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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중규기자
 표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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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2

매력 있는 예술 관련 콘텐츠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지역에서 열리는 전시나 공연을 일일이 발굴하고 이메일과 자료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그중에 몇 개를 골라 또 큐레이터나 작가, 갤러리 대표와 통화해서 촬영가능여부, 인터뷰 시간을 맞추고 그래도 실제 현장에 가면 또 상황이 바뀌고....그런 번거롭고 지루한 과정들이 매주 수차례씩 반복되면, 어느 순간 아무리 거장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취재기자와 촬영기자 모두 그저 무덤덤한 업무의 한 꼭지로 스쳐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굉장히 독특한 피드백을 받았다. 여느 날처럼 뉴스 제작을 위해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카메라 기자 후배가 며칠전 촬영한 그림이 정말 예뻣다고, 뜬금없이 얘기를 꺼냈다. 누구 전시? 어떤 작품? 이냐고 언뜻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되묻는 내게 물감튜브에서 꽃이 피어나는 소품이었는데 그 분위기가, 그저 예쁜 그림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밝아지고 기분 좋아지면서도 계속 기억에 남는 그림이라며, 인터뷰를 마친 작가에게 자기가 하나 구입하고 싶다고 하니, 벌써 이번 전시작품은 다 팔렸다고 미안해하더라면서 주말에 아내와 함께 다시 가서 봤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그 얘기를 듣자 언뜻 바로 그 주에 해운대 프랑스문화원에 의뢰했던 전시회가 떠올랐고 아 그런 이미지의 작품이었지 라는 기억이 언뜻 살아났다. 최은희 작가의 개인전인 <나를 피워내고, 너를 물들이고>에 대한 이례적인 찬사에 나 역시 호기심이 생겨 곧바로 주말, 작가가 없을만한 시간대를 틈 타 천천히, 조용히 전시장을 찾았다. 정확히 그 촬영기자가 말한 감상이 뭔지 와 닿았지만, 그보다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팽팽한 긴장감, 아슬아슬한 불안감은 좀 낯설고도 익숙한, 어떤 날것의 생동감으로 더 깊게 와 닿았다. 그런 기억과 함께 만난 작업실의 최은희 작가는 기대했던 이야기들과 예상하지 못했던 스토리들을 당연한 삶의 양면성인 것처럼 망설임없이 풀어냈다. 기자 : 전시회 작품을 보면 물감튜브에서 피어나는 꽃이나 풀이 많은데 어떤 인터뷰들을 보면 최작가님은 그걸 물감주머니라고 굳이 표현하셨더라고요. 혹시 어떤 다른 의미가 있나요? 최은희 작가 (이하 작가) : 제 작업 안의 물감 튜브는 원래 물감 주머니에서 시작하는데 이 물감 주머니는 온전히 제 상상에서 출발해요. 식물의 뿌리에는 숨겨진 물감 주머니가 있어서 어떤 씨앗을 뿌리면 그 빨간색 물감주머니에서 빨간색 꽃이 피어나나 봐 라는거죠. 어릴 때 제가 하던 상상인데 뿌리가 있으면 뿌리의 마지막에 물감 주머니가 있고 이 물감을 빨아들여서 빨간 꽃이 피는 거겠지. 뿌리에 물감 주머니가 달려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 왔던거죠. 그런데 알고 보면 시금치는 사실 빨간색 씨앗이고 갓김치를 만드는 갓은 파란색 씨앗이에요. 그런데 여러 색깔의 씨를 뿌렸는데도 다 똑같이 초록색에 입이 나는 게 참 신기하지 않나요? 특히 꽃은 대부분의 씨앗이 다 갈색류, 어두운 색류가 많아요. 요즘은 모종 자체를 심는 게 더 많은데 씨앗부터 피워내기가 힘들어서 사실 모종을 심는 거거든요. 농사를 하면서 많이들 하는 게 씨앗부터 해서 좋은 결과물을 얻기 힘들다 하지만 씨앗부터 키우는 게 사실 진짜예요. 저는 그 씨앗부터 키우는 그런 꽃들이나 작물들을 보면서 씨앗이 처음에는 어두운 색깔이다가 뿌리를 내리고나면 초록색 잎을 피우고 노란색 꽃을 피우는 뿌리를 내리는 모습이 사실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생겨난 물감 주머니 때문이 아닐까 그냥 그렇게 상상을 하면서 물감주머니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 거죠. 기자 : 그런데 굳이 물감주머니가 아니라 물감튜브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실제로 나중에는 물감주머니가 아니라 진짜 물감튜브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걸로 옮겨갔잖아요? 작가 : 그때 그 물감 주머니 자체는 저한테 ‘제가 가지지 못했지만 제 속에 갖추고 있는, 그런 재능’을 뜻하는 개념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저는 저 자신이 ‘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저는 지금도 제가 재능이 없는데 결국 버티고, 미술이 하고 싶기 때문에 남아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 아...작가가 스스로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니까 제가 뭐라고 대화를 이어가야할지 당황스럽네요. 그럼 혹시 꽃이 없는, 무화과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인가요? 작가 : 음...정확히 저는 제가 초록색 물감에 초록색 이파리만 피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초록색 물감을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작품 활동 초반에 그린건 대부분 다 초록색 물감으로 그린 이파리들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약간 좀, 그 지점을 뛰어넘었나 봐요 요즘은 그림에서 특별히 초록색 물감이 나오지를 않는데 제 그림을 처음부터 쭉 보신 분들은 ‘요즘은 왜 초록색 물감이 없어요?’ 이 얘기를 많이 하시거든요. 왜냐하면 초록색 물감이 바로 ‘나’니까, 초록색 물감에서 초록색 잎만 피워낼 수 있는 게 나라고 생각하고, 나 자신은 초록색 물감이니까 정작 꽃은 못 피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제가 그런 지점에 부딪칠 때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좋겠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나도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능이 있었으면... 그런데 그 재능이 계속 저한테는 빨간 꽃을 피우고 노란 꽃을 피우는, 어떤 뿌리들이 어느 곳엔가 분명히 숨겨두고 있는, 그런 물감 주머니들 같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작가들을 보면 쟤는 나처럼 까만 씨앗 심었는데도 빨간 꽃을 피우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한테도 그런 물감 주머니가 있었으면, 내가 그렇게 꽃 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작품들을 그리게 된 거에요.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붓이랑 물감 튜브가 연결된 거였어요. 그래서 예전 작업들 보면 붓에서 이렇게 나온다든지, 식물의 붓에서 물감이 이렇게 쭉쭉쭉 떨어지는 작업들이 있었고 이제 그게 물감 튜브로 바뀌게 된 거죠.
