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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HD 2030 부산엑스포 유치 기원 新조선통신사 1부 - 200년의 약속
등록일 : 2023-11-27 16:58:44.0
조회수 : 876
-(해설) 긴 역사 속 한 시절을 함께 어울리며 200여 년간 평화를 누렸던 조선과 일본.
-(해설) 그것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맺고 이어온 소중한 약속이 있기에 가능했는데요.
그 옛날 두 나라를 오갔던 조선통신사 목선이 닫혔던 뱃길을 활짝 열어 그날의 약속을 찾아갑니다.
지난 7월 28일 부산 영가대에서 해신제가 진행되었습니다.
-(해설) 해신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향해 떠나기 전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해신제가 열린다는 건 조선통신사 행렬에 모든 준비가 마침내 끝났음을 뜻하는데요.
그 행렬의 수가 적게는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으로 대규모의 인원이 바다로 건너 일본 땅으로 오른 뒤 다시 육로를 거쳐 애도까지 가야 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사절단으로서의 설렘도 컸지만 어쩌면 살아서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었기에 해신제의 엄숙함과 간절함은 남달랐습니다.
-(해설) 조선 사신이 일본에 파견되는 일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통신사의 성격을 띤 것은 1428년 정사 박서생의 사절단이 최초라고 할 수 있는데요.
통신사는 이후 여섯 차례 더 이루어졌지만 임진왜란으로 모든 왕래가 끊어지게 됩니다.
두 나라가 다시 교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내란을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워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고 조선 조종의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못 이기는 척 화친을 택할 것인가 단교를 유지할 것인가.
그 기로 앞에 지목된 사람. 그가 바로 사명대사 유정이었습니다.
-(해설) 그날의 담판 이후로 일본으로 끌려갔던 피로인 3000여 명이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이 일의 흔적이 밀양 표충비 비각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습니다.
적국의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한치의 굽힘도 없었던 사명대사의 담판.
그야말로 역사의 길이 남을 명승부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쟁의 상처가 아물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참히 깨져버린 신의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막부의 정식 사과와 함께 화친을 요청하는 국서를 일본에서 먼저 보낼 것과 전쟁 당시 왕릉을 훼손한 범인들을 잡아 조선으로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요.
이 상황에서 가장 곤란해진 건 조선과 가장 가까운 일본 땅, 쓰시마였습니다.
일본 나가사키현의 쓰시마. 약 2만 8000여 명의 주민들이 수산업과 관광업을 생계 수단으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쓰시마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불과 50km.
후쿠오카까지의 거리는 138km로 쓰시마는 일본 땅이지만 본토의 어떤 지역보다 한국과 더 가까운 섬입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쓰시마에게 조선은 그저 단순히 바다 건너 남의 나라일 수 없었습니다.
-(해설) 조선에서 온 사절단을 제일 먼저 맞이하고 조선에서 온 식량과 물건으로 삶을 이어가며 조선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쓰시마가
결국 본국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된 것인데요.
번주의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부산과 무역을 시작하는 것이 쓰시마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한낱 작은 섬마을의 번주가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게 된 배경에는 붕괴되어 가는 쓰시마의 경제 상황이 깔려 있었습니다.
-(해설) 결국 쓰시마의 번주 쇼 요시토시는 지난 과거는 모두 잊고 다시 사절단을 왕래하며 화친하자는 내용의 거짓 국서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인을 위조해 조선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선조가 에도 막부에 보낸 화답서를 조선이 먼저 보내는 국서인 양 위조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처음으로 올린다는 뜻으로 봉서라고 고쳐버립니다.
그다음에 뒤쪽에도 먼저 국서를 보내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도 지워버립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도 보면 보내준 뜻에 대응을 해서 사신을 보낸다고 되어 있는데 전부 고쳐버렸습니다.
-(해설) 이들의 위조 행위는 이후 두 차례나 더 이어졌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쇼 요시토시가 국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을 조선과 일본은 정말 몰랐을까요?
