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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싱싱한 해산물에 정까지 한 상…통영에서 피어난 ‘다찌 문화’

통영에는 정해진 메뉴 대신 그날그날 좋은 해산물을 상에 내는 독특한 식문화인 ‘다찌’가 있습니다. 통영에서 다찌 가게를 운영하는 김순점 씨는 매일 아침 중앙전통시장을 찾아 계절과 날씨에 따라 좋은 해산물을 고릅니다. 다찌는 매일 들어오는 재료에 따라 메뉴가 달라지며, 김 씨의 가게에서는 스물몇 가지 정도의 음식이 나오지만, 그날에 따라 가짓수가 달라집니다. 요즘에는 갈치와 전갱이가 맛있고, 겨울에는 물메기와 대구, 가을에는 전어, 여름에는 장어, 봄에는 도다리 등 계절에 맞는 음식이 상에 오릅니다. 현재 통영 강구안 일대에는 30여 개의 다찌 가게가 성업 중입니다. 김 씨는 26년 전 생계를 위해 다찌 가게를 시작했고, 일을 하면서 통영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다도해에 속한 통영은 예부터 싱싱한 해산물이 풍부했고, 특히 굴과 멍게는 우리나라 최대 생산량을 자랑한다는 설명입니다. 1908년에는 일본 오카야마현 주도로 미륵도 도남동 일대에 일본인 집단 이주 정착촌인 ‘오카야마촌’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식문화가 전해졌고, 특히 선술집 문화인 ‘다찌노미’가 통영 다찌의 형성에 영향을 줬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술상을 차리는 방식은 통영의 토속 문화와 관련이 있으며, 최원준 시인·음식 칼럼니스트는 다찌의 술상 문화를 통영에서 자생한 문화라고 설명했습니다. 통영의 술상 문화는 옛 실비집에서 시작됐으며, 당시 실비집은 ‘찬새미집’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찬새미’는 찬 우물을 뜻하는 말로, 여름철 쉽게 상하는 음식을 우물에 보관했다가 손님이 오면 꺼내 평상이나 대청마루에 술상을 차렸습니다. 술 한 병을 마실 때 나오는 안주가 따로 있었고, 추가로 주문할 때마다 새로운 안주가 나오면서 점차 더 좋은 음식이 차려졌습니다. 다섯 병 정도를 마시면 진수성찬과 같은 술상이 차려졌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가게마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부분들이 모여 지금의 상차림이 보편화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다찌는 음식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정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작은 방에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다 서로 형님, 아우라 부르고,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이 다른 방에 맥주를 넣어주고 그 값을 계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최원준 시인·음식 칼럼니스트는 다른 도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통영만의 술 문화라며 다찌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또 통영 지인들과 밤새 술과 음식을 나누다 보면 바다의 파도 소리와 사람들의 노랫소리 속에서 통영의 밤이 깊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박종준
2026.09.16 14:32

[오래된 미래] 동양의 떨림을 서양음악에 담다…통영에 뿌리 둔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은 동양적인 철학과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키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유소년기 오광대와 유랑극단 등을 통해 전통음악을 경험했고, 학교와 교회에서는 서양음악을 접했습니다. 해방 이후 통영에서는 시인 유치환과 윤이상에게 교가 제작 요청이 많이 들어왔고, 이때 만들어진 교가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후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윤이상은 상금을 바탕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학 3년 만에 ‘일곱 악기의 음악’이 현대음악의 실험장으로 소개된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초연되며 빠른 성취를 이뤘습니다. 당시 초연을 맡은 지휘자 브루노 마데르나는 공연이 끝난 뒤 서양음악이 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윤이상은 음의 떨림과 농담 등 동양적인 음악 어법을 서양음악과 조화시키며 새로운 표현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연주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함부르크 공연에서는 연주자들이 연주가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자 윤이상이 직접 첼로를 잡고 원하는 표현을 시범 보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1967년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윤이상은 그해 6월 17일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됐고,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자료에서는 월북한 친구를 만나고 고구려 사신도를 보기 위해 방문했던 일이 간첩죄로 인지됐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의 구명운동과 서독 정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겪은 뒤 윤이상의 음악은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독일인으로 귀화한 뒤에도 각종 행사에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소개했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한국인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도 전해집니다. 윤이상은 자신이 충무에서 자라며 얻은 모든 요소를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담아 평생의 작품을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1994년에는 윤이상의 귀국 음악회가 추진되면서 고국 방문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결국 무산됐습니다. 당시 윤이상은 귀국하면 그리워하던 고국의 흙을 만지고 변함없는 사랑과 충성을 말하겠다는 뜻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윤이상의 작품은 이를 연주한 한 첼리스트에게도 새로운 음악적 경험을 안겼습니다. 이 첼리스트는 윤이상의 곡을 연습하며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적인 요소까지 함께 익힐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윤이상이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며, 그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현대음악의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충무에서 쌓은 경험과 동양적인 음악 어법은 서양음악과 어우러지며 윤이상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이어졌습니다.
노경민
2026.09.10 14:35

