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프로그램
KNN 특집 다큐멘터리 천년의 염원, 가야진용신제
등록일 : 2025-02-03 16:17:17.0
조회수 : 260
-(해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바람의 신께 용왕과 칠성께 고합니다.
농사가 곧 생명이었던 시대. 비는 모든 인간의 기원이었고 또한 신앙이었습니다.
시간과 세월을 거슬러 대대로 이어온 염원은 신성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해설)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쳐 그리고 지금.
나라의 이름이 바뀌고 숱한 부침 속에서도 끝끝내 이어온 1000년의 염원.
우리는 그 실체를 가야진에서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국가는 자연 지형이 특수한 곳을 하늘을 제사터로 삼아 염원을 빌었습니다.
국가의 선택을 받은 신성한 곳. 이곳은 가야진입니다.
신화나 전설 속에서 신적인 존재로 여겨진 용.
용은 동아시아에서 구름과 비를 관장하는 신령한 존재였고 한편으론 국가의 위엄을 상징했습니다.
경남 양산시 원동면 용당마을. 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밑바탕에는 그 존재, 용이 있었습니다.
-(해설) 숱한 비극이 난무했던 전쟁에서도 죽음을 피해간 사람들.
모두가 용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용은 수호 신앙의 대신이었습니다.
-낙동강 앞에 여기 내가 서 있는데 용 세 마리가 이렇게 나를 보고 오는 거야.
하나는 암놈이고 두 마리는 수놈이라 하면 이렇게 구불구불 엉켜서 막 이렇게 오는 거야.
-그것도 농사에는 햇빛도 중요하지만.
-맞아.
-햇빛보다 물이 더 중요하니까.
-맞아요.
-그것도 용신에게.
-그러니까 이제 용산에게 하는 게.
-용산을 보고 또 절을 하거든, 나는.
앞을 보고도 하지마는 우리 당곡, 동네 산 저 산 보고도 같이하라 이거야.
어느 용이라든 하나가 샘을 놓으면 안 된다고. 양쪽을 보고 절을 하래.
-여기.
-나는 용신 님이,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것도 용신 님 덕이라고 본다.
-(해설) 국가와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온 용을 향한 믿음.
그 믿음은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 그들의 삶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흥사에서 뭐.
-(해설) 마을 이름부터 용당마을 답게 마을을 둘러싼 산.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과 관련이 깊습니다.
-(해설) 용의 머리를 닮아 용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 용산입니다.
-(해설) 낙동강 하류. 황산강이 있는 방향을 향해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듯한 모습.
19세기 말 양산 군수를 지낸 이만도는 한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낙동강으로 머리를 내민 용산. 용산과 맞닿은 곳에 만들어진 길고 둥근 모양의 용소.
그곳에 용당마을이 있었습니다.
용당마을에 큰비가 내리는 날이면 용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했습니다.
-(해설) 용소에 큰물이 들이쳐 만들진 소리를 용이 우는 소리로 여겼을 만큼
용은 마을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존재였습니다.
용은 용당마을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용당마을로 불리지만 오래전 이 일대는 가야진으로 불렸습니다.
-(해설)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를 나누는 영토의 경계.
동시에 경상도의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
1421년 이곳 가야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세종실록에 기록된 흥미로운 한 줄. 바로 용의 출몰입니다.
-(해설) 실재했던 용산과 용소.
그곳에 용이라는 실체까지 출몰했으니 이곳 가야진에서 용을 신으로 섬기게 된 건
어쩌면 필연에 가까웠을 겁니다.
-(해설) 가야진의 유일한 제사 터. 그곳이 바로 이곳 양산 용당마을입니다.
가야진사에서 모신 용은 하나가 아닌 셋이었습니다.
-(해설) 설화 속에 등장하는 세 마리의 용은 한 전령의 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을 황룡의 본처라 소개한 용은 청룡을 죽여줄 것을 부탁하는데 전령은 실수로 황룡을 죽이게 되죠.
황룡의 죽음 이후 마을에 재앙이 계속되자 마을은 사당을 짓고 용의
분노를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설화는 수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지고 마을 주민들은 용을 신으로 받들며
해를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용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제사였고 또한 기원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저기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막 이렇게 휘감는 게 보입니다, 사실은.
-소가 보여, 소.
-보입니다.
-물 위로 완전히 빙빙 돌아서.
