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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동학의 꿈
등록일 : 2025-10-20 15:32:30.0
조회수 : 24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동학의 꿈: 불평등에 맞서 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황해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이 된 백범 김구는 동학의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사상에 감명받아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새 세상을 꿈꿨습니다.
이처럼 동학은 억압받던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었고, 131년 전 극심한 수탈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시달리던 고부(현 정읍) 지역에서 민초들의 절규가 혁명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에 달하자, 농민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통해 상소를 올렸으나 처참하게 좌절되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통해 고부성을 격파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등 혁명을 결의했고, 말목장터에 모인 민중들의 함성은 아래로부터의 첫 혁명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황룡촌 전투에서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경군을 '장태'라는 기발한 전술로 물리치며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결국 전주성까지 점령하며 그 위세를 떨쳤습니다.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통해 신분제 철폐, 토지 균등 경작 등 파격적인 내용의 '폐정 개혁안'을 제시했으며, '집강소'라는 민관 협치 기구를 설치하여 농민 스스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실현의 첫걸음이자 오늘날 지방자치의 시원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백범 김구를 포함한 동학 지도부가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에 맞서 '척외양의(서양 오랑캐와 일본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움)'를 내걸고 2차 봉기를 일으켰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비극적으로 패배하며 막을 내렸습니다.
많은 농민군이 목숨을 잃었고, 전봉준과 최시형 등 지도자들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동학 농민군이 외쳤던 자유와 평등, 생명의 가치는 저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3.1운동으로 계승되어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역사적 의미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은 인간 존엄성을 최고 이념으로 삼는 우리 헌법의 원형이자, 오늘날까지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회를 밝히는 굳건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황해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이 된 백범 김구는 동학의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 사상에 감명받아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새 세상을 꿈꿨습니다.
이처럼 동학은 억압받던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었고, 131년 전 극심한 수탈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시달리던 고부(현 정읍) 지역에서 민초들의 절규가 혁명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에 달하자, 농민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통해 상소를 올렸으나 처참하게 좌절되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통해 고부성을 격파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등 혁명을 결의했고, 말목장터에 모인 민중들의 함성은 아래로부터의 첫 혁명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황룡촌 전투에서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경군을 '장태'라는 기발한 전술로 물리치며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결국 전주성까지 점령하며 그 위세를 떨쳤습니다.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통해 신분제 철폐, 토지 균등 경작 등 파격적인 내용의 '폐정 개혁안'을 제시했으며, '집강소'라는 민관 협치 기구를 설치하여 농민 스스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실현의 첫걸음이자 오늘날 지방자치의 시원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백범 김구를 포함한 동학 지도부가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에 맞서 '척외양의(서양 오랑캐와 일본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움)'를 내걸고 2차 봉기를 일으켰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비극적으로 패배하며 막을 내렸습니다.
많은 농민군이 목숨을 잃었고, 전봉준과 최시형 등 지도자들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동학 농민군이 외쳤던 자유와 평등, 생명의 가치는 저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3.1운동으로 계승되어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역사적 의미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은 인간 존엄성을 최고 이념으로 삼는 우리 헌법의 원형이자, 오늘날까지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회를 밝히는 굳건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백범 김구는 잔반 출신이에요. 쉽게 이야기해서 과거에 진출할 수 없는 불평등한.
이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과 계급이 정해졌다. 여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게 성리학적 지배 질서인데 여기에서 너무 답답한 거죠.
-(해설) 황해도 벽촌,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이 된 김구.
신분제 사회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느낀 그는 동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됐습니다.
-상놈 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고 하니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백범이 동학을 접하면서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시천주, 내 안에 있는 게 곧 하늘이다.
이건 불평등한 세계에서 하나의 보금과 같은 빛이었죠.
그래서 백범 김구는 가장 어린 나이에 동학 접주로서 활동하게 되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해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고 인류 평화를 외쳤던 김구.
계급과 출신을 넘어 조선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고자 했던 혁명가의 의지는 동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읍 이평면, 옛 고부군에 속했던 이곳은 동진강 입구를 통해 서해로 나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곳에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인 말목장터가 자리해 있죠.
-131년 전 새벽닭 울음소리를 신호로 동학농민군은 이곳 말목장터로 모여들게 됩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그 첫 봉화가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해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가치가 정해져 있는 불합리한 구조 속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은 점점 뜨겁게 일었습니다.
131년 전의 고부. 민초들은 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데요.
극심한 수탈과 횡포에 지친 농민들의 처절한 외침이었습니다.
-호남평야 지대가 서출이 높고 이 지역에서 물산이 풍부하니까 강원도나 경상도나 충청도 산악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은 자리죠.
