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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먹과 한지에서 시작해 영화 스크린까지 그려가는 화가 - 화가 김유경

표중규 입력 : 2026.11.04 14:27
조회수 : 77
먹과 한지에서 시작해 영화 스크린까지 그려가는 화가 - 화가 김유경

BNK부산은행 본점 건물 1층은 드넓지만 텅 빈 통로로서의 공허한 존재감이 특징인 곳이다. 하지만 지난 5월 찾은 이곳은 아주 독특한 갤러리로 변신해 있었다. 로비에 미술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짙은 먹, 아니 그보다 더 검은색의 캔버스를 입체적으로 엮어낸 일종의 ‘병풍’이 중간에 자리 잡아 말 그대로 블랙홀처럼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독특한 전시에서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던 김유경 작가의 병풍 작품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 건 갤러리 궁에서 연 시월 초, 전시회였다. 관객과의 대화를 준비 중인 김유경 화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것들을 물을 수 있었다.

기자
보통 사각 캔버스로 된 작품이 아무래도 좀 익숙한데, 저기 저 낯선 작품은 병풍이라고 해야 하나요?

김유경 작가(이하 김유경)
하하. 저건 완전한 설치 작업이라기보다는 병풍의 느낌을 지닌 작품이에요. 여러 조각을 이어 붙였고, 중간의 빈 프레임에 주안점을 두었는데요. 창이나 병풍을 통해 풍경을 감상하는 차경(借景)의 개념을 가져왔어요. 여기서는 빈 프레임이 창처럼 기능하면서 그 너머에 설치된 영상 작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거죠. 차경의 개념을 적용한 설치 작품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기자
그런데 저 병풍의 작품과 바로 아래층에 전시된 작품은 너무 색깔이 달라요. 같은 작가분의 작품인데 같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일부러 그렇게 차별화하신 건가요? 아니면 원래 색깔이 다른 작품을 동시에 하시는 스타일인 건가요?

김유경
이번 전시는 2층과 3층의 구성을 조금 다르게 나눴는데요. 2층 작품은 ‘곶’이라는 주제로 구성했고, 곶자왈의 ‘곶’이 숲이라는 뜻이에요. 파트 1이 〈곶〉이고, 파트 2가 〈주름진 밤〉이라는 시리즈예요. 2층은 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곳의 작품은 기존 작업처럼 배경을 다 덮지 않고 선으로만 드로잉한 작품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고요. 3층에는 작년부터 해온 〈주름진 밤〉 시리즈가 있는데, 검은 안료를 계속 쌓아서 검게 보이는 블랙 페인팅을 설치했습니다.
이 전시 공간에서 더 특이한 점은 3층이 영상 전문 갤러리 공간이라는 거예요. 어두운 곳에서는 페인팅 작업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통 잘 두지 않는데요. 〈주름진 밤〉 시리즈는 자세히 바라봐야만 보이도록, 가물가물하게 조금 어둡게 설치했어요. 그래서 2층과 3층의 톤이 굉장히 달라요. 2층은 낮에 방문한 느낌이고, 3층은 밤이나 저녁에 어두운 곳에 온 듯한 느낌을 주려고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기자
그렇군요. 작품이 전부 검은색이던데, 작가님 전공이 동양화라서 그런가 했어요. 그런데 먹이 아니라 안료라고 표현하셔서 약간 의외였어요.

김유경
동양화를 전공해서 한지에 먹으로 작업을 계속해왔어요. 먹의 색을 일반적으로 검정이라고 아시는데, 사실 회색빛, 갈빛 등 다양한 빛이 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한지에 먹이 스며드는 기존 작업과 조금 다르게 작업했어요. 먹 작업처럼 흑백으로 이루어진 회화이긴 하지만, 먹도 쓰고 콩테나 검정 목탄 같은 건식 드로잉 재료도 쓰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통틀어서 안료라고 표현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종이에 그리지 않고 양모로 만든 펠트에 먼저 먹으로 스케치했는데요. 펠트가 천이기 때문에 먹이 안으로 다 스며들어서 저렇게 검게 나오지는 않아요. 그래서 그 위에 아까 말씀드린 건식 재료인 콩테와 오일 파스텔을 여러 번 중첩해서 검게, 더 검게 보이도록 작업했습니다.

기자
동양화인데도 말 그대로 캔버스부터 재료까지 실험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그게 원래 작가님이 추구해오던 변화의 과정인가요?
김유경
네. 기존에 먹이 종이에 스며들게 작업하는 방식으로는 제가 말하고자 하는 사라진 풍경의 변화나 중첩되는 시간성을 표현하기 힘들다고 느꼈어요. 바탕 재료는 기존의 한지 대신 펠트라는 천을 쓰고, 먹 외에 혼합 재료들도 썼어요. 이번에는 전시 공간이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가 아니기 때문에 공간에 맞게 작품을 구성하다 보니 그런 시도를 더 본격적으로 했죠.
사운드도 조금 들리면 좋을 것 같았고, 평면 회화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영상 작업으로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최근 작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향으로 바뀌면서 매체도 조금 더 확장해서 보여주고자 했어요.




