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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은 마음…『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남교극 부산진고등학교 교장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으로 소개했습니다. 남 교장은 지난 2015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학생 인권 교육 기본계획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이 책을 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저자가 토크빌의 ‘마음의 습관’ 개념을 바탕으로 미국의 정치 현실과 민주주의 위기를 해석하고, 마음을 통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말했습니다. 프로그램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이 제도만이 아니라 시민의 마음에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남 교장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긴장을 효과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갈등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이 민주주의 위기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는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분노보다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고 소개했습니다. 남 교장은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든 제도 가운데 그나마 가장 좋은 제도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시민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길러져야 한다며 학교 현장에서 시민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로그램은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는 순간 민주주의가 시작된다고 전했습니다.
노경민
2026.08.06 14:23

[테마스페셜] 나무가 보내는 작은 신호…사람의 손길로 이어지는 생명

우리 가까이에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상태와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나무 의사들이 가로수를 두드려 울림을 확인하고 센서로 음파 속도를 측정해 나무 내부를 살핍니다. 필요할 경우 가는 드릴로 미세한 구멍을 내 목재 밀도의 변화와 썩은 부위의 위치, 깊이도 확인합니다. 가로수를 자르지 않고 상태를 점검하는 이 과정은 아픈 나무를 빠르게 찾아내고 도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작업입니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천연기념물 정이품송과 서원리 소나무도 사람들의 관심과 관리 속에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이품송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은 나무의 활력과 수형을 살피고, 상처 부위에 도포제를 발라 병원균이 침투하거나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습니다. 영동의 포도밭에서는 반세기 넘게 농사를 지어온 박삼수 씨가 포도나무의 생장과 날씨를 살피며 순을 정리합니다. 포도꽃은 1년에 일주일 정도만 피며, 꽃이 진 자리에서 자라난 작은 포도알은 비와 바람, 햇살을 만나 약 90일 동안 성장합니다. 농부는 나무가 보내는 변화를 읽고 필요한 작업을 제때 이어가며 한 해의 결실을 준비합니다. 숲에서는 수목관리전문가인 아보리스트가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높은 나무에 올라 손상되거나 썩은 가지를 제거합니다. 아보리스트는 나무의 상태에 따라 위험목은 제거하고, 온전한 나무는 손상된 부분만 정리해 스스로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도심의 반려식물병원에서는 시들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식물을 가져온 시민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환경교육을 받은 시민들도 가로수 돌보미로 나서 일상에서 지나쳤던 나무의 변화와 아픔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나무 의사와 농부, 아보리스트와 시민들의 손길은 나무가 보내는 작은 신호를 알아차리고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과정입니다. 나무를 향한 관심과 돌봄이 이어질 때 우리 곁의 푸른 풍경도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박종준
2026.08.04 15:16

[오래된 미래] 흥남철수, 피란민들이 남긴 삶의 기억

흥남철수는 수많은 피란민의 삶을 바꾼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피란 작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흥남부두에 모여 배를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생존을 위한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당시 어린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새끼줄로 몸을 서로 묶고 피란길에 올랐다는 가족들의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또 일부 가족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면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고 회상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당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북식 순대를 만들거나 흥남부두를 떠올리는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기억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승선 인원의 120배가 넘는 1만4천500명의 피란민을 태우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피란민을 함께 태워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고, 결국 알몬드 장군의 승인이 이뤄지면서 대규모 피란이 가능했다고 소개됐습니다. 당시 배 안에서는 화물칸과 갑판은 물론 모든 공간에 피란민이 탑승했고,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며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피란 이후 거제도와 부산에 정착한 가족들은 사진관과 상회, 정육점 등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일궈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기억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아영
2026.08.04 14:15

