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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 6편> 허황옥의 흔적을 따라 목숨건 추적*발굴

<앵커> KNN은 2천년 전 인도에서 온 허황옥의 실체를 추적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해 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걸 정도로 험난한 과정도 있었는데요, 이 모든 추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내일(15일) 공개됩니다. 강소라 기자입니다. <기자> 지금으로 부터 2천년 전의 김해평야입니다. 대부분의 지역이 바다에 잠겨 버립니다. 이 작업은 지난 5월부터 7개월이 걸렸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삼국유사 기록을 과학적 방법으로 고증하자 뜻밖의 결과들이 쏟아졌습니다. 허황옥이 탄 인도배를 처음 목격했다는 망산도는 망산도가 아니었습니다. 견마도가 망산도로 새롭게 발굴된 것입니다. 역사적 유적이 될 높은 가능성에도 섬은 매립 과정에서 곳곳이 짤린 채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취재팀은 기록을 더듬어 신혼 첫날밤을 보낸 증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길도 없는 야산! 절벽을 기어오르다, 단단하지 못한 절벽으로 아찔한 상황이 몇번 반복되고, 그러기를 3시간여! 기어이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도명스님'자, 감독님 여기 석축이 이렇게 있습니다. 엄청 높죠?'성벽처럼 돼 있네요?''네, 거의 3미터? 3미터50센티미터'} 그리고 석축 위 곳곳에서 깨진 기와조각들이 쏟아져 나오고, 고려와 조선시대로 확인됐습니다. 그 아래를 발굴하면 가야시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취재팀은 최첨단 영상 기법도 적용했습니다. 메타휴먼 즉 아바타형 연출 기법으로 국내 방송에서는 최초입니다. {권하진/허황옥 목소리 대역'난 아직 그대들을 모른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 갈 수있겠소'} 여기에는 허황옥 출신 지역의 유전적 특징들을 하나씩 적용했습니다. 바로 인물 복원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과학적으로 고증해 들어가자 역사의 새로운 줄기가 보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허황옥3일이 내일(15일) 공개됩니다. KNN강소라입니다.
2021.12.14

<허황옥 5편> 삼국유사 "허황옥 신행 3일", 정밀한 기록

<앵커> 인도에서 온 가야의 허황옥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정확히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몇가지 논란으로 신화로 치부되고 있는데요, KNN 취재결과 적어도 허황옥 신행 3일은 정밀하게 기록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강소라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2천년 전 가야에 도착한 허황옥은 수로왕을 만나기 전 능현을 올라 흰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올렸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 모습이 폐백이라며 당시 인도에 없었던 문화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신들에게 받치는 가장 오래된 경전 리그베다 찬가에는 결혼을 앞둔 신부의 의식이 정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거룡/선문대 대학원교수'그 능고를 벗어서 산신령에 주었다는 가락국기의 내용은 인도의 결혼 풍습과도 상당히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지 않겠는가'} "흰 바지"를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인도규범으로서 처녀성을 상징하는 순결함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 삼국유사에는 수로왕을 만난 허황옥이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일부에선 "아유타"라는 국호가 국내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한 때는 이보다 수백년이 지난 시점이라고 주장합니다. 허황옥보다 후대 인물인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이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유타라는 발음은 기원전 부터 사용돼 왔습니다. 이를 연구하는 황정일 박사는 기원전부터 아유타와 유사한 발음만 10가지를 찾아냈습니다. {황정일/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 교수'한자 표기로 14개가 됩니다. 적어도 불전의 내용으로나 내용을 봤을 때는 기원전 6세기부터 부처님이 그 쪽을 다녔다는 얘기들이 나오니까 그 시기부터 있었다고 추정할수 있습니다.'} 다양한 발음으로 쓰이던 아유타가 추후에 하나의 지명이 된것이며 실제 인도문화가 전파된 태국과 베트남에도 아유타가 나옵니다 삼국유사는 신화가 아닌 정밀한 역사서로서 당시의 문화와 지명을 명확히 싣고 있었습니다. KNN강소라입니다.
2021.12.12