기자
작품을 보다가 느낀 건데, 작가님이 부산 출신이라서 그런지 전시 곳곳에서 부산을 많이 다루신 것 같아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김유경
부산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어요. 이후 다른 지역에서 20년을 지내다가 고향에 돌아와, 지금 3년째 작업실을 두고 작업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때는 익숙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자주 갔던 해안가는 이제 매립돼 주거지로 변해 있기도 하고, 자주 갔던 황령산도 난개발이나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 예전과는 다른 낯선 느낌의 숲으로 변해 있어요. 그런 생경한 감각과 감정들이 밀려오면서 작년부터 올해까지의 작업들이 부산을 담게 됐는데요.
부산의 실제 풍경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제가 다녔던 곳의 풍경을 찰나의 순간에 드로잉한 작업들 가운데, 그 드로잉을 오래 바라볼수록 과거와 현재의 느낌이 오묘하게 함께 보이는 것들을 선별해서 이번 전시로 선보이게 됐어요. 특히 3층에 있는 〈주름진 밤〉은 사실 부산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작품이에요. 물론 2층 작품에도 부산임을 알아볼 수 있는 랜드마크를 그리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면 3층 작품에는 하야리아 기지, 그러니까 군부대가 있었던 땅을 담았어요. 땅을 반환받고 지금의 시민공원이 조성되기 직전의 상태를 담은 아카이브 자료와 어릴 때 방문했던 기억, 그리고 제가 자주 갔던 황령산에서 그 땅을 바라봤을 때의 느낌 등을 담았죠. 그 산에 있던 구상반려암,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마그마가 굳어 만들어진 바위나 당시 하야리아 기지에 있던 나무들 같은 풍경을 참고해서 재편집하고 재구성한 그림이에요.
흑백 회화이긴 한데, 예전에 미군 부대가 떠나면서 폐유를 많이 버리고 갔잖아요. 그때의 찐득거림과 땅이 겪어온 수많은 변화와 굴곡을 제가 감각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직관적으로 표현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기자
예전에 부산 금고미술관 등에 전시하셨던 작품도 그런 식으로 과거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현대인이 현대의 모습을 담는 것보다는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과거를 자주 다루시는 것 같은데, 그런 창작 스타일을 선호하시나요?

김유경
선호하기보다는 변화를 겪는 땅이나 우리 주변 환경에 제가 좀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이 가는 것 같아요. 세상이 빠르게 변하더라도 그 흔적들은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런데 사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고, 표면적인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기도 해요. 저는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니까 그런 것들을 작품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저희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를 거쳐 최근까지의 시대를 다 겪으시고 101세에 돌아가신 분이에요. 강제징용을 당하셨고, 이후 여순 사건 같은 역사적인 굴곡도 겪으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다 보니 그런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강제징용으로 가셨던 곳이 팔라우라는 섬인데, 제가 직접 그 섬에 가볼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를 들었어요. 또 여수의 돌산이라는 섬에는 일제강점기의 해상 기지나 벙커 같은 곳들이 방치된 채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강제징용을 가셨을 때 그곳의 풍경도 이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외할아버지가 한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부터 그런 장소를 찾아가 스케치하고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 경험이 자연스럽게 특정한 장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이어지고, 다시 미래로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한 생각도 깊어진 것 같고요.




기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질문드리면, 앞으로 2027년에는 어떤 작품 활동을 해볼 계획이 있으신가요?

김유경
2027년의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는데, 외할아버지의 개인적인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단편이 2026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제주 43영화제 상영작으로 선정됐어요. 운 좋게 상영 기회를 얻은 작품인데, 직접 만든 작품이고 제가 프로듀싱했어요.
촬영감독님과 함께 찍은 영상으로 단편 경쟁 부문에 선정됐는데, 외할아버지와 저 사이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몇 년에 걸쳐 그 장소를 찾아가는 내용이었어요. 이제 그 범위를 주변으로 좀 더 확장해서, 제가 살아보지 않은 그 시대의 주변국 상황도 더 알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작년부터 조금씩 리서치를 시작했는데, 그걸 구체화해서 작품으로 발표하려고 해요.
사실 욕심으로는 감독을 맡아 영화를 제작해서 보여주면 좋겠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라서요. 현장에서 그린 스케치와 인터뷰 텍스트, 영상이 지금처럼 함께 어우러지는 전시 형태로 발표하게 될 것 같아요.

검은 먹으로 그려낸 과거의 흔적이 도시의 역사를 넘어 민족이 겪은 상흔까지 담아내고, 회화의 틀을 벗어나 영화로까지 펼쳐진다면 그 작가를 더 이상 화가라고만 규정짓는 생각은 어쩌면 별 의미 없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인터뷰가 끝난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작가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은 채 강당을 가득 채웠다. 청주 한 잔을 손에 든 채 시월의 가을밤을 그림과 영화로 물들이는 순간은, ‘가물 현’이라는 전시회 제목과 딱 어울리는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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