[오래된 미래] “최강 롯데!” 세대가 함께 외쳤다…사직야구장에 새겨진 부산의 야구

부산에서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시민들의 삶과 함께해 온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부터 고교야구를 즐겼던 팬들은 프로야구 창단 이후 자연스럽게 롯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부산고등학교가 광주상업고등학교를 3대 1로 꺾고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정상에 오르는 등 고교야구의 열기도 뜨거웠습니다. 1만 1,700명가량을 수용했던 구덕구장보다 약 두 배 큰 2만 3천 명 규모의 사직구장이 생기면서 늘어난 야구팬들의 열기를 담을 공간도 마련됐습니다. 롯데의 우승 역사에는 최동원의 활약도 깊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롯데가 6대 4로 승리해 챔피언에 올랐고, 당시 최동원의 모습은 훗날 야구선수를 꿈꾸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팬에게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롯데의 우승과 함께 받은 선물이 지금까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염종석 전 롯데 자이언츠 선수는 19살 때를 떠올리며 당시 부산에서 자신의 인기를 실감했던 일화를 전했습니다. 사직야구장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은 관중석을 가득 채운 독특한 응원 문화였습니다. 신문지를 찢어 흔들며 응원하고 관중들이 쓰레기봉투를 머리에 쓴 채 응원을 펼치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머리에 썼던 봉투에 쓰레기를 담아가는 모습도 이어졌습니다. 이런 응원 문화를 두고 롯데가 우리나라의 응원 문화를 선도하고 주도해 왔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가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기장에 던져진 많은 쓰레기로 경기 속개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홈팀 몰수패 가능성까지 거론됐습니다. 롯데가 경기에 지면 그물을 타고 올라가거나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고 음식물을 던지는 등 과격한 모습이 나타났다는 회고도 나왔습니다. 그만큼 다른 팀과 비교해 롯데 팬들의 열의가 강하게 느껴졌다는 증언입니다. 사직야구장에서는 “최강 롯데”를 외치는 구호와 노래가 울려 퍼지며 관중들이 함께 호흡했습니다. 20년째 사직야구장에서 팬들과 함께해 온 한 관계자는 남녀와 세대의 구분 없이 하나의 목소리와 응원으로 뭉치는 모습에서 사직야구장의 특별함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9살 때 처음 사직구장을 찾은 뒤 자연스럽게 롯데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팬도 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롯데에 관심을 갖다 보니 이제는 “롯데 그 자체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야구장을 찾아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는 팬의 말처럼 사직야구장은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됐습니다. 두 차례 우승을 지켜봤다는 70대 팬은 다시 한번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부산 야구팬들을 가족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만큼 사직야구장은 팬과 야구인이 함께 추억을 쌓아온 특별한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동현
2026.09.04 14:29

[오래된 미래] 귀한 연향 음식에서 대중의 음식으로…동래파전이 이어온 맛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동래파전의 이야기와 전통의 맛을 지켜가는 사람들의 노력이 조명됐습니다. 동래파전은 파를 재배하는 농민과 바다에서 굴과 해초 등을 채취하는 사람들의 땀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음식으로 소개됐습니다. 동래도호부 시절에는 일반 백성들이 흔히 먹던 음식이 아니라 기생 양성소인 교방청에서 연향을 베풀 때 내놓던 중요한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는 설명이 나왔습니다. 동래 지역에서 나는 다양한 식재료를 넣어 만든 파전은 중앙의 고급 관리나 해외 사신 등이 왔을 때 연향 음식으로 제공됐습니다. 조선 말기 기생들이 면천된 뒤 생계를 위해 동래장을 중심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하면서 동래파전도 대중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설명됐습니다. 전통 동래파전에는 부산에서 나는 기장파와 해산물, 쇠고기, 쌀가루와 찹쌀가루 등이 사용됐습니다. 기장파는 흰 부분과 파란 부분의 구분이 분명하고 연하면서 달짝지근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바다와 인접해 해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논밭도 비옥했던 부산의 지역적 환경이 동래파전의 식재료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조리 과정에서도 일반적인 파전과 차이를 보입니다. 둥근 번철을 은근하게 달군 뒤 쪽파를 길이대로 가지런히 놓고 해산물과 쇠고기, 맛국물 등을 더해 익히며, 마지막에는 뚜껑을 덮어 찜을 하듯 익히는 방식입니다. 전통을 이어온 한 가게는 1950년대 증조할머니가 동래장 장날에 파전을 굽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가게를 열어 영업을 이어왔다고 소개했습니다. 현재 가게를 운영하는 이는 1994년 5월부터 일을 시작했으며, 현대인의 입맛에 맞춰 전분이나 부침가루, 튀김가루 등을 사용하는 방법도 고민했지만, 지금까지 전통적인 조리법을 고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4대째 전통음식을 이어가려는 다음 세대 역시 할머니와 어머니가 지켜온 음식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는 한편, 외국인 관광객 유치와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시도에도 나서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한편, 또 다른 가게에서는 튀김가루와 부침가루를 배합하고 치자물을 사용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파전을 만드는 등 전통과 다른 방식도 소개됐습니다. 이곳에서는 누룩이 많이 들어가 발효 과정에서 산미가 생기는 금정산성 막걸리와 파전의 기름지고 구수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프로그램에서는 동래파전의 조리법과 역사를 기록해 보존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는 음식과 조리법을 개발하는 ‘보존과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습니다. 동래파전은 지역의 식재료와 이를 길러내고 채취한 사람들의 땀이 어우러진 음식으로, 전통을 보존하면서 다음 세대의 취향에 맞는 변화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경민
2026.08.26 13:51