-고부라고 하는 지역은 지형적으로 보면 서쪽의 평야 지대와 동쪽의 산간 지대가 만나는 접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의 중심은 행정의 중심은 전주였지만 경제의 중심은 고부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해설) 호남 최대의 곡창 지대. 풍부한 농토와 풍족한 물산이 넘쳐나는 곳.
그러나 이러한 풍족한 환경은 부당한 착취와 수탈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탐관오리들의 패악이 극에 달했는데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19세기에는 세도 정치기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세도라는 것은 권력이 한곳에 집중이 되어 있고 권력을 남용을 한다는 이야기거든요.
이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가 공직, 그러니까 어떤 관직을 사고파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실제 황현이 쓴 오하기문에 보면 아들 낳으면 과거에 급제를 해서 호남으로 가야 한다.
왜? 호남이 가장 노다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지역이다 보니까 그 전형적인 사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병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해설)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 그의 행적을 돌아보면 첫 시작부터 단단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과거 합격자 출신의 자리였던 고부군수. 권문세도가 출신 조병갑.
그의 과거시험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관직을 얻어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매천야록이라고 황현 선생이 쓴 기록에 의하면 과거를 급제하려면 10만 냥이 있어야 한다.
현감 자리라도 하나 얻으려면 20만 냥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안동 김씨만 가능하다라고 써 있어요.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배를 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매관매직은 19세기 들어와서 내내 일상화된 거야.
-(해설) 고부 인근에 자리한 태인.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에 세워진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이곳에서도 조병갑의 악랄한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조병갑이 백성들에게 빼앗은 1000냥의 돈으로 세운 자기 아버지의 공적비입니다.
-조병갑만큼 오자마자 이렇게 수탈을 전문적으로 진행한 사람이 그렇게 없어요.
그래서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조금 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수탈을 처음부터 작정하고 하지는 않았을 거거든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 형제 간의 우애하지 않는다 등 각종 명목을 대서 세금을 뜯어내고 만석보는 원래 있었거든요.
있었는데 새로운 만석보라는 것을 쌓을 정도의 상당히 창의적인데 이 정도면 돈에 대한 순수한 열망도 있겠지만
그런 본전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해설)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짠 조병갑.
급기야 수세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데요.
-이 공간은 조병갑이 부임하기 이전에 정읍천 상류에 광산보, 예동보라고 하는 멀쩡한 보가 있었고요.
그 멀쩡한 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병갑이 부임하면서 하류에 새로운 보를 쌓았던 그 장소입니다.
-그럼 보가 2개였다는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보가 2개였어요.
왜냐하면 전봉준 봉초 기록에 따르면 전봉준이 민보 아래 새로운 보를 쌓았다고 했기 때문에 저희는 보가 2개.
최소 2개 이상 있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해설) 만경강 상류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하류에 새로운 보를 세웁니다.
그리고 이곳에 물을 받는 논에 과도한 수세를 매기는데요.
-조병갑이 부임하면서 상류에 멀쩡한 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새로운 보를 쌓았던 곳이라고 저희가 추측돼서
이 비석을 만들게 된 것이고요.
조병갑이 문제가 되는 게 만석보를 새로 쌓는 과정 중에서 강제로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강제로 세금을 거두면서
이것들이 문제가 되어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해설) 농민들의 피눈물이나 다름없었던 만석보의 물.
조병갑의 횡포와 수탈이 극에 달하자 그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자 했는데요.
글을 알고 있었던 한 인물이 나서서 상소문을 쓰게 됩니다.
그가 바로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었는데요.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군수를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오히려 매를 맞고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보며 의로운 항거를 결심한 전봉준.
고부 지역의 농민들은 통문을 써내려가며 결의를 다지는데요.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됐습니다.
-보통 통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을 모이기 위해서 알리는 일종의 고지문인데
조선 후기에 통문이 상당히 많이 유행했습니다.
이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1892년 4월에 부임했었고 그 이후에 많은 폭정이 있었기 때문에 고부군수 조병갑을
일차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농민분들이 1893년 11월에 여기 보시는 송두 집에 모여서 사발통문을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해설) 동학농민혁명의 단초가 된 통문에는 거사 계획이 담겨 있었는데요.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 창고와 화약 창고를 점령할 것.
전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과 같은 거사 내용이 담겼습니다.
-(해설)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해설) 말목장터에 모인 사람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민초들의 역사적 첫 걸음이 시작됩니다.
-당시의 상황이 그러니까 전봉준을 따라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느낌보다는 어느 시점에서 타협할 수 있다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조선이 통치 방식이 뭐였냐 하면 민란이 일어나면 민란 세력을 완벽하게 제압해서 굴복시키고 죽이고 이런 방식이 아니었어요.
조선은 어떤 방식이었냐 하면 대체적으로 민란이 일정 부분 성공하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타협해서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방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시에 동학이 처음에 봉기를 했을 때 그 뜻이 나쁘지가 않잖아요.
