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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평장리 청동거울의 비밀
등록일 : 2026-03-23 17:34:48.0
조회수 : 24
-(해설) 불 속에서 탄생한 태양을 닮은 이곳의 이름은 정문경. 잔무늬 거울이라고도 부르죠.
1cm 안에 수십 개의 동심원을 그려 넣은 나노기술의 결정체로
수천 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마한 사람들의 기술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중국의 거울은 우주와 자연, 용과 같은 문양의 글씨를 새기는 방식. 우리나라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마한의 땅으로 알려진 익산에서 중국의 것이 분명한 청동 거울이 그 모습을 드러내 세상을 놀라게 했죠.
2000여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이 거울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마한과 백제사 연구에 매진해 온 최완규 교수와 함께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한여름 밤 신비로운 음악과 함께 화려한 레이저 쇼가 펼쳐집니다.
황홀한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석탑을 품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입니다.
이곳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동과 선화공주죠.
마를 캐던 서동이 백제 30대 무왕이 되고 왕비였던 선화의 청으로 미륵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서탑 발원자가 사택왕후로 확인되면서 잠깐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중앙에 가장 먼저 세워졌을 목탑의 주인공이 바로 선화공주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400년 전 새로운 백제를 꿈꿨던 무왕의 원대한 포부가 남아있는 미륵사지.
미륵사지를 품고 있는 미륵산에는 또 다른 왕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기 600년, 왕위에 오른 백제 무왕보다 무려 800년 전 이곳에 내려와 마한의 왕이 된 한 사람에 관한 것이죠.
산 정상을 감싸고 도는 미륵산성. 하늘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의 또 다른 이름은 기준성입니다.
-미륵산성은 미륵산의 옛 이름을 딴 용화 산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최근 발굴을 통해 서기 600년경 유물이 다수 확인돼 백제의 것으로 이야기되는데요.
하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고조선 준왕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고 남아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고조선의 왕은 익산으로 내려와 산성을 쌓았던 것일까요?
-(해설) 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죠.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통해 당시 고조선의 영역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만리장성.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역사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진나라가 망한 뒤 새로운 통일왕조인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은 바닷길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중국 기록에는 준왕이 신하들과 함께 산이라고 부르는 땅에 이르러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적어놓았죠.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준왕 남천이라고 부르는데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옮겨갔다는 뜻입니다.
-(해설) 준왕이 남천했다고 알려진 땅이 바로 미륵산성이 자리한 익산인 겁니다.
고려사에도 고조선의 왕 기준이 바닷길로 내려와 한의 땅에 이르러 마한을 개국했다고 적어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금마군.
지금의 전북 익산시입니다.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음을 말해 주는 왕궁리유적.
미륵산이 한눈에 보이고 왕궁리유적에서 차로 3분이면 닿는 거리.
지금은 붉은 맨살을 드러낸 이곳에서 기원전 2세기, 준왕의 남천을 증언해 줄 단서가 확인된 겁니다.
익산과 군산 일대에 잠들어있던 청동기와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곳 박물관에서 평장리의 것도 만날 수가 있죠.
지난 1987년 익산시 왕궁면 평장리에서 수습된 유물은 총 다섯 점입니다.
바로 한국식 동검과 청동으로 만든 창 그리고 청동 거울이었죠.
그 가운데 특히 이 거울은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죠.
평장리에서 나온 중국제 거울과 비슷한 시기의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국립청주박물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한 독지가가 기증한 청동 거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진 거울을 흔히 한경이라고 부르는데 그 시기에 따라 전한경과 후한경으로 구분하고 있죠.
전한시대에 만들어진 이런 거울은 명대경이라고 하는데 한자로 쓰인 글씨가 동그랗게 띠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다름 아닌 샘물.
신기한 광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힘차게 흐르는 물길은 도심 곳곳을 실핏줄처럼 연결하고 있는데요.
샘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곳은 중국 산둥성의 성도인 진안시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땅이었던 곳이죠. 이 유서 깊은 도시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박물관입니다.
이 청동 항아리는 중국 상나라 때 만들어진 겁니다.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았던 용도였죠.
용의 형상을 한 손잡이. 몸통에는 온 우주를 담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보다 먼저 만들어진 청동 거울도 만날 수 있죠.
