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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전쟁 속 생명을 구한 손길…태종대 의료지원기념비의 의미

부산 영도 태종대 입구에 세워진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해외 의료지원단의 헌신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내 의료시설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인도, 이탈리아, 독일 등 6개국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해 부상자와 피란민 치료에 나섰습니다. 이 가운데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1951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활동하며 초기에는 부산항, 이후에는 인천항에서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온 김주완 씨는 신문배달을 하다 기차 사고로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고, 덴마크 의료진의 도움으로 유틀란디아호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김 씨는 당시 유틀란디아호가 전쟁 속 한국 사회와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친절한 공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스웨덴은 가장 먼저 한국에 의료지원단을 보낸 나라 가운데 하나로, 옛 부산상고를 징발해 400 병상 규모의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는 전쟁 중에는 군인을, 휴전 이후에는 부산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가 이어졌습니다. 스웨덴 병원에서 일했던 김낙규 씨는 당시 시민들이 아침마다 수백 명씩 줄을 서 치료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김 씨는 또 병원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외과 과장이 대학 등록금을 두 차례 지원해 준 일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의료지원단은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 인력과 시설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남겼습니다. 프로그램은 이들이 살려낸 목숨이 200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1972년 태종대에는 의료지원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 속에서 대가 없이 의료지원을 펼친 해외 의료진의 활동은 휴전 이후 한국 의료기술 발전에도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김주완 씨는 훗날 덴마크에서 자신을 구조했던 요한 프리스크를 다시 만나 감사의 뜻을 전했고, 자신이 살아 가족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도움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6·25 전쟁 의료지원 기념비’는 피란수도 부산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한 이름 모를 의료진들의 희생과 인도주의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노경민
2026.06.24 15:14

[오래된 미래]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의 기억을 품다

한국전쟁 이후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들의 삶과 부산항 발전의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영도 일대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천막과 임시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도 선창가와 수용소 등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고, 서로 의지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주민들은 원조 물자로 들어온 쌀을 주워 죽을 끓여 먹고 집집마다 음식을 구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영도 물양장은 보세창고가 밀집한 부산항의 주요 물류 거점이었습니다. 컨테이너가 없던 시절, 하역 작업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 이뤄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바지선에서 화물을 내려 보세창고까지 직접 운반하며 부산항 물류를 떠받쳤습니다. 영도다리와 영도경찰서 일대는 매립사업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습니다. 주민들은 과거 대평동과 봉래동 일대 상당수가 바다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영도에는 부산 최초의 슈퍼마켓으로 알려진 럭키슈퍼체인이 들어서며 당시 활기 있던 상권의 모습도 전해졌습니다. 물양장 주변은 선박과 항만 관련 물품이 오가던 공간으로 부산항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창고들은 당시 항만 물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창고를 활용한 문화공간 조성 작업에 참여한 관계자는 세월이 남긴 공간의 질감과 분위기가 특별한 매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과거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영도 옛 도선터 물양장이 피란민의 삶과 부산항 산업화의 기억을 간직한 지역유산이라고 조명했습니다.
이아영
2026.06.23 16:36

[오래된 미래] 자갈치시장, 피란민의 삶과 함께 자라난 부산의 상징

부산 자갈치시장이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삶과 함께 성장해 온 부산의 대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을 온 주민들에게 자갈치시장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피란민들은 자갈치시장 일대에 정착해 빈대떡과 생선, 곰장어 등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시장은 허가나 정식 시설 없이 대야 하나를 놓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주민들은 하루 한 끼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모여들었고 피란민과 원주민이 함께 어려운 시절을 버텨냈습니다. 현재의 자갈치시장 일대는 과거 바닷가였으며 작은 좌판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오늘날의 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장 상인들은 한복이나 작업복 차림으로 장사하며 생계를 꾸렸고 시장의 규모도 점차 커졌습니다. 곰장어 장사 역시 몇몇 상인들이 시작한 뒤 점차 늘어나며 자갈치의 대표 먹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상인들은 단속을 피해 자리를 옮겨가며 장사를 이어가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자갈치시장에는 지금도 피란민들이 생활했던 흔적과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때 영화 촬영지로 활용될 정도로 당시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습니다. 시장 관계자는 자갈치시장이 11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곳으로 전국의 수산물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건어물과 멸치, 연안 수산물 등이 부산에 집결해 전국으로 유통됐습니다. 상인들은 시장에서의 장사를 통해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일구며 삶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자갈치시장 상인들은 변화에 대응하면서도 전통을 지키며 시장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프로그램은 자갈치시장이 전쟁과 피란의 기억, 가족의 삶과 부산의 정서를 품은 공간이라고 조명했습니다.
노경민
2026.06.22 15:10

