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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귀향, 장생탄광 수몰 83년 기억의 귀환

등록일 : 2025-11-10 16:40:13.0
조회수 : 42
"장생탄광 수몰 83년, 망각의 세월을 뚫고 귀환하는 기억"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 2월 3일, 일본인들이 꺼리던 위험한 해저 탄광에서 갱도 천장이 붕괴하며 조선인 136명을 포함한 총 183명의 광부들이 수몰됐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강제로 끌려와 하루 12시간씩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혔던 진실의 발굴-

사고 당시 일본 정부는 희생자 수를 축소하고 진실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일본의 전시 상황에서 조선인 희생자 대량 발생은 불편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희생된 이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채, 시신이나 유골도 찾을 수 없어 많은 유가족들은 그저 사고 현장의 모래 한 줌으로 위령제를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일본인 역사학자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의 노력으로 희생자 수가 183명이라는 진실이 밝혀졌고, 강제 징용된 조선인 136명을 포함한 사망자 명부가 비로소 작성되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 시민단체 '장생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회'는 바다 건너 조선인 유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일 시민들의 연대와 83년 만의 귀환-

이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은 사고 발생 50년 만인 1992년, 대한민국유족회를 결성하며 진실 규명과 유해 발굴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8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실을 외면하며 유해 발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한일청구권 협정이 개인의 권리까지 해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내부 문서를 통해 밝혀지면서 유가족들의 좌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일 시민들의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일본 시민단체는 유골의 위치가 불분명하다는 일본 정부의 핑계에 맞서 자체적으로 유골 수집 조사를 위한 모금 운동을 펼쳐 목표액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을 모았습니다.

2024년 9월에는 마침내 갱구가 발견되었고, 한국의 잠수사들이 합류하여 수중 탐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희생자 136명 중 절반이 넘는 73명이 대구·경북 지역 출신으로 밝혀지면서, 대구 시민들이 주축이 된 '귀향추진단'은 수중 탐사 때마다 "이제 그만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시자"며 희생자들을 마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해저 탄광 수색 중 두개골 한 점과 대퇴부, 팔 뼈 등 유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83년의 오랜 세월에도 치아까지 선명한 모습은 고향으로의 귀향을 간절히 기다려온 희생자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비록 아직은 유골 수습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지연을 겪고 있지만, 83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망각의 바다 아래 묻혔던 기억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해설) 일본 야마구치현 우배시 바닷속. 83년 전 무너져내린 탄광의 잔해를 헤치며 들어간다.
일제강점기. 작업 환경이 위험하고 붕괴 위험이 높아 일본인들은 모두 꺼리던 해저 탄광.
조선 땅에서 강제로 끌려와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석탄을 캐야 했던 청년들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암담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해설) 당시에도 열악한 환경 탓에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통하던 탄광은 1942년 갱도 천장이 붕괴되면서
조선인 136명에 한꺼번에 수몰된 진짜 무덤이 됐다.
-(해설) 마침내 83년 만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바닷속에 잠겨 잊혀져가던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 그들의 귀환이 시작됐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들어갑시다.
-(해설) 83년 전 장생탄광에서 아버지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온 전석호 씨.
-(해설) 올해 95세인 아버지는 날마다 기억을 잃어간다.
-아버지는 어디 있어, 아버지. 아버지 찾아 봐.
-(해설) 장생탄광 붕괴 당시 우베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버지는 사고 현장의 목격자이자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했다.
-피아. 피아 앞에서 그러니까 모래밭에서.
-해변, 해변.
-여기 해변에?
-(해설) 1932년 본격적으로 조업을 시작한 장생 탄광은 전성기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가 연간 약 16만 톤의 석탄을 채굴하던 곳이었다.
피아는 원통형 배기탑으로 바다 아래 해저탄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물자가 절실했던 일본은 석탄의 증산이 급선무였고 무리한 채굴을 강행했다.
특히 장생탄광은 일본 법이 규정한 깊이보다 10m나 얕은 깊이로 갱을 파 다른 해저탄광보다 수몰 위험이 큰 곳이었다.
다른 일본인들이 기피하자 일본은 1939년부터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해 채탄 작업에 동원했다. 그리고 1942년 2월 결국 사고가 터졌다.
-(해설)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셨을 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
-보고 싶을 때는...
-(해설) 해마다 탄광이 붕괴됐던 2월 초순만되면 장생 바다로 가시고는 했지만 돌아오셔서도 늘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더 늦기 전에 들어두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제 아버지와의 대화는 쉽지 않다.
-(해설) 시신도 유골도 찾을 수 없어 그저 장생바다에서 모래 한줌을 가져와 할머니 산소에 합장을 했었다.
-과일 드세요.