-(해설) 조선 한양에서 부산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 에도까지.
왕복 4000km가 넘는 길을 1년여에 걸쳐 오갔던 여정, 1607년부터 재개된 조선 후기 통신사에는 이렇듯 거짓 국서로 시작됐지만 1811년 마지막 사행까지 순탄하게 이루어졌는데요.
그날의 행렬을 만나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세로 30.7cm, 가로 595cm의 그림을 펼치면 마치 살아 움직이듯 행렬이 시작되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36년, 제4차 조선 통신사 행렬도라 불렸던 이 그림은 조사 결과 18세기 작품으로 우리 조선 통신사 행렬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해설) 수백 명의 조선 통신사가 일본 땅에서 행렬을 시작하면 감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요.
네덜란드의 한 상인은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행렬이 다 지나가는 데만 5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마치 왕자의 행차와 같았다.
-(해설) 신의를 나눈다라는 의미의 통신.
짧게는 7년, 길게는 47년 만에 이루어진 조선통신사였지만 그렇게 양국을 오가는 동안 사행단과 일본 학자들 간에 마음을 나누는 이들도 생겼는데요.
이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놓은 것 가운데 조선 수창시가 있습니다.
1682넌 7차 조선통신사 사행 때 일본의 유학자 야마다 겐킨이 성완, 이담령, 홍세태 등을 상대로 주고받은 25수의 시문을 적은 것인데요.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단순히 문화 교류 역할만 한 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우정을 다짐한 시로 조선통신사 봉별시고도 있습니다.
-(해설) 나라가 다르고 말과 글이 달랐지만 스스럼없이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
거기에는 제술관 신유한과 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도 있습니다.
-(해설) 이날의 첫만남을 두고 신유한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얼굴이 푸르고 말이 무거우며 마음속을 드러내지 않아 자못 문인의 소탈한 기상은 없었다.
-(해설) 하지만 우정이 깊어지는 만큼 서로 달라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도 일어났는데요.
-(해설) 그중에서도 서로 다른 인사 예법은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오늘 정이 있어 나를 전송하는데.
이승에서는 다시 그대를 만날 길이 없구나.
-(해설) 신유한은 호슈를 두고 한어에 능통하고 시문에 밝은 최고의 학자라 평했고 호슈는 신유한이 준 유권을 평생토록 간직했습니다.
단 한 차례 만남이었지만 우정만큼은 남달랐던 두 사람.
통신사들과 터놓고 교류하며 조선어 교재를 집필하고 우삼동이라는 조선 이름까지 가질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1755년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쓰시마에 묻혔습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서일본 최대의 도시로 도쿄 다음가는 교통의 중심지인데요.
2025 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입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육로로 이동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쓰시마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일본의 여러 지역을 거쳐 마침내 도착한 오사카.
오사카는 일본에서의 육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는데요.
활기찬 사람들과 아름다운 거리를 보고 이곳이야말로 천하의 장관이라며 사행단 모두가 감탄을 했다고 하죠.
그중에도 요도가와 강은 최고의 볼거리였는데요.
이곳에서 그 옛날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해설) 사행단은 이 강을 거슬러 애도로 향했는데요.
오사카에서는 최고의 예후로 2층 지붕이 있는 배, 가와고자부네를 내놓았습니다.
오사카에서만 볼 수 있었던 풍경.
국서를 받든 선도선을 필두로 150여 척이 줄을 잇는 조선통신사 선당을 구경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는데요.
가와고자부네에는 특별히 노래하는 선원이 따로 있어 조선통신사 악대에 맞춰 공연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축제를 방불케 했을 그 분위기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네요.
오사카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통신사의 또 다른 흔적.
사행단의 숙소로 이용됐던 니시혼간지입니다.
그때는 규모가 더 커서 방이 무려 1000칸이 넘었다고 하는데요.
대체 얼마나 으리으리했던 걸까요?