용 문양 사이를 뚫어 만든 투조 형태의 이 거울은 청동기 주조 기술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금과 은, 터키석을 이용해 만든 이 거울은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에서 나온 거죠.
익산 평장리에서 나온 청동 거울의 비밀을 찾기 위한 여정.
긴 세월 동아시아 교류사를 연구해 온 백운상 교수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해 중국 전한경이 바닷길을 통해 익산 평장리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건데요.
어떤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했을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언제부터 이러한 물질문명이 바닷길로 한반도 남부에 전해지기 시작했던 것일까요.
-(해설) 부여 송국리 유적을 먼저 만나볼까요?
청동기 시대 주거 형태가 잘 남아있어 당시 생활상을 짐작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죠.
이를 통해 당시 집약적인 농경 생활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유적의 지명을 딴 송국리형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를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토기입니다.
납작한 바닥에 좁은 굽. 그릇의 윗부분은 막 피어난 장미꽃 봉오리를 닮았는데 흔히 송국리식 토기라고 부르죠.
당시 권력자들의 무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인돌. 그리고 송국리형 토기를 활용한 독널 등이 있었죠.
이런 송국리형 유적이 집중된 대표적인 유적은 보령 관창리와 서천 당정리, 익산 영등동이 있습니다.
당시 이런 곳에 살던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마한의 토대. 즉 기층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요.
익산 영등동이 한눈에 보이는 바로 이곳에서 송국리형 문화와는 전혀 다른 집단의 이주를 말해 주는 단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 발굴 조사를 했는데 토광묘가 확인된 겁니다.
이전과는 달리 나무 널을 만들어 시신을 땅속에 묻는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었죠.
이 무덤에서는 철기는 물론 송국리식 토기와는 다른 형태의 그릇이 나왔는데요.
점토로 띠를 만든 다음 토기 윗부분에 덧붙인 점토대토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검은색 광택에 긴 목이 특징인 검은간토기도 새로운 집단의 등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고인돌 무덤을 쓰던 사회집단은 규모가 작은 옹관묘를 사용했던
송곡리형 사회보다 견고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무거운 돌을 함께 옮겨야 했으니까요.
그만큼 배타성도 강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죠.
때문에 금강과 만경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해로 교통의 요충지에 개방적인 성향까지 갖춘
송곡리형 사회가 철기와 점토대토기를 가지고 내려온 토광묘 집단이 안착할 수 있는 터전이 된 겁니다.
송곡리형 문화의 기층 세력과 이주민이었던 고조선 문화의 결합은 마한 성립기 일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죠.
-(해설) 중국 요녕성의 본계 박물관. 이곳에 들어서면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던 유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고조선의 영역을 말해 주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 바로 그거죠.
그리고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봤던 점토대토기도 있습니다.
마치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비파형동검은 물론 거푸집까지. 그리고 고조선 준왕이 익산으로 내려올 당시의 상황을 짐작게 하는 유물도 있습니다.
기원전 267년. 진나라에서 만들어진 이 무기는 진나라가 고조선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죠.
그리고 연나라의 청동 창과 마지막 왕의 이름이 남아있는 이런 무기들은 국경을 맞대고 치열하게 경쟁했을 고조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게 연나라가 망한 뒤 위만이 고조선 준왕에게 망명해 국경을 지키다가, 기원전 194년 반란을 일으켰던 겁니다.
고조선 준왕이 마한의 땅으로 내려온 것을 보여주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통해 들어온 철기문화의 등장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죠.
고조선의 영토였던 지금의 북한 땅에서 나온 초기 철기시대의 것과 유사한 형태의 쇠낫도 보입니다.
마한이 시작되던 때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와 철기가 나온 곳은 다름 아닌 만경강 일대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전주완주 혁신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대규모의 발굴 조사 덕분이었죠.
지도에서 살펴보면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온 신풍유적 바로 옆에
가장 오래된 쇠낫을 품고 있던 갈동유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전한 시대 중국 거울이 나온 평장리 유적이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는 이 유적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걸까요?
한국식 동검과 그것을 만들던 거푸집이 발견된 곳은 완주 갈동유적.
그런데 바로 인근 상림리유적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청동검이 세상을 놀라게 했죠.
손잡이에는 볼록한 2개의 마디를 만들어놨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모두 26자루의 이런 청동검이 한곳에 묻혀있었다는 거죠.