뜻이 나쁘지 않고 상대, 말하자면 나쁜 짓한 사람이 명확하잖아요.
그러니까 일정하게 전주 가까이 가면 말하자면 조선 왕조가 오히려 개혁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조선 왕조를 바꾸게 하는 데 힘이 될 거라 생각했던 거예요.
-(해설) 한마음 한뜻으로 고부관아 점령에 성공한 농민들.
이는 민초들의 염원이 이루어낸 의로운 항거였습니다.
-당시에 모든 70여 개 고을의 농민 봉기가 고을의 경계를 안 넘어요.
안 넘는 이유는 무기를 들고 고을의 경계를 넘어서면 반역인 거예요.
역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을 경계를 못 넘어. 그리고 수령을 죽여도 반역이에요.
임금이 명령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수령을 고을 경계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목표예요.
-(해설) 조정은 농민들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고부군수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신임 군수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농민군의 해산을 위해 타협을 이루어냅니다.
-관리의 가렴주구에 농민들은 그저 민란을 일으키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습니다.
포악한 관리 조병갑을 몰아낸 농민군. 그러나 또 다른 도전이 다가오게 됩니다.
-(해설) 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
농민군이 해산하면 그들의 요구를 받아줄 것처럼 굴었던 그는 약속을 어기고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박원명은 고부를 안정시켰는데 이용태가 조사한다고 장정을 200명을 데리고 와서 오히려 더 만행을 저지른 거예요.
동학도라면 다 잡아가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그때 농민군 지도부는 손화중, 김계남, 전봉준 이 사람들은 무장해 있는 손화중 쪽으로 피신해 있었어요.
그러다가 더 이상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 다시 일어나자는 결의를 한 거죠.
-(해설)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과 연계한 전봉준.
그들은 전라도 무장에서 본격적인 혁명의 의지를 무장 포고문에 담았습니다.
낫과 죽창을 들고 모여든 농민들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보국안민과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을 외치며 혁명에 동참하는데요.
농민군의 선두엔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이 있었습니다.
-무장은 농민군들이 재봉기를 결의한 건데 이미 여러 고을에서 모였어요.
호남 각 고을에서. 이미 고을 경계를 넘었고 그 무장 깊어진 지금 그 앞에 있는 개울가에서 군사 훈련을 했단 말이에요.
이거는 이미 역적이 되기로 각오를 한 거죠.
-(해설) 수탈과 억울함에 지친 농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동학.
-모두 없앤다.
-(해설) 전라 각지의 농민들은 새 세상을 향한 열망으로 한 곳에 모여듭니다.
옛 고부 지역에 야트막한 야산. 백산에 모여든 농민군. 이곳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여기 백산은 낮은 산인데 이쪽이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백산에 올라갔을 경우엔 주변 일대가
다 훤히 보일 수 있어서 농민들 입장에서는 이쪽이 군사적, 전략적으로 요충지였어요.
그래서 이쪽에 모여서 농민군들은 총대장으로 전봉준을 뽑고 손화중,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선출하면서 군대의 조직을 정비했고
이때 위세가 대단했던지 멀리서 이 농민군들의 모습을 봤을 때 농민군들 옷이 하얀색이다 보니까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됐습니다.
-(해설) 호남의 민중들이 모여 혁명군으로서의 조직을 갖춘 백산.
새로운 세상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백산 대회의 중요성은 우선 고을 경계를 넘어선 건 무장에서 이미 넘어섰고 다시 군사 대오를 갖췄다.
이거는 서울로 쳐들어가든, 않든 고을 경계를 넘어서 군사 대오를 갖췄다는 거는 역모예요, 이거는.
명백한. 그러니까 목숨 건 거죠.
-(해설)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을 필두로 흰옷을 입고 죽창을 갖춘 농민군.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군이 됐습니다.
농민들의 결연한 의지에 조선의 조정은 크게 당황하는데요.
그 결과 관군인 전라감영군을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정읍 황토현.
이곳에서 동학농민군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 번째 전투를 맞이합니다.
-당시 전주에서 영군이라고 해서 지방군이 있어요.
지방군이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신태인에 보면 화오리라는 곳이, 거기 동진강 나루터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지는 척하면서 계속 뒤로 물러납니다.
그러니까 관군은 우리가 계속 이기네, 심지어는 얘네 별거...
역시 그냥 반란군 무리구나라고 생각을 해서 계속 쫓아오고 지금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는 황토현까지 옵니다.
-감영군뿐만 아니라 전라도 각 군현에 병사들을 보내라고 통지를 냈어요.
그래서 전부 황토현을 향해서 감영군이 오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농민군이 미리 황토현에 와서 진을 치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죠.
저녁 때 술을 먹고 함성을 지르고 하면서 밤늦게까지 시끌벅적하게 하다가 잠든 걸로, 잠든 척한 거예요.