하지만 그 규모보다 놀라운 비밀이 이 니시혼간지에 숨어 있는데요.
조선통신사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보게, 이보게!
이보게!
이보게!
이보게!
-살인이 났대요. 놔라 놔라.
-(일본어)
-(해설) 조선통신사 초유의 살인 사건은 미심쩍은 상황만 남긴 채 마무리됐는데요.
도훈도 최천종의 위패가 이곳 치쿠린지에 모셔져 있습니다.
-(해설) 타국에서의 죽음만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요?
주지 스님은 이렇게나마 그 영혼을 위로하고 있는데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최천종의 죽음이 정말 거울 하나 때문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해설) 조선통신사가 경비 조달용으로 가져온 품목은 비단과 종이, 붓 등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인삼은 팔면 4배 이상의 이익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고가의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자를 따라다닌 건 바로 인삼 밀무역이었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시오?
-(함께) 네!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아니 됩니다.
나으리, 나으리 아니 됩니다.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안 됩니다.
-이놈!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함께) 네!
-(해설) 인삼 밀무역으로 붙잡힌 권홍식과 오만창.
그 당시 인삼 밀무역을 한 자들에게는 참형이라는 엄벌이 내려졌는데요.
죄가 두려웠던 권홍식은 쓰시마에 도착하기 전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해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살인에다 인삼이라는 고가의 상품이 더해져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이 사건은 이후 가부키로 만들어져 무대에서 상영되기도 했는데요.
1883년까지 오사카와 교토에서만 42차례나 공연됐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가 지나는 길마다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조선 문사에게는 글을 화공에게는 그림을 받기 위해 줄을 섰던 일본 사람들.
그렇게 15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조선통신사 11차 사행이 끝나고 47년 후인 1811년에 이르러 12차 사행이 이루어지게 되는데요.
12차 사행은 그 모든 것이 이전의 사행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47년이라는 시간 속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이런...
-(해설) 이렇게 연기된 12차 통신 사행이 기약 없이 세월을 넘기는 동안 일본에서는 또 다른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해설) 이로 인해 1811년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조선통신사 신미사행은 종사관이 빠지고 정사, 부정사 두 사람을 주축으로 행렬단이 꾸려졌습니다.
가장 큰 볼거리던 마상제가 빠지면서 400명이 넘던 사행단의 수가 336명으로 축소되고 예식도 간소화됐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국서 전달이 일본의 수도인 에도가 아니라 쓰시마에서 행해졌다는 겁니다.
-(해설) 어쩔 수 없는 변화의 바람이었다고 할까요?
조선과 일본의 유구한 역사 속에 가장 평화로웠던 200여 시간을 뒤로 조선통신사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지난 8월 5일, 일본 쓰시마에 특별한 배 한 척이 입항했습니다.
조선 시대 사행단을 태우고 일본을 오갔던 조선통신사선을 그대로 재연한 것인데요.
이 배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떠세요? 그 옛날의 정취와 흥겨움이 조금이나마 느껴지시나요?
이 특별한 볼거리를 반기기 위해 올해엔 더 많은 사람이 쓰시마를 찾았습니다.
-(해설) 그 옛날, 글과 그림, 예술에 능통했던 조선 학자들이 외교사절, 문화사절이라는 특명을 띠고 일본 땅에 발을 내디뎠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환대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
우리의 춤과 가락이 일본 땅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데요.
분명, 낯선 음악, 낯선 모습이지만 만나서 반갑고 어울려서 즐거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설) 매년 이맘때쯤, 쓰시마에서는 이렇게 조선통신사 행렬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이 행사 하나를 위해 기꺼이 땀을 흘립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이만큼 변했는데도 조선통신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유는 과연 뭘까요?
-(해설)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믿음으로 소통하고 교류한다는 의미의 성신교린.