상림리에서 나온 이 청동검은 언제 어디에서 누가 만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곳 산동박물관에서 말이죠.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서슬 퍼런 무기들 가운데
이곳에 전시된 청동검은 한눈에 봐도 상림리의 것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일체형으로 된 칼은 손잡이에 2개의 돌기가 있죠. 수천 년 전 최첨단 무기가 어떻게 한반도에 건너간 것일까요.
백운상 교수의 말을 듣고 찬찬히 다시 살펴보니 살상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른 재질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상림리에서 발견된 이런 전국식 청동검은 어떤 이들이 만들었을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기원전 334년 초나라의 공격으로 나라를 잃은 월나라 장인들이 유력하게 거론되곤 합니다.
수많은 이들의 염원에 바닷바람이 응답해 주는 듯합니다. 중국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한 천진두.
하늘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산둥성의 웨이하이시.
지도에서 보면 우리나라와 얼마나 가까운지 한눈에 알 수 있죠.
진시황이 이곳을 두 번이나 찾았는데, 그중 한 번은 불로초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2,2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다는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겁니다.
거센 풍랑이나 암초만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죠.
난파선을 발굴한 자리에 들어선 봉래 해상실크로드박물관.
수백 년 동안 펄 속에 잠들어있던 배가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게 신기할 뿐인데요.
더 놀라운 건 이곳에 전시된 4척의 배 가운데 절반인 2척이 14세기에 침몰한 고려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뾰족한 중국의 것과는 다르게 평평한 바닥이 가장 큰 차이점이죠.
그리고 물속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들은 바닷길이 무역의 중요한 통로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해상실크로드박물관이 자리한 펑라이는 고려시대까지 산둥반도를 대표했던 항구도시입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한 봉래각은 풍광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죠.
서해와 발해만을 마주한 이곳은 우리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요.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위만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에서 출발했고 서기 660년,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한 것도 바로 이 바다에서 시작됐습니다.
당나라 때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로를 지도에서 살펴보면 봉래에서 연안 항로를 통해 내려가는 코스와
황해를 횡단해 한반도를 향했던 방식이 있었습니다.
-이 바닷길은 중국 전국 시대부터 존재했을 겁니다.
크고 안전한 배를 만들기 어려웠을 때는 연안 항로를 따라 내려가는 선택을 했겠죠.
중간에 기항지에 머물며 식량과 물도 챙겨야 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러다 건조 능력과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개척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죠.
-(해설) 기원전 194년. 고조선 준왕은 아마 이 연안 항로를 따라 내려왔을 겁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수도 없이 오가던 안전한 길. 망설일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준왕은 미륵산이 보이는 금마저, 지금의 익산 땅에 도착했겠죠.
그렇다면 고조선 준왕이 익산으로 남천할 때 타고 왔던 배의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해상실크로드박물관 벽면에 새겨진 옛 배들의 모습 가운데 당시를 떠올려볼 수 있는 단서도 있지 않을까요?
바닷길이 들려주는 고조선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만 한데요.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런 청동 거울도 고조선에서 시작된 겁니다.
거울 뒷면을 가득 채운 기하학적인 문양.
이 청동 거울은 우리나라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 제작 기술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수천 년 전, 이 땅의 권력자가 목에 걸었던 이런 청동 거울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작은 거울 안에 무려 13,000개가 넘는 선을 새겨 넣는 기술력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잔무늬거울의 대부분은 만경강 일대의 토광묘에서 나온 겁니다.
구덩이를 파고 목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형태의 묘제죠.
때문에 기존에 독널을 사용했던 마한 초기의 기층 세력과는 다른
어찌 보면 이주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조선 준왕 집단의 존재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거죠.
학계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준왕의 남천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죠.
마한의 땅, 당시 만경강 일대에서 청동기와 초기 철기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특별한 비밀이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마한.
훗날 이 마한이 진한과 변한으로 나누어지면서 삼한 시대가 열리게 되는 거죠.
그 마한이 시작된 땅이 바로 생명의 강으로 불리는 만경강 일대와 금강 하구인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고조선 준왕이 배를 타고 내려온 곳을 금마, 지금의 익산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기고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부터 호남 3대 수리시설로 알려진 익산의 황등제.
안타깝게도 기록에만 남아있을 뿐 실체가 확인되지 않아 한동안 의구심의 대상으로 남아있었죠.
