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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 문영숙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조다영 입력 : 2023.08.02 07:00
조회수 : 1842
{길재섭/KNN경남 보도국장}

KNN 인물포커스입니다.

불과 80여년 전까지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늘 기억해야할 분들입니다.

오늘은 러시아 항일 민족운동의 대부 역할을 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서오십시오.

{문영숙/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안녕하세요.

Q.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요, 먼저 최재형 지사는 어떤 분입니까?

A.
최재형 선생님은 1860년도에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나셨고요, 9살 때 러시아로 가서 아주 여러 가지 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기업가로서 또는 교육가로서 또 언론가로서 한인들의 '패치카(난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도 최재형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이분이 중심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Q.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도 배후에서 지원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역할을 하셨습니까?

A.
최재형 선생님은 1906년부터 의병 활동을 모집을 하시고, 1907년에 안중근 의사가 해외 망명을 가서 그 당시에 최재형 선생은 동양의 카네기라고 할 정도로 거대한 부를 이루셨고, 또 한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시고 계셨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당연히 우리 민족의 대표 되시는 분을 찾아갔겠죠.

그래서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만나서 최재형 선생님과 1908년에 최초의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시고, 최재형 선생님이 총장, 또 안중근 의사는 거기 평의원으로 참여를 하게 됩니다.

Q.
기업으로 굉장히 기업 활동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셨지만 그것도 독립운동에 쓰시고 결국에는 본인의 목숨도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최후를 맞게 되셨나요?

A.
최재형 선생님의 이력은 아주 독특한데요, 11살에 배가 고파서 바닷가에 쓰러져 있는 어린 소년을 러시아 선장 노부부가 발견을 해서 양아들처럼 키우면서 세계를 6년 동안 두 바퀴를 돌거든요. 그러면서 상선이기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항구들을 들를 때마다 그 상업 기술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해야 되겠죠? 기업인으로서의 자질을. 그때 키우셔서 엄청난 부를 이루셨어요.

그 한인들을 같이 잘 사는 그런 뭐 육우 납품업을 하시는 대신 한인들은 소를 키우게 하고, 또 과실수도 심고, 뭐 그 당시 정원도 만들고 여러 가지 일을 하시면서 한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시면서 우리가 대부분 돈을 많이 벌면 이분이 배가 고파서 러시아로 갔기 때문에 당신의 그 영화를 위해서 쓰셨을 법도 한데, 그 모든 재산과 열정과 결국은 목숨까지 이제 그 한인 독립을 위해서 다 숭고하게 희생을 하셨고, 이분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국민들이 꼭 알아야 되고, 또 그런 DNA를 우리가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Q.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순국하신거죠?

A.
마지막에 이제 60세 되셨을 때인데 그때 이제 1920년 4월에 일본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 대거 침입을 해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하거든요. 그 중심에 최재형 선생님이 목표가 되고, 잠깐 집에 들어오셨을 때 가족과 이제 빨리 도망가라고 지금 밀정이 다 깔려 있다고 하는데도 '너희들이 일본의 그 잔인함을 모르느냐,

만약에 내가 도망갔을 때 엄마와 너희들이 무슨 고초를 당할지 내가 보지 않아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자진해서 잡히마' 그리고 자진해서 잡히셔서 이틀 후에 재판도 없이 그냥 총살을 당하시고, 현재 안중근 의사처럼 시신도 찾지 못하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일본이 감추기 때문에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Q.
국내에서는 이 최재형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뒤늦게 일고 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A.
네, 저희 최재형 기념사업회는 2011년에 기업인 네 분이 당시 80세 되셨던 김창송 회장님을 비롯해서 그분들이 우연히 러시아에 갔다가 이분을 처음 들은 거예요. 이렇게 안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주고, 하얼빈 의거를 지원하고, 학교를 32개나 세우고, 기업가로 성공하고. 이런 분이 어떻게 우리가 모를 수가 있나

그래서 돌아와서 이렇게 위대한 분의 이름을 따서 우리가 장학회를 만들어서 연해주에서 1937년에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후대들을 우리 키워보자, 죽기 전에 정말 멋있는 일 한번 해보자 이렇게 만들어진 게 최재형 장학회로 시작해서 지금 이제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로 올해가 창립 12주년입니다.

Q.
네, 부산*경남에도 사업의 지부죠. 지부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A.
네, 저희가 이렇게 훌륭한 분은 국민들이 많이 알아야 자긍심도 높아지고, 또 우리가 세계에 지금 대한민국이 엄청난 파급 효과를 일고 있잖아요.

이런 시점에 750만 재외동포들한테도 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1세대인이 최재형 선생님의 훌륭함을 많이 알려야 하고, 그래서 우선 국내부터 저희가 이쪽도 경상도 지역에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와 더불어서 최재형 선생님도 전국에 좀 많이 국내부터 알려야 되는데, 사실 이쪽에는 저희가 어떤 지연이나 이런 게 없어서 이번 계기를 통해서 이쪽에서도 최재형을 알리는 아주 근본적인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Q.
최재형 선생님이 사모님 유해는 이번에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죠?

A.
네, 저희가 정말 극적으로 꿈 같은 일이었는데 여러 가지 많이 도와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또 국가보훈부도 지금 전적으로 나서고 있고, 그래서 정말 될까? 하고 생각을 했던 건데, 키르키스스탄에 이분이 강제 이주를 당했기 때문에 셋째 딸의 남편, 그러니까 최재형 선생님의 사위가 키르키스스탄의 뭐 보건문화부 장관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최재형 선생님 부인도 그쪽에 가서 살다가 52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동안 그쪽에 후손도 한 명도 없고 그래서 공동묘지에 방치돼 있었어요.

그래서 우연히 이제 알게 돼가지고 이번에 이제 최재형 선생님이 원래 국립서울현충원에 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멸실이 되는 불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번에 박민식 장관님도 적극적으로 나서주고 그래서 이번 광복절을 기해서 사모님 유골을 모셔올 겁니다.

거의 지금 준비 단계는 다 끝났고, 저희가 7월 30일날 들어가서 8월 7일날 모시고 나오면 이제 국내에서 아마 국가보건부에서 나서서 두 분의 합장을 원래 독립운동가 묘역 108호에 정말 영광스럽게 복원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선열들은 후대가 정말 잘 기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념사업회 잘 끌어주십시오. 오늘 출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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