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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준PD
 박종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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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나무가 보내는 작은 신호…사람의 손길로 이어지는 생명

우리 가까이에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상태와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나무 의사들이 가로수를 두드려 울림을 확인하고 센서로 음파 속도를 측정해 나무 내부를 살핍니다. 필요할 경우 가는 드릴로 미세한 구멍을 내 목재 밀도의 변화와 썩은 부위의 위치, 깊이도 확인합니다. 가로수를 자르지 않고 상태를 점검하는 이 과정은 아픈 나무를 빠르게 찾아내고 도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작업입니다.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천연기념물 정이품송과 서원리 소나무도 사람들의 관심과 관리 속에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이품송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은 나무의 활력과 수형을 살피고, 상처 부위에 도포제를 발라 병원균이 침투하거나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습니다. 영동의 포도밭에서는 반세기 넘게 농사를 지어온 박삼수 씨가 포도나무의 생장과 날씨를 살피며 순을 정리합니다. 포도꽃은 1년에 일주일 정도만 피며, 꽃이 진 자리에서 자라난 작은 포도알은 비와 바람, 햇살을 만나 약 90일 동안 성장합니다. 농부는 나무가 보내는 변화를 읽고 필요한 작업을 제때 이어가며 한 해의 결실을 준비합니다. 숲에서는 수목관리전문가인 아보리스트가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높은 나무에 올라 손상되거나 썩은 가지를 제거합니다. 아보리스트는 나무의 상태에 따라 위험목은 제거하고, 온전한 나무는 손상된 부분만 정리해 스스로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도심의 반려식물병원에서는 시들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식물을 가져온 시민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환경교육을 받은 시민들도 가로수 돌보미로 나서 일상에서 지나쳤던 나무의 변화와 아픔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나무 의사와 농부, 아보리스트와 시민들의 손길은 나무가 보내는 작은 신호를 알아차리고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과정입니다. 나무를 향한 관심과 돌봄이 이어질 때 우리 곁의 푸른 풍경도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2026.08.04

[오래된 미래] 피란민의 한 그릇, 부산 밀면의 탄생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주민들은 비싼 냉면을 대신할 새로운 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것 없이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에 정착한 피란민들은 냉면 기술을 바탕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구호물품으로 공급되던 밀가루를 활용해 냉면을 대신할 면을 만드는 시도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밀가루만으로는 면발이 쉽게 끊어지고 식감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밀가루와 고구마가루를 3대 7 비율로 배합하면서 지금의 밀면이 탄생했습니다. 밀면은 고향을 떠나온 피란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면을 더 주문하기 어려워 따뜻한 육수를 한 주전자 가까이 마시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따뜻한 육수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을 살렸다고 회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당시 국수 한 그릇의 기억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손님들의 사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온 가게는 밀면을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부산의 식문화로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밀키트 등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오래된 가게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부산만의 새로운 밀면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문헌에 나온 비빔밥에서 착안해 밀면을 비빔밥처럼 구성한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맛본 손님들은 기존 밀면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한 밀면 가게 운영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밀면의 맛을 되살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손님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진주냉면처럼 밀면도 하나의 독립된 음식 장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밀면을 만드는 사람들은 피란민들의 삶이 담긴 밀면을 부산의 식문화이자 하나의 음식 장르로 알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026.07.29

[오래된 미래] 장기려 기념관, 사랑으로 남긴 생명의 기록

부산 장기려 기념관에는 평생 가난한 환자를 위해 헌신한 장기려 박사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장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사랑’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도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고, 필요한 치료를 끝까지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수술복조차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시절에도 맹장염 수술 등을 직접 집도하며 환자를 살렸습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는 오랜 시간 곁을 지키며 치료를 이어갔다는 증언도 전해졌습니다. 입원비보다 환자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고, 돈이 없는 환자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치료비와 차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환자 가족에게 직접 도움을 준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말기암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온 가족이 귀가할 비용이 없다는 사정을 알게 되자 차비를 마련해 보냈습니다. 당시 도움을 받은 가족은 배 속의 아이까지 살려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장 박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해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만났다는 증언도 이어졌습니다. 함께 일했던 의료진은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사랑을 가장 큰 가르침으로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장 박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결국 가족에게도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또 어려운 시기 월 400원의 회비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조직하며 서로 돕는 의료를 실천했습니다. 장 박사는 부산을 아끼며 의사로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장 박사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의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2026.07.27

[행복한 책읽기] 류해숙 관장 “걷기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작”