[오래된 미래] 동항성당, 피란민의 눈물과 희망을 품은 우암동의 버팀목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이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삶을 지탱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우암동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들었고, 동항성당은 어려운 시절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주민들은 천막과 판잣집에서 생활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장마철이면 집 안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생활 여건은 어려웠습니다. 성당은 미군 구호물자를 활용해 주민들을 돕고 피란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했습니다. 주민들은 성당에서 제공한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전했습니다. 동항성당의 한 하 신부는 구호활동과 모금 운동에 나서며 가난한 이웃들을 돌봤습니다. 그는 길거리의 아이들을 데려와 보살피고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을 지원했습니다. 주민들은 신부가 우암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움을 받았을 정도로 헌신했다고 기억했습니다. 또 낙태를 고민하던 임산부를 설득해 생명을 지키도록 도왔다는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동항성당은 조산소를 운영하며 지역 주민들의 출산을 돕는 역할도 했습니다. 성당을 다니지 않는 주민들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신부가 늘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챙겼다고 회상했습니다. 신부는 독일에 있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의 삶보다 이웃을 우선했다고 전해졌습니다. 2017년 선종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함께 나눴습니다. 프로그램은 동항성당이 전쟁과 가난 속에서 주민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한 공간이었다고 조명했습니다.
박종준
2026.06.19 14:44

[오래된 미래] 낙동강 재첩국, 가난한 시절을 건너게 한 부산의 맛

부산 강서구 덕두마을과 낙동강 하구에서 이어져 온 재첩국의 역사와 의미가 소개됐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 낙동강 하구 덕두마을에서는 재첩잡이가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주민들은 봄이면 재첩을 잡아 부산 전역에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홍분연 씨와 양순옥 씨는 당시 낙동강에 재첩이 풍부했고 재첩국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졌다고 회상했습니다. 재첩은 국과 찜, 전 등 다양한 음식으로 활용되며 낙동강을 대표하는 향토 식재료로 자리 잡았습니다. 덕두마을에서 2대째 재첩잡이를 해온 김순철·김순도 형제는 전후 어려웠던 시절 재첩이 중요한 먹거리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재첩국은 낙동강 유역 주민들의 생계수단이자 허기를 달래주던 음식이었습니다. 과거 낙동강 하구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재첩이 풍부하게 서식했습니다. 하지만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준공된 이후 물의 순환이 달라지면서 재첩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김순철 씨는 하굿둑 건설 이후 재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서진원 낙동강하구에코센터장은 하굿둑 건설 전 연간 1만 톤 이상 생산되던 재첩이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낙동강에서는 재첩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삼락재첩거리 일대에서는 일부 음식점들이 재첩국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산 재첩이 거의 사라지면서 상당수 업소는 수입산 재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하굿둑 개방 등을 통해 언젠가 낙동강 재첩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낙동강이 남긴 재첩국의 추억과 부산 사람들의 삶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아영
2026.06.18 14:23

