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나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겼습니다. - 조각가 김영원
표중규
입력 : 2026.07.29 15:14
조회수 :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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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광화문 세종대왕상의 작가로 기억하지만 사실 갈라진 인간의 형상을 그린 조각품으로 더 널리 알려진게 조각가 김영원이다. 그런 그의 작품은 많이 봐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해 이제 여든에 접어든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를 쉽게 기대하기는 어려웠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의외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게 경남 김해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들어섰고 그 개관을 핑계로 내가 진행하는 대담프로그램에 초대했고 그게 또 흔쾌하게 받아들여져서 그 대담을 내가 진행하면서 녹화 이후로 따로 20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누군가와 우연에 우연이, 인연에 인연이 겹쳐 이렇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던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재미있기도 했다. 심지어 내 사무실 책장에 꽃혀있던 누가 어떻게 챙겨두었는지 알 수 없는 김영원씨의 도록에 사인을 받은 것까지 모든게 다 재미있는 만남이었다.
기자경남 김해에 김영원 미술관, 그러니까 작가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실거 같아요.
조각가 김영원(이하 김영원)
예 감회가 깊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광이고 참 자랑할 만한 일인데 또 한편으로는 부담이 커요. 어떻게 지역성을 좀 벗어나서 그러한 미술관으로 성장시키는 데 제가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부담이 아주 큽니다.
기자
특히 개관기념전도 열리지 않았습니까? 보신 소감은 어떠세요?
김영원
아주 입지 선정이 참 좋더라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어디 뭐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삶의 현장에 있는 건데 거기는 경전철 정거장이랑 한 10분, 도보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위치가 선정이 잘 됐다 싶었어요. 길 가다가 목마르면은 식수대에 가서 물 한 잔 마시고,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간이의자에 앉아서 잠깐 쉬어가는, 그것이 하나의 삶의 문화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참 위치 선경이 잘 됐다, 또 운동장하고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상호 간에 시너지 효과가 크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만족합니다.
기자
그렇군요. 김작가님은 김해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신 걸로 제가 들었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그런 추억이 있다고 인연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작품을 어느 지자체에 기증하시는 건 사실 쉬운 생각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김영원
제 작품이 약간 대중성이 있다 보니까 각 지자체에서 미술관 러브콜이 쭉 있어 왔지요. 그런데 김해시만큼 진정성이 있고 적극성을 띤 곳이 없었습니다.
사실 김해가 제가 중고등학교를 나온 곳입니다. 진영 한얼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또 제 할아버지 고향이 김해 장유입니다. 선산도 있어가지고 제가 죽으면 그쪽에 묻혀야 할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아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학생 미술 실기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대회가 김해 왕릉에서 열렸는데 제가 점토를 가지고 그 왕릉 상석을 받침대 삼아서 만든 작품이 상을 받게 되지요. 그것이 제가 조각가의 길을 가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저한테는 의미가 깊고 당연히 제가 미술관을 한다면 김해에 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쉽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많은 작품들 되도록이면 아주 중요한 작품은 다 김해에 기증을 하는 걸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기자
지역민으로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에 김영원 미술관 관장을 맡으신 최정은 관장님 모셨을 때 제가 비슷한 질문을 한번 드렸는데... 김영원 미술관이 김해를 무대로 해서 어떤 문화적인 산실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김영원
저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그런 미학보다 동양적인 그리고 우리 국내에서 이루어졌던, 옛날부터 내려오던 미학에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글로벌한 미학으로 만들어서 세계 미술 문화에 우리가 하는 기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왔죠. 단지 미술관에 작품만 전시하는 박물관 식의 미술관은 해서는 안 되겠다, 항상 살아 움직이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서 글로벌한 미술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된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 김해에 김영원 미술관이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기자
그런데 대부분 굉장히 관심 있게 보시는게 아무래도 광화문의 세종대왕상 아닐까 싶은데요. 세종대왕은 실물이나 이런 게 없는 상황에서 그걸 제작하실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좀 초점을 맞춰서 하신거죠?