그런데 지난 2021년 땅속에 잠들어 있던 황등제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흙덩이를 벽돌처럼 만들고 나뭇가지를 넣어 오늘날 철근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죠.
과학적 방법을 통해 연대를 측정했더니 1차 공정, 그러니까 처음 축조된 때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고지형 분석 결과 지금은 사라진 황등제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마한의 경제적 토대가 됐던 황등제의 존재가 익산의 위상을 말해 주고 있는 겁니다.
서동설화의 주인공 백제 무왕이 금마로 불리던 익산으로 천도했음을 증언하는 왕궁리 유적.
한가운데 자리한 정원 유적은 백제 왕궁의 완결성을 더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곤 합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왕궁성의 배후에는 고조선 준왕의 설화를 품고 있는 미륵산이 자리하고 있죠.
왕궁리 유적의 양쪽을 감싸며 흐르는 옥룡천과 부상천.
토층 조사 결과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과거에는 그 수량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죠.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왕궁리 유적이 만경강과 금강으로 연결된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마한이 시작된 땅, 익산을 증언하는 유물이 모여있는 곳.
준왕이 남천했던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평장리 유물도 한편을 차지하고 있죠.
청동검 두 자루와 청동창과 꺾창. 그리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 거울 한 점.
이 귀한 물건들을 지니고 다녔을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마한이 시작된 땅, 익산.
송국리형 토기로 불리는 이런 그릇을 썼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수천 년 전부터 마한 땅의 주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전후부터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있었죠.
송국리형 토기와는 전혀 다른 토기의 존재가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전란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바닷길로 금마저라 불리는 땅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준왕의 남천은 일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죠.
당시 만들어진 청동 거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전한시대에 만들어진 중국제 청동 거울이 새로운 문물이 교차했던 해상실크로드의 정점이 익산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송곡리 문화로 일컬어지는 토착 세력과 바닷길을 통해 도착한 이주민들은 금마저라는
희망의 땅에서 때로는 부딪치고 또 화합했을 겁니다.
익산을 비롯한 만경강 일대는 문명이 충돌하는 문화의 용광로가 되어 한반도 고대 문화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겁니다.
1cm 안에 수십 개의 동심원을 그려 넣은 나노기술의 결정체로
수천 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마한 사람들의 기술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중국의 거울은 우주와 자연, 용과 같은 문양의 글씨를 새기는 방식. 우리나라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마한의 땅으로 알려진 익산에서 중국의 것이 분명한 청동 거울이 그 모습을 드러내 세상을 놀라게 했죠.
2000여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이 거울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마한과 백제사 연구에 매진해 온 최완규 교수와 함께 그 비밀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한여름 밤 신비로운 음악과 함께 화려한 레이저 쇼가 펼쳐집니다.
황홀한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석탑을 품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입니다.
이곳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서동과 선화공주죠.
마를 캐던 서동이 백제 30대 무왕이 되고 왕비였던 선화의 청으로 미륵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서탑 발원자가 사택왕후로 확인되면서 잠깐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중앙에 가장 먼저 세워졌을 목탑의 주인공이 바로 선화공주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400년 전 새로운 백제를 꿈꿨던 무왕의 원대한 포부가 남아있는 미륵사지.
미륵사지를 품고 있는 미륵산에는 또 다른 왕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기 600년, 왕위에 오른 백제 무왕보다 무려 800년 전 이곳에 내려와 마한의 왕이 된 한 사람에 관한 것이죠.
산 정상을 감싸고 도는 미륵산성. 하늘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의 또 다른 이름은 기준성입니다.
-미륵산성은 미륵산의 옛 이름을 딴 용화 산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최근 발굴을 통해 서기 600년경 유물이 다수 확인돼 백제의 것으로 이야기되는데요.
하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고조선 준왕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고 남아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고조선의 왕은 익산으로 내려와 산성을 쌓았던 것일까요?
-(해설) 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죠.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통해 당시 고조선의 영역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흉노족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만리장성.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역사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진나라가 망한 뒤 새로운 통일왕조인 한나라를 세운 유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은 바닷길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중국 기록에는 준왕이 신하들과 함께 산이라고 부르는 땅에 이르러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적어놓았죠.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준왕 남천이라고 부르는데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옮겨갔다는 뜻입니다.
-(해설) 준왕이 남천했다고 알려진 땅이 바로 미륵산성이 자리한 익산인 겁니다.