-(해설) 이제는 그 세월도 다 잊으신 걸까. 그러나 아버지가 결코 잊지 못한 그리움이 있다.
-포도.
-하나만 드세요.
-일본, 저기.
-일본? 아버지한테 가야지.
-그래, 아버지한테 가고 싶다고 했잖아.
-(해설) 11살이던 아이는 어느새 95살이 되었다. 역사가 강요한 망각의 세월. 그것은 너무나 길고 너무나 고독한 싸움이었다.
-(해설)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까. 바다 건너 일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직접 쓴 편지였다.
-어머님, 저는 지금 일본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 밑으로 갱도가 연결되어있고 바다 위를 지나는 어선의 통통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정말로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울타리는 3m 정도의 두꺼운 송판으로 만들어져 세워졌고 그 바깥에는 촘촘한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출입문에는 무장한 경비원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동물 이하의 것으로 간주하여 폭력을 가하고 밥도 주지 않고 굶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어쨌든 간에 반드시 탈출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해설)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들의 탈출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그때. 또 한 통의 편지가 일본에서 왔다.
-(해설) 1942년 2월 3일, 장생탄광 갱도 내 사망. 그날의 진실이 밝혀진 건 30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일본인 역사학자가 깜짝 놀랄만한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사고는 당시 신문에도 조금 보도됐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는 희생자 수를 크게 축소하여 전했고 사고의 실체를 은폐했다.
전시하에서는 생산 제일이 외쳐졌고,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 반도에서 다수의 노동자가 동원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 노동자가 대거 희생됐다는 사실은 당국에게 불편한 것이었다.
실제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은 회사측 명부에조차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부연고 불로써 매장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해설) 1940년대 일본이 발표한 장생탄광 수몰 희생자 수는 고작 42명.
하지만 관청 기록과 생존자 증언 조사를 통해 1970년대에 이르러 야마구치 다케노부가 밝혀낸 희생자 수는 무려 183명이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강제 징용된 조선인 136명을 포함한 제대로 된 사망자 명부가 작성됐다.
-(해설) 그렇게 그를 중심으로 장생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회라는 일본 시민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바다 건너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조선인 유가족을 위해 집집마다 국제우편을 보냈다.
-(해설)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된 유가족들은 1992년이 되어서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을
사고 발생 50년 만에 마침내 일본 장생탄광 희생자 대한민국유족회가 탄생한 것이다.
-(해설) 장생탄광유족회의 초창기멤버로 사무국장을 맡았던 아버지.
살아 생전 유족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계셨던 역사의 숙제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유족회의 사무국장을 맡기로 결심했다. 고맙습니다.
-(해설) 그 통탄의 세월을 어찌 다 말로 할까. 유족회 설립 시절부터 33년째 유족회 활동을 이어온 양현 회장은
일본에서 소식이 올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
-(해설) 일본 정부는 사고 이후 83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실을 외면하며 유해 발굴에 소극적 태도를 보여왔다.
-(해설) 그렇게 50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유족들이 사고 현장을 찾았다.
그냥 백사장에서 우리가 천막 쳐놓고 우리가 위령제도 지내고 했는데.
-(해설) 이후 해마다 붕괴 사고가 났던 2월 3일이면 휑한 모래 사장에서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제를 올린 게 무려 십수 년.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불행했던 과거의 한일 관계를 청산하고 영광스러운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한일협정이 2월 22일 오후 5시 일본에서 정식 조인됐습니다.
-(해설) 그러나 당시 일본 외무성이 감춰뒀던 내부 문서가 공개됐다.
-1991년 주일 대사관이 작성한 외교문서에는 청구권 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된 게 아니라는 암묵적 인식 일치가 있었다고 말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지만 이제 요구할 수 없다는 궤변입니다.
-(해설) 허허벌판 백사장에서 위령제를 지낸 지 꼭 20년 만이었다.
그제야 가슴 속에 묻어둔 오래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갱구가 없대. 왜 그러냐 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고.
-(해설) 한 고비 넘었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망망대해 속이었다. 어렵사리 갱구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냈지만.
이번에는 유골의 위치가 불분명하다는 핑계를 대며 조사를 외면하고 있었다.
-(일본어)
-(해설) 그러자 일본 시민단체는 자체적으로 유골 수집 조사를 하기로 결단했다.
-(일본어)
-(해설) 뼛조각 하나라도 발견되면 일본 정부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망각과 외면의 역사에 맞서 양심적인 시민들은 국경을 초월한 연대에 나섰다.
-(해설) 결과는 놀라웠다. 목표액 800만 엔을 훌쩍 뛰어 넘는 1200만 엔이 모였다.
-그러고 작업들어간 게 9월, 2024년도, 2024년 9월 26일에 갱구가 발견됐잖아요.