김영원
사실 그전에 있던, 1973년 김기창 화백이 그린 초상화는 내가 생각하는 세종대왕 외형하고는 좀 거리가 있더라고요. 세종대왕께서는 벌써 외모가 고기를 많이 먹으셔서 몸이 좀 비대한 분이고 또 그분이 유약한 분이 아니고 학문을 중시하면서도 상당한 결단력과 미래 지향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분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분의 초상을 만들 때 전주 이씨의 상(相)에 대해서 연구를 좀 했습니다. 이성계 시조부터 시작해서 쭉 내려오면 초상이 몇 개 있습니다. 영조대왕도 있고 고종도 있고 노래하는 가수 이석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아침마당에 나와서 방송하는 걸 제가 또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그 전주 이씨의 평균적인 골격이 약간 사각형의 골상에다가 광대뼈가 거의 없다 등등 여러 가지 특징이 있더라고요. 거기다가 조소를 하려면 해부학적인 지식을 많이 가져야 되거든요. 하지만 또 일상적으로 우리 국민들이 많이 접했던, 그 당시 만 원짜리 지폐에 있는 어떤 이미지하고 너무 동떨어지면 또 국민들이 이건 아니다고 할 것 같으니까 그런 점까지 다 고려해서 제 머릿속에 창조한 겁니다.
기자
그랬군요. 반응은 어땟습니까? 처음부터 딱 맞다, 너무 좋다, 막 그랬나요?
김영원
처음은 뭐 인상이나 외모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어요. 왜 이렇게 크게 했느냐 그런 외적인 얘기가 많았지요. 사실 세종대왕님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참 머리가 숙여지고 때로는 눈물도 나고 그랬는데 이분은 하나의 권위를 내세우는 대왕이 아니었어요. 그냥 애민 정신, 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했던 그런 대왕이었어요. 한 예를 들면은 노비가 임신해서 출산을 하면 출산하기 전에 한 달을 휴가를 주고 그리고 1년을 또 몸조리하라고 휴가를 줍니다. 그 지아비한테도 한 달 정도 휴가를 줍니다. 노비한테 그 당시에 신분 제도가 엄격했잖아요.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런 제도가 없거든요. 근데 그 시대에 그 제도를 시행했다는 것은 눈물 겨운 일 아닙니까?
그래서 이분은 아주 인자한 얼굴 정말 인지한 얼굴에다가 어느 정도 성군으로서의 경의를 담아야겠다 하고 그 상을 만드는데 제가 한 달 동안 사다리 타고 올랐다 내려왔다 이런 얼굴만 만드는데 한 5kg가 빠졌어요. 그래서 만들어낸 상이 그겁니다.
그래서 어떤 시민이든이나 누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왜 그렇게 컷냐 라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사실 뭘 하든 그 주변 환경을 고려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과 조화가 이루어져야 되니까 그래서 북악산에서 쭉 내려오는 경복궁, 건천전, 광화문 양 옆으로 교보빌딩이니 미국 대사관이니 세종문화회관이 이런 여러 가지 구조물에 맞추어서 크기를 정해야 되거든요. 근데 무조건 대놓고 크다? 그거는 비난을 위한 비난이지... 이런 환경 속에서 이 정도의 크기가 왜 된거냐 이렇게 따져 물어야 되는데 그거는 뭐 들은 척도 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또 이순신 장군 동상 제작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제력이 약해서 거기에 청동을 만들 만한 어떤 잉곳을 만들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물상에 가서 뭐 놋그릇이니 뭐니 이거 그냥 모아놓은 걸 그걸 가지고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색도 안 맞고 좀 엉망인데 여기에 당시에 요즘처럼 아르곤 용접기가 있어서 기가 막히게 용접을 한다든지 하지도 못하던 때에요. 그걸 산소 용접기로 쭉쭉쭉 하다 보니까 용접한 자리가 아주 두드러져 나오고 아주 험악하니까 새파란 물감을 칠하고 통일을 시켰습니다. 그걸 보고 청동 동상 하면 아 파란 거다 이런 인식이 있었던 거에요.
근데 실제로 최고의 청동 잉곳은 황금보다 더 화려해요. 그래서 제가 만든걸 보고 왜 황금을 칠하냐고 막 비판했어요. 그런데 또 공교롭게, 그 당시에 제가 세종대왕 동상을 모셔놓고 나니까 용접 자국도 없고 전부 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시의 판단에서 이제 이순신 장군이 너무 낡았고 부식이 많이 됐으니 이걸 다시 보수를 해야 되겠다면서 그 작업단에 저를 끼워 은 겁니다.
그래서 그거 보수할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을 검증하는 자리에 한 오십 명 넘는 기자들이 모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순신 장군을 외관적으로 이렇게 보는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깨에 구멍을 뚫어서 내시경을 찍어 봐야 됩니다.'
