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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중규기자
 표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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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부산 안락동의 주택가를 한참 들어가다 보면 평범한 주택인 것 같은데, 다시 보면 주택은 분명히 아닌, 독특한 외양의 건물이 눈에 띈다. 저녁 시간이라 회청색으로 보이는 외관은 단순하면서도 견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듯 하지만 입구에서 담으로, 또 투명하게 내부가 비치는 대문으로 자신을 엿보이며 소통을 차단하지는 않는 묘한 균형을 보여주었다. 갤러리 ‘하우스 오브 알파(House of Ahlhah, A hand looking for a hand-손을 찾는 손이라는 의미라는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저 alpha로 생각했다)’에 전시된 이현승 공예가의 작품은 바로 이 건물의 느낌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그리고 작품 뿐 아니라 작가도 묘하게 닮아있었다. 기자 제가 방금 작품들을 좀 보고 왔는데 굉장히 겉보기에는 묵직해 보이던데 실제로 들어보니까 굉장히 가볍네요. 재료를 뭘로 하셨길래 저렇게 나오는 거죠? 이현승 공예가 (이하 이현승) 저게 건칠이라는 작업인데 기본이 되는 재료는 삼베에요. 그 위에 옻을 여러 번 바르고, 말리고, 다시 바르고… 그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형태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무겁고 단단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삼베와 옻칠의 덩어리라고 할까요. 제가 대학 때 처음 옻칠을 접했는데, 그때부터 이런 반복적인 작업이 이상하게 잘 맞았어요. 겉으로 보면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는데,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형태가 스스로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방식에 오래 머물게 됐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는 아예 옻칠 작업에 집중하게 됐죠. (웃음) 기자 아니, 목칠이나 도자를 전공으로 하셨는데 왜 갑자기 옻칠 쪽으로 방향을 트셨죠? 이현승 옻칠 작품은 제작 과정이 갈고 닦고 갈고 닦고 하면서 아주 지루한 작업일 수도 있는데 그 지루한 작업이 저한테 적성에 딱 맞았어요. 제가 지구력이라 해야되나 그런 것들이 조금 다른 사람들보다는 있는 편인지 끈질기게 이걸 어떻게 해서든지 완성해야 된다라는 그런 성격이 있더라구요. 갈고 닦고를 반복 하는게 굉장히 지루한 작업이지만 그 작업 속에서 마침내 결과물이 생기잖아요. 그 결과물을 보게 되면 엄청난 진짜 보상이 주어지는 느낌, 그 결과에 대한 성취감 그것이 이제 또 저한테는 매력으로 다가와서 옻칠작업을 40년째 계속하게 된 것 같아요. 기자 그렇군요. 그런데 예술의 측면이 아닌 실용의 측면에서, 옻칠을 한 가구나 물품의 장점이 정확히 뭔가요? 예전에 항균작용 같은건 본것 같긴 한데... 이현승 말씀하신 대로, 무엇보다 정말 항균성이 최고입니다. (하하). 제가 여름철에 옻칠 밥그릇에 밥을 담아 뚜껑을 덮어두곤 하는데, 여름에도 밥이 잘 쉬지 않더라구요. 어떤 분들은 옻칠한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면 맛이 부드러워진다고 하시기도 했어요. 또 하나는 강도입니다. 천연 도료 가운데서는 굉장히 단단한 편이에요. 실제로 이 공간을 리모델링할 때 계단이나 테이블, 마루까지 모두 옻칠로 마감했는데, 인테리어 전문가분이 만져보시더니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다”고 놀라시더라고요. 화학 도료는 손가락으로 누르면 표면이 쑥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옻칠은 표면이 굉장히 견고하다고 했어요. 또, 습기나 곰팡이에도 강해서, 오래 쓰는 생활용품으로는 정말 매력적인 재료라고 생각해요. 하우스 오브 알파 내부 인테리어 사진
하우스 오브 알파 내부 인테리어 사진
기자 저는 사실 안에 있는 작품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작가님은 옻칠작가라는 말 대신 ‘공예가’라는 표현에 상당히 자부심을 갖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공예가다 나는 공예가다 이렇게 하시게 된 어떤 계기나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는 어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있으신건가요? 이현승 저는 기본적으로 공예가라는 말이 더 편해요. 회화적인 작업도 하긴 하지만, 그 안에도 늘 공예적인 감각이 함께 들어가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평면보다는 손으로 만지고 형태를 만드는 일을 더 좋아했어요. 진정한 공예는 ‘용(用)’과 ‘미(美)’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진정한 공예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저는 작업을 하면서 그 속에서 ‘용’, 즉 쓰임새는 물론이고 거기에 ‘미’를 더 할 수 있다는 점에 흥미와 의욕을 느낍니다. 회화나 다른 예술영역은 그냥 보는 것 자체가 용이 될 수도 있지만, 공예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같이 부대끼면서 쓸 수 있어야 용의 의미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쓸 수 있는 걸 만들고 싶었고 그게 좋았어요. 누구나 부담 없이 쓰고, 생활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요. 그런 걸 생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는 공예가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자 근데 아까 그 작품들, 건칠 기법으로 만드신 이런 그릇 같은건 방금 말씀하신 대로 실용적인 그릇이나 뭐 이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은 그 안에서 공예가로서의 어떤 다른 형태의, 발전 아니면 전환 이런 걸 추구하고 계신건가요? 이현승 전환이라기보다는 예술이 공예부터 시작되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원시 인류가) 뭔가 물을 먹어야 하는데 물을 먹을 그릇이 없잖아요. 제일 처음에는 손으로 먹었겠지만 결국에는 뭔가 용기가 있어야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토기도 만들었을 거고, 그러다 보면서 형태도 발전하고 기술도 발전하면서 공예가 된 거라고 봐요 . 사실 어떤 때는 저도 두 마음이 있는 거죠. 어떤 때는 그냥 아름다운 것, ‘미’를 주로 추구하기도 하는데 또 어떤 때는 ‘용’적인 것도 해보고 싶고, 마음속에 두 가지 욕심이 다 있어서 그런 작품들이 나오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요. (하하) 나전기법을 사용한 건칠 작품 사진
나전기법을 사용한 건칠 작품 사진
기자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작가님 작품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전통적인 옻칠 공예와는 상당히 달라보이거든요. 특히 이 발우 같은 것도 재해석하셨다고 되어 있고... 이런 재해석은 기존 전통 공예와는 좀 결이 다른데 그렇게 기존 전통에서 벗어나셨다 떨어져 나왔다 라고 스스로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이현승 음... 저는 사실은 기존 전통 공예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공예는 어쨌든 그 기존 공예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발전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 해요. 그래서 저는 전통을 무시하기 보다는 전통 속에서 제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나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하) 제가 요즘도 박물관이나 이런 데 잘 가거든요. 가서 보면 유물들이 너무 멋져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작품들은 어떻게 보면 옛날의 그 방법을 그냥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럴 때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해요. 내가 열심히 작업하고 또 내 나름대로 구상해서 작업을 했는데, 막상 박물관에 가 보면 이미 그런 작품이 있으니까 그럴 때는 조금 힘이 빠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 전통 속에서 저 스스로도 ‘나의 것’을 찾고 싶고, 또 현대의 사람들이 뭔가 좋아하는 그런 걸 만들고 좋아하게끔 하고 싶어서, 그래서 제가 그런 것들을 위해 발전을 해나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그렇군요. 그런 발전을 위한 변화 가운데 하나가 다양한 건칠기법의 발우나 찻잔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런 기법 자체는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법 아닙니까? 그러면 그 외에 혹시 건칠 외에 좀 새롭게 기법상의 어떤 도전도 그럼 해보실 것 같은데....? 이현승 저는 일본 도쿄예술대학에서 유학을 했는데 사실 거기는 전통의 권위가 굉장히 강하거든요. 일본이 아무래도 조금 그런데, 그 속에서도 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었어요. 제가 어떻게 보면 좀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지만 일본 사람들이 어쩌면 구태의연한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어요 (웃음). 그래서 저기서 재료라든지 이런걸 조금만 발전시키면 또 다른 칠공예가 나올 것 같는데 왜 저 사람들은 맨날 저걸 답습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좀 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재료적인 측면에서 좀 다시 한 번 다가가야 되겠다라는 생각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사이잘(sisal)이라는 천연섬유를 사용하게 됐어요. 제가 건칠 기법을 계속 연구하는 과정에서 석고 모형을 뜨게 됐어요. 석고형을 뜨기 위해 석고틀을 튼튼하게 하는 재료로 일본에서는 사이잘을 많이 썼는데 저는 그 재료를 딱 보는 순간 ‘어.. 이거 뭔가 되겠다’ 라는 생각에서 틈틈이 나름대로 실험을 해봤어요. 근데 ‘이거 되겠다’ 라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가서 새로운 장을 한번 열어봐야지 라고 생각했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게 됐어요 그게 한 1995년 정도 였던거 같아요. 사이잘 작품 사진
사이잘 작품 사진
기자 그러면 그때부터 30년을 계속 사이잘로 작업하신거에요? 이현승 아 아니에요. 사이잘 작업은 유학 마치고 한국 돌아오자마자 한 작업이에요. 그러면서 간간이 생각날 때마다 그 형태라든지 방식이라든지 이런 걸 생각하면서 다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또다른 작업을 하는 식으로 이어갔지요. 사실 사이잘로 작업을 하고 난 뒤에 한동안은 ‘가죽’을 가지고 또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가죽에 옻칠을 하는 작업을 칠피(漆皮)라고 해요. 칠피 작업을 할 때는 그것에 심취해 다양한 디자인의 브로치를 다량으로 만들어낼 때도 있었구요. 그 재료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는 이런 작업을 하면 재미있겠다, 저건 저게 재미있겠다 하면서 작업을 다양화시키는 것인데 어떤 때는 나무로도 하고 그런 식으로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연구를 해요. 실을 활용한 작업도 해왔어요. 면실을 계속 감아가며 형태를 만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하게 굳어 하나의 구조가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발우 같은 형태를 만들기도 했죠. 또 종이를 재료로 삼아 작업하기도 하는데, 이걸 ‘지태(紙胎)’라고 불러요. 말 그대로 종이가 형태의 바탕이 되는 방식이에요. 이렇게 재료마다 가진 성질을 살피면서, 제가 하고싶은 작업에 대입해보고 있습니다. 발우 작품 사진
발우 작품 사진
기자 작가님은 굉장히 지금도 작업이 정말 재미가 있으신가봐요. 지금 이것저것 설명해 주시는데 너무 재미있어 하신다는 게 막 느껴져요. 이현승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요. 솔직히 말하면, 옻칠공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느껴요. 기법이나 재료, 형태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업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저는 옻칠공예만큼은, 죽을 때까지 해도 다 해보지 못할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그러면 요즈음 꽂히신 작업이나 재료는 어떤건가요? 이현승 요즘에는 벽면에 작은 조각처럼 나뉜 작업들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요. 작업을 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남겨지는 흔적들이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그저 과정의 일부였던 것들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예상보다 훨씬 흥미로운 표정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것들을 조금씩 다듬고 배열하다 보면, 어떤 것은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인물의 인상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의도와 우연 사이에서 생겨나는 이런 결과들이 재미있어서, 요즘은 그 가능성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옻칠 천 작품 사진