-소리가 웅 하는 소리가 엄청 무섭게 들립니다.
-그게 용이 우는 소리야?
-처음에는 저도 몰랐는데 그렇다고 봐야죠. 지금도 비 오고 그러면 한 번씩.
-오래전부터 쳤는데 이번에. 굴 넣었네, 굴.
-여기에 작은 거 놓으라고...
-홍수 안 나게 해달라고 제사 지내고.
-비가 많이 오면.
-가뭄 있을 때는 또 비 와달라고.
-가물면 또 비 내려달라고 지내고.
-비 내려달라고도 지내고.
-옛날에는 가래떡도 집에서 다 만들었거든요, 밀어서.
-맞아.
-그리고 마지막에 용머리에 올리고 이렇게 만들면 그걸 용떡이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여기는 용떡을 강가에 놓고 빌죠.
-제사 지내려고 하면 옛날에는 돈이 어디 있어.
곡식 이런 걸 걷어서 이래서 용신제를 살렸지.
그런데 물이 들어오니까 제당에서 할 수 있나.
-옛날에는 여기 전부.
-그런 산에서 했지.
-(해설) 여러 기록과 설화 속에 등장한 가야진의 용.
여기에 용산과 용소를 비롯한 뚜렷한 장소성은 용 신앙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신앙과 유교적 제례를 중요시했던 조선은 가야진을 주목했고
왕이 주관하는 국가 제사 용신제를 지냈습니다.
-(해설) 조선의 왕들이 용신제를 통해 빌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농경 사회였던 만큼 풍년을 기원하고 농사의 근원인 비를 염원하는
기우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해설) 국가 제례로서 의 용신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사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해설) 용산과 용소, 낙동강을 비롯한 실제 존재하는 자연.
거기에 용 신앙에 대한 염원성이 더해져 중사를 지내는
국가 제사장으로 가야진이 선정되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가야진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국가가 지내는 제사 목록에 가야진사를 중사로 언급하며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 관리가 비를 기원하는 국가 제례를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큰 강에 지내는 4개의 제사를 사독이라 불렀는데
가야진의 황산강은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강이었습니다.
-(해설) 삼국시대부터 남아있는 사독의 기록.
중요한 사실은 동서남북의 사독 중에서 가야진 용신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국가 제례라는 사실입니다.
-(해설) 국가 제례로서의 중사이자 그 장소인 사독.
그 의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제례 의식이 지금까지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해설) 물론 위기는 있었습니다.
1925년 을축년에 큰 홍수가 일어났고 그로부터 12년 후 대홍수가 또다시 마을을 덮쳤습니다.
-홍수 나면 그냥 제사 안 지내면 되는데 다 뜯어서 옮기셨잖아요.
-(해설) 대홍수 속에 큰 피해를 겪으며 1937년 마을은 통째로 이전을 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용신을 모신 가야진사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가야진사가 지금의 원래 위치를 되찾게 된 건 비석골로 제당을 옮긴 지 30년 만이었습니다.
-쓸려 내려가지 않게 건물을 다 뜯어서, 지붕하고 벽을 다 뜯어서 비석골이라고 하는
산 쪽으로 옮겼다가 거기서 또 제사를 지내고 또 67년이 되니까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원래 자리는 저 자리잖아. 왜냐하면 그 앞에 용소가 있고 우리가 믿는 용신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67년에 다시 옵니다. 이러한 것들의 주체가 다 민이라는 거죠, 용당 주민들.
-(해설) 조선의 왕이 행한 국가 제례. 하지만 조선이 없어지는
역사적을 소용돌이 속에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자연재해 속에도 가야진사용신제는 살아남았습니다.
모두가 주민의 의지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해설) 이제 가야진용신제는 양산을 대표하는 삽량문화축전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풍물 중심의 대동놀이 성격이 짙어졌습니다.
-(해설) 가야진용신제는 경상남도 민속 자료이자 무형유산입니다.
하지만 용신제의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국가무형유산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해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다는 건 국가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야진용신제가 단지 주민들만의 신앙이 아닌
국가 차원의 제례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2010년 가야진용신제는 무형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할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분청사기를 비롯한 기와와 옹기 등 총 219점에 달하는 가야진사의 유물이 발굴된 겁니다.
-(해설) 여러 기록과 문헌에 수차례 등장한 가야진.
주민에 의해 지금껏 전승되어 온 용신제.