[톡앤썰] 100만 그루 나무에 담긴 삶의 메시지…다큐멘터리 영화 『나무의 노래』

KNN이 참여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나무의 노래』가 뉴욕 페스티벌에서 3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오는 9월 개봉하는 영화는 중미 국가 니카라과에서 여의도 면적의 7배가 넘는 땅을 사들이고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88세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연출을 맡은 진재운 감독은 나무에 관해 오랫동안 공부해 온 주인공을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인공은 60대 중반 말기 암 진단과 함께 남은 시간이 4개월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를 계기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나무 심기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파리와 하와이, 남미를 거쳐 니카라과의 땅을 사들였고,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100만 그루를 채우겠다는 목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진 감독은 처음에는 한 달 동안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주인공을 충분히 담기 어렵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현지를 찾으며 약 1년 동안 작업했다고 밝혔습니다. 주인공은 이름을 알리려는 공명심이 자신을 상실하게 한다고 여기며 자신의 이름과 개인사를 드러내는 일을 꺼렸고, 영화에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진 감독은 거듭된 설득 끝에 주인공과 나무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 뜻을 모았다고 말했습니다. 내레이션은 작사가 김이나가 맡았으며, 영화의 영어 번역은 영화 『기생충』의 영어 자막을 번역한 달시 파켓이 담당했습니다. 진 감독은 시사회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 잃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는 공동체 상영 신청도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나무의 노래』는 뉴욕 페스티벌 TV 앤드 필름 어워즈에서 금상 2개와 은상 1개를 받으며 3관왕에 올랐습니다. 진 감독은 자연을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관계로만 바라보기보다 생태계가 서로 공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수많은 영상물 속에서 자신을 놓치기 쉬운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삶의 동아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나무의 노래』는 오는 9월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임택동
2026.07.30 16:32

[행복한 책읽기]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자신을 원망하곤 합니다. 김경희 아쿠아셀 대표이사는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가 행복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책은 삶의 고통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김 대표는 책이 막연한 위로 대신 삶은 누구에게나 힘들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인생은 행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과정을 지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으로는 태어난 이상 고통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깨달음과,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내용을 꼽았습니다. 김 대표는 알츠하이머로 아픈 어머니를 돌보고 어려운 경영 환경을 겪으며 삶이 힘들게 느껴졌지만, 책을 통해 모든 것은 과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흔들림 없는 삶은 없으며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습니다. 책은 행복만을 좇기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전합니다. 김 대표는 삶의 어려움도 지나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길의 끝은 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노경민
2026.07.30 15:31

