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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부산경남 DNA]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1

표중규 입력 : 2025.11.10 10:06
조회수 : 554
[오피니언] 예술이 머무른 자리에서 사람의 향기를 되짚다 1
The Wise Man, 2022, Mixed media on canvas, 200x130cm

자아도, 대상도, 재료도 아니다
본성을 추구하는 구도(求道)의 길
- 작가 길후

부산 기장 빌라쥬 드 아난티의 갤러리 입구에서 가장 오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묵직한 존재감 그 자체였다. 인간의 형상처럼 보이지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회화로 분류되어야 하겠지만 두터운 질감은 부조에 더 가까웠으며, 캔버스 전반이 블랙홀처럼 어두웠지만 빨아들이기보다 강렬하게 쏟아내고 있는 그림, 작품명이 『현자(賢者)』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그 그림 자체가 응축하고 있는 질량감은 단순히 기술적인, 기법상의 완성이라기보다 실제로 작가가 쏟아 부은 지난한 시간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렵게 연락을 통해 만난 작가 길후는 짧게는 찰나에서 길게는 십수년을 작품 한점 한점에 쏟아 부으며, 그러면서도 세상에 내놓은 작품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태우고 부수면서 쌓아온 작품 세계에 대해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인 듯 편안하게 설명했다.

기자 : 전시회 때 작품 『현자(賢者)』를 특히 관심 깊게 봤습니다. 거의 회화라기보다 마티에르만 봐서는 부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보였는데요, 보통 작품에 이렇게 깊은 무게감을 담으려면 제작기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겠죠?

길후 작가(이하 길후) : 음... 『현자(賢者)』 같은 작품은 10년 이상 작업기간이 걸린 게 맞지만 함께 전시했던 300호 넘는 작품들은 작업하는 데 30~40분 밖에 안 걸린 작품들도 많아요. 평균적인 작업기간을 말씀드릴 수 없는 게, 어떤 건 6개월씩 또 때로는 몇 년씩 작업하다가 한쪽에 처박아 두고는 또 몇 년 만에 다시 시작을 하기도 하고 그래요. 다만 작품 자체가 태어나고서 공개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말씀하거 라면 최소 삼 년 이상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저는 늘 삼 년마다 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거든요. 삼 년 지나고 내가 봤을 때 나를 감동시켜 주지 않으면 그 작품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없애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작품을 없애는 게 내 주된 일입니다. 지금도 대구 작업실에 가면 큰 소각장이 있습니다. 작업실 곳곳에 항상 부서진 캔버스 합판이 널려져 있습니다. 그런 건 제가 다 없앤 겁니다.

기자 : 굉장히 스스로에게 엄격하시네요. 원래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작업을 계속해오신건가요?

작가 : 아니에요 정확히는 밀레니엄, 2000년부터라고 할 수 있죠. 그 해가 제 생애에 어떤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제가 서른 아홉이 되었을 때, 99년도까지 그린 작품이 만 6천여 점 됐어요. 그런데 그때 2000년에 그걸 다 버렸어요 불태워서. 다 버리고 새로 이제 밀레니엄에 맞춰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지금의 저는 그때 새로 시작한 거라고 봐도 됩니다
밀레니엄이 그때 준 충격이 제게는 굉장했습니다. 우주 전체와 세상의 질서, 모든 것이 바뀌어지는 시기에 ‘나는 과연 새로운 밀레니엄에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한 거죠. 그래서 나는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나간다, 그래서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다 불태우고 없애고 그때부터는 블랙을 한 거예요.

Refusal to Coming Dawn, 2003, Acrylic Ink on paper, 100X71cm
Refusal to Coming Dawn, 2003, Acrylic Ink on paper, 100X71cm