옻칠 천 작품 사진
기자 근데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술성과 실용성이라고 해야되나 생산성, 정말 공예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거 균형을 맞추기가 되게 어려울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맞추고 계십니까? 이현승 요즘은 예술기획사 알파콜렉티브와 함께,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공예품을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들이 벌써 2~3년이 되었고, 지금은 ‘크래프트 나비’라는 브랜드로 제품화해 판매하고 있어요. 제품화 작업은 혼자 할 때도 있지만, 제자들이나 여러 장인분들과 협업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나전칠기나 자개 가구를 오래 다뤄오신 장인분들이 아직 현장에 계시거든요. 연세는 제법 있으시지만, 손의 감각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섬세합니다. 제품은 수량이 많잖아요. 그런 정교한 자개 작업까지 혼자 다 해내기는 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자문을 구하고 함께 의논하면서 작업을 진행해요. 제 디자인을 바탕으로 자개가 자연스럽게 포인트가 되도록 조율하고, 전통 기법의 우수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는 방식이죠. 그런 협업 과정에서 저 역시 많이 배우고, 작업의 깊이도 더해진다고 느껴요! 자개 작품 사진
자개 작품 사진
기자 그러면 앞으로 새로 내가 이거 해보고 싶다 이런 건 생각하고 있는게 있으신가요? 2026년 계획이라든지 아니면 앞으로 내가 앞으로 10년은 내가 이거 해보겠다 이런 거? 이현승 저는 이제 다시 평면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벽면 작업이라면 이제 벽걸이식으로 되는 거예요. 보고 계신 작품은 건칠이지만 약간 부조적인 느낌도 나거든요. 근데 이제 아예 판넬 작업이라든지 캔버스처럼. 이런 식으로 회화적인 방향으로 하면서도 공예적인 것도 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고 또 감상하시는 분들도 그런 작품을 선호하는거 같아요. 건칠 평면작업 사진
건칠 평면작업 사진
기자 선호한다는 게 주로 이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 취향을 말씀하실텐데 주로 어떤 분들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예를 들어 나이대가 좀 더 다양해지고 있다든지 아니면 젊은 친구들도 관심이 있다든지 이런 변화가 좀 있을 것 같아요. 이현승 음... 솔직히 이게 공이 많이 들기 때문에 고가예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젊은이들이 제품을 사고 싶어도 어떤 때는 못 살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넘기 위해 생각해서 한 게 이제 크래프트 나비에서 생산하는 것들, 그리고 쓸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비싸게 느껴지더라도 저건 나만의 것을 갖고 싶다 하는 젊은이들이 그런 작품들을 구매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컵이라든지 진짜 쓸 수 있는, 플레이팅도마나, 머그컵, 에스프레소잔, 수저 세트 등을 생산하고 있는거에요. 젊은 층들을 위한 옻칠의 변신인 셈이죠. 크래프트 나비 상품 사진 예를 들어, 이 플레이팅 도마 같은 경우도 양면으로 쓸 수 있게 만든 것인데 우리나라 전통 떡살 문양을 넣은거에요. 떡살 문양 중 한 부분, 나비하고 포도인데 부귀영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포인트로 이 자개문양을 붙이고 옻칠을 한 뒤에 마감하는 나전기법으로 새롭게 만들어 젊은 층들의 취향을 끌어들이는거죠. 크래프트 나비 상품 사진
크래프트 나비 상품 사진
기자 그게 옻칠공예에 대한 저변을 더 확산시키기 위한 방향이기도 하겠네요? 이현승 그렇죠. 사실 제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 30여년 했는데, 사실.. 공예를 하는 학생들이 솔직히 말씀드리면 돈이랑 잘 연결 되지는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고 살다 보면 다 손을 놓게 되더라고요. 그게 참 안타까웠는데, 요즘은 의외로 K-컬처 라고 해서 이런 전통문양, 전통공예들이 다시 뜨기 시작하잖아요. 그러니까 저에게 문의도 예전보다 많이 와요. 그래서 이제는 일반인 상대로 강의를 해서 전통공예가 가진 문화로서의 가치를 좀 더 알리면, 사회적인 인식도 좀 더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 보면 젊은이보다는 이제 퇴직하신 분들, 적당히 연세가 있는 분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과 함께 작업하면 또 제가 모르는 분야를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고요. 예를 들어 이번에 이 공간을 리모델링하면서 옻칠을 접목시키고 전통공예를 활용하는 방식을 시도해봤는데 너무 느낌이 좋고 다들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인테리어쪽으로도 확장시켜봐도 좋을것 같고... 2026년도 쉴 틈이 없이 바쁠 것 같아요 (하하) 마치 10대 아이들이 걸그룹이나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도 모르게 들떠서 홍조를 띠며 어디서 저렇게 열정이 솟아날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를 쏟아낼 때가 있다. 벌써 30년이상,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뀌도록 옻칠작업에만 전념해왔다는데 아직도 옻칠에 대해서는 말이 끊길 틈이 없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할 것도 많다는 이현승 작가를 보면서 가끔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또 가끔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것보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편하지, 좋은게 좋은거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나 자신을 조금은 반성하게 되었다. 지난한 시간을 쌓아야하는 건칠기법으로 자신의 예술을 한겹씩 쌓아가지만 나는 예술가보다는 공예가다 라고 이야기하는 그 자부심이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쌓아올린 또 하나의 건칠작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무거울 듯 가벼운 옻칠 찻잔에 하우스 오브 알파의 밤을 담아 기울였다. 이현승 작가 프로필 사진
이현승 작가 프로필 사진
2026.01.05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 우주를 逍遙하는 토끼· 작가 김남진

대학원 시절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건 소요학파(逍遙學派)였다. 대체로 공부는 플라톤이나 루크레티우스여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많이 논하지는 않았지만 거닐며 노닌다는 그 단어, ‘소요’라는 말이 가지는 향기가 너무 좋아 항상 소요학파를 깊이 있게 기억하게 됐다. 그런데 이런 향기로운 산책을 우주에서 하는 그림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것도 사람이 아닌 토끼가. 이런 놀라움은 이런 발칙한 그림을 그린 독특한 상상력의 작가를 직접 만났을 때, 또 한번 더 커졌다. 기자 : 사실은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젊고 톡톡 튀는 작가의 작품일거다라고 생각했는데 김 작가님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김남진 작가(이하 김남진) : 하하, 제가 아직은 60대입니다(김남진 작가는 정확히 59년생, 그러니까 돼지띠인 67세였다.) 기자 : 아 실례했습니다. 이 토끼가 사실은 너무 어리고 톡톡 튀는 것 같아서 당연히 굉장히 젊은 작가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김작가님은 계속 토끼를, 이렇게 젊은 토끼, 어린 토끼를 그려오신 건가요? 김남진 : 그건 아닙니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왔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진지하고 조금은 사색적인, 묵직한 작업들을 해왔습니다. 이 토끼 캐릭터는 30년 전, 제가 30대 중반쯤에 우연히 귀 끝이 뭉툭하고 팔다리 길이가 거의 같은 이 캐릭터가 나와서 한 7점 정도 제작했습니다. 당시 제일 큰 게 한 50호 하나 하고 소품들이 한 6개 정도 해서 7점이면 그렇게 많지는 않았죠. 김남진, 무제, 32.5x16.5x5cm, 나무 위에 혼합재료, 1996
김남진, 무제, 32.5x16.5x5cm, 나무 위에 혼합재료, 1996
그런데 그 당시에 뱃놀이라는 연작 작업도 했었는데, 보트 위에 실루엣만 있는 두 사람이 노를 저어 항해하는 형태로 90년대 중반에는 이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의 선호를 받았어요. 반면에 이 토끼 캐릭터는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반응을 얻지 못했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캐릭터였죠. 저는 유학 후에도 2002년에 혼자 독일에 다시 가서 1년 정도 재충전하면서 드릴 작업을 시작했고, 나무판에 드릴 작업을 하고 거기에 아크릴 물감이라든지 피그먼트, 안료 같은 걸로 작업하고 다시 닦아내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주제면으로는 여러 가지 사회적 풍경 시리즈를 거쳐 사피언스 시리즈라는 인간에 대한 시리즈 다음에 간 게 문명 시리즈였습니다. 김남진, 문명4 (Civilization IV), 366x244x9cm, 나무패널 위에 안료채색, 2021
김남진, 문명4 (Civilization IV), 366x244x9cm, 나무패널 위에 안료채색, 2021
문명 시리즈는 어찌 보면 진지함의 끝인데 인문학적인 소양을 이야기하는 그런 작품들 끝까지 가보니까 아 정말 이제는 어떻게 풀어야 될지 좀 막연했어요. 저의 문명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에는 우주로 올라가는 우주선 같은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사실은 우주선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핵물질 그러니까 핵폭탄의 가장 요약된, 단순화시킨 그런 형태거든요. 제가 담고자 했던 건 ‘우리가 기술을 발전시켜서 이 우주선같이 우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핵폭탄처럼 공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우주, 마지막 문명 작업을 하면서 나온 게 이 토끼였어요. 김남진, 문명5 (Civilization V), 366x244x9cm, 나무패널 위에 혼합재료, 2022
김남진, 문명5 (Civilization V), 366x244x9cm, 나무패널 위에 혼합재료, 2022
기자 : 지구의 멸망, 문명의 멸망에 나온 게 토끼였던건가요? 김남진 : 문명의 끝까지 추구한 작품의 새로운 장이 갑자기 토끼와 우주가 결합되는 그런 형태가 되더라고요. 왜 하필 토끼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 캐릭터가 되돌아오게 됐어요. 물론 그전부터 술 취한 토끼, 끌려가는 토끼도 몇 번 그렸는데 묘하게 그때 다시 토끼가 이렇게 등장하더라고요. 김남진, 무제, 91x117cm, 나무패널 위에 안료채색, 2022
김남진, 무제, 91x117cm, 나무패널 위에 안료채색, 2022
기자 : 술에 취한 그 토끼도 지금 같은 우주 토끼였나요? 김남진 : 그때는 우주 토끼라기보다는 다시 토끼를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확 올라오는데, 하지만 술 취한 토끼는 예전의 토끼와는 또 많이 달랐어요. 그러다가 아까 이야기했던 그 문명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과 조합되면서 우주 토끼가 되어버린 겁니다. 30대 때 처음 나온 토끼를 발전시키지 않은 이유도 캐릭터는 재미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배경 처리를 하면서 어떻게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될지가 막연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더 이상 발전할 동력을 찾지 못해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것이, 우주라는 주제와 토끼가 다시 같이 만나면서 우주 토끼가 툭 튀어나온 겁니다. 기자 : 거의 30년 만에 우주에서 돌아온 토끼인 셈이네요. 그런데 또 하나 이 토끼를 보면 궁금한 게 가만히 앉아 있거나 평화롭게 쉬고 있는 토끼의 이미지는 거의 없이 우주를 유영하고 있다?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 나간다? 이런 이미지인 것 같은데 이건 일부러 그렇게 그리시는 건가요? 김남진 : 예 맞습니다. 우주 속에서, 팽창을 해나가는 행성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데 그 안에서 멈추지 않고 출발하려는 토끼를 그린 게 맞아요. 처음에 시작한 게 뛰어오르는, 도약하는 토끼의 형상이었는데 휴식하는 토끼도 되고 팔 벌리는 토끼도 나오고 이제 도약하려고 나는 토끼로 조금씩 변형해 나가고 있어요. 사실 이 토끼의 형상은 드로잉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우연히 ‘이 형태가 재밌는데?’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 귀를 그리고 그다음에 팔을 그리고 다리를 그리고 했는데 이 길이와 형태가 거의 똑같았어요. 귀도 똑같고 팔다리도 똑같고 끝은 뭉툭하고 그런 식으로 이 토끼 드로잉이 저절로 나온 거예요. 이게 굉장히 “재밌는데”에서 출발했어요. 그러나 이 캐릭터를 90년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시대가 안 맞았던 거죠. 이제 지금에 와서 이 캐릭터가 사람들한테 재미있게 와닿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 거예요. 김남진, 우주토끼, 나무패널 위에 안료채색, 91x73cm, 2023
김남진, 우주토끼, 나무패널 위에 안료채색, 91x73cm, 2023