고려사에도 고조선의 왕 기준이 바닷길로 내려와 한의 땅에 이르러 마한을 개국했다고 적어놓았는데 그곳이 바로 금마군.
지금의 전북 익산시입니다.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음을 말해 주는 왕궁리유적.
미륵산이 한눈에 보이고 왕궁리유적에서 차로 3분이면 닿는 거리.
지금은 붉은 맨살을 드러낸 이곳에서 기원전 2세기, 준왕의 남천을 증언해 줄 단서가 확인된 겁니다.
익산과 군산 일대에 잠들어있던 청동기와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곳 박물관에서 평장리의 것도 만날 수가 있죠.
지난 1987년 익산시 왕궁면 평장리에서 수습된 유물은 총 다섯 점입니다.
바로 한국식 동검과 청동으로 만든 창 그리고 청동 거울이었죠.
그 가운데 특히 이 거울은 고고학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죠.
평장리에서 나온 중국제 거울과 비슷한 시기의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국립청주박물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한 독지가가 기증한 청동 거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진 거울을 흔히 한경이라고 부르는데 그 시기에 따라 전한경과 후한경으로 구분하고 있죠.
전한시대에 만들어진 이런 거울은 명대경이라고 하는데 한자로 쓰인 글씨가 동그랗게 띠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다름 아닌 샘물.
신기한 광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힘차게 흐르는 물길은 도심 곳곳을 실핏줄처럼 연결하고 있는데요.
샘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곳은 중국 산둥성의 성도인 진안시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땅이었던 곳이죠. 이 유서 깊은 도시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박물관입니다.
이 청동 항아리는 중국 상나라 때 만들어진 겁니다.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았던 용도였죠.
용의 형상을 한 손잡이. 몸통에는 온 우주를 담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보다 먼저 만들어진 청동 거울도 만날 수 있죠.
용 문양 사이를 뚫어 만든 투조 형태의 이 거울은 청동기 주조 기술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금과 은, 터키석을 이용해 만든 이 거울은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에서 나온 거죠.
익산 평장리에서 나온 청동 거울의 비밀을 찾기 위한 여정.
긴 세월 동아시아 교류사를 연구해 온 백운상 교수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해 중국 전한경이 바닷길을 통해 익산 평장리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건데요.
어떤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했을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언제부터 이러한 물질문명이 바닷길로 한반도 남부에 전해지기 시작했던 것일까요.
-(해설) 부여 송국리 유적을 먼저 만나볼까요?
청동기 시대 주거 형태가 잘 남아있어 당시 생활상을 짐작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곳이죠.
이를 통해 당시 집약적인 농경 생활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유적의 지명을 딴 송국리형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를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토기입니다.
납작한 바닥에 좁은 굽. 그릇의 윗부분은 막 피어난 장미꽃 봉오리를 닮았는데 흔히 송국리식 토기라고 부르죠.
당시 권력자들의 무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인돌. 그리고 송국리형 토기를 활용한 독널 등이 있었죠.
이런 송국리형 유적이 집중된 대표적인 유적은 보령 관창리와 서천 당정리, 익산 영등동이 있습니다.
당시 이런 곳에 살던 사람들을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마한의 토대. 즉 기층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요.
익산 영등동이 한눈에 보이는 바로 이곳에서 송국리형 문화와는 전혀 다른 집단의 이주를 말해 주는 단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 발굴 조사를 했는데 토광묘가 확인된 겁니다.
이전과는 달리 나무 널을 만들어 시신을 땅속에 묻는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었죠.
이 무덤에서는 철기는 물론 송국리식 토기와는 다른 형태의 그릇이 나왔는데요.
점토로 띠를 만든 다음 토기 윗부분에 덧붙인 점토대토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검은색 광택에 긴 목이 특징인 검은간토기도 새로운 집단의 등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고인돌 무덤을 쓰던 사회집단은 규모가 작은 옹관묘를 사용했던
송곡리형 사회보다 견고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무거운 돌을 함께 옮겨야 했으니까요.
그만큼 배타성도 강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죠.
때문에 금강과 만경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해로 교통의 요충지에 개방적인 성향까지 갖춘
송곡리형 사회가 철기와 점토대토기를 가지고 내려온 토광묘 집단이 안착할 수 있는 터전이 된 겁니다.