기자 : 왜 본인에게는 본인이 원하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작가 : 그냥 쉽게 말하면 만약 누군가 ‘내가 여기에 이 꽃을 그려야지’ 하면 감수성 넘치는, 무언가에 영감을 가진 작가들은 그리면서 무언가를 해 나가다보면 그 안에서 꽃을 피워내거든요. 저는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물감 튜브를 그려야지 고 스케치를 해 두고 여기도 뭔가를 띄우고 여기도 간격이 같아야 되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꽃이어야 되는, 그런 형태의 강박이 너무 심한 거예요. 근데 이 강박은 사실 막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그릴 수 없어서 오는 강박이에요. 저는 제가 원래의 루틴대로 앉아서 내가 원래 사용하던 물감과 내가 원래 그리던 그런 재료들 그다음에 나의 환경 안에 있어야 내의 퀄리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더라고요. 근데 젊은 작가들, 제 제자뻘 되는 작가들 가운데서는 정말 캠핑하듯이 스케치북, 야외에 나가서 할 수 있는 도구를 들고 가서 그날 하루, 모네처럼 앉아서 그날 하루에 시간별 하늘을 그리고 오고 산을 그리면서 작품을 내놓는 거에요. 예를 들어 장건율 작가라고 있는데 걔를 보면서 약간 충격을 받았어요 ‘저렇게 재능이 많은 애들이 많았지’ 라는 생각을 또 그때 한 번 했거든요. 제가 작년에 그 작가의 개인전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까지 재능이 없으니 늘 내가 뭔가 이렇게 상황을 만들고 또 그 상황 안에서 노력을 해야 겨우 이 결과물을 뽑아내는데, 저 작가들은 땅바닥에 앉아서 어느 공간이든 자유롭게 막 분출해내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그렇게 못하는 작가더라고요. 이런 대화를 하면서 좀 아이러니했던건 강박을 이야기하는 최작가의 표정은 강박에 묶여있다기보다 아 내가 강박이 있어 라고 하면서 그 강박 자체를 하나의 객관적인 존재로 물화(物化)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강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미워하지도 않고 일부러 내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부인하지도 않는, 그저 언제든 함께 내 곁에 있는 나의 수많은 페르소나 가운데 하나로, 담담하게 손잡고 함께 가는 동반자로 이야기하는 그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작가 : 저는 하나도 틀어지면 안 되는 그런 강박들도 좀 있어서 아시다시피 오와 열이 정확하게 맞아야 하고, 그 오와 열을 맞추는데 시간이 또 들어요. 그러니까 다른 작가들 시간 딱 두 배가 드는거죠. 간격 맞추고 있어야 되고 높이도 맞춰야 되고 뭐 이러다 보니까 저는 ‘아 내가 막 이렇게 막 뿜어낼 수 있는 에너지나 재능이 없어서 이렇게 강박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고 그러니까 나 스스로는 꽃을 피우는 게 아닌, 초록색 흔한 잎만 피워내는 그런 식물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작업을 하게 된 거죠. 기자 : 하지만 요즘 그림 속에서는 초록색 잎이 아니라 다양한 꽃이나 식물, 혹은 채소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던데요? 이제 그런 강박을 벗어난건가요? 작가 : 아직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요. 지금 제가 그리고 있는 작품들이 이제 곧 아트페어에 보낼 작업들인데 아트페어에서 좋아하시는 꽃들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희 갤러리 대표님은 꽃 좀 그려라, 제발 이상한 식물 좀 그려오지 마라고 하시거든요. 실제로 제가 그리는 작품들 중에 진짜 제가 밭에서 농사짓거나 직점 보고 그린 작물들은 사실 잘 안 팔려요. 어머님들이랑 얘기하다 이거 갓인데요 이러면 아이고 그 갓김치 갓이네 하고 그냥 안 사시거든요. 그런데 시카고나 외국에서는 그런 작품들이 다 팔려요. 그래서 지금은 아트페어용이어서 조금 더 꽃이 많은데 이제는 제가 예전에 하던, 제가 갇히는 작업들이 좀 갑갑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깨내려는 작업을 많이 하는거죠. 예를 들어 강박에 갇힌 나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만들었던 작품이 현재까지 많이 한, 물감 주머니에서 나오는 꽃 피는 식물들이었다면 이제 이걸 훼손시키는 시도 자체가 ‘지금까지의 나를 똑바로 봤으니까 기존의 나를 어떻게 깨보고 변화해 보자는 그런 시도라고 생각을 해주시면 될거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깨려고 하고는 있는데 사실 그다음에 뭔가 자유롭게 움직여야 되는데 저는 사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까지도 이미 정해놨어요. 반드시 여기에 하나가 있고 그다음 물감이 들어와서 뒤집어지자 뭐 이런 식으로 배치를 사실 자유롭게 움직인 게 아니죠. 그래서 지금의 프레임을 깨면 그 새로워진 프레임 안에서 내가 자유로워져야한다, 그게 남아있는 저의 몫인 것 같거든요. 제가 이제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달렸는데 그건 이제 또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고요. 이런 고민 속에 물감 자체를 없애보자 라고 생각해서 물감튜브 자체를 없애고 꽃에서 물감들이 그냥 흘러내리는 작업들을 이번에 아트 부산, 시카고 이런 전시회 때 다 같이 선보였죠. 그게 올해 신작이에요.