기자 : 정말 요즘 시대와 딱 맞는 거 같아요. 특히 젊은 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어떤가요? 김남진 : 반응이 좋죠. 20대 30대 친구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이게 형태가 단순하니까, 사실적인 게 아니고 굉장히 단순한데 명시성이 굉장히 높아요. 특히 푸른 바탕에 흰 토끼가 딱 들어서면 이게 눈에 확 들어오거든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한테 각인되는 효과가 굉장히 강하고요. 2년 전에 전시할 때, 작가와의 대화에서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작가님 그때 1990년대에 이 우주 토끼가 안 나온 게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묵혀 놨다가 지금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관점이나 안목들이 정말 매섭구나,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말씀하신다고 느꼈죠. 그리고 또 한 분은 젊은 작가들도 토끼를 많이 그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20, 30대가 그리는 그림들은 좀 귀엽고 예쁜 토끼로 그리는데, 이 우주 토끼는 그렇지도 않고 뭔가 묵직한 게 있다는 거죠. 텍스쳐라든지, 캔버스라도 유화로 그리기 때문에 그런 다른 느낌을 가지는 것 같아요. 기자 : 안 그래도 질감, 텍스쳐(texture) 이야기를 하셨는데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 외에도 저기 거친 질감의 부조 같은 느낌도 있고 다른 작업들이 많아요. 혹시 또 다른 형태의 변화도 생각하고 계신 게 있나요? 김남진: 제가 종이 작업이라든지 캔버스 작업, 아니면 드릴로 이렇게 나무 표면을 깎아서 작업하는 걸 다양하게 하고 있는데 사실 설치 작업도 많이 해봤어요. 근데 3차원적인 조각이라는 분야에는 아직 못 들어갔거든요. 그 이유는 조각은 제가 직접적으로 다루어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지금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될지도 앞으로의 숙제죠.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위해서도 이 우주 토끼 시리즈를 조금 길게 하고 싶어요. 제가 예전에는 거의 1년에 한 번씩 시리즈가 바뀌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우주 토끼 시리즈는 좀 길게 해보고 싶어요. 지난번, 재작년 개인전의 주제가 우주 토끼 출현이었다면 이번 전시의 주제는 이 토끼들이 이제 우주를 개척하면서 넓게 퍼져나가는 팽창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래서 코라(Co Ra)라는 이름도 지어줬고, 관람자들이 참여해서 벽면에 행성을 붙이며 자기만의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보는 이벤트를 마련한 게 특징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어요. (좌) 김남진_우주토끼_61x50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4/(우)김남진_우주토끼_61x50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5
(좌) 김남진_우주토끼_61x50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4 / (우) 김남진_우주토끼_61x50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5
(좌) 김남진_우주토끼-코라_39.5x27cm_종이위에 아크릴릭, 오일파스텔_2025/(우) 김남진_우주토끼-코라_39.5x27cm_종이위에 아크릴릭, 오일파스텔_2025
(좌) 김남진_우주토끼-코라_39.5x27cm_종이위에 아크릴릭, 오일파스텔_2025/(우) 김남진_우주토끼-코라_39.5x27cm_종이위에 아크릴릭, 오일파스텔_2025
기자 : 그렇군요. 이런 코라의 탄생에는 그전부터 쌓아온 내공이 많이 녹아 있을텐데요. 예전에 독일에서 개념미술 공부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혹시 독일에서의 그런 시간이 코라에 영향을 미쳤나요? 김남진 :음 제가 독일 가기전부터 개념미술 작업들을 잡다하게 많이 했었습니다. 독일 가기 전에 저는 82년쯤에 조종두라고 판토마임 하는 친구와 개념미술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둘이 죽이 잘 맞아 가지고 ‘우리 메시지 작업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엽서로 우리가 메시지를 일단 평론가들한테 띄우는 작업을 했어요. 엽서 크기, 1982
엽서 크기, 1982
김남진 조종두의 삶을 ‘삶의 확인 작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가지고 조종두는 장소성을 표현하고 저는 시간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한 거죠. 조종두는 해운대 물에 들어가서 찍은 흑백 사진을 갖고 해운대라는 장소성을 상징했고 저는 활자로 ‘1982년 2월 28일 김남진 살아 있음‘ 이런 타이핑을 그냥 찍어서 이 두 개를 갖다가 동시에 사람들한테 보냈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 하늘에 별이 항상 있는데 우리가 정작 너무 바쁘니까 이 하늘에 별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냥 살아 있다는 걸 한번 확인해 보자, 뭔가 다른 거 없지 않나 이래서 둘이 했는데, 이 친구가 마임을 하다가 또 특이하게 스님이 된다고 절에 들어가 버렸어요. 그래도 저 혼자라도 매년 하게 됐는데 또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학사 장교를 갔거든요. 겁도 없이 소위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으로 사진을 찍어서 1983년 몇 월 며칠 김남진 살아있음이라고 보냈는데 이게 일부가 주소 불명이라 우체국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었으니 우체국에서 보고는 이상해서 신고했고 제가 보안사에 잡혀갔어요. 보안사에서 조사를 해도 아무 잡힐 게 없었지만 그 이후로 계속 감찰을 하더라고요. 사실 그 뒤부터 겁이 나서 그 길로 메시지 작업을 끝내버렸어요. 제대한 이후 85년도에 첫 개인전 할 때 다시 ‘우리 모두 같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 봅시다’ 하면서 설치 작업을 했어요. 설치 작업을 뭘로 했냐면 제가 전역할 때 화천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잘라 와서 그걸 전부 실로 묶어서 설치하는 작업,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는 그런 작업을 했거든요. 그런 설치 작업을 하다가 독일에 가게 되면서 평면 작업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 거죠. 기자 : 예술작업을 하시다 보안사까지 가셨군요. 험난한 예술인생이셨습니다.하하. 그다음에 독일 가신 건 석사? 아니면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서였나요? 김남진 :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뒤셀도르프는 시스템이 좀 달라요. 미국식 시스템이 아니고 거기는 쿤스트 아카데미 그러니까 국립 예술 대학이죠. 거기에 들어가면 두 학기는 우리 한국에서 말하는 예과에서 다니게 하는데 8시에 학교 가면 4시에 끝나요. 교수 한 분이 있고 강사들만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중간에 두 차례 유급/진급 평가를 해서 3학기 때 교수를 찾아가게 하거든요. 10여 학기 정도까지 그 교수한테 배우고 그 교수가 이제 이 학생은 어느 정도 작가로서 완전히 컸다 했을 때 마이스터 슐러를 줍니다. 그러면 한 2년 정도 더 거기서 공부하고 완전히 졸업을 하는 시스템이예요. 그래서 학사 석사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묶어 놔서 보통 한 13학기에서 16학기까지 이렇게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한 5,6년, 7년까지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한국이나 미국의 학기 개념하고는 조금 다른데 저는 운 좋게 입학 때 8학기를 인정받았고, 한 5년 정도 있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게 됐죠. 기자 : 그런 독일에서의 시간들도 다 이 우주토끼에 녹아있는 거네요. 그럼 다시 토끼에 초점을 맞춰볼까요? 이번 팽창하는 토끼 다음에는 어떤 우주토끼가 나올 계획인가요? (좌) 김남진_우주토끼_91x73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5/(우) 김남진_우주토끼_73x91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5
(좌) 김남진_우주토끼_91x73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5/(우) 김남진_우주토끼_73x91cm_나무패널위에 안료채색_2025
김남진 :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 어디서 영감을 받았냐면 ‘비행하는 물체가 굉장히 빨리 날아가게 되거나 빛의 속도로 가게 되면은 시간이 정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번뜩 영감이 온 거예요. 그렇다면 우주 토끼도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어느 지점에 갔을 때 시간의 지평선 혹은 시간의 블랙홀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 찰나에 우주 토끼가 딱 걸리면은...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 작품을 한 거거든요. 이제 이 작품에서 팽창하던 우주 토끼가 시간의 지평선마저 지나가는 순간이 한 점 딱 나온 거고 앞으로도 고민을 많이 할 거예요. 저는 내년쯤이나 꼭 미국을 가고 싶어요. 우리 딸하고 내년에 뉴욕을 꼭 가자고 약속을 했어요. 뉴욕하고 주변 위주로 미국으로 한번 가서 새로운 에너지를 좀 얻고 나면 또 새로운 느낌이 오겠죠.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된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 궁금하고 더 기대가 되는 거죠. 기자 : 이번에는 뉴욕에서 영감을 얻은 우주토끼가 나오겠네요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한거 여쭤볼께요. 여기 우주 토끼가 저 소품부터 500호 정도 대작까지 전시돼있는데 사실은 이 우주 토끼가 굉장히 친근감 있고 그렇잖아요. 그러면은 우리 젊은 친구들은 다른 형태의 굿즈라든지 아니면 요즘 어린애들 하는 키링이라든지 여러 형태의 작품들도 요구하거나 시도해보실텐데 그런건 안 하실건가요? 김남진 : 아직은 없는데 사실 우리 딸이 이런 걸 좋아해요. 제가 지금 작업실이 있는 울산에 <거리이음>이라고 복합문화공간을 갖고 있는데 우리 딸이랑 둘이 운영하고 있거든요. 딸이 지금 울산시청에서 시간 선택제로 일을 하는데 그건 겸업이 돼요. 시청에서 일을 하면서 <거리이음>이라는 복합문화공간 대표로서도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동네가 상북면 거리인데 우리 집하고 작업실에서 얼마 안 떨어졌습니다. 옛날에 마을 회관이었는데 지금은 안 쓰고 놀리고 있는 2층짜리 건물을 연세를 주고 빌린 거에요. 밑에는 전시장으로 꾸미고 위에는 교육장으로 사용하면서 로컬크리에이터 일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는 굿즈 같은 거 만든 게 조금 있어요. 저번에 전시했던 우주토끼를 갖다가 여러 가지로 굿즈들을 만들어 봤어요. 딸과 저도 그런 굿즈 같은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 보고 있어요. 앞으로 그런 것도 같이 병행돼야 되지 않나 그 정도 생각하고 있는거죠. 김남진 프로필 사진
김남진 프로필 사진
어떻게 보면 반세기 넘는 작품인생의 내공이 그대로 담긴 듯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 가장 트렌디한 작품의 정석같기도 한 <우주토끼>는 그 작품만큼이나 어떻게 보면 가장 실험적인 젊은 작가인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반로환동(反老还童)처럼,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처럼 작품만이 자신의 세계에 남은 작가인듯도 한 김남진 작가의 손길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제 우주를 넘어 차원을 넘나드는 그 다음 우주토끼의 행보는 2026년 그의 뉴욕행에서 그가 무엇을 거둬들여오는가에 달려있는 듯 하다. 조금 더 기꺼이 기다려 볼 일이다. <약력> 김남진 KIM NAM JIN ㆍ부산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ㆍ독일 뒤셀도르프 국립예술대학 졸업 ㆍ마이스터슐러 과정 졸업 ㆍ경성대학교 대학원 문화기획ㆍ행정ㆍ이론학과 박사과정 졸업 <개인전> ㆍ2025 갤러리 아트숲, 부산 커넥트 현대, 부산 그 외 34회 <기획ㆍ단체전> ㆍ2024 김남진ㆍ정광화 2인전, 갤러리 아트숲, 부산 ㆍ2022 “부기우기 미술관”전, 울산시립미술관, 울산 그 외 250여 회 <수상> ㆍ2021 제17회 송혜수미술상 ㆍ2011 제23회 봉생문화상(전시부문) ㆍ2006 제5회 오늘의 작가상 본상 <주요 작품 소장처> ㆍ성곡미술관, 서울 ㆍ부산시립미술관, 부산 ㆍ울산시립미술관, 울산 ㆍ삼성의료원, 서울 ㆍ인천지방검찰청, 인천 ㆍ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과천 ㆍ파라다이스 호텔, 부산 ㆍ현대해상 사옥, 부산 ㆍ부산대학병원, 부산
