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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안용복이 지킨 울릉도·독도…기록과 문화로 이어지는 영토의 기억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안용복의 활동과 관련 기록들이 다시 조명됐습니다. 1693년 울릉도를 찾은 안용복은 현지에 머물던 일본 어부들과 충돌했고,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문제가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번졌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분쟁은 5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으며, 막부로부터 각서까지 받아 돌아오던 중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이를 빼앗긴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 돗토리를 찾았을 당시 안용복과 돗토리번 관리들이 접촉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 2주 동안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안용복이 일본에 가기 전인 1696년 1월 이미 도해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를 조선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보여주는 일본 측 자료로는 1837년 니가타현에서 제작된 경고판인 ‘죽도제찰’이 소개됐습니다. 죽도제찰에는 울릉도를 조선국의 땅으로 규정하고 해당 지역으로 항해해 어로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설명됐습니다. 이 자료는 일본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끝에 현재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또 일본의 문서인 태정관 지령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영토 수호의 의미를 후대에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영토를 함께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습니다. 독도를 지리적·역사적·국제법적 근거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켜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소개됐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노래를 만들고 외국어로 번역하거나 숏폼과 SNS, 밈 등 미디어 콘텐츠를 활용해 세계에 알리는 방안도 제시됐습니다. 프로그램은 안용복과 관련 유적·기록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온 역사를 되짚고, 영토 수호의 의미를 후대에 이어갈 필요성을 전했습니다.
이아영
2026.08.11 14:27

[오래된 미래] 흥남철수, 피란민들이 남긴 삶의 기억

흥남철수는 수많은 피란민의 삶을 바꾼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피란 작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흥남부두에 모여 배를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생존을 위한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당시 어린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새끼줄로 몸을 서로 묶고 피란길에 올랐다는 가족들의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또 일부 가족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면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고 회상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당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북식 순대를 만들거나 흥남부두를 떠올리는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기억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승선 인원의 120배가 넘는 1만4천500명의 피란민을 태우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피란민을 함께 태워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고, 결국 알몬드 장군의 승인이 이뤄지면서 대규모 피란이 가능했다고 소개됐습니다. 당시 배 안에서는 화물칸과 갑판은 물론 모든 공간에 피란민이 탑승했고,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며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피란 이후 거제도와 부산에 정착한 가족들은 사진관과 상회, 정육점 등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일궈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기억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아영
2026.08.04 14:15

[오래된 미래] 피란민의 한 그릇, 부산 밀면의 탄생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주민들은 비싼 냉면을 대신할 새로운 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 없이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냉면 기술을 바탕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구호물품으로 공급되던 밀가루를 활용해 냉면을 대신할 면을 만드는 시도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밀가루만으로는 면발이 쉽게 끊어지고 식감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밀가루와 고구마가루를 3대 7 비율로 배합하면서 지금의 밀면이 탄생했습니다. 밀면은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면을 더 주문하기 어려워 따뜻한 육수를 한 주전자 가까이 마시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따뜻한 육수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회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당시 국수 한 그릇의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손님들의 사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온 가게는 밀면을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부산의 식문화로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밀키트 등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오래된 가게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부산만의 새로운 밀면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문헌에 나온 비빔밥에서 착안해 밀면을 비빔밥처럼 구성한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맛본 손님들은 기존 밀면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한 밀면 가게 운영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밀면의 맛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손님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진주냉면처럼 밀면도 하나의 독립된 음식 장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밀면을 만드는 사람들은 피란민들의 삶이 담긴 밀면을 부산의 식문화이자 하나의 음식 장르로 알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7.29 14:16

[오래된 미래] 장기려 기념관, 사랑으로 남긴 생명의 기록

부산 장기려 기념관에는 평생 가난한 환자를 위해 헌신한 장기려 박사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장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사랑’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고, 필요한 치료를 끝까지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수술복조차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시절에도 맹장염 수술 등을 직접 집도하며 환자를 살렸습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는 오랜 시간 곁을 지키며 치료를 이어갔다는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입원비보다 환자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고, 돈이 없는 환자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치료비와 차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환자 가족에게 직접 도움을 준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말기암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온 가족이 귀가할 비용이 없다는 사정을 알게 되자 차비를 마련해 보냈습니다. 당시 도움을 받은 가족은 배 속의 아이까지 살려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장 박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해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만났다는 증언도 이어졌습니다. 함께 일했던 의료진은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사랑을 가장 큰 가르침으로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장 박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결국 가족에게도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또 어려운 시기 월 400원의 회비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조직하며 서로 돕는 의료를 실천했습니다. 장 박사는 부산을 아끼며 의사로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장 박사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의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7.27 14:08

