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
자연을 그리던 작가에서 자연을 담는 작가로 - 화가 장건율
표중규
입력 : 2026.10.06 15:26
조회수 :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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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개인전 전시장에서 직접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를 만나는 건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더구나 아직 젊은 작가가 10년 전 자신의전시회를 떠올리며 같은 형태의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진행한다는 건, 그 갤러리의 결단만큼이나 작가의 용기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몇 달이 흘렀나. 다시 그 작가가 그룹전을 한다는 소식에 찾은 갤러리 블루브릭에는전혀 다른 느낌의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풀과 숲 등 자연을 그리는 작가라는 그동안의 평과는 전혀 다른,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역시 자연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작품들. 그 새로운 변신에 캔버스 앞에 머물며 생각하는 시간이조금씩 더 길어졌다. 여전히 손 곳곳에 물감이 묻어 있었지만,실제 작업 중일 때보다는 훨씬 더 정갈한 모습으로 나타난 장건율 작가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바뀐 차림새만큼이나 정갈하게 흘렀다.
지난번에 봤던 작품들은 꽃이나 풀 같은,사람들이 잘 아는 장건율 작가님의 작품들, 전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이번 작품들은 무엇을 담고 있나요?
장건율 작가(이하 장건율)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는데, 바로 해와 달, 달과 구름이에요 .지난번에 블루브릭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는 제가 처음 활동을 시작한 2016년부터 올해까지10년간 계속 연구해 오고 보여주고 싶었던 이미지들을 발표했었는데, 그게 주로 꽃이나 식물, 풍경 같은 것들이었어요. 나무나 강 같은 것들이요. 그런데 올해 제가 합천에 있는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되면서 변화가 있었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요.거기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게 해랑 달이었어요.
주제와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미지도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전까지 제가 꽃을 그릴 땐 그것들을 보며 느끼는 아련함 같은 게 있었어요. 저는 주로 밖에 나가서 그림을 자주 그리는데,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계절이 변하는 것도 계속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게 돼요.꽃이나 식물 같은 것들은 모두 계절에 맞춰서 알아서 피고 지죠.그다음 순서가 되면 또 다른 꽃이 피고 지고요. 정비 사업 등으로 풀을 베어내면, 오늘 본 꽃을 내일 와서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라지기도 해요.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가기도 하고요.그런 데에서 오는 아련함, 그래서 그것들을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계속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하는 고민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들었거든요. ‘나는 왜 얘네들을 그리고 싶어 하고,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까. ’이런 고민이 계속 들었는데, 스스로 내린 답은 어쩌면 오히려 제가 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 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친구들을 보고 그림으로 남겨줌으로써 저와 이들의 만남도 남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작년과 올해 계속 바깥에 나가서 그리면서 그림의 대상도 넓어졌어요.꽃이나 식물뿐만 아니라 큰 나무라든지 강이나 산을 그리게 됐는데, 꽃을 그릴 때랑은 느낌이 많이 달랐어요. 특히 낙동강을 그릴 일이 이번에 많았어요. 합천의 레지던시 바로 앞에 가면 낙동강이 있어서,강가에서 큰 강이랑 산을 그리는 동안에는 꽃을 그릴 때처럼 곧 사라질 존재들을 남기려는 마음보다는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바다나 강, 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물론 강이나 산은 생명들이 모여 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는 아니잖아요. 그들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긴 시간 속에, 잠시 살다 가는 제가 들어간다는 기분을 낙동강을 그리면서 많이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제 삶을 확인하고, 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면서 어딘가에 기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에게 속하고 무언가를 남겨주는 일이라면, 그림을 통해 그 일을 계속해 나가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의 끝에 닿았던 게 달이랑 해였어요. 산이나 강은 물이 흘러가고 계절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데,달과 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그림에서는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을 함께 그려보고 싶었어요. 저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제가 보고 싶은 그림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이번 그림에 해가 있고, 반대쪽 모서리에 맑은 날에 보이는 달이 있고, 동그랗게 그려진 건 햇빛이거든요. 그 빛은 계속해서 변하고 사라지는 거잖아요. 순간순간 변하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을 함께 여기에 그려봤어요.뒤에 있는 ‘달과 구름’ 한 점도 마찬가지예요. 구름은 곧 그 모양이 사라지는 존재고 달은 계속 있는 존재니까요. 그 둘을 함께 그려놓고 시간과 삶,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기자
지난 10년 동안 꽃이나 풀을 비롯한 자연을 그리던 때와는 대상과 화풍이 달라졌는데, 스스로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 시기라고 보면 되겠네요?