나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겼습니다. - 조각가 김영원

기자 경남 김해에 김영원 미술관, 그러니까 작가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실거 같아요. 조각가 김영원(이하 김영원) 예 감회가 깊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참 자랑할 만한 일인데 또 한편으로는 부담이 커요. 어떻게 지역성을 좀 벗어나서 그러한 미술관으로 성장시키는 데 제가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담이 아주 큽니다. 기자 특히 개관기념전도 열리지 않았습니까? 보신 소감은 어떠세요? 김영원 아주 입지 선정이 참 좋더라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어디 뭐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삶의 현장에 있는 건데 거기는 경전철 정거장이랑 한 10분, 도보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위치가 선정이 잘 됐다 싶었어요. 길 가다가 목마르면은 식수대에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간이의자에 앉아서 잠깐 쉬어가는, 그것이 하나의 삶의 문화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참 위치 선경이 잘 됐다, 또 운동장하고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상호 간에 시너지 효과가 크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만족합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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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그렇군요. 김작가님은 김해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신 걸로 제가 들었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그런 추억이 있다고 인연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작품을 어느 지자체에 기증하시는 건 사실 쉬운 생각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김영원 제 작품이 약간 대중성이 있다 보니까 각 지자체에서 미술관 러브콜이 쭉 있어 왔지요. 그런데 김해시만큼 진정성이 있고 적극성을 띤 곳이 없었습니다. 사실 김해가 제가 중고등학교를 나온 곳입니다. 진영 한얼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또 제 할아버지 고향이 김해 장유입니다. 선산도 있어가지고 제가 죽으면 그쪽에 묻혀야 할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아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학생 미술 실기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대회가 김해 왕릉에서 열렸는데 제가 점토를 가지고 그 왕릉 상석을 받침대 삼아서 만든 작품이 상을 받게 되지요. 그것이 제가 조각가의 길을 가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저한테는 의미가 깊고 당연히 제가 미술관을 한다면 김해에 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쉽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많은 작품들 되도록이면 아주 중요한 작품은 다 김해에 기증을 하는 걸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기자 지역민으로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에 김영원 미술관 관장을 맡으신 최정은 관장님 모셨을 때 제가 비슷한 질문을 한번 드렸는데... 김영원 미술관이 김해를 무대로 해서 어떤 문화적인 산실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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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저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그런 미학보다 동양적인 그리고 우리 국내에서 이루어졌던, 옛날부터 내려오던 미학에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글로벌한 미학으로 만들어서 세계 미술 문화에 우리가 하는 기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왔죠. 단지 미술관에 작품만 전시하는 박물관 식의 미술관은 해서는 안 되겠다, 항상 살아 움직이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서 글로벌한 미술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된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 김해에 김영원 미술관이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기자 그런데 대부분 굉장히 관심 있게 보시는게 아무래도 광화문의 세종대왕상 아닐까 싶은데요. 세종대왕은 실물이나 이런 게 없는 상황에서 그걸 제작하실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좀 초점을 맞춰서 하신거죠? 김영원 사실 그전에 있던, 1973년 김기창 화백이 그린 초상화는 내가 생각하는 세종대왕 외형하고는 좀 거리가 있더라고요. 세종대왕께서는 벌써 외모가 고기를 많이 먹으셔서 몸이 좀 비대한 분이고 또 그분이 유약한 분이 아니고 학문을 중시하면서도 상당한 결단력과 미래 지향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분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분의 초상을 만들 때 전주 이씨의 상(相)에 대해서 연구를 좀 했습니다. 이성계 시조부터 시작해서 쭉 내려오면 초상이 몇 개 있습니다. 영조대왕도 있고 고종도 있고 노래하는 가수 이석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아침마당에 나와서 방송하는 걸 제가 또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그 전주 이씨의 평균적인 골격이 약간 사각형의 골상에다가 광대뼈가 거의 없다 등등 여러 가지 특징이 있더라고요. 거기다가 조소를 하려면 해부학적인 지식을 많이 가져야 되거든요. 하지만 또 일상적으로 우리 국민들이 많이 접했던, 그 당시 만 원짜리 지폐에 있는 어떤 이미지하고 너무 동떨어지면 또 국민들이 이건 아니다고 할 것 같으니까 그런 점까지 다 고려해서 제 머릿속에 창조한 겁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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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그랬군요. 반응은 어땟습니까? 처음부터 딱 맞다, 너무 좋다, 막 그랬나요? 김영원 처음은 뭐 인상이나 외모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어요. 왜 이렇게 크게 했느냐 그런 외적인 얘기가 많았지요. 