하지만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가야진사 유적지는 가야진용신제의 역사적인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해설) 15세기 당시에 가야진사 제당과 제단 그곳에서 출토된 제기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가야진사를 건립했을 당시 사용됐던 제기는 분청사기.
특히 희준과 상준은 1454년과 1474년에 제기 도설 기록과 일치했습니다.
가야진사가 적어도 600여 년 이상 지금의 자리에 있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해설) 가야진용신제의 국가무형유산 승격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세심한 보완을 위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부터 다시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다 예산 들어갈 문제인데 이러면 안 됩니다. 격에 절대 맞지 않아요.
-주춧돌 같은 경우도 이게 너무 사실은 안 어울리잖아. 차라리 저런 돌 갖다 했어야지.
-주춧돌 저거는 항상 저도 마음이 항상 걸렸어요.
-문헌에 나온 대로 여기에 해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죠.
-고증에 의한 문헌을 제시하고 보고서 만들 텐데 거기에 넣으면 돼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좋네, 이 공간.
-(해설)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무형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세 번째 도전.
-여기에서 지적할까 합니다.
-(해설) 당시 왕의 권한을 위임받는 지방 관리가 국가 제례를 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시장이 초헌관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가야진용신제 제복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고증에 따라 옷감을 선택하고 직조를 하고 나면 미리 잰 치수를 바탕으로 모양을 만들게 됩니다.
-(해설) 제례 의상을 복원하는 데 있어 가장 까다로운 건 국가 제례 제복을
당시와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구현해 내야 한다는 겁니다.
-(해설) 준비해야 할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문헌과 초상화를 토대로 최대한 그 시기와 가까운 형태를 구현하는 복원.
원단부터 바느질,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한 해석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단순히 제복을 복원하는 것 외에도 제례 의식의 순서와 내용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리고.
-(해설) 국가유산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가유산을 전문으로 탐구하는 대학으로
가야진사에서 발굴된 제기가 이곳에서 복원됩니다.
-(해설) 유적지에서 발굴된 사소한 조각은 때로는 큰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당시에 사용된 제기의 원료와 질감, 크기와 색을 유추해 나갑니다.
-(해설) 가야진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제기는 가야진용신제의 역사성을 가장 뚜렷이 증명합니다.
가장 특징적인 건 당시에 제기가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는 건데요.
-(해설) 가야진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넓은 사발 형태의 새.
하지만 당시 발굴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던 건 두 점은 상준과 희준입니다.
소의 모습을 본떠 만든 희준은 1400년대의 오례와 국조 오례의서례에 기록된 모양과 일치합니다.
-(해설) 자기에 관한 한 독보적인 기술을 자랑했던 조선.
그 솜씨로 빚어낸 국가 제례의 제기들.
오랜 시간 땅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유산이 수백여 년이 지난 지금 후대에 의해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한편 제기가 올라갈 제사상을 만드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해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해도 당시 정황을 최대한 유추하고 추적해 나갑니다.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제례였던 점을 감안해 조선시대의 종묘와 사직의 의뢰를 바탕으로 하되
조립이 아닌 짜임 형식을 취했습니다.
-(해설) 복원과 고증은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
그 질문의 답을 찾아 결과물로 보여줘야 합니다.
-포충사는 사 자가 절 사 자가 아니고 사당 사 자를 쓰는 거예요.
청주를 담아서 지하 간주구에 부어서 모셔 오는 그런 절차가...
-(해설)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국가 제례로서의
형식과 절차를 따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절하고 그다음에 손 닦고...
-(해설) 국가의 제례였던 가야진용신제지만 민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는 동안 제례의 과정과 형식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한 번에 같이 절하고 나가는 거예요.
-(해설) 변형됐거나 혹은 누락된 과정들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
지금껏 용신제를 지켜 온 이들이 마을의 주민들이었듯 용신제를 바로 세우는 이들도 마을의 주민들입니다.
-사람이 이쪽이지.
-북쪽이 만약에 이쪽이다, 생각하면.
-사람이 여기에 있어.
-남쪽, 북쪽으로 설 수도 있고 동서로 설 수도 있어요. 어떻게 서세요?
-(해설) 방향 하나, 손짓 하나. 정해진 절차와 형식을 정확히 따라갑니다.