2025.12.22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부산도시철도 2호선 남천역에서 내려 KBS 뒤편 도모헌 쪽으로 가다보니 커피숍 다다가 보인다. 웬지 노트북 켜놓고 도모헌으로 가는 나들이객들을 노곤하게 바라보며 오후의 한때를 즐겨야할 것 같은 느낌의 카페 바로 옆에는, 모르고 지나가다보면 눈에 띄기도 힘든 갤러리가 숨어있다. 누가 갤러리라고 말하지 않으면 예쁜 집이겠거니 싶은, 차를 몰고 왔다면 주차할 곳 찾는 것부터 고민해야할 것 같은 좁은 고갯길, 가파른 내리막길의 초입에 조그맣지만 단아한 화단에 정성을 기울였음이 한눈에 보이는 정갈한 나무와 풀들이 자리잡고 그 안내를 받아 따라가다 보면 그 느낌만큼이나 단아한 갤러리가 깔끔하게 등장한다. 이게 내가 비트리 갤러리를 처음 봤을 때 받은 느낌 그대로였고, 전시회를 찾아 몇 번 이곳을 방문하면서 때때로 마주한 정유선 대표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바닷속 종이정원’을 선보인 윤승희 작가의 전시를 보고 난 뒤 오랜만에 정유선 대표와 부담없는 커피 한잔을 나눌 수 있었다. 기자 방금 윤승희 작가님 작품을 봤는데 이번에 윤 작가님 작품을 선택하시게 된 어떤 계기가 특별히 있나요 아니면 평소에 그냥 윤 작가님을 좋아하셔서 전시회를 갖게 된건가요? 정유선 대표(이하 정유선) 둘 다에요 사실 저희 부산전시가 처음 시작부터 큰 흐름이 있어요. ‘현대인들의 무의식’에 대한 흐름이 전체적인 기획 의도에 깔려 있어요. 올해 부산 전시가 오피셜하게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김효선 선생님에 이어 윤승희 선생님 전시가 무의식의 어떤 흐름에 대한 얘기랍니다. 근데 그게 꼭 비단 저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인들, 요즘의 현대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라고 봐요. 저희도 그렇듯 사람들은 모두 다 사람 간의 관계들을 갖잖아요. 근데 이 사람 저 사람이 다르고 다 모두 다른 색을 갖고 있는데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약간 서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윤 선생님은 그런 이해받지 못한 인간 내면의 정원들을 상상해서 그리시는 건데 이제 그런 것들이 주제랑 맞아서 제 전시를 준비를 한 거고 사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작가님도 몇 차례 부산에 오셨었어요. 그리고 2022년도에는 저희 서울전에서 큰 전시를 하시기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그 후속편 격으로 <종이정원, 심연을 거닐다>를, 조금 더 깊은 얘기들을 끄집어내는 전시회를 이 부산 공간에 맞춰서 준비하게 된 거예요.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기자 아까 다른 분이 대표님과 ‘작품이 덜 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는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 들었어요. 저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혹시 어떤 걸 그렇게 표현하신건가요? 정유선 유화가 원래 약간 겹치는 느낌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물감을 계속 겹치면서 올라가는데 그러면서 약간 마른 느낌이 드는데 윤 작가님 작품에 나온 그 까만 색깔의 달이 유난이 반짝거려서 물어보니 오일 물감이 아닌 판화 잉크였어요.그래서 약간 반짝 반짝거리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마치 덜 마른 느낌이 든다라고 표현하신 거에요. 특히 판화잉크 자체가 원래 오일을 많이 먹고 있어요. 그래야 잉킹(기법에 따라 롤러나 천을 이용해 판에 잉크를 바르는 과정)을 할 때 그 롤러에 잉크가 잘 먹어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그 검정색 잉크 하나에도 종류가 되게 많아요. 그래서 조금 더 그런 느낌을 살리려고 판화 잉크를 쓰지 않으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작가님 동생분이 수목원에서 일을 하는데 깜깜한 밤에 수목원에서 나오는 길에 달빛이 비치니까 그 비침을 조금 더 강조하고 싶어서 판화잉크를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기자 그렇군요 판화쪽은 또 잘 모르다보니 하나 배워갑니다. 그런데 아까 부산 전시회의 큰 흐름이 무의식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서울전시회는 별도의 어떤 흐름이 따로 있는 건가요? 정유선 약간은 좀 달리 가기는 해요. 사실 저는 부산 출신이 아니거든요. 근데 부산을 좋아해서 여기에 비트리 부산점을 뜬금없이 오픈한 것도 있긴 한데, 전시를 하면서 사실 작년 전시까지도 부산이라고 해서 자체적인 큰 흐름은 없었어요. 근데 혼자 올해는 저 혼자만의 의식, 그러니까 올해는 이런 테마들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전시를 해야 겠다라고 이제 마음을 먹고 있는 거에요. 단지, 매번 전시를 기획하는게 어렵긴 하네요.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기자 저도 사실 서울에도 비트리 갤러리가 있다는걸 뒤늦게 알았는데 그게 참 신기했어요. 서울에 2019년 먼저 운영을 시작하고 부산은 2023년에 뒤늦게, 똑같은 이름의 갤러리를 문을 여셨던데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굉장히 궁금했어요. 정유선 제가 미술계에서 거의 한 15년 넘게 갤러리 큐레이터랑 갤러리스트 일을 진짜 오래 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미술계를 잠시 접으려고 떠나려고 했었거든요 너무 지쳐서요. 그러면서 조금 한 1년 쉬면서 이것 저것 다른 거를 배워봤어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말고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내가 너무 바보 같이 그림만 알고 살았나 싶어서 진짜 1년 동안 안 해봤던 거를 다양하게 많이 배웠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달았죠. 내가 지금 헤매고 있는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미술계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서 갤러리를 오픈하기로 결정했는데, 사실 처음에는 제가 부산에서 시작하려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해외를 조금 더 많이 진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굳이 서울이 아니여도 되겠다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먼저 좋은 계기가 생겨서 시작을 하게 되면서 비트리 서울갤러리가 먼저 문을 열었고, 비트리 부산점은 어렸을 때부터 ‘위에서 살면서, 일할 때는 내려와서 일하는’ 이런 공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현실로 이룬 곳이 부산점이랍니다.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사실 갤러리를 오픈하기 전까지 부산 남천동이라는 동네는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아는 분 때문에 이 동네로 우연히 왔다가 여기 황령산 올라가는 그 길에 햇살이 이렇게 쫙 내리 쬐는데 너무 기운이 좋은 거예요. 그러다가 이 집을 발견하게 되었고, 여기가 80년대 지어진 집이라서 박공 스타일(주:건축에서 경사진 지붕의 양쪽 끝부분에 생기는 삼각형 모양의 벽면 또는 그 지붕형태를 말한다)을 그대로 살린 거예요. 그래서 이 집을 보자마자 지금의 리노베이션한 구조가 머릿속에 진짜 시뮬레이션이 되면서 지금의 공간을 구현 한거죠. 서울은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 공간이고 부산은 집이다 보니까 내가 집에 진짜 그림을 걸었을 때 그 실제 사이즈가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내 공간에 어떤 그림을 걸었을 때 이런 느낌이겠다가 좀 더 많이 와닿는 장점이 있어요, 그래서 서울이랑 부산점이 콘셉트에서 완전히 다르답니다. 오시는 분들도 갤러리 위치도 신기해 하고 집을 갤러리로 사용하는 걸 보고 되게 재미있게 생각 하기도 하세요, 그리고, 저도 지역 작가들을 조금 더 좀 많이 만나고 싶어서 여기에 공간을 만든 이유도 있기는 하죠. 그리고 바다도 가깝고 퇴근하고 바다 구경하는 그런 재미는 보너스인 셈이고요 기자 완전히 낭만적으로 들리는데요, 진짜 부산에 갤러리 문 열고 그런 계획대로 다 살고 계신가요? 정유선 로망을 어느 정도 실현은 하고 있어요(웃음) 하지만 100%는 아닌거 같아요. 직원을 아직 구하지 못하다 보니까...근데 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약간 좀 고민 중이에요. 지금은 전시가 없을 때는 문을 닫고, 전시가 있을 때는 제가 내려오거나 파트 타임 직원을 구해서 쓰거나 하고 있거든요. 부산 갤러리를 계속 돌릴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구상 중인데 그게 숙제로 남아있어요. 어쨌든 전문 큐레이터가 아니라도 갤러리가 계속 오픈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아직은 그게 안 되고 있어서 이 공간이 좀 아까워요. 그래서 제가 계속 상주하지 않아도 부산 비트리 갤러리가 오픈돼서 그냥 오가는 사람들이 편히 들어와서, 언제든 와서 전시도 보고, 작품도 구매할 수 있는 편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여기가 자체적으로 좀 돌아갔으면 좋겠다라는 욕심이 있긴 하죠.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기자 그렇군요. 서울에 있는 갤러리도 부산처럼 특징 있는, 그런 건물에 그런 공간인가요? 정유선 서울 비트리 갤러리는 홍익대 안에 있어요. 운 좋게 홍익대학교 건물을 빌려 쓰고 있답니다. 서울점의 특징은 천고도 높고, 바닥이 철판으로 되어 있어서 큰 작품을 걸었을 때 몰입감을 줄 수 있기도 하고, 작품이 바닥에 살짝 반사되어 다른 분위기를 연출 할 수 있어서 부산점과 차별화 되는 부분이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학교 지하 주차장에서 쓰면 되니까 그런 것도 좋았어요.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기자 그런데 서울에서 하나, 부산에서 하나 이렇게 서로 거리가 많이 떨어져있는 곳에서 갤러리 2개를 동시에 운영하시는거 힘들지 않으세요? 정유선 사실 인력 말고는 사실 별로 힘든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사실은 지점을 서울 부산 말고 하나 더 하고 싶었는데 제가 부산을 열고서 약간 스톱을 한 이유가 하드웨어는 만드는게 정말 자신 있는데, 이게 인력, 그러니까 소프트웨어가 문제인 거예요. 인력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슈더라고요. 그게 가장 큰 부분 중에 하나고 여전히 이래저래 고민이 좀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전시를 기획하고 뭔가 콘텐츠를 만드는 거는 제가 잘 하는 일이니까 그건 어떻게든 굴리겠는데 이제 이거를 같이 서포트해 줄 친구가 가장 큰 문제인거죠. 그리고 부산은 제가 잘은 모르지만 여기 아트페어나 전시회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 가능성이 약간 조금씩 보인다고 해야 되나? 약간 느껴지는 것들이 있는데요. 최근에 도모헌도 이 근처에 오픈을 했고 여기 광안리에도 드문드문 갤러리가 좀 생기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라도 뭔가 묶어서 뭔가 같이 하면 재밌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어요.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기자 부산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시면 뭔가 서울에 비해 휴식같은, 쉬어가는 느낌도 있으실거 같아요 정유선 사실은 저한테는 이거 오프더 레코드인데 (웃음) 약간 워케이션 같아요. 부산에 와서 일을 하고 있지만 약간 서울을 벗어나는 거잖아요. 그래서 물리적인 거리로 체력적으로는 힘든데도, 바다를 볼 수 있어서 그런지 정신적으로 좀 덜 힘든 점도 있는 것 같아요. 다 좋은데, 욕심이 있다면 그래도 서울보다는 보러 오는 분들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는 점? 서울이랑 비교를 하면 적지만, 그래도 오시는 분들은 계속 꾸준히 오세요. 저희 고정 고객분들은 전시 때마다 오세요. 계속 보러 오시는데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유입이 됐으면 좋겠어요. 굉장히 신기했던 건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와요. 그래서 제가 오면 물어보거든요. 어떻게 알고 왔냐 했더니 구글에서 검색해서 전시 보러 온다고 많이들 해요. 제가 부산에서 제일 신기하고 재미있는 포인트가 그 외국인들이었어요. 대만에서도 오기도 하고, 제가 아는 인도네시아 친구들, 컬렉터분들이 오기도 해요. 또, 전시 리뷰를 보고 그림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또 오더라고요. 이런 부분들이 부산점을 오픈하고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기자 아 저도 그때 그 인도네시아 컬렉터분들, 부산 아트페어 왔을 때 오신분들과 같이 저녁 식사 했었잖아요? 굉장히 유쾌하고 또 부산도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인연이 어떻게 닿은거에요? 정유선 사실 그 친구들이랑 2023년 저희가 아트 자카르타에 참여를 하면서 알게된 지인들이예요. 그리고 아트 자카르타 디렉터랑 친분이 있기도 해서 아트 부산을 연결을 해 드렸어요. 아트 페어간 협업을 통해 고객분들을 초청해서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교류를 서로 하시게 된 거죠. 그러면서 올해도 방문해 주셨고 서로 좋은 시너지를 만들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아트 부산 기간동안에 저희 부산점에서 열린 전시를 보러 방문해 주신 외국분들도 많았답니다.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그분들이 너무너무 부산을 좋아해요. 이번에도 아트부산 갔을 때 만나고 같이 저녁 먹은 다음에 광안리에 있는 술집에 갔거든요. 거기 갔더니 한국 예능에서 나오는 술 마시기 게임 같은 것도 직접 하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한국 소주도 잘 마시고 폭탄주도 만들어 마시더라고요. K문화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웃음) 이번에 아트 자카르타에 저희 이여름 작가 아이스크림 작품 전시한 것도 반응도 좋았고, 처음으로 제가 현지 갤러리랑 협업을 해서 저희 작가님들 개인전도 만들었는데 이렇게 해외 갤러리랑 협업 전시를 계속 모색하고 확대하려고 합니다. 기자 그렇군요. 저도 자카르타 가서 한류열품을 직접 느껴본 적은 있는데 그걸 직접 우리 부산에서 인도네시아 분들이 보여 주실 줄은 몰랐어요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그런 해외로 확장하시는 모습도 보여주셨는데 이제 내년에 또 뭔가 이런 기획, 전시를 이어가실 계획도 있으실거 같아요. 정유선 벌써 내년 서울점은 전시 기획이 다 되었고요, 부산점은 전 섹션을 만들려고 합니다. 