사실 세종대왕님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참 머리가 숙여지고 때로는 눈물도 나고 그랬는데 이분은 하나의 권위를 내세우는 대왕이 아니었어요. 그냥 애민 정신, 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했던 그런 대왕이었어요. 한 예를 들면은 노비가 임신해서 출산을 하면 출산하기 전에 한 달을 휴가를 주고 그리고 1년을 또 몸조리하라고 휴가를 줍니다. 그 지아비한테도 한 달 정도 휴가를 줍니다. 노비한테 그 당시에 신분 제도가 엄격했잖아요.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런 제도가 없거든요. 근데 그 시대에 그 제도를 시행했다는 것은 눈물 겨운 일 아닙니까? 그래서 이분은 아주 인자한 얼굴 정말 인지한 얼굴에다가 어느 정도 성군으로서의 경의를 담아야겠다 하고 그 상을 만드는데 제가 한 달 동안 사다리 타고 올랐다 내려왔다 이런 얼굴만 만드는데 한 5kg가 빠졌어요. 그래서 만들어낸 상이 그겁니다. 그래서 어떤 시민이든이나 누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왜 그렇게 컷냐 라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사실 뭘 하든 그 주변 환경을 고려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과 조화가 이루어져야 되니까 그래서 북악산에서 쭉 내려오는 경복궁, 건천전, 광화문 양 옆으로 교보빌딩이니 미국 대사관이니 세종문화회관이 이런 여러 가지 구조물에 맞추어서 크기를 정해야 되거든요. 근데 무조건 대놓고 크다? 그거는 비난을 위한 비난이지... 이런 환경 속에서 이 정도의 크기가 왜 된거냐 이렇게 따져 물어야 되는데 그거는 뭐 들은 척도 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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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순신 장군 동상 제작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제력이 약해서 거기에 청동을 만들 만한 어떤 잉곳을 만들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물상에 가서 뭐 놋그릇이니 뭐니 이거 그냥 모아놓은 걸 그걸 가지고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색도 안 맞고 좀 엉망인데 여기에 당시에 요즘처럼 아르곤 용접기가 있어서 기가 막히게 용접을 한다든지 하지도 못하던 때에요. 그걸 산소 용접기로 쭉쭉쭉 하다 보니까 용접한 자리가 아주 두드러져 나오고 아주 험악하니까 새파란 물감을 칠하고 통일을 시켰습니다. 그걸 보고 청동 동상 하면 아 파란 거다 이런 인식이 있었던 거에요. 근데 실제로 최고의 청동 잉곳은 황금보다 더 화려해요. 그래서 제가 만든걸 보고 왜 황금을 칠하냐고 막 비판했어요. 그런데 또 공교롭게, 그 당시에 제가 세종대왕 동상을 모셔놓고 나니까 용접 자국도 없고 전부 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시의 판단에서 이제 이순신 장군이 너무 낡았고 부식이 많이 됐으니 이걸 다시 보수를 해야 되겠다면서 그 작업단에 저를 끼워 은 겁니다. 그래서 그거 보수할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을 검증하는 자리에 한 오십 명 넘는 기자들이 모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순신 장군을 외관적으로 이렇게 보는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깨에 구멍을 뚫어서 내시경을 찍어 봐야 됩니다.' 그래보니까 이건 뭐... 거미줄처럼 용접한 자리가 전부 다 떨어져 있어 그냥 하늘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이게 그럼 이거는 큰 충격 맞으면 와라락 무너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보완을 해야 됩니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장소에서 그 안을 보면 황금 같이 녹이 슨 부분, 청동 색깔이 나오잖아요. 그 이거 들고 기자들한테 '여러분 이거 청동인데 색깔이 파랗습니까? 금색입니까?' 라고 물으니 아무 기사도 말을 안 해요. 이게 바로 청동 색깔입니다. 이 색깔하고 세종대왕 동상 색깔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도 거기에 대해 이의가 없어요. 기자 그 스토리가 참 재미가 있네요. 그리고 또 하나 여쭤보고 싶은게... 아까 작가님도 스스로 대중성이 있는 작가다 말씀하셨는데 처음부터 작품 활동하실 때 대중성을 염두에 두십니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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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그런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70년도에 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 시기가 10월 유신 유신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젊은이들이 당했던 그 압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 가면 프락치들이 실시간으로 감시를 하고 또 경찰까지 학교에 상주해 가지고 굉장히 아주 어려웠지요. 감시라든지 이런 것이 많았고 또 제가 학교 학회장을 하다 보니까 모임이 많잖아요. 학년별로 모여서 모임을 했는데 두 명 이상 모이면은 신고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뭐 몇십 명 모아놓고 자주 하다 보니까 요 주위 인물로 항상 찍혔지요. 그리고 학교 밖, 학교 내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위수령이다 휴교령이다 하다보니 경찰하고 학생들하고 부딪혀서 최루탄 타는 냄새가 학교에, 정말 그냥 학교 들어가면 눈물이 흘렀어요. 학교가 폐쇄돼서 밖에 나오면은 경찰들이 가방들 다 수색하고 머리 좀 길면 끌고 가서 그냥 밀어버리고 이러한 엄혹한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다 보니까 현실에 대해서 눈을 뜰 수밖에 없지요. 원래 저는 고향이 낙동강 하류기 때문에 그 낙동강 물이 모래 톱을 헤치면서 흘러가는 유유하게 흘러가는 복선들을 평생을 보고 자랐으니까 저한테는 선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어요. 제가 작품 만드는 것보다 아름답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한참 제가 공부할 그 시기에 새로운 미술 사조가 막 들어오는 겁니다. 해외 추상 미술이 막 막 들어오는데 사실 우리는 구상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는데 그냥 시대에 뒤떨어진 거라고 내몰리는 상황이 된거에요. 그때 제가 뭘 생각했냐면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주의 하자. 우리한테 언제 합리주의적인 그러한 조각 작품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거죠. 서양에서는 몇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합리주에 기반한 사실주의 작품을 두고 그걸 갖다가 부정하면서 새로운 걸 만들고 만들고 하는데, 우리는 정반합 그러한 과정 없이 걔들이 하는 걸 그대로 흉내 낸다는 것은 문화의 뿌리가 없는 거다. 