이것이 바로 조선통신사가 지켜온 200여 년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성신교린으로 두 나라의 평화를 일구어냈던 조선시대의 통신사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대한민국이 써 나갈 통신사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믿음으로 소통하고 믿음으로 교류하는 세상. 이제 우리가 이 약속을 이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런 요리를 대접했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해설) 그것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맺고 이어온 소중한 약속이 있기에 가능했는데요.
그 옛날 두 나라를 오갔던 조선통신사 목선이 닫혔던 뱃길을 활짝 열어 그날의 약속을 찾아갑니다.
지난 7월 28일 부산 영가대에서 해신제가 진행되었습니다.
-(해설) 해신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향해 떠나기 전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해신제가 열린다는 건 조선통신사 행렬에 모든 준비가 마침내 끝났음을 뜻하는데요.
그 행렬의 수가 적게는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으로 대규모의 인원이 바다로 건너 일본 땅으로 오른 뒤 다시 육로를 거쳐 애도까지 가야 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사절단으로서의 설렘도 컸지만 어쩌면 살아서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었기에 해신제의 엄숙함과 간절함은 남달랐습니다.
-(해설) 조선 사신이 일본에 파견되는 일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통신사의 성격을 띤 것은 1428년 정사 박서생의 사절단이 최초라고 할 수 있는데요.
통신사는 이후 여섯 차례 더 이루어졌지만 임진왜란으로 모든 왕래가 끊어지게 됩니다.
두 나라가 다시 교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내란을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워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고 조선 조종의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못 이기는 척 화친을 택할 것인가 단교를 유지할 것인가.
그 기로 앞에 지목된 사람. 그가 바로 사명대사 유정이었습니다.
-(해설) 그날의 담판 이후로 일본으로 끌려갔던 피로인 3000여 명이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이 일의 흔적이 밀양 표충비 비각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습니다.
적국의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한치의 굽힘도 없었던 사명대사의 담판.
그야말로 역사의 길이 남을 명승부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쟁의 상처가 아물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참히 깨져버린 신의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막부의 정식 사과와 함께 화친을 요청하는 국서를 일본에서 먼저 보낼 것과 전쟁 당시 왕릉을 훼손한 범인들을 잡아 조선으로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요.
이 상황에서 가장 곤란해진 건 조선과 가장 가까운 일본 땅, 쓰시마였습니다.
일본 나가사키현의 쓰시마. 약 2만 8000여 명의 주민들이 수산업과 관광업을 생계 수단으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쓰시마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불과 50km.
후쿠오카까지의 거리는 138km로 쓰시마는 일본 땅이지만 본토의 어떤 지역보다 한국과 더 가까운 섬입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쓰시마에게 조선은 그저 단순히 바다 건너 남의 나라일 수 없었습니다.
-(해설) 조선에서 온 사절단을 제일 먼저 맞이하고 조선에서 온 식량과 물건으로 삶을 이어가며 조선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쓰시마가
결국 본국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된 것인데요.
번주의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부산과 무역을 시작하는 것이 쓰시마를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한낱 작은 섬마을의 번주가 이토록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게 된 배경에는 붕괴되어 가는 쓰시마의 경제 상황이 깔려 있었습니다.
-(해설) 결국 쓰시마의 번주 쇼 요시토시는 지난 과거는 모두 잊고 다시 사절단을 왕래하며 화친하자는 내용의 거짓 국서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인을 위조해 조선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선조가 에도 막부에 보낸 화답서를 조선이 먼저 보내는 국서인 양 위조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처음으로 올린다는 뜻으로 봉서라고 고쳐버립니다.
그다음에 뒤쪽에도 먼저 국서를 보내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도 지워버립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도 보면 보내준 뜻에 대응을 해서 사신을 보낸다고 되어 있는데 전부 고쳐버렸습니다.
-(해설) 이들의 위조 행위는 이후 두 차례나 더 이어졌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쇼 요시토시가 국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을 조선과 일본은 정말 몰랐을까요?
-(해설) 조선 한양에서 부산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 에도까지.