그 현장 중계하듯이 나왔는데 듣고 나니까 나도 눈물 나더라고.
나중에 갱구 보고난 뒤에는 이런 데 사람을 잡아 넣다니.
-(해설) 그리고 지난해 10월. 갱구를 통한 첫 잠수 조사가 이루어졌다.
-(해설) 늘 적막하던 장생 해안이 최근에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희생자 유해 발굴을 위한 다섯 번째 수중 탐사가 있는 날이다.
대구 시민들을 중심으로 올 2월 장생탄광희생자귀향추진단이 꾸려지면서 200여 명의 한국인들도 바다를 건너왔다.
-안녕하십니까?
-수고 많습니다. 힘들었죠?
-(해설) 어김없이 발굴 현장을 지키고 있는 한국유족회 양현 회장과 일본 새기는회의 이노우에 상.
-(일본어)
-(해설) 부디 오늘은 뼛조각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사람들의 마음이 간절하다.
이 바다 아래 잠든 조선인 희생자 136명 중 절반이 넘는 73명이 대구, 경북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이들이었다.
대구 시민들이 주축이 된 귀향추진단은 이제 그만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시자고 수중 탐사 때마다 마중을 나와줬다.
83년만의 오랜 침묵을 깨고 서서히 바다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일본어)
-(해설) 한국유족회장과 일본 국회의원이 오늘도 한 자리에서 만났다. 80여 년 풀리지 않던 한일 간에 오래된 숙제.
그 숙제를 풀어낼 연대의 적점이 이곳 장생탄광에 있는지도 모른다.
-(해설) 최초 탐사는 탄광 입구에서 시작됐지만 무너진 잔해가 갱도를 막아 진입과 수색이 쉽지 않았다.
올 4월부터는 한국의 잠수사들이 합류해 배기구 쪽으로 진입 방향을 틀었다.
탈출을 시도했던 많은 희생자들이 이곳 가까이에서 수장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갱구 앞에서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진혼무가 준비되고 있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 석탄을 캐기 위해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을 통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1942년 사고 이후 탄광주가 막아버렸던 갱구를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 열어젖힌 지 1년.
희생자들의 염원에 귀를 기울이며 한참을 서성이던 노희가 빨려들듯 갱구를 향해 나아간다.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이 모두 철렁 내려앉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작은 사고였다.
-(해설) 장생탄광을 매개로 두 시민사회도 이곳에서 만났다. 이른바 시민사회 대표들의 한일 양국 정상회담이다.
한국에서 귀향추진단이 결성되기 전까지 양심적인 일본시민사회의 헌신이 있었다. 이노우에 상은 그 속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
-(해설) 닫힌 문을 여는 일. 그 속에 수장된 아픈 역사를 발굴하는 일. 그 어려운 일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시민들이 해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한 일제강점기 문제 해결의 시작점이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해설) 드디어 잠수사들의 해저 탄광 수색이 끝났다.
-(해설) 결국 오늘도 유골은 발견하지 못했다. 유골을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두가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에 대해 오래 연구해온 김준혁 의원도 갑판 위에 나와 섰다.
-희생자들의 유골이 83년 만에 하나둘 발견되고 있습니다.
-(해설) 마침내 때가 왔다.
-한국인 잠수사가 갱도 조사를 위해 출발합니다. 약 4시간 조사 끝에 드디어 두개골 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어제 저희가 유골 발견했던 그 근처에 있어서 만약 그게 항구일수도 있고.
-어제 대퇴부 추정 뼈 등 유골 세 점도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해설) 지난 4월부터 유해 수습을 위한 한일공동 수중 탐사에 나선 한국인 다이버들.
세계 각지에서 동굴이나 난파선 발굴에 참여해 온 테크니컬 다이빙 전문가들이다.
첫날 발견한 대퇴부랑 팔 뼈 그리고 그다음 날 확보한 두개골은 한 지점에 있어서 정확한 DNA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어쨌든 그게 한 구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고.
-(해설) 마침내 물 밖으로 나온 희생자의 유골.
83년의 오랜 세월에도 치아까지 선명한 그 모습은 오래 귀향을 기다려온 이들의 모습이었다.
-(해설) 그곳에 여전히 83년의 기다림이 가라앉아 있다. 알지만 재빨리 수습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연착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해설) 장생탄광 귀향추진단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 해무가 짙어 부산항에 다 와서도 하선이 반나절이나 연기됐다.
이제 다 왔건만. 고향 땅에 내리지 못한 채. 여전히 바다 위를 떠돌 수밖에 없던 시간. 그 세월이 83년이라면.
그들의 애끓는 마음이 출렁이는 바닷물결처럼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에 비가 내리며~ 눈 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아른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 앞에 보이는 수 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눈 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아른거리고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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