갤러리의 한 공간은 여러 작가의 작품을 좀 더 다양하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나의 첫 번째 컬렉션”이라는 타이틀 그대로, 관람객이 자신의 삶에 처음으로 예술을 들이는 순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갤러리를 방문한 이들이 부담 없이 작품을 소장하거나, 비트리 갤러리의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컬렉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첫 컬렉션의 기쁨’을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려고 합니다. 기자 그런 측면에서 지역과, 그러니까 부산지역 작가나 갤러리들과 협업도 한번 추진해보시면 더 다양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혹시 이전에도 추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정유선 사실 거의 없었어요. 제가 부산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처음에는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많이 알지 못했거든요. 몇 년 일하다 보니 부산 고객분들과는 많이 친해져서 밥도 먹고 여기저기 함께 다니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지역 문화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아니다 보니 그런 네트워크가 부족한 건 조금 아쉬워요. 그래도 저는 부산에서 다른 형태의 시스템을 만들어보고 싶고, 부산 갤러리가 지역 안에서 자생적으로 자리 잡고 운영될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제가 서울에서도 활동하면서 굳이 부산에 공간을 낸 이유 중 하나가, 부산 고객분들도 예술작품을 좋아하시는데 서울 전시를 자주 보러 오기 어렵다는 점이 늘 아쉬웠기 때문이에요. 물론 전시장을 지역마다 만들 수는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도시 몇 곳 ‘예를 들면 부산이나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곳’에 한 지점씩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죠. 그런데 제 몸이 하나다 보니 지금 당장은 어렵겠다 싶어서, 우선 부산에 낸 걸로 만족하고 있어요. 가끔은 이런 구상도 해요. 만약 지점을 낸다면 각 지역마다 디렉터를 두고, 어느 정도 지분도 나눠주면서 저는 콘텐츠를 다듬는 역할로 돌아다니는 거죠. 그러면 유럽이나 미주까지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예전에 오페라 갤러리에서 일했을 때, 전 세계에 12개 지점이 있었는데 각 지점의 주인이 다 달랐거든요. 그래도 하나의 ‘오페라’라는 브랜드 아래 시너지를 잘 냈어요. 지금도 부산에서 고객이 뭘 찾으면 서울에서 보내주고, 그런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은 당장은 어렵겠지만, 부산을 거쳐 아시아 쪽에 한 곳 정도 더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있어요. 다만 제 몸이 하나라 지금 바로 확장하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하고, 어쩌면 제 욕심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기자 그렇군요. 세계 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계시다니 정말 바쁘시겠어요. 생각의 폭이 넓으신 만큼, 갤러리 운영 외에도 다양한 일들을 하고 계실 것 같은데요. 어떤 활동들을 함께 하고 계신가요? 정유선 네, 맞아요. 제가 갤러리 일만 하는 건 사실 아니에요. 전시 기획은 기본이고, 아트페어도 나가고 외부 뮤지엄이나 기업의 아트 컨설팅, 전시와 공간 연출 작업까지 함께 하고 있어요. 그래서 외부 일이 정말 많아요. 여력이 된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역시 몸이 하나라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직원이 조금만 더 있어도 일을 나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직 제가 그만큼 확장할 능력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막상 일이 닥치면 뭐든 하긴 하죠(웃음). 여러 백화점과 전시 협업도 하고 있고, 저희 작가님들도 여러 공간에서 전시하거나 작품 연출, 전시 제안을 하고 있어요. 이런 전반적인 과정을 함께 해줄 직원이나 파트너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늘 있어요. 그런데 부산에서 일을 하면서 놀랐던 점이 있어요. 젊은 친구들이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부산을 떠난다는 얘기를 너무 자주 듣는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부산점에서 아르바이트했던 친구도 부산을 정말 좋아해서 여기서 안정적인 일을 찾고 싶어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어요. 왜냐하면 제 눈에는 부산에 정말 많은 가능성이 있어 보이거든요. 도대체 왜 없을까?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왜 없지? 이런 물음표가 계속 붙는 거예요. 실제로 젊은 사람들이 부산이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서울로 간다는 얘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앞으로 부산이, 그리고 부산의 문화시장이 꼭 고민해야 할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서울, 그것도 한국 미술의 중심이라 불리는 홍대에 자리 잡은 갤러리가 굳이 연고도 없는 부산, 그것도 조용한 주택가의 2층 주택에 ‘쌍둥이 갤러리’를 연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부산의 매력 있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왜 지역을 떠나는지, 왜 결국 서울로만 향하게 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자로 일할 때 늘 접하던 ‘지방 소멸’과 ‘인구 절벽’ 같은 무거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미술 갤러리에서 마음을 식혀보겠다는 의도였는데, 결국 어느 곳에서나 다시 지역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비트리 갤러리가 보여주는 이 쌍둥이 갤러리 모델이, 지역과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지역은 지역에만 머무는 곳’이 아니라 서울과 따로 또 같이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도 혼자 여러 지역을 넘나들며 뛰고 있는 정 대표에게 그 역할까지 바라는 건 다소 민망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다만 앞으로는 갤러리나 전시회를 방문할 때,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큐레이터와 직원들의 얼굴을 조금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우선 다음번 비트리 갤러리 부산의 전시에서부터 그렇게 해봐야겠다.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3
2025.11.26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2

매력 있는 예술 관련 콘텐츠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지역에서 열리는 전시나 공연을 일일이 발굴하고 이메일과 자료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그중에 몇 개를 골라 또 큐레이터나 작가, 갤러리 대표와 통화해서 촬영가능여부, 인터뷰 시간을 맞추고 그래도 실제 현장에 가면 또 상황이 바뀌고....그런 번거롭고 지루한 과정들이 매주 수차례씩 반복되면, 어느 순간 아무리 거장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취재기자와 촬영기자 모두 그저 무덤덤한 업무의 한 꼭지로 스쳐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굉장히 독특한 피드백을 받았다. 여느 날처럼 뉴스 제작을 위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카메라 기자 후배가 며칠전 촬영한 그림이 정말 예뻣다고, 뜬금없이 얘기를 꺼냈다. 누구 전시? 어떤 작품? 이냐고 언뜻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되묻는 내게 물감튜브에서 꽃이 피어나는 소품이었는데 그 분위기가, 그저 예쁜 그림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밝아지고 기분 좋아지면서도 계속 기억에 남는 그림이라며, 인터뷰를 마친 작가에게 자기가 하나 구입하고 싶다고 하니, 벌써 이번 전시작품은 다 팔렸다고 미안해하더라면서 주말에 아내와 함께 다시 가서 봤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그 얘기를 듣자 언뜻 바로 그 주에 해운대 프랑스문화원에 의뢰했던 전시회가 떠올랐고 아 그런 이미지의 작품이었지 라는 기억이 언뜻 살아났다. 최은희 작가의 개인전인 &lt;나를 피워내고, 너를 물들이고&gt;에 대한 이례적인 찬사에 나 역시 호기심이 생겨 곧바로 주말, 작가가 없을만한 시간대를 틈 타 천천히, 조용히 전시장을 찾았다. 정확히 그 촬영기자가 말한 감상이 뭔지 와 닿았지만, 그보다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팽팽한 긴장감, 아슬아슬한 불안감은 좀 낯설고도 익숙한, 어떤 날것의 생동감으로 더 깊게 와 닿았다. 그런 기억과 함께 만난 작업실의 최은희 작가는 기대했던 이야기들과 예상하지 못했던 스토리들을 당연한 삶의 양면성인 것처럼 망설임없이 풀어냈다. 기자 : 전시회 작품을 보면 물감튜브에서 피어나는 꽃이나 풀이 많은데 어떤 인터뷰들을 보면 최작가님은 그걸 물감주머니라고 굳이 표현하셨더라고요. 혹시 어떤 다른 의미가 있나요? 최은희 작가 (이하 작가) : 제 작업 안의 물감 튜브는 원래 물감 주머니에서 시작하는데 이 물감 주머니는 온전히 제 상상에서 출발해요. 식물의 뿌리에는 숨겨진 물감 주머니가 있어서 어떤 씨앗을 뿌리면 그 빨간색 물감주머니에서 빨간색 꽃이 피어나나 봐 라는거죠. 어릴 때 제가 하던 상상인데 뿌리가 있으면 뿌리의 마지막에 물감 주머니가 있고 이 물감을 빨아들여서 빨간 꽃이 피는 거겠지. 뿌리에 물감 주머니가 달려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 왔던거죠. 그런데 알고 보면 시금치는 사실 빨간색 씨앗이고 갓김치를 만드는 갓은 파란색 씨앗이에요. 그런데 여러 색깔의 씨를 뿌렸는데도 다 똑같이 초록색에 입이 나는 게 참 신기하지 않나요? 특히 꽃은 대부분의 씨앗이 다 갈색류, 어두운 색류가 많아요. 요즘은 모종 자체를 심는 게 더 많은데 씨앗부터 피워내기가 힘들어서 사실 모종을 심는 거거든요. 농사를 하면서 많이들 하는 게 씨앗부터 해서 좋은 결과물을 얻기 힘들다 하지만 씨앗부터 키우는 게 사실 진짜예요. 저는 그 씨앗부터 키우는 그런 꽃들이나 작물들을 보면서 씨앗이 처음에는 어두운 색깔이다가 뿌리를 내리고나면 초록색 잎을 피우고 노란색 꽃을 피우는 뿌리를 내리는 모습이 사실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생겨난 물감 주머니 때문이 아닐까 그냥 그렇게 상상을 하면서 물감주머니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 거죠. 기자 : 그런데 굳이 물감주머니가 아니라 물감튜브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실제로 나중에는 물감주머니가 아니라 진짜 물감튜브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걸로 옮겨갔잖아요? 작가 : 그때 그 물감 주머니 자체는 저한테 ‘제가 가지지 못했지만 제 속에 갖추고 있는, 그런 재능’을 뜻하는 개념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저는 저 자신이 ‘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저는 지금도 제가 재능이 없는데 결국 버티고, 미술이 하고 싶기 때문에 남아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 아...작가가 스스로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니까 제가 뭐라고 대화를 이어가야할지 당황스럽네요. 그럼 혹시 꽃이 없는, 무화과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인가요? 작가 : 음...정확히 저는 제가 초록색 물감에 초록색 이파리만 피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초록색 물감을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작품 활동 초반에 그린건 대부분 다 초록색 물감으로 그린 이파리들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약간 좀, 그 지점을 뛰어넘었나 봐요 요즘은 그림에서 특별히 초록색 물감이 나오지를 않는데 제 그림을 처음부터 쭉 보신 분들은 ‘요즘은 왜 초록색 물감이 없어요?’ 이 얘기를 많이 하시거든요. 왜냐하면 초록색 물감이 바로 ‘나’니까, 초록색 물감에서 초록색 잎만 피워낼 수 있는 게 나라고 생각하고, 나 자신은 초록색 물감이니까 정작 꽃은 못 피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제가 그런 지점에 부딪칠 때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좋겠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나도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능이 있었으면... 그런데 그 재능이 계속 저한테는 빨간 꽃을 피우고 노란 꽃을 피우는, 어떤 뿌리들이 어느 곳엔가 분명히 숨겨두고 있는, 그런 물감 주머니들 같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작가들을 보면 쟤는 나처럼 까만 씨앗 심었는데도 빨간 꽃을 피우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한테도 그런 물감 주머니가 있었으면, 내가 그렇게 꽃 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작품들을 그리게 된 거에요.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붓이랑 물감 튜브가 연결된 거였어요. 그래서 예전 작업들 보면 붓에서 이렇게 나온다든지, 식물의 붓에서 물감이 이렇게 쭉쭉쭉 떨어지는 작업들이 있었고 이제 그게 물감 튜브로 바뀌게 된 거죠.