기자 : 아 시카고 아트페어 다녀오신게 얼마 전이라고 하셨죠? 거기서는 반응이 어땟나요? 작가 : 제 그림이 시카고에서 열린 아트페어에서 첫날, 제일 처음으로 저희 부스에서 스타트를 끊었는데 그걸 사신 분이 VIP 오프닝 때 온 시카고 미술관 펀드 헤드 디렉터였어요. 세계 최고수준의 미술관들은 후원회에서 후원금을 받아서 모든 걸 운영하는데 그 후원회의 대장인 거예요. 거기 계신 분이 와서 제 걸 사면서 율무, 염주 얘기를 듣고 사 가셨는데 그 작품이 예쁘긴 예뻣거든요. 그건 사실 저도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저는 너무 기쁘긴한데 왜 제 작업이냐고 사실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그 디렉터가 오늘 들어와서 딱 한 작업 사 갔는데 네 걸 사 간다. 여기 와서 너를 처음 알았다고 하는데 왜 내 거였지 라고 물으니까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있대요. 그래 서양 사람이 나를 보고 계속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길래 뭐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제가 가는 날까지 들은 말이 그거예요. 어디서 동양의 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동양의 미, 뭐 제가 그리는 식물도 동양적이다. 라인도 동양적이다. 재료도 동양적이다 라고 계속 그래서 ‘아니다 이거 아크릴이다 이거 캔버스도 너네가 쓰는 린넨 똑같은 거야 너네 린넨이 더 좋아 나는 한국에 살아서 한국 린넨 쓰는 거야’ 라고 하는데도 아니래요. 자꾸 제 작품보고 동양적이래. 그 동양적인 미에 다 사람들이 반한거래요. 사실 그때 들고 간 작품들이 깻잎, 갓, 무 같은 건데 걔들은 무에 무청도 저희처럼 안 생겼대요. 그런 모든 것들, 그냥 모든 게 동양적이어서 너무 매력적인 거래요 그 분들한테는. 제가 그린 그런 식물들은 사실 제가 직접 농사를 짓고 직접 키우고 있거든요. 물론 그게 아주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가 우리 주변이나 우리 삶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소재와 상상을 가지고 그렸는데, 그게 이제 더 발전이 되면서 해외 시장에 가니까 그런, 조금 다른 형태의 반응이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기자 : 최작가는 부산예고 다니면서부터 계속 그림 그려오셨잖아요. 그동안 지금의 이런 화풍의 작업을 계속 발전시켜 오신건가요? 작가 : 아 사실 정확히 그림 작업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2019년부터에요. 부산대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석사는 미술교육, 박사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작업보다는 사실 교단에서 강의에 전념해온 시간이 10년이 넘거든요. 교단에 서면서 박사과정을 계속해왔는데 미술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된건 사실 박사 논문을 다 쓴 다음이었어요. 그즈음 박사를, 제가 6년 정도 하고 있었거든요. 박사를 6년 정도 하면서 박사 논문을 다 쓰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가 목표였어요. 그때 너무 제가 힘들어하니까 박사논문 쓰지 말라고 주변에서 말리기도 할 정도였죠., 그런데 제가 솔직히 저 스스로의 프레임에 갇혀 있기도 하고, 좀 원래 어릴 때부터 환경 자체가 저를 좀 많이 쪼으는 상황 아래에서 크다 보니까, 지도 교수님이나 부모님이 박사를 시작했는데 박사를 졸업 안 하면 안 된다 라고 엄청 많이 간섭하셨어요. 사실 박사를 수료만 하는 사람 많거든요. 그런데 제 지도 교수님은 내가 박사를 안 받으면 자신의 인생에 오점이 되니까, 꼭 받아야한다고 너무 압박을 주셨어요. 집에서도 그 비싼 박사학위 과정 학비를 다 대줬는데 꼭 받아야한다고 하셨죠. 그리고 사실 이건 비밀인데 당시에 동서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는 제 앞에 방정아 선생님이 학위를 받으셨었거든요. 제가 들어갈 때 방정아 선생님이 끝났을 때 딱 그 시점이었는데 저는 약간, 작가로서 방정아 쌤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방정아 쌤이 그 박사학위를 받은 것 때문에 더 룰루랄라, 나도 꼭 받아야지 하면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그정도 생각으로 들어가서 그랬을까요 딱히 박사에 대한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박사 논문을 쓰는 것 자체가 고역인 거예요. 그래서 논문만 쓰는 2년 동안 내가 불행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요. 그러니까 이걸 끝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가 같이 붙는 거죠. 