송곡리형 문화의 기층 세력과 이주민이었던 고조선 문화의 결합은 마한 성립기 일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죠.
-(해설) 중국 요녕성의 본계 박물관. 이곳에 들어서면 우리가 역사책에서 보던 유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고조선의 영역을 말해 주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 바로 그거죠.
그리고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봤던 점토대토기도 있습니다.
마치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비파형동검은 물론 거푸집까지. 그리고 고조선 준왕이 익산으로 내려올 당시의 상황을 짐작게 하는 유물도 있습니다.
기원전 267년. 진나라에서 만들어진 이 무기는 진나라가 고조선까지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죠.
그리고 연나라의 청동 창과 마지막 왕의 이름이 남아있는 이런 무기들은 국경을 맞대고 치열하게 경쟁했을 고조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게 연나라가 망한 뒤 위만이 고조선 준왕에게 망명해 국경을 지키다가, 기원전 194년 반란을 일으켰던 겁니다.
고조선 준왕이 마한의 땅으로 내려온 것을 보여주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통해 들어온 철기문화의 등장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죠.
고조선의 영토였던 지금의 북한 땅에서 나온 초기 철기시대의 것과 유사한 형태의 쇠낫도 보입니다.
마한이 시작되던 때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와 철기가 나온 곳은 다름 아닌 만경강 일대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전주완주 혁신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대규모의 발굴 조사 덕분이었죠.
지도에서 살펴보면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쏟아져 나온 신풍유적 바로 옆에
가장 오래된 쇠낫을 품고 있던 갈동유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전한 시대 중국 거울이 나온 평장리 유적이 있습니다.
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는 이 유적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걸까요?
한국식 동검과 그것을 만들던 거푸집이 발견된 곳은 완주 갈동유적.
그런데 바로 인근 상림리유적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청동검이 세상을 놀라게 했죠.
손잡이에는 볼록한 2개의 마디를 만들어놨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모두 26자루의 이런 청동검이 한곳에 묻혀있었다는 거죠.
상림리에서 나온 이 청동검은 언제 어디에서 누가 만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곳 산동박물관에서 말이죠.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서슬 퍼런 무기들 가운데
이곳에 전시된 청동검은 한눈에 봐도 상림리의 것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일체형으로 된 칼은 손잡이에 2개의 돌기가 있죠. 수천 년 전 최첨단 무기가 어떻게 한반도에 건너간 것일까요.
백운상 교수의 말을 듣고 찬찬히 다시 살펴보니 살상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른 재질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상림리에서 발견된 이런 전국식 청동검은 어떤 이들이 만들었을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기원전 334년 초나라의 공격으로 나라를 잃은 월나라 장인들이 유력하게 거론되곤 합니다.
수많은 이들의 염원에 바닷바람이 응답해 주는 듯합니다. 중국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한 천진두.
하늘의 끝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산둥성의 웨이하이시.
지도에서 보면 우리나라와 얼마나 가까운지 한눈에 알 수 있죠.
진시황이 이곳을 두 번이나 찾았는데, 그중 한 번은 불로초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2,2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다는 세상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겁니다.
거센 풍랑이나 암초만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죠.
난파선을 발굴한 자리에 들어선 봉래 해상실크로드박물관.
수백 년 동안 펄 속에 잠들어있던 배가 이렇게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게 신기할 뿐인데요.
더 놀라운 건 이곳에 전시된 4척의 배 가운데 절반인 2척이 14세기에 침몰한 고려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겁니다.
뾰족한 중국의 것과는 다르게 평평한 바닥이 가장 큰 차이점이죠.
그리고 물속에서 건져 올린 도자기들은 바닷길이 무역의 중요한 통로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해상실크로드박물관이 자리한 펑라이는 고려시대까지 산둥반도를 대표했던 항구도시입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한 봉래각은 풍광이 아름다워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죠.
서해와 발해만을 마주한 이곳은 우리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요.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위만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이곳에서 출발했고 서기 660년,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한 것도 바로 이 바다에서 시작됐습니다.
당나라 때 동아시아의 해상 교역로를 지도에서 살펴보면 봉래에서 연안 항로를 통해 내려가는 코스와
황해를 횡단해 한반도를 향했던 방식이 있었습니다.
-이 바닷길은 중국 전국 시대부터 존재했을 겁니다.
크고 안전한 배를 만들기 어려웠을 때는 연안 항로를 따라 내려가는 선택을 했겠죠.