-(함께) 궤 진홀~
-알자 찬 초헌관~ 궤 진홀~
-잘하십니다. 박수 좀 보내드리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해설) 마을 사람들에게 용신제는 축제와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국가 무형유산에 지정되지 못했던 건 놀이의 성격에 치중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가야진용신제의 정신.
-가야진사에~
-(함께) 얼쑤, 좋다.
-(해설) 다만 그 민속성을 조선시대 제례 의식에 제대로 담아 볼 작정입니다.
-시작.
-(해설) 동선부터 진행 순서까지 수정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대대로 삼용을 신으로 섬겨 온 사람들. 마을 주민들은 한밤의 연습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해설) 마을의 축제 그 이상의 가야진용신제.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를 바라는 그 염원 하나로 모인 주민들입니다.
-연습 우리 2시간 하니까 10시까지 하죠.
-10까지 해요?
-시간 금방 가요.
-시간이 금방 가요?
-악 잡으면 시간은 금방 가요. 속세를 잊어버리는, 여기가.
-하나, 둘, 셋, 넷, 하나. 급하죠?
-(해설) 가야진용신제를 지켜 온 주민들. 그들의 바람은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해설) 국가 무형유산 지정을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가야진용신제.
서류 심사 과정을 거쳐 이제 남은 건 현장 실사 평가입니다.
평가를 앞둔 마지막 최종 연습의 시간.
-(해설) 리허설에 앞서 제복까지 제대로 갖춰 입어봅니다. 용신제의 시작.
1과장 부정가시기로 문을 엽니다.
-(해설) 수개월간 반복해 온 연습은 완벽을 향해 갑니다.
국가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최종 관문.
가야진용신제 현지 조사 시연을 선보이는 날입니다.
지난 두 차례의 심사에서 탈락했던 아쉬움을 이번에는 만회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에 조금 더 밀고.
-첫 줄하고 라인 맞춰야 해.
-(해설) 조금은 긴장되고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한 주민들입니다.
-올라가라.
-(해설) 용신제에 사용될 제물까지 준비를 마치고.
-(해설) 마을의 어른은 주민들의 바람을 축원의 글로 써 내려갑니다.
-용당 사람들!
-(함께) 네!
-자, 가야진사로 갑시다!
-(함께) 갑시다!
-(해설) 드디어 최종 시연. 가야진용신제, 그 막이 오릅니다.
-1과장은 부정가시기라고 하는 장이에요.
그래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단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소지하는.
-안 좋은 기운을 다 쫓아내고 좋은 기운을 맞이한 상태에서 제를 올리겠다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죠.
-정성스럽게 소지하도록 합시다.
-(함께) 알겠습니다!
-온갖 잡귀 잡신아~ 썩 물렀거라~ 허세!
-(함께) 허세! 허세!
-삼용신이 기분이 좋아 잘 자정을 한 것 같습니다. 길이 엉망진창이네.
길 좀 잘 닦아주세요. 갈 닦아주세요!
-(함께) 그러세!
-칙사라는 개념이 저희가 볼 때는 귀한 손님이라는 뜻이에요.
-3과장은 향을 받아서 정식으로 가야진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용신제가 3과장입니다.
-(노래)
-감소고우~ 가야진지신~ 복이~ 위국지축~ 택윤만물~
-(노래)
-그리고 4과장은 용소풀이라고 하는데 용소풀이는 과거에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있었습니다마는
지금은 용신제가 비단 정기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기우제도 있었거든요.
-제라는 글자에는 제물로 바치는 희생물이 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 의례와는 달리 제사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동물을 희생으로 쓴다.
이게 제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
-풍년 든다!
-우리가 용신에게 제를 지냈으니까 우리의 신이 화답을 했노라고 믿는 거죠.
그래서 기쁜 마음에 같이 어울려 한바탕 대동 마당을 이루고 썼던 음식들을 나눠 먹고 또 술도 한 잔 마시고.
-끝나도 이게.
-끝난 게 끝난 게 아닙니다.
-(해설) 아쉬움은 남지만 오랜 숙제를 끝마친 기분입니다.
-하나, 둘, 셋!
-(함께) 파이팅!
-(해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유산.
그것은 지난 역사를 연결하는 끈이었고 시대를 넘나드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낙동강 하류 황산강 유역.
내 집과, 이웃과, 마을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한 조선의 국가 제례 중 중사로써
유일하게 계승되어 온 가야진용신제.