내가 지금 너무 불행하니까 이건 끝나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그런데 끝내고 난 다음에 하고 싶은 게 그래서 뭐니, 뭐든 네 마음대로 해라 라고... 지도 교수님이나 부모님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입을 모아 그러셨어요. 그때 제게 든 생각이 아 나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림을 그리는 게 나의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아 였어요. 사실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니까 이제 교수라는 직업, 커리어도 있고 작업에서 손을 뗀지도 좀 되고 그러니까 전부 가볍게 작업해라 뭐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뭐 제가 작업을 전혀 안 하던 것도 아니고...시각 디자인으로 박사를 따면서 1년 한 학기에 두 번씩 전시를 해야 했어요. 단체전을 매번 하고 있는데, 미술작업도 그렇게 하면 되지 너무 다들 쉽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렇게까지 전업적으로 미술작업을 할 줄은 몰랐던 거죠. 지금은 다들 그때 그러더니 진짜 이렇게 하는구나, 난 네가 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 말을 진짜 많이 하시거든요 하하. 그게 사실 계기였어요. 기자 : 그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저도 석*박사 과정에만 11년이 걸려서...그 어려운 과정에 100% 공감합니다. 하하. 그럼 그 이후 7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이제 린넨에 아크릴물감으로 그리는 작품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작가 만의 스타일로 인정을 받은 것 같네요? 작가 : 음...그렇긴 한데, 그 부분에서 역설적으로 이제 고민을 시작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이 작업으로 인지도가 꽤 많이 쌓여서 아트페어에서 이제 팔리기 시작했고 꽤 많이 ‘린넨으로 물감 튜브 그리시는 작가님’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는데, 제가 몇 년간 쌓아 올린 저만의 경력인데 이걸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시점이 왔나 라는 고민이 들어요. 뭐 아직은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걸 버리는 순간이 오려면 좀 더 해야 될 것 같아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지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그러니까 교수를 맡은 지가 이제 12년 차거든요. 10년을 향해 달려갈 때, 8년 차쯤에 정말 미련도 없이 놓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한 5, 6년째까지는 미련이 많았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 학교에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이런 생각도 많았고 학교라는 이 집단 안에서 가지는 명예도 좀 가져보고 싶었거든요.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겸임 초빙 ...너무 그 명예도 좀 쥐어보고 싶었고 그랬는데, 딱 어느 지점이 저한테 제 스스로가 할 만큼 다 한 어느 지점이 오니까 너무 가볍게 버릴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저는 자동 계약이라 컴퓨터에 들어가서 클릭만 하면 자동으로 교수로 재계약이 되는데 올해, 계약 안 하고 내년에는 시간 강사 한다고 학교에 말씀을 드렸거든요. 교수직에 더 이상 미련도 없는데 자꾸 그림을 그려야 할 내 시간을 뺏기는 거예요. 이제 학교일이나 다른 업무로 시간과 열정을 뺏기는 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거에요. 근데 예전에 한 몇 년 전 같으면 이렇게 결단을 못 내렸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작업, 린넨에 굉장히 공들여 하는 이 작업들도 마찬가지에요. 최근 3년 정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데, 바꿔야한다는 고민과 갈등은 많은데 아직은 그걸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걸로 그래도 뭔가 사람들한테 일단은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본질적인 방법을 바꾸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기자 : 그럼 지금은 기존의 물감튜브 작업과 동시에 그 기존의 스타일을 바꾸기 위한 변신을 함께 시도하고 계신건가요? 작가 : 네 지금은 일단 두 가지 방향으로 시도하고 있는데, 우선은 제가 기장군의 한 밭, 야외에 제 작품을 설치하는 전시회를 지금 진행하고 있어요. 