[오래된 미래] 조국 위해 싸운 박차정 의사…독립운동의 길을 되짚다

박차정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과 그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들이 조명됐습니다. 박 의사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함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인물로 소개됐습니다. 박 의사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에는 배고픔과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억압에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이 담겼습니다. 박 의사의 활동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 반외세·반제국·반봉건을 지향하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설명됐습니다. 박 의사는 서울 여학교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풀려난 뒤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이후 오빠 박문호의 권유로 국내보다 국외에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망명했습니다. 국외 활동 과정에서는 약산 김원봉과의 인연이 소개됐으며,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으로 활동했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또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가를 박 의사가 작사·작곡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이후 민족혁명당을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남경 부녀복무단이 조직됐고, 박 의사는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선무공작에 나섰습니다. 일본 측을 향해 투항을 권유하거나 팸플릿과 포스터를 활용하는 선무공작을 벌였으며, 나아가 직접 총칼을 들고 전투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박 의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원봉이 직접 유해를 수습해 돌아왔으며, 박 의사가 총상을 입었을 당시 입고 있던 피 묻은 적삼을 장모에게 건넸다는 기록도 소개됐습니다. 하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성격을 띤 연구가 터부시됐고, 김원봉의 이름 역시 지역에서 금기시됐다는 설명이 나왔습니다. 박 의사는 계급보다 민족을 우선하고, 국민 대중 전체가 민족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로 설명됐습니다. 박 의사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도 소개됐습니다. 학생들은 허물어지고 풀 한 포기 없던 박 의사의 묘소를 찾은 뒤 직접 나무판과 못을 구해 표지판 2개를 만들었습니다. 또 묘소까지의 거리를 평균 86걸음으로 계산해 ‘그녀에게 가는 길 86걸음’이라는 메시지를 표지석에 남겼습니다. 프로그램에서는 남성 독립운동가와 여성 독립운동가를 구분하려는 경향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모든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활동을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또 국가로부터 독립장을 받은 박 의사의 묘가 현재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로 표현돼 있다며, 앞으로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라고 새겨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는 뜻도 전해졌습니다.
이아영
2026.08.19 13:56

[오래된 미래] 안용복이 지킨 울릉도·독도…기록과 문화로 이어지는 영토의 기억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안용복의 활동과 관련 기록들이 다시 조명됐습니다. 1693년 울릉도를 찾은 안용복은 현지에 머물던 일본 어부들과 충돌했고,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문제가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번졌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분쟁은 5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으며, 막부로부터 각서까지 받아 돌아오던 중 나가사키에서 대마도주에게 이를 빼앗긴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두 번째로 일본 돗토리를 찾았을 당시 안용복과 돗토리번 관리들이 접촉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 2주 동안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안용복이 일본에 가기 전인 1696년 1월 이미 도해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를 조선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설명도 나왔습니다.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보여주는 일본 측 자료로는 1837년 니가타현에서 제작된 경고판인 ‘죽도제찰’이 소개됐습니다. 죽도제찰에는 울릉도를 조선국의 땅으로 규정하고 해당 지역으로 항해해 어로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설명됐습니다. 이 자료는 일본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끝에 현재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소개됐습니다. 또 일본의 문서인 태정관 지령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영토 수호의 의미를 후대에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영토를 함께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습니다. 독도를 지리적·역사적·국제법적 근거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켜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소개됐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노래를 만들고 외국어로 번역하거나 숏폼과 SNS, 밈 등 미디어 콘텐츠를 활용해 세계에 알리는 방안도 제시됐습니다. 프로그램은 안용복과 관련 유적·기록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온 역사를 되짚고, 영토 수호의 의미를 후대에 이어갈 필요성을 전했습니다.
이아영
2026.08.11 14:27