가야진용신제는 과거에 이어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질 우리의 역사입니다.
농사가 곧 생명이었던 시대. 비는 모든 인간의 기원이었고 또한 신앙이었습니다.
시간과 세월을 거슬러 대대로 이어온 염원은 신성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해설)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쳐 그리고 지금.
나라의 이름이 바뀌고 숱한 부침 속에서도 끝끝내 이어온 1000년의 염원.
우리는 그 실체를 가야진에서 보았습니다.
예로부터 국가는 자연 지형이 특수한 곳을 하늘을 제사터로 삼아 염원을 빌었습니다.
국가의 선택을 받은 신성한 곳. 이곳은 가야진입니다.
신화나 전설 속에서 신적인 존재로 여겨진 용.
용은 동아시아에서 구름과 비를 관장하는 신령한 존재였고 한편으론 국가의 위엄을 상징했습니다.
경남 양산시 원동면 용당마을. 마을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밑바탕에는 그 존재, 용이 있었습니다.
-(해설) 숱한 비극이 난무했던 전쟁에서도 죽음을 피해간 사람들.
모두가 용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용은 수호 신앙의 대신이었습니다.
-낙동강 앞에 여기 내가 서 있는데 용 세 마리가 이렇게 나를 보고 오는 거야.
하나는 암놈이고 두 마리는 수놈이라 하면 이렇게 구불구불 엉켜서 막 이렇게 오는 거야.
-그것도 농사에는 햇빛도 중요하지만.
-맞아.
-햇빛보다 물이 더 중요하니까.
-맞아요.
-그것도 용신에게.
-그러니까 이제 용산에게 하는 게.
-용산을 보고 또 절을 하거든, 나는.
앞을 보고도 하지마는 우리 당곡, 동네 산 저 산 보고도 같이하라 이거야.
어느 용이라든 하나가 샘을 놓으면 안 된다고. 양쪽을 보고 절을 하래.
-여기.
-나는 용신 님이,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것도 용신 님 덕이라고 본다.
-(해설) 국가와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온 용을 향한 믿음.
그 믿음은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 그들의 삶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흥사에서 뭐.
-(해설) 마을 이름부터 용당마을 답게 마을을 둘러싼 산.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과 관련이 깊습니다.
-(해설) 용의 머리를 닮아 용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 용산입니다.
-(해설) 낙동강 하류. 황산강이 있는 방향을 향해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듯한 모습.
19세기 말 양산 군수를 지낸 이만도는 한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낙동강으로 머리를 내민 용산. 용산과 맞닿은 곳에 만들어진 길고 둥근 모양의 용소.
그곳에 용당마을이 있었습니다.
용당마을에 큰비가 내리는 날이면 용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고도 했습니다.
-(해설) 용소에 큰물이 들이쳐 만들진 소리를 용이 우는 소리로 여겼을 만큼
용은 마을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존재였습니다.
용은 용당마을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용당마을로 불리지만 오래전 이 일대는 가야진으로 불렸습니다.
-(해설)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를 나누는 영토의 경계.
동시에 경상도의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
1421년 이곳 가야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세종실록에 기록된 흥미로운 한 줄. 바로 용의 출몰입니다.
-(해설) 실재했던 용산과 용소.
그곳에 용이라는 실체까지 출몰했으니 이곳 가야진에서 용을 신으로 섬기게 된 건
어쩌면 필연에 가까웠을 겁니다.
-(해설) 가야진의 유일한 제사 터. 그곳이 바로 이곳 양산 용당마을입니다.
가야진사에서 모신 용은 하나가 아닌 셋이었습니다.
-(해설) 설화 속에 등장하는 세 마리의 용은 한 전령의 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을 황룡의 본처라 소개한 용은 청룡을 죽여줄 것을 부탁하는데 전령은 실수로 황룡을 죽이게 되죠.
황룡의 죽음 이후 마을에 재앙이 계속되자 마을은 사당을 짓고 용의
분노를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설화는 수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지고 마을 주민들은 용을 신으로 받들며
해를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용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제사였고 또한 기원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저기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막 이렇게 휘감는 게 보입니다, 사실은.
-소가 보여, 소.
-보입니다.
-물 위로 완전히 빙빙 돌아서.
-소리가 웅 하는 소리가 엄청 무섭게 들립니다.
-그게 용이 우는 소리야?