기자 : 특유의 블랙, 그러니까 블랙페이퍼 작업을 시작하신게 그때부터군요. 그런데 보통 블랙이라는 색깔이 작가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색깔이 아니라고 하던데 굳이 블랙을 선택하신 건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작가 : 제가 2000년도, 밀레니엄에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 블랙이라는 색깔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전에 그린 그림을 다 태웠다는 이야기는 제가 새롭게 태어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이 블랙이라는 색깔이 가장 고귀한 태초의 색, 근원을 뜻하는 색인만큼 그런 블랙을 통해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제 새로운 출발을 블랙과 함께 선언했습니다. 그런 제 확신이 가장 강렬했던 때였기 때문일까요, 제 작품 중에 제일 좋은 작품들은 2000년도에 그린 블랙 페이퍼 작품들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0년부터 2003년 요때 그린 블랙 페어퍼 작품들은 지금 제가 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계속 블랙만 쓰는 줄 아시는데, 사실 지금 제 작업실에는 평소에도 열려있는 물감색깔이 한 50개 정도 됩니다. 그래서 제 작업실은 아무리 추워도 난방을 못 해요. 그렇게 다양한 색깔로 작업을 하지만 제가 새로운 제 출발을 백지 위가 아닌 흑지 위, 검은 색, 우주의 근원을 담은 블랙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선언적인 의미가 있고 거기서 담은 내공들은 이제 최근에 황금색까지도 확장되었습니다. 이 골드 역시 화가들이 쉽사리 선택하기 힘든 색이지만 저는 충분히 제 작업 속에서 활용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펼쳐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작품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색채의 폭을 넓혔다는 게 맞겠죠.
이런 변화는 당연히 단순한 혼자만의 자신감만으로는 되는건 아니고요, 항상 물밑에서 쉴새없이 헤엄치는 백조처럼 계속 다양한 세계를 탐색하며 연구하는 작업이 이어집니다. 사실 황금색을 사용하게 된데도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2016년부터 2년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프란치스코 성당 앞에 있었거든요. 그 기간동안 매일 가서 당시 대가인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림을 관찰했어요. 성화는 금박, 그러니까 얇은 금색을 입혀서 화려하게 꾸미는데 우리 고려문화도 박을 입혔잖아요 그런데 성화에서 여전히 금색을 기본으로 배치하는 서양과는 달리 우리는 고려 이후로 박을 입히지 않았거든요 기법이 공예적이고 이게 회화에서는 번쩍번쩍 비치니까 어울리지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주력해온 블랙에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색이 또 금박이거든요. 저걸 어떻게 회화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지만 제가 해온 회화에서도 금색이나 스틸, 메탈을 쓰면 절대 안 되는 게 불문율이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절대 안 어울립니다. 근데 제가 하는 건 붓의 본질에 그 에너지를 담기 때문에 사용이 가능한 거죠. 뭐 색이 뜬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것, 그런 개념이 없는 거예요. 특별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본질인 붓에 금색을 찍어서 그리면 그게 하면 그게 본질로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거죠.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기자 : 이탈리아 성화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으셨군요. 분위기에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력을 살펴봤더니 중국에서 오래 작품 활동을 하셨던데 유럽까지 함께 담아내셨다는건 몰랐습니다. 혹시 해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주로 해외활동을 해오신건가요?

작가 : 그렇게 보이나요? 허허 전혀 아닙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대학은 대구 계명대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미술작업도 계속 대구에서 해왔는데 2010년 북경에 처음 갔죠. 지금도 북경에 작업실이 있고 1년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넘어가기도 힘들고 국내작업도 바빠져서 예전처럼 오래 있거나 자주 가지는 못 합니다.

기자 : 그런데 왜 중국을 택하신거죠? 그때 작가님은 이미 한국에서는 오래 활동하신 상황이잖아요? 그즈음이면 수도권에서서 바로 활동하셔도 됐을 텐데 굳이 중국에서 활동하시다가 다시 돌아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 : 수도권에서 바로 활동이라...그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요. 한국은 아무래도 지연, 학연이 앞서 가는 사회이고 제가 지방대학을 갔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중심에 서울대, 홍익대 라는 판이 사실 짜여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작품을 내놔도 사실 진입이 어렵고요. 제가 파주의 레지던시에서 작업을 하면서 서울 쪽 예술계 흐름을 보니까 자기들끼리 굉장한 공고한, 그런 카르텔이 있어서 한 1년을 작업했는데도 아무도 저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레지던시 작업 기간이 끝나고 개인전을 했을 때는 제가 가장 관심도 많이 받고 작품이 판매도 잘 되고 너무 성과가 좋았어요. 그래서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한계인가 라는 답답함을 느끼던 차에 2011년 대만에 본사를 둔 소카 아트센터(Soka Art Center)가 베이징 798에 갤러리를 오픈하면서 제가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베이징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현지에서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현지 전시를 계속 열기 위해 현지에 작업실을 구하고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첫 개인전이 북경에 있는 아트 사이드 라는 갤러리에서 열리게 되면서 제 무대가 중국으로 확장된거죠. 그때 아 내가 더 이상 국내시장, 이미 짜여진 판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 뜨고 있는 북경으로 가자 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세계적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 관장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 오는 시대가 아니고 북경으로 가는 시대였어요.