그래보니까 이건 뭐... 거미줄처럼 용접한 자리가 전부 다 떨어져 있어 그냥 하늘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이게 그럼 이거는 큰 충격 맞으면 와라락 무너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보완을 해야 됩니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장소에서 그 안을 보면 황금 같이 녹이 슨 부분, 청동 색깔이 나오잖아요. 그 이거 들고 기자들한테
'여러분 이거 청동인데 색깔이 파랗습니까? 금색입니까?' 라고 물으니 아무 기사도 말을 안 해요. 이게 바로 청동 색깔입니다. 이 색깔하고 세종대왕 동상 색깔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도 거기에 대해 이의가 없어요.
기자
그 스토리가 참 재미가 있네요. 그리고 또 하나 여쭤보고 싶은게... 아까 작가님도 스스로 대중성이 있는 작가다 말씀하셨는데 처음부터 작품 활동하실 때 대중성을 염두에 두십니까?
김영원
그런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70년도에 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 시기가 10월 유신 유신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젊은이들이 당했던 그 압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 가면 프락치들이 실시간으로 감시를 하고 또 경찰까지 학교에 상주해 가지고 굉장히 아주 어려웠지요. 감시라든지 이런 것이 많았고 또 제가 학교 학회장을 하다 보니까 모임이 많잖아요. 학년별로 모여서 모임을 했는데 두 명 이상 모이면은 신고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뭐 몇십 명 모아놓고 자주 하다 보니까 요 주위 인물로 항상 찍혔지요. 그리고 학교 밖, 학교 내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위수령이다 휴교령이다 하다보니 경찰하고 학생들하고 부딪혀서 최루탄 타는 냄새가 학교에, 정말 그냥 학교 들어가면 눈물이 흘렀어요.
학교가 폐쇄돼서 밖에 나오면은 경찰들이 가방들 다 수색하고 머리 좀 길면 끌고 가서 그냥 밀어버리고 이러한 엄혹한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그러다 보니까 현실에 대해서 눈을 뜰 수밖에 없지요.
원래 저는 고향이 낙동강 하류기 때문에 그 낙동강 물이 모래 톱을 헤치면서 흘러가는 유유하게 흘러가는 복선들을 평생을 보고 자랐으니까 저한테는 선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어요. 제가 작품 만드는 것보다 아름답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한참 제가 공부할 그 시기에 새로운 미술 사조가 막 들어오는 겁니다. 해외 추상 미술이 막 막 들어오는데 사실 우리는 구상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는데 그냥 시대에 뒤떨어진 거라고 내몰리는 상황이 된거에요. 그때 제가 뭘 생각했냐면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주의 하자.
우리한테 언제 합리주의적인 그러한 조각 작품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거죠.
서양에서는 몇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합리주에 기반한 사실주의 작품을 두고 그걸 갖다가 부정하면서 새로운 걸 만들고 만들고 하는데, 우리는 정반합 그러한 과정 없이 걔들이 하는 걸 그대로 흉내 낸다는 것은 문화의 뿌리가 없는 거다. 그래서 저는 그 시대에 억눌려 살던 우리의 국민들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하자 이제 이게 이제 출발이 됩니다.
당시에 시대상이 사람들을 이리로 가라 가라 저리 가라 뭘 해라 안 하면 제재를 가하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배금주의에 매몰돼 가면서 농경시대의 좋은 전통을 다 버려버리고 그냥 하나의 사물화되는 과정으로 걸어가고 위에 지도자들이 그렇게 몰아가는걸 보고, 아 이제 인간의 사물화 시대다 이런 생각이 든거죠. 그래서 인간을 사물화해서 만든 게, 중력 무중력 이런 시리즈예요.
그러다 보니까 당국에서는 이제 기가 막힌 거지... 그냥 그 첫 개인전 할 때 내 작품을 좋아하는 평론가가 당신 있는 그대로 현실을 그대로 기록했다 라고 평을 하면서 그런게 그런걸 자세히 설명하면 삼청교육대 간다, 막 그렇게 겁을 겁을 주면서 그냥 당신 철학, 당신 작품에 있는 철학만 자세히 얘기해라 라고 조언을 하더라고요.
실제로 종로경찰서 정보과에서 와서 작품 설명을 좀 해주세요 라고 하길래 그래서 내가 저거는 즉자태(卽自的 態度)과 대자태(對自的 態度), 즉 우리 자신의 즉자적 태도에 대해, 대자적 태도의 시선으로 즉자를 보는거다. 여기에 헤겔과 샤르트르의 현상학을 한참 떠들면 한 5분도 채 안 돼서 아이고 잘 알았습니다 하고 다 일어나는거에요. 그런데 그러면 또 종로경찰서에서 오고 또 동대문 경찰서에 다른 또 사람이 오고 참 전시할 때 곤욕을 치렀지요.