-처음에는 저도 몰랐는데 그렇다고 봐야죠. 지금도 비 오고 그러면 한 번씩.
-오래전부터 쳤는데 이번에. 굴 넣었네, 굴.
-여기에 작은 거 놓으라고...
-홍수 안 나게 해달라고 제사 지내고.
-비가 많이 오면.
-가뭄 있을 때는 또 비 와달라고.
-가물면 또 비 내려달라고 지내고.
-비 내려달라고도 지내고.
-옛날에는 가래떡도 집에서 다 만들었거든요, 밀어서.
-맞아.
-그리고 마지막에 용머리에 올리고 이렇게 만들면 그걸 용떡이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여기는 용떡을 강가에 놓고 빌죠.
-제사 지내려고 하면 옛날에는 돈이 어디 있어.
곡식 이런 걸 걷어서 이래서 용신제를 살렸지.
그런데 물이 들어오니까 제당에서 할 수 있나.
-옛날에는 여기 전부.
-그런 산에서 했지.
-(해설) 여러 기록과 설화 속에 등장한 가야진의 용.
여기에 용산과 용소를 비롯한 뚜렷한 장소성은 용 신앙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신앙과 유교적 제례를 중요시했던 조선은 가야진을 주목했고
왕이 주관하는 국가 제사 용신제를 지냈습니다.
-(해설) 조선의 왕들이 용신제를 통해 빌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농경 사회였던 만큼 풍년을 기원하고 농사의 근원인 비를 염원하는
기우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해설) 국가 제례로서 의 용신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사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해설) 용산과 용소, 낙동강을 비롯한 실제 존재하는 자연.
거기에 용 신앙에 대한 염원성이 더해져 중사를 지내는
국가 제사장으로 가야진이 선정되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가야진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국가가 지내는 제사 목록에 가야진사를 중사로 언급하며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 관리가 비를 기원하는 국가 제례를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해마다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낸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큰 강에 지내는 4개의 제사를 사독이라 불렀는데
가야진의 황산강은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강이었습니다.
-(해설) 삼국시대부터 남아있는 사독의 기록.
중요한 사실은 동서남북의 사독 중에서 가야진 용신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국가 제례라는 사실입니다.
-(해설) 국가 제례로서의 중사이자 그 장소인 사독.
그 의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제례 의식이 지금까지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해설) 물론 위기는 있었습니다.
1925년 을축년에 큰 홍수가 일어났고 그로부터 12년 후 대홍수가 또다시 마을을 덮쳤습니다.
-홍수 나면 그냥 제사 안 지내면 되는데 다 뜯어서 옮기셨잖아요.
-(해설) 대홍수 속에 큰 피해를 겪으며 1937년 마을은 통째로 이전을 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용신을 모신 가야진사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가야진사가 지금의 원래 위치를 되찾게 된 건 비석골로 제당을 옮긴 지 30년 만이었습니다.
-쓸려 내려가지 않게 건물을 다 뜯어서, 지붕하고 벽을 다 뜯어서 비석골이라고 하는
산 쪽으로 옮겼다가 거기서 또 제사를 지내고 또 67년이 되니까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원래 자리는 저 자리잖아. 왜냐하면 그 앞에 용소가 있고 우리가 믿는 용신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67년에 다시 옵니다. 이러한 것들의 주체가 다 민이라는 거죠, 용당 주민들.
-(해설) 조선의 왕이 행한 국가 제례. 하지만 조선이 없어지는
역사적을 소용돌이 속에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자연재해 속에도 가야진사용신제는 살아남았습니다.
모두가 주민의 의지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해설) 이제 가야진용신제는 양산을 대표하는 삽량문화축전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풍물 중심의 대동놀이 성격이 짙어졌습니다.
-(해설) 가야진용신제는 경상남도 민속 자료이자 무형유산입니다.
하지만 용신제의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국가무형유산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해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다는 건 국가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야진용신제가 단지 주민들만의 신앙이 아닌
국가 차원의 제례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2010년 가야진용신제는 무형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할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분청사기를 비롯한 기와와 옹기 등 총 219점에 달하는 가야진사의 유물이 발굴된 겁니다.
-(해설) 여러 기록과 문헌에 수차례 등장한 가야진.
주민에 의해 지금껏 전승되어 온 용신제.