<허황옥 4편> 인도~가야 "해상 철기실크로드" 있었다

<앵커> 철기는 중국을 통한 북방으로부터 전해졌다는 게 기존 학계의 통설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해상으로부터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KNN은 허황옥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철의 해상실크로드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강소라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고대 철의 이동로를 밝힌 한 논문입니다. BC 4세기 무렵부터 인도로부터 철기가 동남아를 거쳐 필리핀과 대만으로 향합니다. 이는 베트남을 거쳐 중국으로 이동하는 루트와는 별개입니다. 탄소동위원소 측정결과로 나온 결론인데, 기존 학설을 크게 뒤집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대만까지의 철기루트가 완성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대만에서 가야까지는 없었을까? 이 선이 가야까지 이어질 수 있는 흥미로운 단서가 있습니다. 가야라는 지명과 철기산지 유적들이 나온 곳을 연결하면 바로 고대 해양철기 루트가 만들어 집니다. {이진아/환경저술가'교역을 했던 해로를 그리고 있어요. 지도에다가. 그 노선 위에 있습니다. 가야가 다. 가야라는 이름의 지명 흔적이 남아있는 곳들이 (호주국립대)샤우춘 홍 박사가 얘기하는 철기 유물이 있고 그래서 이런 방향으로 움직였을 거다라는 그 노선하고 정확하게 일치하는 곳에 가야가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금속공학자인 박장식 교수는 인도와 가야 철기 제련법이 똑같을 정도로 유사하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강도를 높일 수 있는 탄소를 넣는 방법이 중국의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박장식/前홍익대 금속공학과 교수'(덩이쇠)양쪽에 탄소를 집어넣어 놓았기 때문에 사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수 있기 때문에 수요가 높은거에요. 중국식 기술체계에서는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야 신라에서 덩이쇠를 사가야했다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고 나는 믿어요. 그런 독특한 아이디어가 우연히 양쪽 지방(가야, 인도)에서 개별적으로 생겨났다고 얘기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죠.'} 가야 유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유리 구슬들도 인도의 가공법과 같습니다. 인도와 가야간 교역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위 단서들을 엮어보면 인도에서 동남아와 대만을 그쳐 가야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철의 해상 실크로드가 그려집니다. 인도와 가야는 이미 기원전부터 교류했었고, 그 과정에서 허황옥의 도래도 가능했음이 상식이 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KNN강소라입니다.
2021.12.11

<허황옥 3편> 2천 년 전 9천km 항해, '충분히 가능했다'

<앵커> KNN은 신화로 치부되는 가락국의 첫 황후, 허황옥의 흔적을 과학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인도에서 가야까지 9천km나 되는 바닷길을 뚫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요? KNN취재팀의 확인 결과 "충분히 가능했다"입니다. 김동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삼국유사에는 붉은 돛의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처음 목격한 신하 유천간이 서 있던 망산도와 배와의 거리는 4.98km라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이 거리에서 돛과 깃발의 색깔까지 구별해 낼 정도로 배의 크기가 컸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취재진은 당시 배를 타고 온 사람 수와 화물의 무게로 크기를 추정해봤습니다. 올 때 신하 부부와 뱃사공 노예까지 최소 40명!, 여기에 식량과 물, 파사석탑 등을 실을 경우 최소 40톤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는 배가 돌아갈 때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식량 10섬과 베 30필 씩 주었다는 기록을 무게로 변환해봐도 비슷한 계산이 나옵니다. 인도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 바스코다가마의 기록입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온 가브리엘호보다 인도배가 10배는 더 컸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보다 한참 앞선 기원 전 4세기부터 인도는 선박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급속도로 진출합니다. 당시 발견된 동전에는 두 개의 돛을 단 배가 새겨져 있습니다. 취재진은 1912년에 출간된 인도 고대 선박 서적에서 당시 배의 모양과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두 개의 돛을 단 배였습니다. 7백명에서 최대 천명까지 탔었다는 기록에다 크기는 50m 수준이었습니다. 허황옥 배가 50m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가야와 일본을 오갔던 선박이 15m 수준인 것에 비해 최소 3배 이상 컸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바람을 이용한 항해술이 뛰어났습니다. {실라 박사(국립인도해양연구소 책임연구원)'고대 인도인들은 날씨를 예측하는 그들만의 전통적인 지식이 있어 낮에 항해하고 밤에는 별을 따라 갔습니다. 항해가 가능한 기상 조건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격노한 파도의 신을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록상 6월 중순에 출발했는데, 취재진이 구현한 당시 계절별 바람장을 대입했을 때 뱅골만은 강한 바람이 부는 시기여서 기록과도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2천년 전 인도 배는 압도적인 크기와 뛰어난 항해술로 9천km 떨어진 가야와 충분한 항해가 가능했습니다. knn김동환입니다.
2021.12.10