김해도서관 류해숙 관장이 KNN ‘행복한 책읽기’를 통해 이케다 미쓰후미의 ‘걷는다’를 소개했습니다. 류 관장은 하루 종일 앉아서 생활하며 몸과 마음이 무겁고 지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큰 결심 없이 오늘 조금 걷는 것만으로도 삶의 리듬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책은 운동을 강요하기보다 걷는 즐거움과 의미를 다시 발견하도록 돕는다고 소개했습니다. 또 걷는 행위가 몸과 뇌, 감정, 일하는 방식, 인간관계, 도시와도 깊게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저자는 인간은 원래 걷는 존재지만 현대인은 지나치게 앉아서 살아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합니다. 또 걷기는 단순히 칼로리를 소모하는 운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회복시키는 기본적인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걷는 동안 몸의 균형이 잡히고 뇌가 자극을 받으며 생각이 정리되고 감각이 살아난다고 설명합니다. 또 걷기를 개인의 건강을 넘어 현대인의 삶과 행동 방식을 돌아보는 계기로 바라봅니다. 류 관장은 걷기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행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가까운 거리도 차량을 이용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내는 일상 속에서 걷기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걷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안정되며 주변 환경과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평소 고민이 많을 때 산책을 하며 기분 전환을 했던 경험도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점을 새롭게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 책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보다 천천히 걷고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몸에 귀 기울이라고 권한다고 전했습니다. 특별한 장비나 비용 없이 한 걸음씩 걷는 것만으로도 삶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이 큰 교훈으로 남았다고 밝혔습니다. 류 관장은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돌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스마트폰과 컴퓨터 앞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현대인들에게 잠시라도 밖으로 나가 걸어보기를 권했습니다. 아울러 짧은 산책만으로도 고민이 정리되고 마음의 여유와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에게 가까운 공원이나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자신만의 힐링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했습니다.
2026.07.14

[오래된 미래] 부산시민공원, 경마장·미군부대 지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부산시민공원이 일제강점기 경마장과 미군 하야리아 부대를 거쳐 시민의 공간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역사를 품은 장소로 소개됐습니다. 부산진구에 자리한 부산시민공원은 100여 년 전 일본인이 범전동 일대에 조성한 경마장 부지에서 출발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이곳에는 포로수용소와 일본군 병참기지가 들어섰고, 한국전쟁 뒤에는 주한미군 부산기지 사령부인 하야리아 부대로 사용됐습니다. 하야리아 부대 주변은 전쟁 이후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주민들의 삶터이기도 했습니다. 부대 인근 주민들은 벽을 따라 건빵과 빵을 팔거나 기름을 모아 되파는 방식으로 생계를 꾸렸다고 회상했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음식물은 ‘꿀꿀이죽’으로 다시 끓여 팔리며 배고픈 시절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1975년부터 1995년까지 하야리아 부대에서 탄약정비관으로 근무한 김수현 씨는 당시 부대가 높은 담장과 철조망, 망대로 둘러싸인 통제된 공간이었다고 떠올렸습니다. 또 전후 복구기 부산의 다른 지역과 달리 하야리아 부대만은 24시간 전기가 공급돼 늘 밝았고, 당시에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야리아 부대는 주민들에게 생계의 현장이자 미국식 음식과 음악, 생활문화를 접하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1986년 하야리아 부대에서 밴드 연주자로 활동한 김화남 씨는 장교클럽에서 공연하며 미군들과 어울렸고, 그곳에서 햄버거와 스테이크, 커피 같은 미국 음식을 처음 접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후 하야리아 부지 반환과 시민공원 조성을 요구하는 시민운동도 본격화됐습니다. 정부가 부지 일부를 선수촌 아파트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시민사회는 평지 공원이 부족한 부산에 전체 부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인간띠 잇기와 종이비행기 날리기 등 평화적인 방식의 운동이 이어졌고, 시민 152만 명의 서명이 모였습니다. 2006년 하야리아 부대는 공식 폐쇄됐고, 2010년 부산시에 부대 열쇠가 반환되면서 빗장이 열렸습니다. 이후 조경 설계를 거쳐 2014년 부산시민공원이 문을 열었고, 일제 경마장과 미군 부대 시절의 흔적을 품은 도심 공원으로 시민 곁에 돌아왔습니다. 프로그램은 부산시민공원이 억압과 동경, 생계와 변화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땅이자, 시민의 힘으로 되찾은 공간이라고 조명했습니다.
2026.06.25

[테마스페셜] 떡살 문양에서 목조건축까지…전통을 오늘에 새기다

전통 떡살과 목조건축의 맥을 잇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소개됐습니다. 목조각장 김규석 장인은 100년 이상 자란 감나무를 재료로 떡살을 만들며 전통 문양 연구에 평생을 바쳐왔습니다. 떡살은 떡에 문양을 새기는 도구로, 장수와 다산, 복을 기원하는 선조들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김 장인은 떡을 찍을 때 문양이 잘 새겨지고 쉽게 빠질 수 있도록 떡살의 곡선과 각도까지 세심하게 고려해 제작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깨진 유리나 도자기 조각을 활용하는 전통 방식으로 표면을 다듬으며 수작업 제작 원칙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풍속 조각가 이조철 선생에게 조각을 배우며 기술을 익혔고, 아들 역시 조각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김 장인은 이연채 여사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30여 년 동안 연구를 이어오며 1300여 개의 떡살 문양을 정리했습니다. 특히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문양 자료를 공개하며 전통 문양의 확산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적 감각을 더한 새로운 떡살 개발에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장인은 우리 문양이 벽지와 포장지, 생활용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욱 활용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국가무형유산 대목장인 김영성 장인은 전통 목조건축의 설계와 시공, 문화유산 보수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 장인은 건축물의 용도와 주변 환경, 비례와 균형을 고려해 전통 건축을 설계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국보와 보물 보수 현장에서는 수동 공구만을 사용하며 전통 기법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송광사와 화엄사 등 다양한 문화유산 보수 현장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전통문화와 국가유산을 교육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통 목조건축 기술 전수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두 장인은 전통 기술과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더해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2026.06.23