사실 작가들이랑 같이 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 반 정도, 직접 밭에서 작물을 키워왔거든요. 지난해는 좀 규모가 작았는데 올해는 아예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하반기에는 배추를 심어서 김장까지 할 계획이에요. 작가들끼리 서로 물 당번이 있어서 돌아가면서 물을 주고 비닐멀칭도 절대 하지 않고 약도 쓰지 않고 모든 걸 친환경으로 키우는 프로젝트에요. 그런데 올해는 그 옆에 제 작품을 직접 전시하고 있어요. 이번 기획은 부산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가능해진 건데, 전제 조건이 밭에다가 그림을 심겠다. 내가 심는 행위를 했는데 내 작업이 다 자연물이라 밭에 심어야겠다. 밭에 그림을 심고 이 프레임에서 얼마나 재미있는 물감들이 그 땅 밑으로 쏟아지는지 확인하고 싶다 라는게 기획의도에요. 그게 신선하게 다가갔는지 선정이 된 거죠. 대부분의 작가들이 어쨌든 캔버스든 뭐든 어떤 프레임에서 작업을 하잖아요. 그거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프레임을 벗어나면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어느 순간, 제 그림이 미술의 정통성 안에, 너무 틀에 박힌 전형적인 회화, 고지식한 그림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아 이거 작정하고 한번 훼손시켜봐야겠다. 이걸 의도적으로 훼손시켜서, 그 훼손시킨 작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밭에서 나온 작물을 대상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밭에, 야외 설치를 하는 회귀(回歸)를 기획한거죠. 실제로 작품을 밭에 설치하고 그 설치가 다 된 걸 공유한다고 사진을 보내니까 모두의 질문이 그거였어요. “회화 작품을 저렇게 두면 되나요?” 하하. 모두가 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제일 많았는데 “제가 훼손시키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설명했죠. 그래서 한달 동안 전시가 끝날 때까지 밭에 놔둔 다음에 수거를 하면, 그 안에 분명히 제가 생각하는 자연의 무언가, 그 자연의 내용들이 묻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거 자체를 제 작품세계랑 같이 융화시켜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그 결과물이 나오면 이번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거죠. 또 동시에 작품의 크기에서도 변화를 추구하고 있어요. 사실 8호짜리 작업을 제가 올해 2월부터 시작해서 5월까지 정확하게 35점을 그렸어요. 거의 뭐 저한테는 진짜 말도 안 되는 개수거든요.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걸리기 때문에 거의 학교를 갔다가 매일 작업실로 와서 그림만 그려야 나올 수 있는 개수였거든요. 근데 8호짜리 30점이면 300호가 넘어갑니다. 붙이면 400호 정도의 크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쉬지 않고 8호짜리부터 30호짜리, 50호짜리 작업을 계속해 왔는데 이제 그게 아니라 통으로 큰 작업, 100호, 200호, 300호짜리 대형작업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요. 저는 발전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맨날 똑같은 걸 그리고 있는 작가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게 제 목표에요. 그래서 다들 이제 물감 튜브 잘 팔리니까 물감 튜브만 그리면 되지 않아? 라고 하는데 그런 작가는 되지 않겠다는 게 제 변하지 않는 다짐이에요. 내가 갤러리 작업만 하고 상업 작가가 되어도, 결국에 미술관에 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대단한 미술관 작가가 하지 못해도 ‘무조건 똑같은 것만 그리고 있는 작가는 절대 되지 말자‘가 제 작업 시작할 때 목표였어요. 매년 새로운 작업을, 조금 더 다른 세계관으로 뻗어나가서 무조건 다른 작업 하나는 해야 한다. 매년 다른 또 물감 주머니에서 다른 게 태어나서 다른 작업을 꼭 해야 한다가 흔들리지 않는 제 유일한 신념입니다. 최은희 작가가 그리는 튤립은 작가가 직접 구근을 심고 물을 주고 겨울을 날 때까지 애정을 쏟아 부어도, 때때로 말라죽고 병들어죽고 어렵게 피어난 뒤에도 고작 한철을 지나지 못하고 시들어 죽는, 그런 가냘픈 식물이다. 하지만 따스한 질감의 린넨 위로 붓에서, 물감주머니에서, 물감튜브에서, 그리고 이제는 물감 그 자체에서 피어나는 튤립은 작가가 숨기지 않는 ‘재능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뿌리를 둔 투쟁’을 통해 좀처럼 바래지않는 단단한 행위자로 거듭난다. 그런 지난한 노력 끝에 자연에서 화폭으로 옮겨낸 튤립을 이제 다시 화폭 채로 자연 속에 돌려놓는 실험, 그 의도적인 훼손을 통해 작가는 또 어떤 새로운 튤립을 꿈꾸는 것일까?