하지만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가야진사 유적지는 가야진용신제의 역사적인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해설) 15세기 당시에 가야진사 제당과 제단 그곳에서 출토된 제기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가야진사를 건립했을 당시 사용됐던 제기는 분청사기.
특히 희준과 상준은 1454년과 1474년에 제기 도설 기록과 일치했습니다.
가야진사가 적어도 600여 년 이상 지금의 자리에 있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해설) 가야진용신제의 국가무형유산 승격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세심한 보완을 위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부터 다시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다 예산 들어갈 문제인데 이러면 안 됩니다. 격에 절대 맞지 않아요.
-주춧돌 같은 경우도 이게 너무 사실은 안 어울리잖아. 차라리 저런 돌 갖다 했어야지.
-주춧돌 저거는 항상 저도 마음이 항상 걸렸어요.
-문헌에 나온 대로 여기에 해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죠.
-고증에 의한 문헌을 제시하고 보고서 만들 텐데 거기에 넣으면 돼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좋네, 이 공간.
-(해설)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무형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세 번째 도전.
-여기에서 지적할까 합니다.
-(해설) 당시 왕의 권한을 위임받는 지방 관리가 국가 제례를 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시장이 초헌관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가야진용신제 제복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고증에 따라 옷감을 선택하고 직조를 하고 나면 미리 잰 치수를 바탕으로 모양을 만들게 됩니다.
-(해설) 제례 의상을 복원하는 데 있어 가장 까다로운 건 국가 제례 제복을
당시와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구현해 내야 한다는 겁니다.
-(해설) 준비해야 할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문헌과 초상화를 토대로 최대한 그 시기와 가까운 형태를 구현하는 복원.
원단부터 바느질,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한 해석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단순히 제복을 복원하는 것 외에도 제례 의식의 순서와 내용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리고.
-(해설) 국가유산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가유산을 전문으로 탐구하는 대학으로
가야진사에서 발굴된 제기가 이곳에서 복원됩니다.
-(해설) 유적지에서 발굴된 사소한 조각은 때로는 큰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당시에 사용된 제기의 원료와 질감, 크기와 색을 유추해 나갑니다.
-(해설) 가야진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제기는 가야진용신제의 역사성을 가장 뚜렷이 증명합니다.
가장 특징적인 건 당시에 제기가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는 건데요.
-(해설) 가야진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넓은 사발 형태의 새.
하지만 당시 발굴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던 건 두 점은 상준과 희준입니다.
소의 모습을 본떠 만든 희준은 1400년대의 오례와 국조 오례의서례에 기록된 모양과 일치합니다.
-(해설) 자기에 관한 한 독보적인 기술을 자랑했던 조선.
그 솜씨로 빚어낸 국가 제례의 제기들.
오랜 시간 땅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유산이 수백여 년이 지난 지금 후대에 의해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한편 제기가 올라갈 제사상을 만드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해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해도 당시 정황을 최대한 유추하고 추적해 나갑니다.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제례였던 점을 감안해 조선시대의 종묘와 사직의 의뢰를 바탕으로 하되
조립이 아닌 짜임 형식을 취했습니다.
-(해설) 복원과 고증은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
그 질문의 답을 찾아 결과물로 보여줘야 합니다.
-포충사는 사 자가 절 사 자가 아니고 사당 사 자를 쓰는 거예요.
청주를 담아서 지하 간주구에 부어서 모셔 오는 그런 절차가...
-(해설)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국가 제례로서의
형식과 절차를 따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절하고 그다음에 손 닦고...
-(해설) 국가의 제례였던 가야진용신제지만 민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오는 동안 제례의 과정과 형식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한 번에 같이 절하고 나가는 거예요.
-(해설) 변형됐거나 혹은 누락된 과정들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
지금껏 용신제를 지켜 온 이들이 마을의 주민들이었듯 용신제를 바로 세우는 이들도 마을의 주민들입니다.
-사람이 이쪽이지.
-북쪽이 만약에 이쪽이다, 생각하면.
-사람이 여기에 있어.
-남쪽, 북쪽으로 설 수도 있고 동서로 설 수도 있어요. 어떻게 서세요?
-(해설) 방향 하나, 손짓 하나. 정해진 절차와 형식을 정확히 따라갑니다.
-(함께) 궤 진홀~
-알자 찬 초헌관~ 궤 진홀~
-잘하십니다. 박수 좀 보내드리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해설) 마을 사람들에게 용신제는 축제와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국가 무형유산에 지정되지 못했던 건 놀이의 성격에 치중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가야진용신제의 정신.