그래서 저는 그 시대에 억눌려 살던 우리의 국민들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하자 이제 이게 이제 출발이 됩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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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시대상이 사람들을 이리로 가라 가라 저리 가라 뭘 해라 안 하면 제재를 가하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배금주의에 매몰돼 가면서 농경시대의 좋은 전통을 다 버려버리고 그냥 하나의 사물화되는 과정으로 걸어가고 위에 지도자들이 그렇게 몰아가는걸 보고, 아 이제 인간의 사물화 시대다 이런 생각이 든거죠. 그래서 인간을 사물화해서 만든 게, 중력 무중력 이런 시리즈예요. 그러다 보니까 당국에서는 이제 기가 막힌 거지... 그냥 그 첫 개인전 할 때 내 작품을 좋아하는 평론가가 당신 있는 그대로 현실을 그대로 기록했다 라고 평을 하면서 그런게 그런걸 자세히 설명하면 삼청교육대 간다, 막 그렇게 겁을 겁을 주면서 그냥 당신 철학, 당신 작품에 있는 철학만 자세히 얘기해라 라고 조언을 하더라고요. 실제로 종로경찰서 정보과에서 와서 작품 설명을 좀 해주세요 라고 하길래 그래서 내가 저거는 즉자태(卽自的 態度)과 대자태(對自的 態度), 즉 우리 자신의 즉자적 태도에 대해, 대자적 태도의 시선으로 즉자를 보는거다. 여기에 헤겔과 샤르트르의 현상학을 한참 떠들면 한 5분도 채 안 돼서 아이고 잘 알았습니다 하고 다 일어나는거에요. 그런데 그러면 또 종로경찰서에서 오고 또 동대문 경찰서에 다른 또 사람이 오고 참 전시할 때 곤욕을 치렀지요. 기자 정말 재미있는데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볼께요. 요즘에는 그럼 작품 활동하시면 어떤 작품을 또 구상하시고 실제로 제작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영원 제 작품이 사실 바탕은 서양 거잖아요. 그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하나의 구축적인 작품이거든요. 작품은 굉장히, 하나의 구조에 그냥 이렇게 갇혀야 돼요. 그래서 근육 하나 피부 하나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그 범주 내에서 해야 되기 때문에 그 틀이 있어요. 그냥 그걸 계속하니까 이제 내 체질에 안 맞는 거예요. 갑갑했는데 그래도 그걸 한 10년 동안 했지요 했는데 87년도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화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 억눌렀던 자유가 한꺼번에 폭발을 한 거지요. 그러고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에 막 갈등이 증폭되어 쓰나미처럼 밀려와 우리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노동자들은 사장을 거인에 매달아 난리를 치고 학생들이 교수들 청문회 한다고 책상에다 운동장에 내놓고 그냥 학생들이 교수를 심문했어요. 그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구조가 산산조각 난 걸 보고 나도 이것이 역사 발전의 하나의 통과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지요. 이 참에 내 작품도 파편화시켜서 해체시키자 나를 해체시키자 그래서 제가 만든 작품을 집어 던져서 깨뜨려서 파편 가지고 얼기설기 이렇게 조립해서 뭐 거기 복원이니 탄생이니 공화국이니 이런 작품을 만들었으니까 그러니 또 정권에서는 전부 다 이제 아예 난리 난 거지. 근데 작품을 잘 만들어서 그걸 깨뜨리다 보니까 내 몸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힘들어서 드러누워 있는데 내 친구가 '너 이러면 큰일 난다' 몸부터 추스려야지 하고 소개해 준 게 기공명상센터예요. 그래서 거기 가서 기공(氣功)을 배우는데 그러니까 조금씩 몸이 회복되더라고요. 그 이후에는 인체 조각을 만드는데 손이 안 가더라고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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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선생님한테 내가 좀 아까 내 손이 안 간다 했더니 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보세요 라고 하길래 그때 다시 나를 바꿨죠. 기둥을 만들어서 흙 기둥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서니까 막 내가 춤을 추면서 그냥 막 할퀴고 뭉개고 치고 그러는 거예요. 그냥 그러면서 흔적을 내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인체조각을 못 하고 이제 기(氣) 연구를 시작한 거지요. 그런데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전시에서 제가 직접 그걸 시연하니까 오히려 그 당시에 따라갔던 평론가들이 기가 무슨 작품이냐 창피하게 라면서 외면해버린거에요. 우리가 우리 거를 개발해야지 뉴욕이나 외국에서 미니멀이라며 사조를 갖고 나오면 그거 그냥 따라 하면 좋다고 막 치켜올려주고 우리 시도는 폄하해 버리는 그런 식민사관이 아예 나를 갖다가 묻어버렸지요. 그게 1994년도예요. 기가 내가 우주의 생명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기를 내가 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배웠으니까. 그 기가 내 몸에서 돌면서 내 몸을 움직이는데 내가 의식적으로 내가 움직여서 움직인 게 아니라 기운이 움직이는 것, 내 몸이 하나의 기가 지나는 통로다 이거죠. 그러면서 기가 움직인 몸짓을 하다가 흙이나 종이 위에다가 흔적을 남긴다. 이게 우리의, 동양의 무위사상(無爲思想) 노장의 무위사상 그대로예요. 근데 이것이 지금 현재 요즘 와서 그래요. 현대 미학에서는 그것이 저자의 소멸, 저자의 죽음, 그 예술의 민주화, 작가가 서야 할 자리를 비워주고, 거기에 관객이 자기 나름대로의 사유를 가지고 작품으로 각자 각자 만든다. 이거는 하나의 질문지다. 이런게 요즘 완전히 뜨거든요. 내가 그걸 94년도에 했는데 그러니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 작업을 지금 하고 있고 그 양식을 가지고 지금 하고 있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라는 명성으로 가려 그 식지 않는 열정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아직도 만족해 머무리지 않는 그 투지를 미처 알지 못 했다. 아니 어쩌면 '김영원'이라는 이름의 조각을 보는 이들 대부분이 이런 조각가 김영원 대신 브랜드로 남은 김영원 만을 보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짧은 시간, 스튜디오에서 길게도 이야기를 나눠 촬영스태프에게 구박도 받았지만 그래도 따로 시간을 잡기 힘든 조각가 김영원과 길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눈 소중한 기회였다. 언제나 작품이 아닌 그들의 삶에서 배운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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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중규
2026.07.29 15:14