기자 : 왜 본인에게는 본인이 원하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작가 : 그냥 쉽게 말하면 만약 누군가 ‘내가 여기에 이 꽃을 그려야지’ 하면 감수성 넘치는, 무언가에 영감을 가진 작가들은 그리면서 무언가를 해 나가다보면 그 안에서 꽃을 피워내거든요. 저는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물감 튜브를 그려야지 고 스케치를 해 두고 여기도 뭔가를 띄우고 여기도 간격이 같아야 되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꽃이어야 되는, 그런 형태의 강박이 너무 심한 거예요. 근데 이 강박은 사실 막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그릴 수 없어서 오는 강박이에요. 저는 제가 원래의 루틴대로 앉아서 내가 원래 사용하던 물감과 내가 원래 그리던 그런 재료들 그다음에 나의 환경 안에 있어야 내의 퀄리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더라고요. 근데 젊은 작가들, 제 제자뻘 되는 작가들 가운데서는 정말 캠핑하듯이 스케치북, 야외에 나가서 할 수 있는 도구를 들고 가서 그날 하루, 모네처럼 앉아서 그날 하루에 시간별 하늘을 그리고 오고 산을 그리면서 작품을 내놓는 거에요. 예를 들어 장건율 작가라고 있는데 걔를 보면서 약간 충격을 받았어요 ‘저렇게 재능이 많은 애들이 많았지’ 라는 생각을 또 그때 한 번 했거든요. 제가 작년에 그 작가의 개인전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까지 재능이 없으니 늘 내가 뭔가 이렇게 상황을 만들고 또 그 상황 안에서 노력을 해야 겨우 이 결과물을 뽑아내는데, 저 작가들은 땅바닥에 앉아서 어느 공간이든 자유롭게 막 분출해내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그렇게 못하는 작가더라고요. 이런 대화를 하면서 좀 아이러니했던건 강박을 이야기하는 최작가의 표정은 강박에 묶여있다기보다 아 내가 강박이 있어 라고 하면서 그 강박 자체를 하나의 객관적인 존재로 물화(物化)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강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미워하지도 않고 일부러 내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부인하지도 않는, 그저 언제든 함께 내 곁에 있는 나의 수많은 페르소나 가운데 하나로, 담담하게 손잡고 함께 가는 동반자로 이야기하는 그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작가 : 저는 하나도 틀어지면 안 되는 그런 강박들도 좀 있어서 아시다시피 오와 열이 정확하게 맞아야 하고, 그 오와 열을 맞추는데 시간이 또 들어요. 그러니까 다른 작가들 시간 딱 두 배가 드는거죠. 간격 맞추고 있어야 되고 높이도 맞춰야 되고 뭐 이러다 보니까 저는 ‘아 내가 막 이렇게 막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나 재능이 없어서 이렇게 강박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고 그러니까 나 스스로는 꽃을 피우는 게 아닌, 초록색 흔한 잎만 피워내는 그런 식물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작업을 하게 된 거죠. 기자 : 하지만 요즘 그림 속에서는 초록색 잎이 아니라 다양한 꽃이나 식물, 혹은 채소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던데요? 이제 그런 강박을 벗어난건가요? 작가 : 아직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요. 지금 제가 그리고 있는 작품들이 이제 곧 아트페어에 보낼 작업들인데 아트페어에서 좋아하시는 꽃들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희 갤러리 대표님은 꽃 좀 그려라, 제발 이상한 식물 좀 그려오지 마라고 하시거든요. 실제로 제가 그리는 작품들 중에 진짜 제가 밭에서 농사짓거나 직점 보고 그린 작물들은 사실 잘 안 팔려요. 어머님들이랑 얘기하다 이거 갓인데요 이러면 아이고 그 갓김치 갓이네 하고 그냥 안 사시거든요. 그런데 시카고나 외국에서는 그런 작품들이 다 팔려요. 그래서 지금은 아트페어용이어서 조금 더 꽃이 많은데 이제는 제가 예전에 하던, 제가 갇히는 작업들이 좀 갑갑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깨내려는 작업을 많이 하는거죠. 예를 들어 강박에 갇힌 나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만들었던 작품이 현재까지 많이 한, 물감 주머니에서 나오는 꽃 피는 식물들이었다면 이제 이걸 훼손시키는 시도 자체가 ‘지금까지의 나를 똑바로 봤으니까 기존의 나를 어떻게 깨보고 변화해 보자는 그런 시도라고 생각을 해주시면 될거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깨려고 하고는 있는데 사실 그다음에 뭔가 자유롭게 움직여야 되는데 저는 사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까지도 이미 정해놨어요. 반드시 여기에 하나가 있고 그다음 물감이 들어와서 뒤집어지자 뭐 이런 식으로 배치를 사실 자유롭게 움직인 게 아니죠. 그래서 지금의 프레임을 깨면 그 새로워진 프레임 안에서 내가 자유로워져야한다, 그게 남아있는 저의 몫인 것 같거든요. 제가 이제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달렸는데 그건 이제 또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고요. 이런 고민 속에 물감 자체를 없애보자 라고 생각해서 물감튜브 자체를 없애고 꽃에서 물감들이 그냥 흘러내리는 작업들을 이번에 아트 부산, 시카고 이런 전시회 때 다 같이 선보였죠. 그게 올해 신작이에요.
기자 : 아 시카고 아트페어 다녀오신게 얼마 전이라고 하셨죠? 거기서는 반응이 어땟나요? 작가 : 제 그림이 시카고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첫날, 제일 처음으로 저희 부스에서 스타트를 끊었는데 그걸 사신 분이 VIP 오프닝 때 온 시카고 미술관 펀드 헤드 디렉터였어요. 세계 최고수준의 미술관들은 후원회에서 후원금을 받아서 모든 걸 운영하는데 그 후원회의 대장인 거예요. 거기 계신 분이 와서 제 걸 사면서 율무, 염주 얘기를 듣고 사 가셨는데 그 작품이 예쁘긴 예뻣거든요. 그건 사실 저도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저는 너무 기쁘긴한데 왜 제 작업이냐고 사실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그 디렉터가 오늘 들어와서 딱 한 작업 사 갔는데 네 걸 사 간다. 여기 와서 너를 처음 알았다고 하는데 왜 내 거였지 라고 물으니까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있대요. 그래 서양 사람이 나를 보고 계속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길래 뭐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제가 가는 날까지 들은 말이 그거예요. 어디서 동양의 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동양의 미, 뭐 제가 그리는 식물도 동양적이다. 라인도 동양적이다. 재료도 동양적이다 라고 계속 그래서 ‘아니다 이거 아크릴이다 이거 캔버스도 너네가 쓰는 린넨 똑같은 거야 너네 린넨이 더 좋아 나는 한국에 살아서 한국 린넨 쓰는 거야’ 라고 하는데도 아니래요. 자꾸 제 작품보고 동양적이래. 그 동양적인 미에 다 사람들이 반한거래요. 사실 그때 들고 간 작품들이 깻잎, 갓, 무 같은 건데 걔들은 무에 무청도 저희처럼 안 생겼대요. 그런 모든 것들, 그냥 모든 게 동양적이어서 너무 매력적인 거래요 그 분들한테는. 제가 그린 그런 식물들은 사실 제가 직접 농사를 짓고 직접 키우고 있거든요. 물론 그게 아주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가 우리 주변이나 우리 삶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소재와 상상을 가지고 그렸는데, 그게 이제 더 발전이 되면서 해외 시장에 가니까 그런, 조금 다른 형태의 반응이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기자 : 최작가는 부산예고 다니면서부터 계속 그림 그려오셨잖아요. 그동안 지금의 이런 화풍의 작업을 계속 발전시켜 오신건가요? 작가 : 아 사실 정확히 그림 작업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2019년부터에요. 부산대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석사는 미술교육, 박사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작업보다는 사실 교단에서 강의에 전념해온 시간이 10년이 넘거든요. 교단에 서면서 박사과정을 계속해왔는데 미술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된건 사실 박사 논문을 다 쓴 다음이었어요. 그즈음 박사를, 제가 6년 정도 하고 있었거든요. 박사를 6년 정도 하면서 박사 논문을 다 쓰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가 목표였어요. 그때 너무 제가 힘들어하니까 박사논문 쓰지 말라고 주변에서 말리기도 할 정도였죠., 그런데 제가 솔직히 저 스스로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도 하고, 좀 원래 어릴 때부터 환경 자체가 저를 좀 많이 쪼으는 상황 아래에서 크다 보니까, 지도 교수님이나 부모님이 박사를 시작했는데 박사를 졸업 안 하면 안 된다 라고 엄청 많이 간섭하셨어요. 사실 박사를 수료만 하는 사람 많거든요. 그런데 제 지도 교수님은 내가 박사를 안 받으면 자신의 인생에 오점이 되니까, 꼭 받아야한다고 너무 압박을 주셨어요. 집에서도 그 비싼 박사학위 과정 학비를 다 대줬는데 꼭 받아야한다고 하셨죠. 그리고 사실 이건 비밀인데 당시에 동서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는 제 앞에 방정아 선생님이 학위를 받으셨었거든요. 제가 들어갈 때 방정아 선생님이 끝났을 때 딱 그 시점이었는데 저는 약간, 작가로서 방정아 쌤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방정아 쌤이 그 박사학위를 받은 것 때문에 더 룰루랄라, 나도 꼭 받아야지 하면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그정도 생각으로 들어가서 그랬을까요 딱히 박사에 대한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박사 논문을 쓰는 것 자체가 고역인 거예요. 그래서 논문만 쓰는 2년 동안 내가 불행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요. 그러니까 이걸 끝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가 같이 붙는 거죠. 내가 지금 너무 불행하니까 이건 끝나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그런데 끝내고 난 다음에 하고 싶은 게 그래서 뭐니, 뭐든 네 마음대로 해라 라고... 지도 교수님이나 부모님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입을 모아 그러셨어요. 그때 제게 든 생각이 아 나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림을 그리는 게 나의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아 였어요. 사실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니까 이제 교수라는 직업, 커리어도 있고 작업에서 손을 뗀지도 좀 되고 그러니까 전부 가볍게 작업해라 뭐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뭐 제가 작업을 전혀 안 하던 것도 아니고...시각 디자인으로 박사를 따면서 1년 한 학기에 두 번씩 전시를 해야 했어요. 단체전을 매번 하고 있는데, 미술작업도 그렇게 하면 되지 너무 다들 쉽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렇게까지 전업적으로 미술작업을 할 줄은 몰랐던 거죠. 지금은 다들 그때 그러더니 진짜 이렇게 하는구나, 난 네가 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 말을 진짜 많이 하시거든요 하하. 그게 사실 계기였어요. 기자 : 그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저도 석*박사 과정에만 11년이 걸려서...그 어려운 과정에 100% 공감합니다. 하하. 그럼 그 이후 7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이제 린넨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리는 작품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작가 만의 스타일로 인정을 받은 것 같네요? 작가 : 음...그렇긴 한데, 그 부분에서 역설적으로 이제 고민을 시작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이 작업으로 인지도가 꽤 많이 쌓여서 아트페어에서 이제 팔리기 시작했고 꽤 많이 ‘린넨으로 물감 튜브 그리시는 작가님’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는데, 제가 몇 년간 쌓아 올린 저만의 경력인데 이걸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시점이 왔나 라는 고민이 들어요. 뭐 아직은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걸 버리는 순간이 오려면 좀 더 해야 될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지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그러니까 교수를 맡은 지가 이제 12년 차거든요. 10년을 향해 달려갈 때, 8년 차쯤에 정말 미련도 없이 놓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한 5, 6년째까지는 미련이 많았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 학교에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이런 생각도 많았고 학교라는 이 집단 안에서 가지는 명예도 좀 가져보고 싶었거든요.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겸임 초빙 ...너무 그 명예도 좀 쥐어보고 싶었고 그랬는데, 딱 어느 지점이 저한테 제 스스로가 할 만큼 다 한 어느 지점이 오니까 너무 가볍게 버릴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저는 자동 계약이라 컴퓨터에 들어가서 클릭만 하면 자동으로 교수로 재계약이 되는데 올해, 계약 안 하고 내년에는 시간 강사 한다고 학교에 말씀을 드렸거든요. 교수직에 더 이상 미련도 없는데 자꾸 그림을 그려야 할 내 시간을 뺏기는 거예요. 이제 학교일이나 다른 업무로 시간과 열정을 뺏기는 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거에요. 근데 예전에 한 몇 년 전 같으면 이렇게 결단을 못 내렸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작업, 린넨에 굉장히 공들여 하는 이 작업들도 마찬가지에요. 