[오래된 미래] 동항성당, 피란민의 눈물과 희망을 품은 우암동의 버팀목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이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의 삶을 지탱한 공간으로 소개됐습니다. 우암동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들었고, 동항성당은 어려운 시절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주민들은 천막과 판잣집에서 생활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다고 회상했습니다. 장마철이면 집 안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생활 여건은 어려웠습니다. 성당은 미군 구호물자를 활용해 주민들을 돕고 피란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했습니다. 주민들은 성당에서 제공한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힘겨운 시절을 버텼다고 전했습니다. 동항성당의 한 하 신부는 구호활동과 모금 운동에 나서며 가난한 이웃들을 돌봤습니다. 그는 길거리의 아이들을 데려와 보살피고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을 지원했습니다. 주민들은 신부가 우암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움을 받았을 정도로 헌신했다고 기억했습니다. 또 낙태를 고민하던 임산부를 설득해 생명을 지키도록 도왔다는 일화도 소개됐습니다. 동항성당은 조산소를 운영하며 지역 주민들의 출산을 돕는 역할도 했습니다. 성당을 다니지 않는 주민들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신부가 늘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챙겼다고 회상했습니다. 신부는 독일에 있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의 삶보다 이웃을 우선했다고 전해졌습니다. 2017년 선종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함께 나눴습니다. 프로그램은 동항성당이 전쟁과 가난 속에서 주민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한 공간이었다고 조명했습니다.
2026.06.19

[오래된 미래] 40계단, 피란민의 눈물과 희망이 쌓인 부산의 기억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부산 중구 40계단의 역사가 소개됐습니다. 40계단 일대는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대표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함경도 출신 차순자 씨는 1·4 후퇴 당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와 남부민동 산복도로에서 판잣집 생활을 시작했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산복도로 일대에는 피란민들이 모여 살았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습니다. 피란민 상당수는 생계를 위해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40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특히 물이 귀했던 시절, 주민들은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 올리며 생활했습니다. 40계단은 피란민들에게 단순한 통행로가 아닌 가족과 친척을 만나던 약속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을 기다리며 많은 사람들이 40계단을 찾았습니다. 현재의 40계단은 원래 자리에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현재 위치에서 약 25미터 떨어진 곳이 원래의 40계단 자리였다고 설명했습니다. 40계단이 자리를 옮기게 된 배경에는 1953년 중구 일대를 덮친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당시 화재로 판잣집 3천여 채가 불타고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주택 복구와 도로 정비 등 대대적인 복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폐허 위에 새로운 길과 집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다시 삶의 터전을 일궜습니다. 한때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40계단 일대는 원도심의 쇠퇴를 겪었지만 피란민들의 삶과 기억을 간직한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피란민들의 눈물과 희망이 서린 40계단이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2026.06.17

[오래된 미래] 한형석 자유아동극장, 전쟁고아 품은 문화예술교육의 시작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와 아동들을 위한 국내 최초의 아동전용 극장인 자유아동극장이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자유아동극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예술가였던 한형석 선생이 전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문화예술교육 공간입니다. 한형석 선생은 독립군가를 작곡하는 등 일제강점기 예술구국 활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문화 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장남 한종수 씨는 한형석 선생이 지인들과 뜻을 모아 사재를 들여 자유아동극장을 만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극장에서는 명작동화를 각색한 영화와 아동극, 인형극, 그림극 등을 상영했고 밤에는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야학도 운영했습니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교사로 참여해 교육을 도왔지만 재정적 한계로 극장은 약 2년간 운영된 뒤 문을 닫았습니다. 자유아동극장은 운영 기간 하루 3회 공연을 진행했으며 연간 146일 동안 모두 268회 공연을 열었습니다. 이 기간 11만1천여 명이 극장을 찾으며 문화예술교육 공간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한형석 선생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서 예술을 공부했습니다. 1940년에는 중국에서 한국 최초의 가극 '아리랑'을 발표했으며 한국광복군 예술대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가를 작곡했습니다. 2004년 추모사업회 결성과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음악회를 계기로 한형석 선생의 작품들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보로 남겨진 악보들은 복원과 편곡 과정을 거쳐 공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재 자유아동극장은 한형석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다양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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