[오래된 미래] 피란민의 한 그릇, 부산 밀면의 탄생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주민들은 비싼 냉면을 대신할 새로운 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 없이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냉면 기술을 바탕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구호물품으로 공급되던 밀가루를 활용해 냉면을 대신할 면을 만드는 시도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밀가루만으로는 면발이 쉽게 끊어지고 식감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밀가루와 고구마가루를 3대 7 비율로 배합하면서 지금의 밀면이 탄생했습니다. 밀면은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면을 더 주문하기 어려워 따뜻한 육수를 한 주전자 가까이 마시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따뜻한 육수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회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당시 국수 한 그릇의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손님들의 사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온 가게는 밀면을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부산의 식문화로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밀키트 등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오래된 가게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부산만의 새로운 밀면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문헌에 나온 비빔밥에서 착안해 밀면을 비빔밥처럼 구성한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맛본 손님들은 기존 밀면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한 밀면 가게 운영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밀면의 맛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손님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진주냉면처럼 밀면도 하나의 독립된 음식 장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밀면을 만드는 사람들은 피란민들의 삶이 담긴 밀면을 부산의 식문화이자 하나의 음식 장르로 알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7.29 14:16

[테마스페셜] 한승헌, 시대를 변론한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며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문 배달과 여러 일을 병행했고, 어머니도 장사를 하며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검사로 근무했습니다. 검사들이 선호하던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스스로 사표를 냈습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부의 탄압을 받던 시국사건과 인권사건의 변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 개업 초기에는 소설 때문에 처벌받게 된 남정현 작가의 사건을 첫 시국사건으로 맡았습니다. 당시 정부와 대립하는 사건을 꺼리는 변호사들이 많았지만, 한 변호사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피고인들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변론을 통해 1심 무죄 판결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에 참여하며 국제적인 인권 연대 활동에도 나섰습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인혁당과 민청학련 관련 사건의 변론에 참여했고, 사형을 선고받은 여정남의 변호도 맡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신도 수감돼 있어 여정남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일을 평생 마음에 담아뒀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사형제도를 비판하는 글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법정에서는 해당 글이 반공법 위반이 아니라 문학이자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증언이 이어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사건도 강하게 변호한 한 변호사는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변호사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아내 명의로 출판사를 운영했습니다. 출판사 역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았지만, 그는 민주화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권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민변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변호사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뜻을 남겼습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뒤 국회의원과 장관직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고, 독립적 지위인 감사원장직은 수락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권력으로부터 입을 다물라는 취지의 제안을 받았을 때도 쓴소리와 바른말을 멈출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동학 기념사업과 전주국제영화제에도 참여하며 고향 전북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전주국제영화제 출범 당시 기업 후원을 이끌어내며 영화제가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그가 남긴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소개됐습니다. 유죄 판결을 예상하면서도 무죄를 확신하며 변론했던 그는 자신을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라고 표현했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평생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법정 안팎에서 활동하며 ‘지면서 이기는 변호사’의 삶을 보여줬습니다.
이아영
2026.07.28 15:49