<허황옥 2편> 수로왕-허황옥의 첫날밤, "만전" 위치 처음 확인

<앵커> KNN 취재팀은 가락국의 황후,허황옥의 흔적을 과학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수로왕과 첫날밤을 보낸 곳을 만전이라고 기록했는데요, 미공개 자료들을 재구성하자 만전의 위치가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강소라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서기 48년 7월 28일, 수로왕은 인도에서 온 허황옥의 손을 잡고 임시 거처인 만전으로 들어가 첫날밤을 보냅니다. 삼국유사는 만전이 있던 자리에 왕후사라는 절이 들어섰다고 기록합니다. 즉 만전이 가능한 지형은 인도에서 온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부두와 넓은 평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적이나 유물은 없습니다. 미공개 항공사진 등으로 복원한 2천 년 전의 김해평야와 가덕도 주변 지형입니다. 당시엔 대부분 바위 해안이지만 배를 처음 목격한 망산도와 가까운 곳에 움푹 들어간 곳이 나옵니다. 그 한 켠에 넓은 평지가 확인됩니다. 삼국유사는 이 만전의 위치를 종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 즉 지금의 단위로 40여미터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관청인 종궐과 가까운 곳에 만전을 친 것인데, 복원한 지형상 종궐과 만전이 놓일 공간이 충분히 넓은 것이 확인됩니다. 취재진은 추가 단서를 확보했습니다. 바로 만전이 세워진 뒷산에 흥국사와 진국사 신국사라는 3개의 절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취재팀은 이 절 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오래 전 사람의 발길이 끊긴 길은 위험천만한 절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절벽에 축대를 쌓은 사람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도명스님/여여정사 주지'잠깐만, 여기 이렇게 석축이 있습니다. 엄청 높죠? 3m50cm?'} 지표면을 들추자 기왓장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도명스님/여여정사 주지'제법 크네요. 여기도, 많이 이렇게 있습니다. 여기도 있네요.'} 기와의 연대를 확인하자 뜻밖의 결과가 나옵니다. {최정혜 /피란수도 부산박물관장(고려기와 전공)'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고려, 조선시대의 기와인것 같습니다.'} 좀 더 깊이, 제대로 된 발굴을 그 이전 시대 것도 가능하다는 예깁니다. 취재진은 반대편 산에서 기둥들이 상당히 많았을 규모의 절터를 확인했습니다. {김형곤/동서문물연구원장'삼국시대까지 올려본다면 혹시 가야초기, 성급합니다만 가능성이 있는거죠.'} 고지형 복원으로 종궐과 만전을 칠 넓은 공간이 확인되고, 뒷산에 절터들과 유물들이 확인되면서 삼국유사의 잃어버린 고리들이 하나씩 모습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KNN강소라입니다.
2021.12.09

<허황옥 1편> 과학으로 밝혀 낸 새로운 망산도

<앵커> 2천 년 전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허황옥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상세히 적혀있지만 그동안 신화로 치부돼 왔는데요, KNN이 과학의 잣대로 삼국유사를 재해석하자 새로운 결론이 나왔습니다. 허황옥의 배를 처음 목격했다는 망산도가 새로 밝혀진 것입니다. 강소라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 서기 46년 7월 27일 기록입니다. 홀연히(갑자기)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깃발과 돛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해가는 배가 나타났다. 이 기록대로라면 방위 상 목격 지점으로부터 서남쪽에서 갑자기 배가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목격한 지점이 바로 망산도가 됩니다. 그동안 망산도로 주장되어 온 지점은 4곳! 취재팀은 이 망산도를 찾기 위해 먼저 2천 년 전 지형을 복원했습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6,70년대 항공 사진과 고지질학의 도움을 받자 지금의 김해평야는 모두 바다로 바뀝니다. {황상일/경북대 지질학과 교수'2천3백년부터 바닷물이 조금 빠르게 상승해서 2천년 경에는 현재보다도 2.8미터에서 2.5미터 높아지는데'} 김해평야와 지금의 가덕도 주변으로 섬들이 나타납니다.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는 진해 용원의 망산도는 물속에 잠겨 버려 섬이 될 수 없습니다.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망산도! 하지만 방위각을 대입하자 이미 남쪽에서 배가 목격됩니다. 칠산도는 서남쪽이 육지로 막혀 있고, 욕망산은 아예 섬이 아닙니다. 4곳 모두 망산도가 아닌 것이 됩니다. 취재진이 확보한 지난 69년 항공사진 한 장! 지금은 매립된 곳에 섬이 하나 나타납니다. 이곳에선 서남쪽 방향이 뚫려있습니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갑자기 배가 나타났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합니다. 견마도로 불리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 지도에선 만산도라고 적혀있습니다. 망산도와 발음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산신항 매립 과정에서 파헤쳐져 방치돼 있습니다. 여전히 역사와 신화의 틈바구니지만,과학을 대입한 삼국유사는 이제 새로운 망산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KNN강소라입니다.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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