2025.11.10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1

부산 기장 빌라쥬 드 아난티의 갤러리 입구에서 가장 오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묵직한 존재감 그 자체였다. 인간의 형상처럼 보이지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회화로 분류되어야 하겠지만 두터운 질감은 부조에 더 가까웠으며, 캔버스 전반이 블랙홀처럼 어두웠지만 빨아들이기보다 강렬하게 쏟아내고 있는 그림, 작품명이 『현자(賢者)』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그 그림 자체가 응축하고 있는 질량감은 단순히 기술적인, 기법상의 완성이라기보다 실제로 작가가 쏟아 부은 지난한 시간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렵게 연락을 통해 만난 작가 길후는 짧게는 찰나에서 길게는 십수년을 작품 한점 한점에 쏟아 부으며, 그러면서도 세상에 내놓은 작품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태우고 부수면서 쌓아온 작품 세계에 대해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인 듯 편안하게 설명했다. 기자 : 전시회 때 작품 『현자(賢者)』를 특히 관심 깊게 봤습니다. 거의 회화라기보다 마티에르만 봐서는 부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보였는데요, 보통 작품에 이렇게 깊은 무게감을 담으려면 제작기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겠죠? 길후 작가(이하 길후) : 음... 『현자(賢者)』 같은 작품은 10년 이상 작업기간이 걸린 게 맞지만 함께 전시했던 300호 넘는 작품들은 작업하는 데 30~40분 밖에 안 걸린 작품들도 많아요. 평균적인 작업기간을 말씀드릴 수 없는 게, 어떤 건 6개월씩 또 때로는 몇 년씩 작업하다가 한쪽에 처박아 두고는 또 몇 년 만에 다시 시작을 하기도 하고 그래요. 다만 작품 자체가 태어나고서 공개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말씀하거 라면 최소 삼 년 이상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저는 늘 삼 년마다 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거든요. 삼 년 지나고 내가 봤을 때 나를 감동시켜 주지 않으면 그 작품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없애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작품을 없애는 게 내 주된 일입니다. 지금도 대구 작업실에 가면 큰 소각장이 있습니다. 작업실 곳곳에 항상 부서진 캔버스 합판이 널려져 있습니다. 그런 건 제가 다 없앤 겁니다. 기자 : 굉장히 스스로에게 엄격하시네요. 원래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작업을 계속해오신건가요? 작가 : 아니에요 정확히는 밀레니엄, 2000년부터라고 할 수 있죠. 그 해가 제 생애에 어떤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제가 서른 아홉이 되었을 때, 99년도까지 그린 작품이 만 6천여 점 됐어요. 그런데 그때 2000년에 그걸 다 버렸어요 불태워서. 다 버리고 새로 이제 밀레니엄에 맞춰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지금의 저는 그때 새로 시작한 거라고 봐도 됩니다 밀레니엄이 그때 준 충격이 제게는 굉장했습니다. 우주 전체와 세상의 질서, 모든 것이 바뀌어지는 시기에 ‘나는 과연 새로운 밀레니엄에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거죠. 그래서 나는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나간다, 그래서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다 불태우고 없애고 그때부터는 블랙을 한 거예요. Refusal to Coming Dawn, 2003, Acrylic Ink on paper, 100X71cm
Refusal to Coming Dawn, 2003, Acrylic Ink on paper, 100X71cm
기자 : 특유의 블랙, 그러니까 블랙페이퍼 작업을 시작하신게 그때부터군요. 그런데 보통 블랙이라는 색깔이 작가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색깔이 아니라고 하던데 굳이 블랙을 선택하신 건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작가 : 제가 2000년도, 밀레니엄에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 블랙이라는 색깔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전에 그린 그림을 다 태웠다는 이야기는 제가 새롭게 태어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이 블랙이라는 색깔이 가장 고귀한 태초의 색, 근원을 뜻하는 색인만큼 그런 블랙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제 새로운 출발을 블랙과 함께 선언했습니다. 그런 제 확신이 가장 강렬했던 때였기 때문일까요, 제 작품 중에 제일 좋은 작품들은 2000년도에 그린 블랙 페이퍼 작품들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0년부터 2003년 요때 그린 블랙 페어퍼 작품들은 지금 제가 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계속 블랙만 쓰는 줄 아시는데, 사실 지금 제 작업실에는 평소에도 열려있는 물감색깔이 한 50개 정도 됩니다. 그래서 제 작업실은 아무리 추워도 난방을 못 해요. 그렇게 다양한 색깔로 작업을 하지만 제가 새로운 제 출발을 백지 위가 아닌 흑지 위, 검은 색, 우주의 근원을 담은 블랙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선언적인 의미가 있고 거기서 담은 내공들은 이제 최근에 황금색까지도 확장되었습니다. 이 골드 역시 화가들이 쉽사리 선택하기 힘든 색이지만 저는 충분히 제 작업 속에서 활용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펼쳐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작품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색채의 폭을 넓혔다는 게 맞겠죠. 이런 변화는 당연히 단순한 혼자만의 자신감만으로는 되는건 아니고요, 항상 물밑에서 쉴새없이 헤엄치는 백조처럼 계속 다양한 세계를 탐색하며 연구하는 작업이 이어집니다. 사실 황금색을 사용하게 된데도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2016년부터 2년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프란치스코 성당 앞에 있었거든요. 그 기간동안 매일 가서 당시 대가인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림을 관찰했어요. 성화는 금박, 그러니까 얇은 금색을 입혀서 화려하게 꾸미는데 우리 고려문화도 박을 입혔잖아요 그런데 성화에서 여전히 금색을 기본으로 배치하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는 고려 이후로 박을 입히지 않았거든요 기법이 공예적이고 이게 회화에서는 번쩍번쩍 비치니까 어울리지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주력해온 블랙에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색이 또 금박이거든요. 저걸 어떻게 회화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지만 제가 해온 회화에서도 금색이나 스틸, 메탈을 쓰면 절대 안 되는 게 불문율이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절대 안 어울립니다. 근데 제가 하는 건 붓의 본질에 그 에너지를 담기 때문에 사용이 가능한 거죠. 뭐 색이 뜬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것, 그런 개념이 없는 거예요. 