왕복 4000km가 넘는 길을 1년여에 걸쳐 오갔던 여정, 1607년부터 재개된 조선 후기 통신사에는 이렇듯 거짓 국서로 시작됐지만 1811년 마지막 사행까지 순탄하게 이루어졌는데요.
그날의 행렬을 만나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세로 30.7cm, 가로 595cm의 그림을 펼치면 마치 살아 움직이듯 행렬이 시작되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36년, 제4차 조선 통신사 행렬도라 불렸던 이 그림은 조사 결과 18세기 작품으로 우리 조선 통신사 행렬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해설) 수백 명의 조선 통신사가 일본 땅에서 행렬을 시작하면 감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요.
네덜란드의 한 상인은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행렬이 다 지나가는 데만 5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마치 왕자의 행차와 같았다.
-(해설) 신의를 나눈다라는 의미의 통신.
짧게는 7년, 길게는 47년 만에 이루어진 조선통신사였지만 그렇게 양국을 오가는 동안 사행단과 일본 학자들 간에 마음을 나누는 이들도 생겼는데요.
이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놓은 것 가운데 조선 수창시가 있습니다.
1682넌 7차 조선통신사 사행 때 일본의 유학자 야마다 겐킨이 성완, 이담령, 홍세태 등을 상대로 주고받은 25수의 시문을 적은 것인데요.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단순히 문화 교류 역할만 한 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우정을 다짐한 시로 조선통신사 봉별시고도 있습니다.
-(해설) 나라가 다르고 말과 글이 달랐지만 스스럼없이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
거기에는 제술관 신유한과 학자 아메노모리 호슈도 있습니다.
-(해설) 이날의 첫만남을 두고 신유한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얼굴이 푸르고 말이 무거우며 마음속을 드러내지 않아 자못 문인의 소탈한 기상은 없었다.
-(해설) 하지만 우정이 깊어지는 만큼 서로 달라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도 일어났는데요.
-(해설) 그중에서도 서로 다른 인사 예법은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오늘 정이 있어 나를 전송하는데.
이승에서는 다시 그대를 만날 길이 없구나.
-(해설) 신유한은 호슈를 두고 한어에 능통하고 시문에 밝은 최고의 학자라 평했고 호슈는 신유한이 준 유권을 평생토록 간직했습니다.
단 한 차례 만남이었지만 우정만큼은 남달랐던 두 사람.
통신사들과 터놓고 교류하며 조선어 교재를 집필하고 우삼동이라는 조선 이름까지 가질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1755년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쓰시마에 묻혔습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서일본 최대의 도시로 도쿄 다음가는 교통의 중심지인데요.
2025 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준비가 한창입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육로로 이동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쓰시마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일본의 여러 지역을 거쳐 마침내 도착한 오사카.
오사카는 일본에서의 육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는데요.
활기찬 사람들과 아름다운 거리를 보고 이곳이야말로 천하의 장관이라며 사행단 모두가 감탄을 했다고 하죠.
그중에도 요도가와 강은 최고의 볼거리였는데요.
이곳에서 그 옛날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해설) 사행단은 이 강을 거슬러 애도로 향했는데요.
오사카에서는 최고의 예후로 2층 지붕이 있는 배, 가와고자부네를 내놓았습니다.
오사카에서만 볼 수 있었던 풍경.
국서를 받든 선도선을 필두로 150여 척이 줄을 잇는 조선통신사 선당을 구경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는데요.
가와고자부네에는 특별히 노래하는 선원이 따로 있어 조선통신사 악대에 맞춰 공연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축제를 방불케 했을 그 분위기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네요.
오사카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통신사의 또 다른 흔적.
사행단의 숙소로 이용됐던 니시혼간지입니다.
그때는 규모가 더 커서 방이 무려 1000칸이 넘었다고 하는데요.
대체 얼마나 으리으리했던 걸까요?
하지만 그 규모보다 놀라운 비밀이 이 니시혼간지에 숨어 있는데요.
조선통신사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보게, 이보게!
이보게!
이보게!