[행복한 책읽기] 윤지숙 교사 “압록강은 흐른다, 떠남과 잊지 않음의 이야기”

부산광역시교육청 특수교육지원센터 윤지숙 교사가 KNN ‘행복한 책읽기’를 통해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소개했습니다. 윤 교사는 평소 세계문학전집을 즐겨 읽던 중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독일어로 쓰인 작품이라는 점에 관심이 생겨 이 책을 읽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품은 주인공 미륵의 어린 시절부터 독일로 향하는 여정을 따라가며 사라져가는 조선의 풍경과 전통, 식민지 시대의 현실을 그려냅니다. 윤 교사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과 옛 모습이 잘 묘사돼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고 전했습니다. 주인공은 만세운동 이후 고향으로 내려간 뒤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 압록강을 건너 독일로 향합니다. 윤 교사는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말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또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아이에게 떠나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며 천천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주인공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했다고 전했습니다. 독일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무겁기만 하기보다 새로운 장소와 세상을 만나는 여행으로도 그려집니다. 윤 교사는 책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을 지도에서 직접 찾아보며 주인공의 이동 경로를 함께 따라갔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역사책에서만 보던 만리장성을 실제로 마주하고 전율을 느끼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주인공은 유럽의 마르세유항에 도착한 뒤 독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도 고국의 소식을 기다리며 고국과 친구들을 그리워합니다. 작품은 미륵이 고향에서 온 편지를 통해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윤 교사는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 한동안 책을 덮지 못하고 여러 차례 다시 읽으며 문장 속 슬픔을 되새겼다고 전했습니다. 프로그램은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뒤로하는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윤 교사는 이 책이 크고 깊은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무겁게만 쓰이지 않아 누구나 부담 없이 읽고, 떠남과 잊지 않음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전했습니다.
노경민
2026.07.28 14:56

[오래된 미래] 장기려 기념관, 사랑으로 남긴 생명의 기록

부산 장기려 기념관에는 평생 가난한 환자를 위해 헌신한 장기려 박사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장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사랑’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고, 필요한 치료를 끝까지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수술복조차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시절에도 맹장염 수술 등을 직접 집도하며 환자를 살렸습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는 오랜 시간 곁을 지키며 치료를 이어갔다는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입원비보다 환자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고, 돈이 없는 환자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치료비와 차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환자 가족에게 직접 도움을 준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말기암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온 가족이 귀가할 비용이 없다는 사정을 알게 되자 차비를 마련해 보냈습니다. 당시 도움을 받은 가족은 배 속의 아이까지 살려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장 박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해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만났다는 증언도 이어졌습니다. 함께 일했던 의료진은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사랑을 가장 큰 가르침으로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장 박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결국 가족에게도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또 어려운 시기 월 400원의 회비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조직하며 서로 돕는 의료를 실천했습니다. 장 박사는 부산을 아끼며 의사로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장 박사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의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7.2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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