[오래된 미래] 좌천동 방공호, 일제의 전쟁 흔적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좌천동 방공호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부산항 방어를 위해 조성된 전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원 소장은 군산에서 부산까지 해안 지역에는 포진지가, 부산 내륙에는 방공호가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좌천동 방공호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인명 피해 방지와 부산항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소장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 부산요새사령부 산하에서 방공호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방공호는 산을 깎아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뒤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형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본은 가덕도를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보고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공사에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징용됐으며, 폭파 뒤 암석을 치우는 작업 등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덕도에서는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토지를 수용하면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주민들의 출입이 제한됐다는 내용이 당시 공문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란민들이 방공호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은 당시 방공호 곳곳에서 여러 가구가 함께 생활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고 회상했습니다. 현재 방공호에는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하되 나라의 부끄러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은 안내 문구가 사라져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좌천동 방공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러한 공간을 통해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좌천동 방공호는 전쟁과 피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부산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전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노경민
2026.07.16 14:41

[오래된 미래] 부평깡통시장, 외제골목에서 부산 대표 먹거리 명소로

부산 부평깡통시장이 한국전쟁 이후 외제품 시장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먹거리 명소로 변화해 온 역사를 소개했습니다. 부평깡통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나라 1호 상설시장으로, 과거에는 잡화와 곡물, 채소 등을 주로 판매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제시장과 미군 부대를 통해 유입된 통조림과 각종 외제품이 거래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원 소장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가져온 미군 개인 전투식량(C-ration) 등이 판매되면서 부평시장 일대가 '깡통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통조림을 비롯한 외제품을 구입하고, 빈 깡통은 지붕과 생활용품 등으로 활용했습니다. 밀수품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물건을 창고에 숨겨두었다가 손님이 찾으면 꺼내 판매해 '도깨비시장'이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이후 시장은 외제품 중심에서 먹거리 중심으로 변화를 이어갔습니다. 피란 시절 허기를 달래던 비빔당면을 비롯해 어묵과 돼지국밥 등 부산의 역사를 담은 음식들이 시장을 대표하는 먹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평깡통시장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상인은 비빔당면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역사 있는 음식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시장에는 떡의 식감을 살린 빵 등 새로운 먹거리를 선보이는 청년 상인들도 잇따라 들어서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야시장인 부평깡통야시장이 문을 열며 세계 각국의 음식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야시장은 음식 중복을 최소화하고 위생 관리 원칙을 지키며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부평깡통시장이 손님들과 함께 성장한 공간이라며 앞으로도 시장과 함께 발전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외국인 방문객이 크게 늘어난 만큼 세계적인 시장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부평깡통시장은 외제골목의 역사를 간직한 채 부산을 대표하는 먹거리 명소로 새로운 도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아영
2026.07.02 10:48

[오래된 미래] 전쟁 속 생명을 구한 손길…태종대 의료지원기념비의 의미

부산 영도 태종대 입구에 세워진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해외 의료지원단의 헌신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내 의료시설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인도,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해 부상자와 피란민 치료에 나섰습니다. 이 가운데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1951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활동하며 초기에는 부산항, 이후에는 인천항에서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온 김주완 씨는 신문배달을 하다 기차 사고로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고, 덴마크 의료진의 도움으로 유틀란디아호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유틀란디아호가 전쟁 속 한국 사회와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친절한 공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스웨덴은 가장 먼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보낸 나라 가운데 하나로, 옛 부산상고를 징발해 400 병상 규모의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는 전쟁 중에는 군인을, 휴전 이후에는 부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가 이어졌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 일했던 김낙규 씨는 당시 시민들이 아침마다 수백 명씩 줄을 서 치료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씨는 또 병원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외과 과장이 대학 등록금을 두 차례 지원해 준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의료지원단은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 인력과 시설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남겼습니다. 프로그램은 이들이 살려낸 목숨이 200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1972년 태종대에는 의료지원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 속에서 대가 없이 의료지원을 펼친 해외 의료진의 활동은 휴전 이후 한국 의료기술 발전에도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김주완 씨는 훗날 덴마크에서 자신을 구조했던 요한 프리스크를 다시 만나 감사의 뜻을 전했고, 자신이 살아 가족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도움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피란수도 부산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이름 모를 의료진들의 희생과 인도주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노경민
2026.06.24 15:14