중간에 기항지에 머물며 식량과 물도 챙겨야 했을 테니까 말이죠.
그러다 건조 능력과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서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개척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죠.
-(해설) 기원전 194년. 고조선 준왕은 아마 이 연안 항로를 따라 내려왔을 겁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수도 없이 오가던 안전한 길. 망설일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준왕은 미륵산이 보이는 금마저, 지금의 익산 땅에 도착했겠죠.
그렇다면 고조선 준왕이 익산으로 남천할 때 타고 왔던 배의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해상실크로드박물관 벽면에 새겨진 옛 배들의 모습 가운데 당시를 떠올려볼 수 있는 단서도 있지 않을까요?
바닷길이 들려주는 고조선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만 한데요.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런 청동 거울도 고조선에서 시작된 겁니다.
거울 뒷면을 가득 채운 기하학적인 문양.
이 청동 거울은 우리나라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 제작 기술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수천 년 전, 이 땅의 권력자가 목에 걸었던 이런 청동 거울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작은 거울 안에 무려 13,000개가 넘는 선을 새겨 넣는 기술력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곳 박물관에 전시된 잔무늬거울의 대부분은 만경강 일대의 토광묘에서 나온 겁니다.
구덩이를 파고 목관에 시신을 안치하는 형태의 묘제죠.
때문에 기존에 독널을 사용했던 마한 초기의 기층 세력과는 다른
어찌 보면 이주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조선 준왕 집단의 존재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거죠.
학계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준왕의 남천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죠.
마한의 땅, 당시 만경강 일대에서 청동기와 초기 철기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특별한 비밀이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마한.
훗날 이 마한이 진한과 변한으로 나누어지면서 삼한 시대가 열리게 되는 거죠.
그 마한이 시작된 땅이 바로 생명의 강으로 불리는 만경강 일대와 금강 하구인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고조선 준왕이 배를 타고 내려온 곳을 금마, 지금의 익산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기고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부터 호남 3대 수리시설로 알려진 익산의 황등제.
안타깝게도 기록에만 남아있을 뿐 실체가 확인되지 않아 한동안 의구심의 대상으로 남아있었죠.
그런데 지난 2021년 땅속에 잠들어 있던 황등제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흙덩이를 벽돌처럼 만들고 나뭇가지를 넣어 오늘날 철근과 같은 역할을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죠.
과학적 방법을 통해 연대를 측정했더니 1차 공정, 그러니까 처음 축조된 때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고지형 분석 결과 지금은 사라진 황등제의 모습을 그려볼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마한의 경제적 토대가 됐던 황등제의 존재가 익산의 위상을 말해 주고 있는 겁니다.
서동설화의 주인공 백제 무왕이 금마로 불리던 익산으로 천도했음을 증언하는 왕궁리 유적.
한가운데 자리한 정원 유적은 백제 왕궁의 완결성을 더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곤 합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왕궁성의 배후에는 고조선 준왕의 설화를 품고 있는 미륵산이 자리하고 있죠.
왕궁리 유적의 양쪽을 감싸며 흐르는 옥룡천과 부상천.
토층 조사 결과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과거에는 그 수량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죠.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왕궁리 유적이 만경강과 금강으로 연결된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마한이 시작된 땅, 익산을 증언하는 유물이 모여있는 곳.
준왕이 남천했던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평장리 유물도 한편을 차지하고 있죠.
청동검 두 자루와 청동창과 꺾창. 그리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 거울 한 점.
이 귀한 물건들을 지니고 다녔을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마한이 시작된 땅, 익산.
송국리형 토기로 불리는 이런 그릇을 썼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수천 년 전부터 마한 땅의 주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전후부터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있었죠.
송국리형 토기와는 전혀 다른 토기의 존재가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전란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바닷길로 금마저라 불리는 땅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준왕의 남천은 일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죠.
당시 만들어진 청동 거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전한시대에 만들어진 중국제 청동 거울이 새로운 문물이 교차했던 해상실크로드의 정점이 익산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송곡리 문화로 일컬어지는 토착 세력과 바닷길을 통해 도착한 이주민들은 금마저라는
희망의 땅에서 때로는 부딪치고 또 화합했을 겁니다.
익산을 비롯한 만경강 일대는 문명이 충돌하는 문화의 용광로가 되어 한반도 고대 문화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