장건율
저도 아직 30대 중반이다 보니까 그림 실력이 느는 등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끼거든요. 재료를 다루는 데 능숙해지는 것도 매 순간 느껴요. 두세 점만 그려도 이 색깔이 더 익숙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 큰 생각들이 바뀌는 건, 몇 년간 이어온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예요. 이번에는 그 변화가 컸던 것 같아요.
기자
굉장히 진중한 대답이어서 이번에는 조금 쉬어가는 질문 드릴게요. 왜 이번 전시회에서는 지난번처럼 직접 현장에서 그리는 퍼포먼스를 안 하시는 거예요?
장건율
아,그거요. 하하. 제가 처음 외부 전시 활동을 했던 곳이 경남도립미술관이었는데,그때 전시한 3개월 동안 전시 현장에 나가서 그렸죠. 하지만 그 이후로는 올해 개인전 전까지 전시 현장에서 그린 적은 없어요. 그런데 올해는 딱 10년째 되는 해여서 당시를 되새겨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이 다 걸려 있는 자리에서 작업하는 모습도 함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여기서 했던 거죠. 전시 때마다 현장 작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있으면서 이런 이벤트가 있으면 밖에서 조금씩 그리고는 싶은데, 오늘은 또 다른 친구들도 있어서요. 하하.
기자
그런데 이력을 보면 프랑스와 일본에서 개인전을 하셨다고 되어 있던데, 두 나라에서는 어떤 인연으로 전시회를 열게 되었나요?
장건율
둘 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프랑스는 매츠라는 곳에 있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했어요. 그런데 그 개인전을 하는 시기에 제가 딱 일본에 가야 해서, 개인전에 직접 가보지 못한 게 많이 아쉽긴 해요.
제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부산에서 주로 작품이 소개됐어요.저는 창원에서 그림을 계속 그리긴 하지만 작품 소개는주로 부산이나 서울에서 이뤄졌는데, 부산에는 아트부산이라는 아트페어가 있어요. 거기에서 젊은 작가를 선정해서 소개하는 부스가 있는데,2024년에 제가 소개됐어요. 그때 참여했던 프랑스 갤러리에서 제 작품을 보고 한번 미팅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작년 말에 미팅이 잡혔죠. 그때 개인전을 프랑스에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뒤, 갤러리 관계자가 제 작업실에 직접 와보기도 하면서 개인전이 진행됐어요.
일본 같은 경우에는, 2016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해외에서 전시 활동을 했던 곳이 일본이었어요.그때는 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만들어준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나가사키에서 학교 친구들이랑 전시회에 참여했는데, 그게 저한테 아주 좋은 경험으로 남았거든요.
해외에 있는 다른 작가들과 교류한다는 게 무척 좋았어요. 그 이후로 기회가 된다면 한국과 일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2025년에BNK 부산은행의 청년 작가 미술 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해외 레지던시 지원을 받게 됐어요.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느냐고 했을 때 일본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거든요. 예전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일본어도계속 공부했었어요.언젠가는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그 지원으로 일본에서 3개월 동안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거기서 개인전을 하게 된 거죠.
기자
프랑스와 일본, 두 나라에서 잇따라 전시를 여신 셈인데, 그걸 계기로 작가님의 경험이나 내공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나요?
장건율
변화가 엄청 컸던 것 같아요. 우선은 제가 지금 여기서 그리는 그림이, 우스갯소리로 하자면 ‘먹히는구나’ 하는 것도 있었고요. 그런 걸 확인하는 순간이 저한테는 또 동기가 되기도 했어요. 특히 좋았던 건 일본에서의 레지던시 경험이었어요.3개월 동안 제가 거기서 살아야 되잖아요. 제가 군대를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낸 적이 없어요. 그동안 계속 창원에 있었고,경남에 있는 레지던시에 2024년에 다녀오긴 했지만 경남을 벗어난 적은 없었어요. 처음으로 혼자 해외에서 지내며 일본어만 쓰는 그 경험이 굉장히 컸어요.그래서 작품이 많이 변했어요.