[오래된 미래] 흥남철수, 피란민들이 남긴 삶의 기억

흥남철수는 수많은 피란민의 삶을 바꾼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피란 작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피란민들은 영하 4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서 흥남부두에 모여 배를 기다리며 가족과 함께 생존을 위한 시간을 버텨야 했습니다. 당시 어린 자녀들을 잃지 않기 위해 새끼줄로 몸을 서로 묶고 피란길에 올랐다는 가족들의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또 일부 가족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면서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고 회상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당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북식 순대를 만들거나 흥남부두를 떠올리는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기억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승선 인원의 120배가 넘는 1만4천500명의 피란민을 태우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봉학 박사는 피란민을 함께 태워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고, 결국 알몬드 장군의 승인이 이뤄지면서 대규모 피란이 가능했다고 소개됐습니다. 당시 배 안에서는 화물칸과 갑판은 물론 모든 공간에 피란민이 탑승했고,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며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피란 이후 거제도와 부산에 정착한 가족들은 사진관과 상회, 정육점 등을 운영하며 새로운 삶을 일궈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희생과 기억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습니다. 흥남철수를 경험한 가족들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아영
2026.08.04 14:15

[오래된 미래] 피란민의 한 그릇, 부산 밀면의 탄생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주민들은 비싼 냉면을 대신할 새로운 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 없이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냉면 기술을 바탕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구호물품으로 공급되던 밀가루를 활용해 냉면을 대신할 면을 만드는 시도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밀가루만으로는 면발이 쉽게 끊어지고 식감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밀가루와 고구마가루를 3대 7 비율로 배합하면서 지금의 밀면이 탄생했습니다. 밀면은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면을 더 주문하기 어려워 따뜻한 육수를 한 주전자 가까이 마시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따뜻한 육수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회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당시 국수 한 그릇의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손님들의 사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온 가게는 밀면을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부산의 식문화로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밀키트 등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오래된 가게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부산만의 새로운 밀면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문헌에 나온 비빔밥에서 착안해 밀면을 비빔밥처럼 구성한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맛본 손님들은 기존 밀면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한 밀면 가게 운영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밀면의 맛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손님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진주냉면처럼 밀면도 하나의 독립된 음식 장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밀면을 만드는 사람들은 피란민들의 삶이 담긴 밀면을 부산의 식문화이자 하나의 음식 장르로 알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7.29 14:16

[오래된 미래] 장기려 기념관, 사랑으로 남긴 생명의 기록

부산 장기려 기념관에는 평생 가난한 환자를 위해 헌신한 장기려 박사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장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사랑’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고, 필요한 치료를 끝까지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수술복조차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시절에도 맹장염 수술 등을 직접 집도하며 환자를 살렸습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는 오랜 시간 곁을 지키며 치료를 이어갔다는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입원비보다 환자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고, 돈이 없는 환자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치료비와 차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환자 가족에게 직접 도움을 준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말기암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온 가족이 귀가할 비용이 없다는 사정을 알게 되자 차비를 마련해 보냈습니다. 당시 도움을 받은 가족은 배 속의 아이까지 살려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장 박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해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만났다는 증언도 이어졌습니다. 함께 일했던 의료진은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사랑을 가장 큰 가르침으로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장 박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결국 가족에게도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또 어려운 시기 월 400원의 회비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조직하며 서로 돕는 의료를 실천했습니다. 장 박사는 부산을 아끼며 의사로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장 박사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의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박종준
2026.07.27 14:08

[오래된 미래] 좌천동 방공호, 일제의 전쟁 흔적에서 역사의 교훈으로

좌천동 방공호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부산항 방어를 위해 조성된 전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원 소장은 군산에서 부산까지 해안 지역에는 포진지가, 부산 내륙에는 방공호가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좌천동 방공호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인명 피해 방지와 부산항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김 소장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이후 부산요새사령부 산하에서 방공호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방공호는 산을 깎아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든 뒤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위장한 형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본은 가덕도를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보고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공사에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징용됐으며, 폭파 뒤 암석을 치우는 작업 등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가덕도에서는 일본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토지를 수용하면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주민들의 출입이 제한됐다는 내용이 당시 공문에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란민들이 방공호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은 당시 방공호 곳곳에서 여러 가구가 함께 생활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고 회상했습니다. 현재 방공호에는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하되 나라의 부끄러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은 안내 문구가 사라져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주민들은 좌천동 방공호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러한 공간을 통해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좌천동 방공호는 전쟁과 피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부산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전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노경민
2026.07.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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