특별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본질인 붓에 금색을 찍어서 그리면 그게 하면 그게 본질로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거죠.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기자 : 이탈리아 성화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으셨군요. 분위기에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력을 살펴봤더니 중국에서 오래 작품 활동을 하셨던데 유럽까지 함께 담아내셨다는건 몰랐습니다. 혹시 해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주로 해외활동을 해오신건가요? 작가 : 그렇게 보이나요? 허허 전혀 아닙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학은 대구 계명대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미술작업도 계속 대구에서 해왔는데 2010년 북경에 처음 갔죠. 지금도 북경에 작업실이 있고 1년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넘어가기도 힘들고 국내작업도 바빠져서 예전처럼 오래 있거나 자주 가지는 못 합니다. 기자 : 그런데 왜 중국을 택하신거죠? 그때 작가님은 이미 한국에서는 오래 활동하신 상황이잖아요? 그즈음이면 수도권에서서 바로 활동하셔도 됐을 텐데 굳이 중국에서 활동하시다가 다시 돌아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 : 수도권에서 바로 활동이라...그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한국은 아무래도 지연, 학연이 앞서 가는 사회이고 제가 지방대학을 갔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중심에 서울대, 홍익대 라는 판이 사실 짜여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작품을 내놔도 사실 진입이 어렵고요. 제가 파주의 레지던시에서 작업을 하면서 서울 쪽 예술계 흐름을 보니까 자기들끼리 굉장한 공고한, 그런 카르텔이 있어서 한 1년을 작업했는데도 아무도 저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레지던시 작업 기간이 끝나고 개인전을 했을 때는 제가 가장 관심도 많이 받고 작품이 판매도 잘 되고 너무 성과가 좋았어요. 그래서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한계인가 라는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2011년 대만에 본사를 둔 소카 아트센터(Soka Art Center)가 베이징 798에 갤러리를 오픈하면서 제가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베이징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현지에서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현지 전시를 계속 열기 위해 현지에 작업실을 구하고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첫 개인전이 북경에 있는 아트 사이드 라는 갤러리에서 열리게 되면서 제 무대가 중국으로 확장된거죠. 그때 아 내가 더 이상 국내시장, 이미 짜여진 판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 뜨고 있는 북경으로 가자 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세계적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 관장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 오는 시대가 아니고 북경으로 가는 시대였어요. 이 대목에서 길후 작가는 찬물을 한 모금 마셨다. 중국 예술촌에서 작업을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저 화가는 그림만 그리는 벙어리*(장애인 비하적인 발언이 아니라 중국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인용 그대로라며 작가도 양해를 부탁했다.)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작품 활동에만 집중했다는 이야기를 했던터라 중국 생활의 애환이 잠시 떠올랐던게 아닐까. 작가 : 북경으로 갔다고 모든 게 쉽게 풀린 건 아니었고요. 중국 베이징에 페이스 갤러리라고, 그 뉴욕 첼시 가에 있는 그 페이스 갤러리의 지점 격인데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거든요. 에이전시 같은 소속사도 없이 개인작가가 거기 문을 두드리니까 관장이 일단 도록을 한번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작품 보고 그림은 좋은 것 같은데 직원들 보고 정보를 한번 찾아보라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메이저 화랑이죠, 화이트박스 라는 화랑과도 연결이 되었어요. 화이트박스에서 제 도록과 실제 작품을 보고는 흔쾌하게 전시를 하자고 제안하면서 오히려 페이스 갤러리보다 빨리, 바로 그해 개인전을 열게 됐습니다. 그걸 보고 중국 작가들이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중국 작가들도 한 3천만 명 되지만 그런 메이저 화랑에 전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중국에서도 그런 메이저 갤러리에서 1년에 기획전을 6~7번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이 전속작가들이지, 새로운 작가가 거기에 들어갈 제출할 가능성은 1년에 많아봐야 한두 명인데 한국 작가가 중국에서 거길 파고든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걸 제가 개인적으로 이뤄내니까 중국 예술가 사회에서 저를 새롭게 보고, 이렇게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좀 저를 우러러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중국에서 화단을 개척했고 이게 서울을 통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어떤 기회가 된 셈이죠. [2014] The Wise Man_200x200_Mixed media on canvas
[2014] The Wise Man_200x200_Mixed media on canvas
기자 : 지금 학고재 전속이시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학고재까지 연결이 된건가요? 작가 : 2021년도에 학고재에서 우찬규 회장님이 연락이 왔더라고요. 우연히 제 작품 도록을 보다가 왜 자기가 지금까지 이런 작가를 몰랐지 하면서. 그런데 사실은 제가 도록을 만들어도 이전에는 일부러 화랑이나 미술계에 한번도 안 보냈거든요. 왜나면 책으로, 도록으로 알려지면 그쪽에서 전시회를 하자고 연락이 오곤 하는데, 그러면 내가 정작 내 작품활동을 할 시간이 모자라지는 상황들이 저로서는 정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일단 도록을 보내놓고는 그림을 못 그려 보낸다고 변명할 수도 없고해서 그때까지는 도록을 일부러 별로 안 보냈는데 그때 우회장님한테 딱 걸린 거죠. 그 때 이후로 국내외 활동을 학고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또 활동폭도 늘고 서로 호흡이 잘 맞아요. 기자 ; 그렇군요. 오늘 시간을 많이 빼앗았는데 마지막으로 요즘 작품활동 방향 한번 여쭤봐도 될까요? 전시회에서 보니 『현자(賢者)』처럼 십수년을 담은 작품들도 있고 또 순식간에 그린 현대 추상같은 작품도 있고 굉장히 다양해보이던데요? 작가 : 요즘에는 드로잉 작업을 많이 해요. 한 2년 전부터는 드로잉을 하기위해 종이 2만장을 사 모으니까 친한 미술상이 저를 보더니 종이 장사를 하려고 하는거냐고 묻더라고요 하하. 영국의 샌더스나 프랑스 아르쉬, 이태리 파브리아노 독일 하네뮬레, 요 네 가지를 구해달라고 했거든요. 