이 대목에서 길후 작가는 찬물을 한 모금 마셨다. 중국 예술촌에서 작업을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저 화가는 그림만 그리는 벙어리*(장애인 비하적인 발언이 아니라 중국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인용 그대로라며 작가도 양해를 부탁했다.)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작품 활동에만 집중했다는 이야기를 했던터라 중국 생활의 애환이 잠시 떠올랐던게 아닐까.

작가 : 북경으로 갔다고 모든 게 쉽게 풀린 건 아니었고요. 중국 베이징에 페이스 갤러리라고, 그 뉴욕 첼시 가에 있는 그 페이스 갤러리의 지점 격인데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거든요. 에이전시 같은 소속사도 없이 개인작가가 거기 문을 두드리니까 관장이 일단 도록을 한번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작품 보고 그림은 좋은 것 같은데 직원들 보고 정보를 한번 찾아보라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메이저 화랑이죠, 화이트박스 라는 화랑과도 연결이 되었어요. 화이트박스에서 제 도록과 실제 작품을 보고는 흔쾌하게 전시를 하자고 제안하면서 오히려 페이스 갤러리보다 빨리, 바로 그해 개인전을 열게 됐습니다. 그걸 보고 중국 작가들이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중국 작가들도 한 3천만 명 되지만 그런 메이저 화랑에 전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중국에서도 그런 메이저 갤러리에서 1년에 기획전을 6~7번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이 전속작가들이지, 새로운 작가가 거기에 들어갈 제출할 가능성은 1년에 많아봐야 한두 명인데 한국 작가가 중국에서 거길 파고든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걸 제가 개인적으로 이뤄내니까 중국 예술가 사회에서 저를 새롭게 보고, 이렇게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좀 저를 우러러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중국에서 화단을 개척했고 이게 서울을 통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어떤 기회가 된 셈이죠.

[2014] The Wise Man_200x200_Mixed media on canvas
[2014] The Wise Man_200x200_Mixed media on canvas

기자 : 지금 학고재 전속이시잖아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학고재까지 연결이 된건가요?

작가 : 2021년도에 학고재에서 우찬규 회장님이 연락이 왔더라고요. 우연히 제 작품 도록을 보다가 왜 자기가 지금까지 이런 작가를 몰랐지 하면서. 그런데 사실은 제가 도록을 만들어도 이전에는 일부러 화랑이나 미술계에 한번도 안 보냈거든요. 왜나면 책으로, 도록으로 알려지면 그쪽에서 전시회를 하자고 연락이 오곤 하는데, 그러면 내가 정작 내 작품활동을 할 시간이 모자라지는 상황들이 저로서는 정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일단 도록을 보내놓고는 그림을 못 그려 보낸다고 변명할 수도 없고해서 그때까지는 도록을 일부러 별로 안 보냈는데 그때 우회장님한테 딱 걸린 거죠. 그 때 이후로 국내외 활동을 학고재와 함께 하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또 활동폭도 늘고 서로 호흡이 잘 맞아요.

기자 ; 그렇군요. 오늘 시간을 많이 빼앗았는데 마지막으로 요즘 작품활동 방향 한번 여쭤봐도 될까요? 전시회에서 보니 『현자(賢者)』처럼 십수년을 담은 작품들도 있고 또 순식간에 그린 현대 추상같은 작품도 있고 굉장히 다양해보이던데요?

작가 : 요즘에는 드로잉 작업을 많이 해요. 한 2년 전부터는 드로잉을 하기위해 종이 2만장을 사 모으니까 친한 미술상이 저를 보더니 종이 장사를 하려고 하는거냐고 묻더라고요 하하. 영국의 샌더스나 프랑스 아르쉬, 이태리 파브리아노 독일 하네뮬레, 요 네 가지를 구해달라고 했거든요. 그 미술상이 그런 고급종이로 2만장은 국내에서 구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갖고 있는걸 다 합쳐도 이만장은 안 되니까...그래서 그냥 제가 있는 건 다 달라고 했죠. 그러니까 저보고 이제 미술 접고 종이장사하려고 하냐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일주일 뒤에 제 작업실에 와 보고는 와, 무슨 종이를 이만큼 썼습니까? 그러더라고요. 그 정도 속도로 계속 드로잉 작업문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오천 장 정도 그렸거든요. 하루에 드로잉 10장, 그러면 한 달이면 몇 개입니까? 300개 아닙니까 그러면 1년이면 3600개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한 5년 안에 끝나는 거예요. 근데 제가 볼 때는 한 3년 안에 끝납니다. 그때까지 드로잉에 계속 매진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기자 : 그럼 주된 작품의 방향이 요즘은 드로잉을 통한 어떤 예술세계의 구현인건가요?

