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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부산 근대 스포츠의 요람 ‘구덕운동장’

1928년 건립된 구덕운동장은 부산 최초의 공설운동장이자, 1985년까지 부산 유일의 시민 종합운동장이었습니다. 스포츠가 시민들의 가장 큰 오락이었던 시절, 구덕운동장은 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1973년 부산에서 열린 제54회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주경기장과 야구장, 실내체육관 등이 갖춰지며 종합운동장의 면모를 완성했습니다. 구덕운동장은 단순한 체육시설을 넘어, 격동의 시대를 품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1940년 11월 23일,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에 항의하며 조선인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부산항일학생의거’가 이곳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기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운동으로 기록됩니다. 광복 이후인 1946년에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이른바 ‘삼의사’의 유해가 이곳을 거쳐 운구됐고, 김구 선생이 직접 추도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구덕운동장은 또 다른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경남고·부산고·경남상고·부산상고 등이 활약한 고교야구는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고,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면 관중석이 가득 차며 뜨거운 응원전이 펼쳐졌습니다. 이후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약 4년간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 사용되며, 부산 야구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권투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부산 서구 아미동 출신의 세계 챔피언 장정구 선수는 15차 방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한국 복싱 전성기를 이끌었고, 구덕운동장은 그의 전성기를 함께한 상징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도 구덕운동장은 여전히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1973년 창단된 동아대학교 육상부를 비롯해 많은 선수들이 이곳에서 훈련하며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근대 스포츠의 출발점이자 시민들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인 구덕운동장은 서구 주민들에게 여전히 ‘심장과 같은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노경민
2026.04.28 14:13

[오래된 미래] 부산 향토음식 ‘어묵’…맛과 가족, 추억으로 이어지다

일제강점기 무렵 부산의 대표 시장이었던 부평깡통시장에서는 일본식 어묵이 주요 판매 품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후 피란 시절을 거치며 어묵은 점차 우리만의 방식으로 변화하며 정착했습니다. 1962년부터 어묵 기술을 익혀온 이종규 씨는 매일 일기를 쓰며 독학으로 기술을 쌓았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어묵은 부산 사람들의 삶이 녹아든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산의 또 다른 전통시장인 초량시장에는 1960년대부터 어묵의 대중화를 이끌어온 가게가 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던 인연으로 시작된 이곳에서 일하던 소년 박경수 씨는 세월이 흐른 뒤 가게의 대표가 됐습니다. 당시 신선한 생선이 풍부했던 부산에서는 아침 경매로 들어온 생선이 그날 오후 어묵으로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이 같은 원재료의 신선함은 부산 어묵 맛의 중요한 기반이 됐습니다. 박 대표는 지금도 어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원재료를 꼽으며, 시설과 기술이 그 뒤를 잇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원도심 골목의 오뎅바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어묵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장에 가면 꼭 사 먹던 음식”, “분식집에서 빠지지 않던 간식”이라는 기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3대째 어묵 공장을 운영하는 김민정 대표에게도 어묵은 가족의 역사입니다. 할머니의 손맛에서 시작된 어묵은 세대를 거쳐 이어졌고, 지금도 변함없는 맛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최근 어묵은 고급 간식으로도 주목받고 있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만드는 방식은 변했지만, 부산 어묵의 맛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임택동
2026.04.17 13:47

[오래된 미래] 60여 년 역사 품은 향토 서점 ‘영광도서’…지역의 ‘문화 사랑방’

영광도서는 1968년 창립된 우리나라 대표 향토 서점으로, 2022년 부산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습니다. 창립자 김윤환 씨는 서점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함께해온 인물입니다. 당시 부산상업고등학교 주변에는 헌책방이 많았고, 청년 시절 김 씨는 고물상에서 헌책을 구해 되파는 일로 서점업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사업 무대가 된 서면 복개천 일대에 1967년 첫 서점을 열며 ‘영광서림’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영광서림’은 ‘책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영광도서’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정부의 기술 개발 정책에 따라 자격증 취득 수요가 늘어나면서 관련 서적을 공급하며 서점이 성장하는 계기를 맞았습니다. 1993년에는 정부 주도의 책 사랑 운동이 펼쳐졌고, 김 대표는 지역 서점 대표로 유럽 도서 박람회에 참여했습니다. 이곳에서 작가와 독자가 자유롭게 대화하는 문화를 접한 뒤, 영광도서 독서토론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영광도서에서 꿈을 키운 박향 소설가는 ‘영광도서 사랑방’에서 처음 열린 소설 학당을 기억합니다. 소설 학당은 약 70석 규모의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 찰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후 소설가로 등단한 박 씨는 독서토론회에 관객이 아닌 작가로 참여하며, 이러한 자리가 작가에게도 큰 자극이 된다고 전했습니다. 영광도서는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 지역 주민들이 모여 소통하는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6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이곳은 오늘날에도 지역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손예지
2026.04.09 15:01

[오래된 미래] 독립자금의 숨은 거점 ‘백산상회’…독립운동사의 주춧돌 ‘백산 안희제’ 선생

부산에 자리한 백산기념관에는 이름보다 더 큰 뜻을 남긴 한 인물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백산(白山) 안희제 선생은 ‘경제적 자립’이 곧 독립의 토대라는 신념으로 행동한 인물이었습니다. 백산은 1914년 ‘백산상회’를 설립했습니다. 겉으로는 건어물과 쌀 등을 판매하는 잡화점이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통로였습니다. 이를 눈치챈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상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이후 무역주식회사 형태로 확대됐습니다. 1919년 설립된 백산무역은 독립운동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습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의 약 60%가 이곳을 통해 조달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백산상회는 자금뿐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정보가 오가는 비밀기지 역할도 수행하며, 국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염을 붙이는 등 변장을 일삼았던 안희제 선생은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탄압이 심해지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만주로 향했고, 4년간의 준비 끝에 1933년 ‘발해 농장’을 개척했습니다. 약 300호의 조선 농가가 이주해 자립 기반을 마련했고, 공동체는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 속에서 1942년 체포된 안희제 선생은 9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겪은 끝에 194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20년이 지나 건국훈장이 추서되며 공적이 공식적으로 기려졌습니다.
손예지
2026.04.07 14:46

[오래된 미래] 진주 실크, 역사와 미래를 잇는 장인들의 숨결

KNN '지역유산아카이브 오래된 미래 - EP5. 진주 실크' 편에서 진주 실크의 찬란한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이 펼쳐졌습니다. 진주 실크는 1980년대 ‘개가 만 원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번성한 국내 실크 산업의 황금기를 상징하며,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1920년 진주에 국내 최초의 비단 공장 ‘동양염직소’가 설립된 이후, 진주는 전국 실크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며 세계 5대 실크 생산지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깨끗한 남강 물은 진주 실크가 명성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진주 실크는 높은 밀도와 곱고 아름다운 색감, 은은한 광택, 그리고 바느질 시 곡선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섬세함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장점을 바탕으로 한복뿐 아니라 넥타이, 파우치, 방석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도 새롭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진주 실크 산업은 전성기 대비 공장 수가 5분의 1 수준으로 줄며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30년 넘게 진주에서 실크 공장을 운영해 온 박태현 대표는 “시대 변화와 융복합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최후의 실크 공장이 될지도 모른다”며 위기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주가 실크를 포기하면 우리나라 실크 산업은 존재할 수 없다”며 굳은 의지를 밝혔습니다.
손예지
2025.08.1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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