[오래된 미래]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의 기억을 품다

한국전쟁 이후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들의 삶과 부산항 발전의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영도 일대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천막과 임시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도 선창가와 수용소 등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고, 서로 의지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주민들은 원조 물자로 들어온 쌀을 주워 죽을 끓여 먹고 집집마다 음식을 구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영도 물양장은 보세창고가 밀집한 부산항의 주요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컨테이너가 없던 시절, 하역 작업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 이뤄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바지선에서 화물을 내려 보세창고까지 직접 운반하며 부산항 물류를 떠받쳤습니다. 영도다리와 영도경찰서 일대는 매립사업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주민들은 과거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 상당수가 바다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영도에는 부산 최초의 슈퍼마켓으로 알려진 럭키슈퍼체인이 들어서며 당시 활기 있던 상권의 모습도 전해졌습니다. 물양장 주변은 선박과 항만 관련 물품이 오가던 공간으로 부산항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창고들은 당시 항만 물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창고를 활용한 문화공간 조성 작업에 참여한 관계자는 세월이 남긴 공간의 질감과 분위기가 특별한 매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과거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 산업화의 기억을 간직한 지역유산이라고 조명했습니다.
이아영
2026.06.23 16:36

[오래된 미래] 자갈치시장, 피란민의 삶과 함께 자라난 부산의 상징

부산 자갈치시장이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삶과 함께 성장해 온 부산의 대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을 온 주민들에게 자갈치시장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자갈치시장 일대에 정착해 빈대떡과 생선, 곰장어 등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시장은 허가나 정식 시설 없이 대야 하나를 놓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주민들은 하루 한 끼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모여들었고 피란민과 원주민이 함께 어려운 시절을 버텨냈습니다. 현재의 자갈치시장 일대는 과거 바닷가였으며 작은 좌판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오늘날의 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장 상인들은 한복이나 작업복 차림으로 장사하며 생계를 꾸렸고 시장의 규모도 점차 커졌습니다. 곰장어 장사 역시 몇몇 상인들이 시작한 뒤 점차 늘어나며 자갈치의 대표 먹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상인들은 단속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장사를 이어가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자갈치시장에는 지금도 피란민들이 생활했던 흔적과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때 영화 촬영지로 활용될 정도로 당시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습니다. 시장 관계자는 자갈치시장이 11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곳으로 전국의 수산물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건어물과 멸치, 연안 수산물 등이 부산에 집결해 전국으로 유통됐습니다. 상인들은 시장에서의 장사를 통해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일구며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자갈치시장 상인들은 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전통을 지키며 시장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자갈치시장이 전쟁과 피란의 기억, 가족의 삶과 부산의 정서를 품은 공간이라고 조명했습니다.
노경민
2026.06.22 15:10

[오래된 미래] 동항성당, 피란민의 눈물과 희망을 품은 우암동의 버팀목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이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삶을 지탱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우암동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들었고, 동항성당은 어려운 시절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주민들은 천막과 판잣집에서 생활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장마철이면 집 안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생활 여건은 어려웠습니다. 성당은 미군 구호물자를 활용해 주민들을 돕고 피란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했습니다. 주민들은 성당에서 제공한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전했습니다. 동항성당의 한 하 신부는 구호활동과 모금 운동에 나서며 가난한 이웃들을 돌봤습니다. 그는 길거리의 아이들을 데려와 보살피고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을 지원했습니다. 주민들은 신부가 우암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움을 받았을 정도로 헌신했다고 기억했습니다. 또 낙태를 고민하던 임산부를 설득해 생명을 지키도록 도왔다는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동항성당은 조산소를 운영하며 지역 주민들의 출산을 돕는 역할도 했습니다. 성당을 다니지 않는 주민들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신부가 늘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챙겼다고 회상했습니다. 신부는 독일에 있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의 삶보다 이웃을 우선했다고 전해졌습니다. 2017년 선종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함께 나눴습니다. 프로그램은 동항성당이 전쟁과 가난 속에서 주민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한 공간이었다고 조명했습니다.
박종준
2026.06.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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