작가 : 아닙니다. 드로잉은 하나의 단계일 뿐이고 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이라면 정확히는 본질(本質), 재료의 물성(物性) 자체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물화일체, 현대철학으로는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을 생각하시면 될듯 한데요. 제 작품 안에는 의식의 주인이 없습니다. 즉 우리는 흔히 의식이 우리 삶의 주인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의식은 마음대로 언제든지 날아가 버리고 바뀌고 흩어져 실체가 없는 것이거든요. 저는 그 자아라는 것이 자기 실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실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실제 내가 그리는 것이 그 자아가 아니라는 데 제 작품세계의 근본철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반 작가들은 화가로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있는 거예요. 자기 자아를 실현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굉장히 잘못됐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화가라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게 아니다, 한 예를 들어 우리가 분재를 만들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실제 나무를 축소시켜서 모양을 만들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선호도, 기호, 기술 등 자아를 투영하죠. 하지만 이미 그 분재 안에는 아무런 자연으로서의 본질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분재를 예술로 보지도, 그것에 빠져들거나 매진하지도 않죠.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이아몬드를 발굴했다 그러면 그것을 가공을 해서 디자인을 해서 목걸이를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그 안에 세공사의 자아가 실현되고 투영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목걸이를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면 딸은 그걸 끼고 다닐까요? 아니죠. 다시 가공하거나 고쳐서 끼거나 팔거나 그러지 않으면 처박아두죠. 그 목걸이는 당시 최첨단의 디자인을 담고 있지만 다른 주체의 자아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외면받는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자아가, 화가의 자아가 실현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가치가 소멸된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것은 자아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 그 자체에 원초적인 뭔가가 있다는 것, 그 원초적인 본질, 드로잉에는 연필의 본질, 회화에는 회화, 물감의 본질, 그 물성이 담겨있는 것이고 저는 그 물성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 작가 정신입니다.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Untitled, 2021, Acrylic on Canvas, 300x200cm

기자 : 아 하지만 그런 작가 정신 자체도 결국은 작가님의 의도, 자아가 투영된 것 아닌가요?

작가 : 그렇죠 본질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죠. 그걸 작품 안에, 물성과 본질의 뒤에 교묘하게 감추면서 보는 이를 속이는 게 지금 제가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물감은 그 물감 자체로는 그 본성, 물성이 전달될 수 없죠. 그 물감이 형상을 만들고 질감을 만드는 과정에서 화가로서, 작가로서 제 자아가 들어가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제 자아 대신 그 자아가 담아낸 물성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게 제일 어려운데 예를 들자면 중국의 대가들이 내놓는 큰 서예 작품을 보면 일필휘지, 한 번에 쓰윽 그린 것같은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큰 붓질 한 번의 느낌이 나게 하기 위해서 세필로 수십 번, 수백 번 그려놓는 겁니다. 멀리서 보면 큰 붓질의 질감을 통해 서예의 물성이 느껴지지만 가까이서 뜯어보면 작가의 자아가 구현해둔 물성, 본질인거죠. 제 작품에서도 한 300호 되는 작품을 30분만에 그릴 때는 실제로 내가 이걸 어떻게 그리겠다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손대기 시작하면 이미 물감이 흘러내려서 그림은 망쳐져요. 한번 올라가면 두 번 내려올 일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본질, 재료의 물성이 구현된 본질이 여지없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이 앞으로 시대가 흘러도,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들이 하나의 예술 이라는 본질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계속 시도할 겁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지만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작품을 전부 태우는 것도, 고국을 떠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몇 년을 창작에만 몰두하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는 무대를 버리고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대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대단한 용기나 결단을 강조하기보다 ‘나는 새로운 작품세계를 만들 자신이 있었고 지금 그러한 길을 쉼없이 걸어가고 있다’며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이 어쩌면 작가 자신이 이야기한 장자(莊子)의 붕정만리(鵬程萬里)처럼 기나긴 비행의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이런 생각마저도 그저 본질을 그릴 뿐인 그의 작품에 기자의 의도를 투영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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