그전까지는 주로 저를 생각하면서 그렸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본 것, 내가 경험한 것에서 나오는 내 그림이 중심이었는데, 일본에서 3개월 동안 레지던시를 하면서는 교류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저를 많이 내려놓고,내 그림이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생각하게 됐죠. 그게 그림 그리기가 더 편해지는 계기가 됐어요.
프랑스 같은 경우에도 작품이 해외에 가 있으니까, 갤러리에서 계속 소식을 전해주고 관객분들의 피드백도 저한테 보내주거든요. 저는 유화 물감과 캔버스를 쓰는데, 그 장르 자체가 서양화잖아요. 저는 그 점에 대한 고민도 있었거든요. 동서양이 완전히 분리되는 건 아니지만, 서양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아시아에 사는 나는 어떤 정서를 담아 어떤 화면을 보여줘야 할까 하는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프랑스에서의 피드백이 저한테 많은 확신을 줬던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과 함께 더 연구해서 다음 방향으로 나아갈 용기를 줬어요. 제 작업에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기자
장 작가님의 뒤를 이어 성장해 나갈 지역의 후배 작가들도 많잖아요. 작가님의 활동이 후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실 것 같은데요. 후배들이 작가님을 보며 어떤 작가로 성장했으면 하시나요?
장건율
저는 그걸 많이 신경 쓰는 편이에요.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보다는 항상 후배들과 함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제가 살고 있는 경남 창원에는 제 나이 또래 작가들이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서 굉장히 적어요. 그런데저는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하거든요. 아쉬운 점은 물론 있겠지만, 그게 단점이라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미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중 하나가 작가들과의 관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들이에요.지금은 저도 선배의 입장에서 활동하지만, 저도 20대 때 졸업하자마자 제 주변에 있는 선배들을 계속 보면서 ‘이렇게 활동하면 좋겠다’, ‘저 선배처럼 되고 싶다’, ‘저렇게 솔직하게 작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품 활동을 했어요.
특히 제가 무척 존경하는 노순천 작가나 최승준 작가는 저보다 열 살 혹은 여섯 살 많은 선배들이거든요. 그 선배들이 경남에서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정말 솔직하고 좋은 작업을 보여주는 모습에서 저는 용기와 확신을 얻었어요. ‘나도 저렇게 하고 싶고, 저렇게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저도 그 선배들처럼 솔직하고 열심히 작업해서, 다른 후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자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2027년에는 어떤 작품을 만들고 어떤 활동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장건율
내년 4월에 부산 맥화랑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어요. 이제는 뭔가 달라질 것 같아요. 저는 5년, 10년 단위로 계획을 짜는 편이에요. 올해까지는 지금껏 해온 작업을 어느 정도 갈무리한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그 작업들을 정리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중이에요. 무 자르듯이 ‘이제부터 이런 그림을 그릴 거야’ 하고 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에 보여드린 그림들처럼 덜어낼 수 있는 만큼 덜어내고, 하고 싶은 만큼 딱 할 수 있는 그런 그림들을 준비하려고 해요. 내년 개인전에서는 더 솔직한 그림들, 이번에 보여드린 것 같은 그림들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사라지는 것들과 사라지지 않는 것들, 그리고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내년에는 중점적으로 할 것 같아요.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캠핑을 처음 시작할 때는 단출하게 텐트 하나로 시작하다가,한창 재미가 들리면 장비 욕심이 생겨 온갖 고가 장비를 마련한다. 결국에는 다시 텐트 하나로 훌쩍 떠나는 사람이 진짜 캠핑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이렇게 무언가가 더해지다가 어느 순간 그 본질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워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30대 젊은 작가와의 대화에서 똑같이 되새기게 될 줄은 몰랐다.
캔버스를 가득 채웠던 풀과 꽃의 순간이 이제 작가가 사라지고 나도 그대로 남을 산과 강을 넘어, 어쩌면 이 세상이 사라져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호젓이 떠 있을 달과 해로 바뀌는 순간, 나는 또 그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오랜만에 기대되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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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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