그 미술상이 그런 고급종이로 2만장은 국내에서 구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갖고 있는걸 다 합쳐도 이만장은 안 되니까...그래서 그냥 제가 있는 건 다 달라고 했죠. 그러니까 저보고 이제 미술 접고 종이장사하려고 하냐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일주일 뒤에 제 작업실에 와 보고는 와, 무슨 종이를 이만큼 썼습니까? 그러더라고요. 그 정도 속도로 계속 드로잉 작업문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오천 장 정도 그렸거든요. 하루에 드로잉 10장, 그러면 한 달이면 몇 개입니까? 300개 아닙니까 그러면 1년이면 3600개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한 5년 안에 끝나는 거예요. 근데 제가 볼 때는 한 3년 안에 끝납니다. 그때까지 드로잉에 계속 매진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기자 : 그럼 주된 작품의 방향이 요즘은 드로잉을 통한 어떤 예술세계의 구현인건가요? 작가 : 아닙니다. 드로잉은 하나의 단계일 뿐이고 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이라면 정확히는 본질(本質), 재료의 물성(物性) 자체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물화일체, 현대철학으로는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을 생각하시면 될듯 한데요. 제 작품 안에는 의식의 주인이 없습니다. 즉 우리는 흔히 의식이 우리 삶의 주인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의식은 마음대로 언제든지 날아가 버리고 바뀌고 흩어져 실체가 없는 것이거든요. 저는 그 자아라는 것이 자기 실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실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실제 내가 그리는 것이 그 자아가 아니라는 데 제 작품세계의 근본철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반 작가들은 화가로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있는 거예요. 자기 자아를 실현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굉장히 잘못됐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화가라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게 아니다, 한 예를 들어 우리가 분재를 만들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실제 나무를 축소시켜서 모양을 만들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선호도, 기호, 기술 등 자아를 투영하죠. 하지만 이미 그 분재 안에는 아무런 자연으로서의 본질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분재를 예술로 보지도, 그것에 빠져들거나 매진하지도 않죠.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이아몬드를 발굴했다 그러면 그것을 가공을 해서 디자인을 해서 목걸이를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그 안에 세공사의 자아가 실현되고 투영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목걸이를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면 딸은 그걸 끼고 다닐까요? 아니죠. 다시 가공하거나 고쳐서 끼거나 팔거나 그러지 않으면 처박아두죠. 그 목걸이는 당시 최첨단의 디자인을 담고 있지만 다른 주체의 자아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외면받는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자아가, 화가의 자아가 실현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가치가 소멸된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것은 자아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 그 자체에 원초적인 뭔가가 있다는 것, 그 원초적인 본질, 드로잉에는 연필의 본질, 회화에는 회화, 물감의 본질, 그 물성이 담겨있는 것이고 저는 그 물성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 작가 정신입니다.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기자 : 아 하지만 그런 작가 정신 자체도 결국은 작가님의 의도, 자아가 투영된 것 아닌가요? 작가 : 그렇죠 본질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죠. 그걸 작품 안에, 물성과 본질의 뒤에 교묘하게 감추면서 보는 이를 속이는 게 지금 제가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물감은 그 물감 자체로는 그 본성, 물성이 전달될 수 없죠. 그 물감이 형상을 만들고 질감을 만드는 과정에서 화가로서, 작가로서 제 자아가 들어가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제 자아 대신 그 자아가 담아낸 물성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게 제일 어려운데 예를 들자면 중국의 대가들이 내놓는 큰 서예 작품을 보면 일필휘지, 한 번에 쓰윽 그린 것같은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큰 붓질 한 번의 느낌이 나게 하기 위해서 세필로 수십 번, 수백 번 그려놓는 겁니다. 멀리서 보면 큰 붓질의 질감을 통해 서예의 물성이 느껴지지만 가까이서 뜯어보면 작가의 자아가 구현해둔 물성, 본질인거죠. 제 작품에서도 한 300호 되는 작품을 30분만에 그릴 때는 실제로 내가 이걸 어떻게 그리겠다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손대기 시작하면 이미 물감이 흘러내려서 그림은 망쳐져요. 한번 올라가면 두 번 내려올 일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본질, 재료의 물성이 구현된 본질이 여지없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이 앞으로 시대가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들이 하나의 예술 이라는 본질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시도할 겁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지만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작품을 전부 태우는 것도,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몇 년을 창작에만 몰두하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는 무대를 버리고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대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대단한 용기나 결단을 강조하기보다 ‘나는 새로운 작품세계를 만들 자신이 있었고 지금 그러한 길을 쉼없이 걸어가고 있다’며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이 어쩌면 작가 자신이 이야기한 장자(莊子)의 붕정만리(鵬程萬里)처럼 기나긴 비행의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이런 생각마저도 그저 본질을 그릴 뿐인 그의 작품에 기자의 의도를 투영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 끝 -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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