이보게!
-살인이 났대요. 놔라 놔라.
-(일본어)
-(해설) 조선통신사 초유의 살인 사건은 미심쩍은 상황만 남긴 채 마무리됐는데요.
도훈도 최천종의 위패가 이곳 치쿠린지에 모셔져 있습니다.
-(해설) 타국에서의 죽음만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요?
주지 스님은 이렇게나마 그 영혼을 위로하고 있는데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최천종의 죽음이 정말 거울 하나 때문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해설) 조선통신사가 경비 조달용으로 가져온 품목은 비단과 종이, 붓 등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인삼은 팔면 4배 이상의 이익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고가의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자를 따라다닌 건 바로 인삼 밀무역이었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시오?
-(함께) 네!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아니 됩니다.
나으리, 나으리 아니 됩니다.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안 됩니다.
-이놈!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함께) 네!
-(해설) 인삼 밀무역으로 붙잡힌 권홍식과 오만창.
그 당시 인삼 밀무역을 한 자들에게는 참형이라는 엄벌이 내려졌는데요.
죄가 두려웠던 권홍식은 쓰시마에 도착하기 전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해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살인에다 인삼이라는 고가의 상품이 더해져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이 사건은 이후 가부키로 만들어져 무대에서 상영되기도 했는데요.
1883년까지 오사카와 교토에서만 42차례나 공연됐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가 지나는 길마다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조선 문사에게는 글을 화공에게는 그림을 받기 위해 줄을 섰던 일본 사람들.
그렇게 15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조선통신사 11차 사행이 끝나고 47년 후인 1811년에 이르러 12차 사행이 이루어지게 되는데요.
12차 사행은 그 모든 것이 이전의 사행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47년이라는 시간 속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이런...
-(해설) 이렇게 연기된 12차 통신 사행이 기약 없이 세월을 넘기는 동안 일본에서는 또 다른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해설) 이로 인해 1811년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조선통신사 신미사행은 종사관이 빠지고 정사, 부정사 두 사람을 주축으로 행렬단이 꾸려졌습니다.
가장 큰 볼거리던 마상제가 빠지면서 400명이 넘던 사행단의 수가 336명으로 축소되고 예식도 간소화됐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국서 전달이 일본의 수도인 에도가 아니라 쓰시마에서 행해졌다는 겁니다.
-(해설) 어쩔 수 없는 변화의 바람이었다고 할까요?
조선과 일본의 유구한 역사 속에 가장 평화로웠던 200여 시간을 뒤로 조선통신사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지난 8월 5일, 일본 쓰시마에 특별한 배 한 척이 입항했습니다.
조선 시대 사행단을 태우고 일본을 오갔던 조선통신사선을 그대로 재연한 것인데요.
이 배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떠세요? 그 옛날의 정취와 흥겨움이 조금이나마 느껴지시나요?
이 특별한 볼거리를 반기기 위해 올해엔 더 많은 사람이 쓰시마를 찾았습니다.
-(해설) 그 옛날, 글과 그림, 예술에 능통했던 조선 학자들이 외교사절, 문화사절이라는 특명을 띠고 일본 땅에 발을 내디뎠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환대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
우리의 춤과 가락이 일본 땅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데요.
분명, 낯선 음악, 낯선 모습이지만 만나서 반갑고 어울려서 즐거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설) 매년 이맘때쯤, 쓰시마에서는 이렇게 조선통신사 행렬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이 행사 하나를 위해 기꺼이 땀을 흘립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이만큼 변했는데도 조선통신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유는 과연 뭘까요?
-(해설)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믿음으로 소통하고 교류한다는 의미의 성신교린.
이것이 바로 조선통신사가 지켜온 200여 년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성신교린으로 두 나라의 평화를 일구어냈던 조선시대의 통신사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대한민국이 써 나갈 통신사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믿음으로 소통하고 믿음으로 교류하는 세상. 이제 우리가 이 약속을 이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런 요리를 대접했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