최근 3년 정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데, 바꿔야한다는 고민과 갈등은 많은데 아직은 그걸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걸로 그래도 뭔가 사람들한테 일단은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본질적인 방법을 바꾸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기자 : 그럼 지금은 기존의 물감튜브 작업과 동시에 그 기존의 스타일을 바꾸기 위한 변신을 함께 시도하고 계신건가요? 작가 : 네 지금은 일단 두 가지 방향으로 시도하고 있는데, 우선은 제가 기장군의 한 밭, 야외에 제 작품을 설치하는 전시회를 지금 진행하고 있어요. 사실 작가들이랑 같이 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 반 정도, 직접 밭에서 작물을 키워왔거든요. 지난해는 좀 규모가 작았는데 올해는 아예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하반기에는 배추를 심어서 김장까지 할 계획이에요. 작가들끼리 서로 물 당번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물을 주고 비닐멀칭도 절대 하지 않고 약도 쓰지 않고 모든 걸 친환경으로 키우는 프로젝트에요. 그런데 올해는 그 옆에 제 작품을 직접 전시하고 있어요. 이번 기획은 부산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가능해진 건데, 전제 조건이 밭에다가 그림을 심겠다. 내가 심는 행위를 했는데 내 작업이 다 자연물이라 밭에 심어야겠다. 밭에 그림을 심고 이 프레임에서 얼마나 재미있는 물감들이 그 땅 밑으로 쏟아지는지 확인하고 싶다 라는게 기획의도에요. 그게 신선하게 다가갔는지 선정이 된 거죠. 대부분의 작가들이 어쨌든 캔버스든 뭐든 어떤 프레임에서 작업을 하잖아요. 그거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프레임을 벗어나면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어느 순간, 제 그림이 미술의 정통성 안에, 너무 틀에 박힌 전형적인 회화, 고지식한 그림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아 이거 작정하고 한번 훼손시켜봐야겠다. 이걸 의도적으로 훼손시켜서, 그 훼손시킨 작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밭에서 나온 작물을 대상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밭에, 야외 설치를 하는 회귀(回歸)를 기획한거죠. 실제로 작품을 밭에 설치하고 그 설치가 다 된 걸 공유한다고 사진을 보내니까 모두의 질문이 그거였어요. “회화 작품을 저렇게 두면 되나요?” 하하. 모두가 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제일 많았는데 “제가 훼손시키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설명했죠. 그래서 한달 동안 전시가 끝날 때까지 밭에 놔둔 다음에 수거를 하면, 그 안에 분명히 제가 생각하는 자연의 무언가, 그 자연의 내용들이 묻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거 자체를 제 작품세계랑 같이 융화시켜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그 결과물이 나오면 이번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거죠. 또 동시에 작품의 크기에서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어요. 사실 8호짜리 작업을 제가 올해 2월부터 시작해서 5월까지 정확하게 35점을 그렸어요. 거의 뭐 저한테는 진짜 말도 안 되는 개수거든요.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걸리기 때문에 거의 학교를 갔다가 매일 작업실로 와서 그림만 그려야 나올 수 있는 개수였거든요. 근데 8호짜리 30점이면 300호가 넘어갑니다. 붙이면 400호 정도의 크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쉬지 않고 8호짜리부터 30호짜리, 50호짜리 작업을 계속해 왔는데 이제 그게 아니라 통으로 큰 작업, 100호, 200호, 300호짜리 대형작업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요. 저는 발전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맨날 똑같은 걸 그리고 있는 작가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게 제 목표에요. 그래서 다들 이제 물감 튜브 잘 팔리니까 물감 튜브만 그리면 되지 않아? 라고 하는데 그런 작가는 되지 않겠다는 게 제 변하지 않는 다짐이에요. 내가 갤러리 작업만 하고 상업 작가가 되어도, 결국에 미술관에 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대단한 미술관 작가가 하지 못해도 ‘무조건 똑같은 것만 그리고 있는 작가는 절대 되지 말자‘가 제 작업 시작할 때 목표였어요. 매년 새로운 작업을, 조금 더 다른 세계관으로 뻗어나가서 무조건 다른 작업 하나는 해야 한다. 매년 다른 또 물감 주머니에서 다른 게 태어나서 다른 작업을 꼭 해야 한다가 흔들리지 않는 제 유일한 신념입니다. 최은희 작가가 그리는 튤립은 작가가 직접 구근을 심고 물을 주고 겨울을 날 때까지 애정을 쏟아 부어도, 때때로 말라죽고 병들어죽고 어렵게 피어난 뒤에도 고작 한철을 지나지 못하고 시들어 죽는, 그런 가냘픈 식물이다. 하지만 따스한 질감의 린넨 위로 붓에서, 물감주머니에서, 물감튜브에서, 그리고 이제는 물감 그 자체에서 피어나는 튤립은 작가가 숨기지 않는 ‘재능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뿌리를 둔 투쟁’을 통해 좀처럼 바래지않는 단단한 행위자로 거듭난다. 그런 지난한 노력 끝에 자연에서 화폭으로 옮겨낸 튤립을 이제 다시 화폭 채로 자연 속에 돌려놓는 실험, 그 의도적인 훼손을 통해 작가는 또 어떤 새로운 튤립을 꿈꾸는 것일까?
2025.11.10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1

부산 기장 빌라쥬 드 아난티의 갤러리 입구에서 가장 오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묵직한 존재감 그 자체였다. 인간의 형상처럼 보이지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회화로 분류되어야 하겠지만 두터운 질감은 부조에 더 가까웠으며, 캔버스 전반이 블랙홀처럼 어두웠지만 빨아들이기보다 강렬하게 쏟아내고 있는 그림, 작품명이 『현자(賢者)』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그 그림 자체가 응축하고 있는 질량감은 단순히 기술적인, 기법상의 완성이라기보다 실제로 작가가 쏟아 부은 지난한 시간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렵게 연락을 통해 만난 작가 길후는 짧게는 찰나에서 길게는 십수년을 작품 한점 한점에 쏟아 부으며, 그러면서도 세상에 내놓은 작품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태우고 부수면서 쌓아온 작품 세계에 대해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인 듯 편안하게 설명했다. 기자 : 전시회 때 작품 『현자(賢者)』를 특히 관심 깊게 봤습니다. 거의 회화라기보다 마티에르만 봐서는 부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보였는데요, 보통 작품에 이렇게 깊은 무게감을 담으려면 제작기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겠죠? 길후 작가(이하 길후) : 음... 『현자(賢者)』 같은 작품은 10년 이상 작업기간이 걸린 게 맞지만 함께 전시했던 300호 넘는 작품들은 작업하는 데 30~40분 밖에 안 걸린 작품들도 많아요. 평균적인 작업기간을 말씀드릴 수 없는 게, 어떤 건 6개월씩 또 때로는 몇 년씩 작업하다가 한쪽에 처박아 두고는 또 몇 년 만에 다시 시작을 하기도 하고 그래요. 다만 작품 자체가 태어나고서 공개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말씀하거 라면 최소 삼 년 이상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저는 늘 삼 년마다 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거든요. 삼 년 지나고 내가 봤을 때 나를 감동시켜 주지 않으면 그 작품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없애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작품을 없애는 게 내 주된 일입니다. 지금도 대구 작업실에 가면 큰 소각장이 있습니다. 작업실 곳곳에 항상 부서진 캔버스 합판이 널려져 있습니다. 그런 건 제가 다 없앤 겁니다. 기자 : 굉장히 스스로에게 엄격하시네요. 원래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작업을 계속해오신건가요? 작가 : 아니에요 정확히는 밀레니엄, 2000년부터라고 할 수 있죠. 그 해가 제 생애에 어떤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제가 서른 아홉이 되었을 때, 99년도까지 그린 작품이 만 6천여 점 됐어요. 그런데 그때 2000년에 그걸 다 버렸어요 불태워서. 다 버리고 새로 이제 밀레니엄에 맞춰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지금의 저는 그때 새로 시작한 거라고 봐도 됩니다 밀레니엄이 그때 준 충격이 제게는 굉장했습니다. 우주 전체와 세상의 질서, 모든 것이 바뀌어지는 시기에 ‘나는 과연 새로운 밀레니엄에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거죠. 그래서 나는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나간다, 그래서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다 불태우고 없애고 그때부터는 블랙을 한 거예요. Refusal to Coming Dawn, 2003, Acrylic Ink on paper, 100X71cm
Refusal to Coming Dawn, 2003, Acrylic Ink on paper, 100X71cm
기자 : 특유의 블랙, 그러니까 블랙페이퍼 작업을 시작하신게 그때부터군요. 그런데 보통 블랙이라는 색깔이 작가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색깔이 아니라고 하던데 굳이 블랙을 선택하신 건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작가 : 제가 2000년도, 밀레니엄에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 블랙이라는 색깔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전에 그린 그림을 다 태웠다는 이야기는 제가 새롭게 태어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이 블랙이라는 색깔이 가장 고귀한 태초의 색, 근원을 뜻하는 색인만큼 그런 블랙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제 새로운 출발을 블랙과 함께 선언했습니다. 그런 제 확신이 가장 강렬했던 때였기 때문일까요, 제 작품 중에 제일 좋은 작품들은 2000년도에 그린 블랙 페이퍼 작품들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0년부터 2003년 요때 그린 블랙 페어퍼 작품들은 지금 제가 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계속 블랙만 쓰는 줄 아시는데, 사실 지금 제 작업실에는 평소에도 열려있는 물감색깔이 한 50개 정도 됩니다. 그래서 제 작업실은 아무리 추워도 난방을 못 해요. 그렇게 다양한 색깔로 작업을 하지만 제가 새로운 제 출발을 백지 위가 아닌 흑지 위, 검은 색, 우주의 근원을 담은 블랙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선언적인 의미가 있고 거기서 담은 내공들은 이제 최근에 황금색까지도 확장되었습니다. 이 골드 역시 화가들이 쉽사리 선택하기 힘든 색이지만 저는 충분히 제 작업 속에서 활용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펼쳐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작품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색채의 폭을 넓혔다는 게 맞겠죠. 이런 변화는 당연히 단순한 혼자만의 자신감만으로는 되는건 아니고요, 항상 물밑에서 쉴새없이 헤엄치는 백조처럼 계속 다양한 세계를 탐색하며 연구하는 작업이 이어집니다. 사실 황금색을 사용하게 된데도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2016년부터 2년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프란치스코 성당 앞에 있었거든요. 그 기간동안 매일 가서 당시 대가인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림을 관찰했어요. 성화는 금박, 그러니까 얇은 금색을 입혀서 화려하게 꾸미는데 우리 고려문화도 박을 입혔잖아요 그런데 성화에서 여전히 금색을 기본으로 배치하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는 고려 이후로 박을 입히지 않았거든요 기법이 공예적이고 이게 회화에서는 번쩍번쩍 비치니까 어울리지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주력해온 블랙에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색이 또 금박이거든요. 저걸 어떻게 회화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지만 제가 해온 회화에서도 금색이나 스틸, 메탈을 쓰면 절대 안 되는 게 불문율이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절대 안 어울립니다. 근데 제가 하는 건 붓의 본질에 그 에너지를 담기 때문에 사용이 가능한 거죠. 뭐 색이 뜬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것, 그런 개념이 없는 거예요. 특별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본질인 붓에 금색을 찍어서 그리면 그게 하면 그게 본질로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거죠.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기자 : 이탈리아 성화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으셨군요. 분위기에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력을 살펴봤더니 중국에서 오래 작품 활동을 하셨던데 유럽까지 함께 담아내셨다는건 몰랐습니다. 혹시 해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주로 해외활동을 해오신건가요? 작가 : 그렇게 보이나요? 