-가야진사에~
-(함께) 얼쑤, 좋다.
-(해설) 다만 그 민속성을 조선시대 제례 의식에 제대로 담아 볼 작정입니다.
-시작.
-(해설) 동선부터 진행 순서까지 수정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대대로 삼용을 신으로 섬겨 온 사람들. 마을 주민들은 한밤의 연습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해설) 마을의 축제 그 이상의 가야진용신제.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기를 바라는 그 염원 하나로 모인 주민들입니다.
-연습 우리 2시간 하니까 10시까지 하죠.
-10까지 해요?
-시간 금방 가요.
-시간이 금방 가요?
-악 잡으면 시간은 금방 가요. 속세를 잊어버리는, 여기가.
-하나, 둘, 셋, 넷, 하나. 급하죠?
-(해설) 가야진용신제를 지켜 온 주민들. 그들의 바람은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해설) 국가 무형유산 지정을 위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가야진용신제.
서류 심사 과정을 거쳐 이제 남은 건 현장 실사 평가입니다.
평가를 앞둔 마지막 최종 연습의 시간.
-(해설) 리허설에 앞서 제복까지 제대로 갖춰 입어봅니다. 용신제의 시작.
1과장 부정가시기로 문을 엽니다.
-(해설) 수개월간 반복해 온 연습은 완벽을 향해 갑니다.
국가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최종 관문.
가야진용신제 현지 조사 시연을 선보이는 날입니다.
지난 두 차례의 심사에서 탈락했던 아쉬움을 이번에는 만회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에 조금 더 밀고.
-첫 줄하고 라인 맞춰야 해.
-(해설) 조금은 긴장되고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한 주민들입니다.
-올라가라.
-(해설) 용신제에 사용될 제물까지 준비를 마치고.
-(해설) 마을의 어른은 주민들의 바람을 축원의 글로 써 내려갑니다.
-용당 사람들!
-(함께) 네!
-자, 가야진사로 갑시다!
-(함께) 갑시다!
-(해설) 드디어 최종 시연. 가야진용신제, 그 막이 오릅니다.
-1과장은 부정가시기라고 하는 장이에요.
그래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단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소지하는.
-안 좋은 기운을 다 쫓아내고 좋은 기운을 맞이한 상태에서 제를 올리겠다는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죠.
-정성스럽게 소지하도록 합시다.
-(함께) 알겠습니다!
-온갖 잡귀 잡신아~ 썩 물렀거라~ 허세!
-(함께) 허세! 허세!
-삼용신이 기분이 좋아 잘 자정을 한 것 같습니다. 길이 엉망진창이네.
길 좀 잘 닦아주세요. 갈 닦아주세요!
-(함께) 그러세!
-칙사라는 개념이 저희가 볼 때는 귀한 손님이라는 뜻이에요.
-3과장은 향을 받아서 정식으로 가야진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용신제가 3과장입니다.
-(노래)
-감소고우~ 가야진지신~ 복이~ 위국지축~ 택윤만물~
-(노래)
-그리고 4과장은 용소풀이라고 하는데 용소풀이는 과거에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있었습니다마는
지금은 용신제가 비단 정기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기우제도 있었거든요.
-제라는 글자에는 제물로 바치는 희생물이 피를 뚝뚝 흘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 의례와는 달리 제사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동물을 희생으로 쓴다.
이게 제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
-풍년 든다!
-우리가 용신에게 제를 지냈으니까 우리의 신이 화답을 했노라고 믿는 거죠.
그래서 기쁜 마음에 같이 어울려 한바탕 대동 마당을 이루고 썼던 음식들을 나눠 먹고 또 술도 한 잔 마시고.
-끝나도 이게.
-끝난 게 끝난 게 아닙니다.
-(해설) 아쉬움은 남지만 오랜 숙제를 끝마친 기분입니다.
-하나, 둘, 셋!
-(함께) 파이팅!
-(해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유산.
그것은 지난 역사를 연결하는 끈이었고 시대를 넘나드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낙동강 하류 황산강 유역.
내 집과, 이웃과, 마을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한 조선의 국가 제례 중 중사로써
유일하게 계승되어 온 가야진용신제.
가야진용신제는 과거에 이어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질 우리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