기자
정말 재미있는데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볼께요. 요즘에는 그럼 작품 활동하시면 어떤 작품을 또 구상하시고 실제로 제작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영원
제 작품이 사실 바탕은 서양 거잖아요. 그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하나의 구축적인 작품이거든요. 작품은 굉장히, 하나의 구조에 그냥 이렇게 갇혀야 돼요. 그래서 근육 하나 피부 하나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그 범주 내에서 해야 되기 때문에 그 틀이 있어요. 그냥 그걸 계속하니까 이제 내 체질에 안 맞는 거예요. 갑갑했는데 그래도 그걸 한 10년 동안 했지요 했는데 87년도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화 선언을 했습니다. 그래 억눌렀던 자유가 한꺼번에 폭발을 한 거지요. 그러고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에 막 갈등이 증폭되어 쓰나미처럼 밀려와 우리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노동자들은 사장을 거인에 매달아 난리를 치고 학생들이 교수들 청문회 한다고 책상에다 운동장에 내놓고 그냥 학생들이 교수를 심문했어요. 그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구조가 산산조각 난 걸 보고 나도 이것이 역사 발전의 하나의 통과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지요.
이 참에 내 작품도 파편화시켜서 해체시키자 나를 해체시키자 그래서 제가 만든 작품을 집어 던져서 깨뜨려서 파편 가지고 얼기설기 이렇게 조립해서 뭐 거기 복원이니 탄생이니 공화국이니 이런 작품을 만들었으니까 그러니 또 정권에서는 전부 다 이제 아예 난리 난 거지. 근데 작품을 잘 만들어서 그걸 깨뜨리다 보니까 내 몸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힘들어서 드러누워 있는데 내 친구가 '너 이러면 큰일 난다' 몸부터 추스려야지 하고 소개해 준 게 기공명상센터예요. 그래서 거기 가서 기공(氣功)을 배우는데 그러니까 조금씩 몸이 회복되더라고요. 그 이후에는 인체 조각을 만드는데 손이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선생님한테 내가 좀 아까 내 손이 안 간다 했더니 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보세요 라고 하길래 그때 다시 나를 바꿨죠. 기둥을 만들어서 흙 기둥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서니까 막 내가 춤을 추면서 그냥 막 할퀴고 뭉개고 치고 그러는 거예요. 그냥 그러면서 흔적을 내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인체조각을 못 하고 이제 기(氣) 연구를 시작한 거지요.
그런데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전시에서 제가 직접 그걸 시연하니까 오히려 그 당시에 따라갔던 평론가들이 기가 무슨 작품이냐 창피하게 라면서 외면해버린거에요. 우리가 우리 거를 개발해야지 뉴욕이나 외국에서 미니멀이라며 사조를 갖고 나오면 그거 그냥 따라 하면 좋다고 막 치켜올려주고 우리 시도는 폄하해 버리는 그런 식민사관이 아예 나를 갖다가 묻어버렸지요.
그게 1994년도예요.
기가 내가 우주의 생명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기를 내가 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배웠으니까. 그 기가 내 몸에서 돌면서 내 몸을 움직이는데 내가 의식적으로 내가 움직여서 움직인 게 아니라 기운이 움직이는 것, 내 몸이 하나의 기가 지나는 통로다 이거죠. 그러면서 기가 움직인 몸짓을 하다가 흙이나 종이 위에다가 흔적을 남긴다. 이게 우리의, 동양의 무위사상(無爲思想) 노장의 무위사상 그대로예요. 근데 이것이 지금 현재 요즘 와서 그래요. 현대 미학에서는 그것이 저자의 소멸, 저자의 죽음, 그 예술의 민주화, 작가가 서야 할 자리를 비워주고, 거기에 관객이 자기 나름대로의 사유를 가지고 작품으로 각자 각자 만든다. 이거는 하나의 질문지다.
이런게 요즘 완전히 뜨거든요. 내가 그걸 94년도에 했는데 그러니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 작업을 지금 하고 있고 그 양식을 가지고 지금 하고 있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라는 명성으로 가려 그 식지 않는 열정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아직도 만족해 머무리지 않는 그 투지를 미처 알지 못 했다. 아니 어쩌면 '김영원'이라는 이름의 조각을 보는 이들 대부분이 이런 조각가 김영원 대신 브랜드로 남은 김영원 만을 보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짧은 시간, 스튜디오에서 길게도 이야기를 나눠 촬영스태프에게 구박도 받았지만 그래도 따로 시간을 잡기 힘든 조각가 김영원과 길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눈 소중한 기회였다. 언제나 작품이 아닌 그들의 삶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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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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