허허 전혀 아닙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학은 대구 계명대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미술작업도 계속 대구에서 해왔는데 2010년 북경에 처음 갔죠. 지금도 북경에 작업실이 있고 1년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넘어가기도 힘들고 국내작업도 바빠져서 예전처럼 오래 있거나 자주 가지는 못 합니다. 기자 : 그런데 왜 중국을 택하신거죠? 그때 작가님은 이미 한국에서는 오래 활동하신 상황이잖아요? 그즈음이면 수도권에서서 바로 활동하셔도 됐을 텐데 굳이 중국에서 활동하시다가 다시 돌아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 : 수도권에서 바로 활동이라...그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한국은 아무래도 지연, 학연이 앞서 가는 사회이고 제가 지방대학을 갔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중심에 서울대, 홍익대 라는 판이 사실 짜여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작품을 내놔도 사실 진입이 어렵고요. 제가 파주의 레지던시에서 작업을 하면서 서울 쪽 예술계 흐름을 보니까 자기들끼리 굉장한 공고한, 그런 카르텔이 있어서 한 1년을 작업했는데도 아무도 저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레지던시 작업 기간이 끝나고 개인전을 했을 때는 제가 가장 관심도 많이 받고 작품이 판매도 잘 되고 너무 성과가 좋았어요. 그래서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한계인가 라는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2011년 대만에 본사를 둔 소카 아트센터(Soka Art Center)가 베이징 798에 갤러리를 오픈하면서 제가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베이징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현지에서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현지 전시를 계속 열기 위해 현지에 작업실을 구하고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첫 개인전이 북경에 있는 아트 사이드 라는 갤러리에서 열리게 되면서 제 무대가 중국으로 확장된거죠. 그때 아 내가 더 이상 국내시장, 이미 짜여진 판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 뜨고 있는 북경으로 가자 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세계적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 관장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 오는 시대가 아니고 북경으로 가는 시대였어요. 이 대목에서 길후 작가는 찬물을 한 모금 마셨다. 중국 예술촌에서 작업을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저 화가는 그림만 그리는 벙어리*(장애인 비하적인 발언이 아니라 중국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인용 그대로라며 작가도 양해를 부탁했다.)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작품 활동에만 집중했다는 이야기를 했던터라 중국 생활의 애환이 잠시 떠올랐던게 아닐까. 작가 : 북경으로 갔다고 모든 게 쉽게 풀린 건 아니었고요. 중국 베이징에 페이스 갤러리라고, 그 뉴욕 첼시 가에 있는 그 페이스 갤러리의 지점 격인데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거든요. 에이전시 같은 소속사도 없이 개인작가가 거기 문을 두드리니까 관장이 일단 도록을 한번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작품 보고 그림은 좋은 것 같은데 직원들 보고 정보를 한번 찾아보라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메이저 화랑이죠, 화이트박스 라는 화랑과도 연결이 되었어요. 화이트박스에서 제 도록과 실제 작품을 보고는 흔쾌하게 전시를 하자고 제안하면서 오히려 페이스 갤러리보다 빨리, 바로 그해 개인전을 열게 됐습니다. 그걸 보고 중국 작가들이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중국 작가들도 한 3천만 명 되지만 그런 메이저 화랑에 전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중국에서도 그런 메이저 갤러리에서 1년에 기획전을 6~7번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이 전속작가들이지, 새로운 작가가 거기에 들어갈 제출할 가능성은 1년에 많아봐야 한두 명인데 한국 작가가 중국에서 거길 파고든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걸 제가 개인적으로 이뤄내니까 중국 예술가 사회에서 저를 새롭게 보고, 이렇게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좀 저를 우러러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중국에서 화단을 개척했고 이게 서울을 통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어떤 기회가 된 셈이죠. [2014] The Wise Man_200x200_Mixed media on canvas
[2014] The Wise Man_200x200_Mixed media on canvas
기자 : 지금 학고재 전속이시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학고재까지 연결이 된건가요? 작가 : 2021년도에 학고재에서 우찬규 회장님이 연락이 왔더라고요. 우연히 제 작품 도록을 보다가 왜 자기가 지금까지 이런 작가를 몰랐지 하면서. 그런데 사실은 제가 도록을 만들어도 이전에는 일부러 화랑이나 미술계에 한번도 안 보냈거든요. 왜나면 책으로, 도록으로 알려지면 그쪽에서 전시회를 하자고 연락이 오곤 하는데, 그러면 내가 정작 내 작품활동을 할 시간이 모자라지는 상황들이 저로서는 정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일단 도록을 보내놓고는 그림을 못 그려 보낸다고 변명할 수도 없고해서 그때까지는 도록을 일부러 별로 안 보냈는데 그때 우회장님한테 딱 걸린 거죠. 그 때 이후로 국내외 활동을 학고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또 활동폭도 늘고 서로 호흡이 잘 맞아요. 기자 ; 그렇군요. 오늘 시간을 많이 빼앗았는데 마지막으로 요즘 작품활동 방향 한번 여쭤봐도 될까요? 전시회에서 보니 『현자(賢者)』처럼 십수년을 담은 작품들도 있고 또 순식간에 그린 현대 추상같은 작품도 있고 굉장히 다양해보이던데요? 작가 : 요즘에는 드로잉 작업을 많이 해요. 한 2년 전부터는 드로잉을 하기위해 종이 2만장을 사 모으니까 친한 미술상이 저를 보더니 종이 장사를 하려고 하는거냐고 묻더라고요 하하. 영국의 샌더스나 프랑스 아르쉬, 이태리 파브리아노 독일 하네뮬레, 요 네 가지를 구해달라고 했거든요. 그 미술상이 그런 고급종이로 2만장은 국내에서 구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갖고 있는걸 다 합쳐도 이만장은 안 되니까...그래서 그냥 제가 있는 건 다 달라고 했죠. 그러니까 저보고 이제 미술 접고 종이장사하려고 하냐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일주일 뒤에 제 작업실에 와 보고는 와, 무슨 종이를 이만큼 썼습니까? 그러더라고요. 그 정도 속도로 계속 드로잉 작업문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오천 장 정도 그렸거든요. 하루에 드로잉 10장, 그러면 한 달이면 몇 개입니까? 300개 아닙니까 그러면 1년이면 3600개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한 5년 안에 끝나는 거예요. 근데 제가 볼 때는 한 3년 안에 끝납니다. 그때까지 드로잉에 계속 매진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기자 : 그럼 주된 작품의 방향이 요즘은 드로잉을 통한 어떤 예술세계의 구현인건가요? 작가 : 아닙니다. 드로잉은 하나의 단계일 뿐이고 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이라면 정확히는 본질(本質), 재료의 물성(物性) 자체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물화일체, 현대철학으로는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을 생각하시면 될듯 한데요. 제 작품 안에는 의식의 주인이 없습니다. 즉 우리는 흔히 의식이 우리 삶의 주인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의식은 마음대로 언제든지 날아가 버리고 바뀌고 흩어져 실체가 없는 것이거든요. 저는 그 자아라는 것이 자기 실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실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실제 내가 그리는 것이 그 자아가 아니라는 데 제 작품세계의 근본철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반 작가들은 화가로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있는 거예요. 자기 자아를 실현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굉장히 잘못됐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화가라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게 아니다, 한 예를 들어 우리가 분재를 만들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실제 나무를 축소시켜서 모양을 만들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선호도, 기호, 기술 등 자아를 투영하죠. 하지만 이미 그 분재 안에는 아무런 자연으로서의 본질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분재를 예술로 보지도, 그것에 빠져들거나 매진하지도 않죠.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이아몬드를 발굴했다 그러면 그것을 가공을 해서 디자인을 해서 목걸이를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그 안에 세공사의 자아가 실현되고 투영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목걸이를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면 딸은 그걸 끼고 다닐까요? 아니죠. 다시 가공하거나 고쳐서 끼거나 팔거나 그러지 않으면 처박아두죠. 그 목걸이는 당시 최첨단의 디자인을 담고 있지만 다른 주체의 자아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외면받는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자아가, 화가의 자아가 실현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가치가 소멸된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것은 자아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 그 자체에 원초적인 뭔가가 있다는 것, 그 원초적인 본질, 드로잉에는 연필의 본질, 회화에는 회화, 물감의 본질, 그 물성이 담겨있는 것이고 저는 그 물성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 작가 정신입니다.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기자 : 아 하지만 그런 작가 정신 자체도 결국은 작가님의 의도, 자아가 투영된 것 아닌가요? 작가 : 그렇죠 본질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죠. 그걸 작품 안에, 물성과 본질의 뒤에 교묘하게 감추면서 보는 이를 속이는 게 지금 제가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물감은 그 물감 자체로는 그 본성, 물성이 전달될 수 없죠. 그 물감이 형상을 만들고 질감을 만드는 과정에서 화가로서, 작가로서 제 자아가 들어가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제 자아 대신 그 자아가 담아낸 물성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게 제일 어려운데 예를 들자면 중국의 대가들이 내놓는 큰 서예 작품을 보면 일필휘지, 한 번에 쓰윽 그린 것같은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큰 붓질 한 번의 느낌이 나게 하기 위해서 세필로 수십 번, 수백 번 그려놓는 겁니다. 멀리서 보면 큰 붓질의 질감을 통해 서예의 물성이 느껴지지만 가까이서 뜯어보면 작가의 자아가 구현해둔 물성, 본질인거죠. 제 작품에서도 한 300호 되는 작품을 30분만에 그릴 때는 실제로 내가 이걸 어떻게 그리겠다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손대기 시작하면 이미 물감이 흘러내려서 그림은 망쳐져요. 한번 올라가면 두 번 내려올 일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본질, 재료의 물성이 구현된 본질이 여지없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이 앞으로 시대가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들이 하나의 예술 이라는 본질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시도할 겁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지만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작품을 전부 태우는 것도,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몇 년을 창작에만 몰두하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는 무대를 버리고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대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대단한 용기나 결단을 강조하기보다 ‘나는 새로운 작품세계를 만들 자신이 있었고 지금 그러한 길을 쉼없이 걸어가고 있다’며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이 어쩌면 작가 자신이 이야기한 장자(莊子)의 붕정만리(鵬程萬里)처럼 기나긴 비행의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이런 생각마저도 그저 본질을 그릴 뿐인 그의 작품에 기자의 의도를 투영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 끝 -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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