[오래된 미래] 40계단, 피란민의 눈물과 희망이 쌓인 부산의 기억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부산 중구 40계단의 역사가 소개됐습니다. 40계단 일대는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함경도 출신 차순자 씨는 1·4 후퇴 당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와 남부민동 산복도로에서 판잣집 생활을 시작했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산복도로 일대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습니다. 피란민 상당수는 생계를 위해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40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특히 물이 귀했던 시절, 주민들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 올리며 생활했습니다. 40계단은 피란민들에게 단순한 통행로가 아닌 가족과 친척을 만나던 약속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기다리며 많은 사람들이 40계단을 찾았습니다. 현재의 40계단은 원래 자리에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현재 위치에서 약 25미터 떨어진 곳이 원래의 40계단 자리였다고 설명했습니다. 40계단이 자리를 옮기게 된 배경에는 1953년 중구 일대를 덮친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당시 화재로 판잣집 3천여 채가 불타고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주택 복구와 도로 정비 등 대대적인 복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폐허 위에 새로운 길과 집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다시 삶의 터전을 일궜습니다. 한때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40계단 일대는 원도심의 쇠퇴를 겪었지만 피란민들의 삶과 기억을 간직한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피란민들의 눈물과 희망이 서린 40계단이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박종준
2026.06.17 16:24

[오래된 미래] 한형석 자유아동극장, 전쟁고아 품은 문화예술교육의 시작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와 아동들을 위한 국내 최초의 아동전용 극장인 자유아동극장이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자유아동극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였던 한형석 선생이 전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문화예술교육 공간입니다. 한형석 선생은 독립군가를 작곡하는 등 일제강점기 예술구국 활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문화 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장남 한종수 씨는 한형석 선생이 지인들과 뜻을 모아 사재를 들여 자유아동극장을 만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극장에서는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 인형극, 그림극 등을 상영했고 밤에는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야학도 운영했습니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교사로 참여해 교육을 도왔지만 재정적 한계로 극장은 약 2년간 운영된 뒤 문을 닫았습니다. 자유아동극장은 운영 기간 하루 3회 공연을 진행했으며 연간 146일 동안 모두 268회 공연을 열었습니다. 이 기간 11만1천여 명이 극장을 찾으며 문화예술교육 공간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한형석 선생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서 예술을 공부했습니다. 1940년에는 중국에서 한국 최초의 가극 '아리랑'을 발표했으며 한국광복군 예술대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가를 작곡했습니다. 2004년 추모사업회 결성과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음악회를 계기로 한형석 선생의 작품들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보로 남겨진 악보들은 복원과 편곡 과정을 거쳐 공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재 자유아동극장은 한형석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다양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6.16 16:10

[오래된 미래] 보수동 책방골목, 전쟁의 폐허에서 피어난 부산의 지식 창고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이 한국전쟁의 역사와 함께 성장해 온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소개됐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전쟁 당시 피란민 학교가 들어서면서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초기 상인들은 미군 전투식량 상자 위에 헌책을 펼쳐 놓고 책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책이 귀했던 시절인 만큼 헌책은 학생들에게 소중한 배움의 기회가 됐습니다. 고충진 기타리스트는 중학교 시절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구입한 기타 교본으로 독학하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버스 회수권을 살 돈을 아껴 책을 구입하고 걸어서 다녔던 기억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보수동에는 헌책방이 잇따라 들어섰고 한때 70여 개의 책방이 골목을 채웠습니다. 김여만 대표는 미군들이 버리고 간 영어 원서와 미국 잡지 등이 헌책방의 중요한 상품이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50년 넘게 헌책방을 운영해 온 남명섭 대표는 친척의 권유로 책방 일을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참고서와 교과서를 구하려는 학생들로 골목이 가득 찼던 시절을 기억했습니다. 특히 1980~1990년대에는 입장 인원을 제한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책방골목을 찾았습니다. 남 대표는 낡고 훼손된 헌책을 손질해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는 일도 맡았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지금도 희귀서와 다양한 헌책들이 남아 있습니다. 피란 시절 학자와 지식인들 역시 이곳에서 책을 구하며 학문을 이어갔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상인들은 앞으로도 누구나 편하게 들러 책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노경민
2026.06.1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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