그러면 감영군이 온다는 걸 알았죠. 오면 어디로 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서 감영군이 공격을 야간에 기습 공격을 하니까 농민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을 한 거예요, 다시.
-(해설) 1894년 4월 7일. 기습 공격에 성공한 농민군은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감영군이 진짜 힘도 못 써 보고 다 도망가 버린 거예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래서 저기 남원이나 어디 전라도 동부 지방에서 오든 여기 황토현으로 오라고 해서 오던 중에
여기서 패잔병들이 막 줄줄이 가니까 여기 오지도 못하고 중간에 돌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한 상황이 되죠. 그래서 황토현전투의 승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백성들이 일어나서 관군을 섬멸해 버린 거예요, 완전히. 이런 일은 없었어요.
조선왕조뿐만 아니고 그 이전 시대에도.
-(해설) 이날의 승리로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최초의 승리 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지정돼 매년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황토현에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농민군은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돌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요.
이 과정에서 농민군의 수가 급증했을 뿐 아니라 무기 또한 강화됐습니다.
이후 농민군은 전남 장성에서 또 한 번의 전투를 맞이합니다.
-황토현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 당연히 전주로 가고 싶었지만 서울에서 경군이 옵니다.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오니까 지방군하고는 또 다른 거죠.
그러니까 전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고창, 흥덕, 영광, 함평까지 갔다가 장성으로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그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경군하고 맞붙게 되는 겁니다.
-(해설) 장성 황룡촌. 경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상태.
누가 봐도 농민군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보자마자 관군이 대포를 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크게 피해를 보잖아요.
그런데 총을 막 쏘고 하니까 이거를 피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어서 했던 게 대나무로 만들었던 장태라는 게 있습니다.
닭장 같은 건데요. 큰 그 장태를 굴려서 관군에게 접근해서 근접전을 벌여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겁니다.
-(해설) 농민군은 장태를 이용해 경군에 맞섰습니다.
장태 안에 볏짚을 가득 채워 굴리는 방법으로 탄환을 막아낸 건데요.
-쏴라!
-(해설) 소박하지만 강력한 장비 장태로 농민군은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왕실을 수비하는 부대예요. 그러니까 최정예 부대.
600명을 보냈는데 황룡촌전투에서 완전히 섬멸을 당하죠.
홍계훈이 나머지 병사를 이끌고 따라오는데 농민군은 전주성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고 앞에 마을에서
농민군이 쉬고 있다 그러면 관군이 10리 뒤에서 쉬고 있어.
그리고 앞에 출발했다 그러면 또 일어서서 따라가고 전투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그래요.
-이곳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에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농민군의 사기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 기세는 호남의 심장, 전주성 진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해설)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세가 오른 동학농민군.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입성에 돌입합니다.
-그러니까 황토현에서 농민군이 승전했다는 거는 농민들로서는 엄청난 사기가 올라간 거고
또 그리고 조선 왕조 정부 입장에서는 정말 이건 창피한 노릇이고.
왕권과 지방 관찰사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들을 세워야 할까.
그러나 농민군은 사기와 기세가 워낙 강성하니까. 결국은 전주성 점령 때까지 아무 일도 못 하는 거예요.
전주성 점령도 관찰사를 비롯해서 관료들이 성을 다 비워버리고 없었어요.
그러니까 동학농민혁명 봄, 가을 전체 과정에서 농민군이 온다 그러면 수령이 제일 먼저 도망가요.
그리고 그 밑에 아전들이 싹 도망가 버리죠. 그러니까 텅 빈 관아를 점령하는 거죠.
-(해설) 사태를 수습할 이는.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었습니다.
-김학진이 전라감사로 임명된 게 4월 18일이에요.
그날 고종이 어떤 지시를 하냐 하면 동학농민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그 원인을 조사하라는 지시도 같이 내려집니다.
그러다 4월 25일 부임하는 날, 고종을 알현했을 때 김학진이 그걸 요구하죠.
전권을 나한테 달라. 그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편의종사라는 거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고종이 좀 머뭇거리다가 인정을 해 줍니다.
그래서 실제 김학진이 전라감사로 부임했을 때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겁니다.
-(해설) 동학군이 빠른 속도로 세를 확장하자 조선 조정은 이들을 진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데요.
위기감 속에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전주성을 점령할 정도로 항의를 했다면 왜 그러는지, 저들이 요구하는 게 뭔지 와서 들어야 하잖아요.
그거를 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안 한 거예요. 오히려 특히 당시 실권자인 민비가 아니다 이거야.
저것들은 다 무지렁이들이고 저것들은 없애버려야 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해서 그거를 자기 측근 누구를 시켜서 청나라에 보내게 한다고.
청나라 군대를 파견시켜 달라.
-(해설)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조선.
이 요청은 또 다른 사태를 유발하는 결정적 단초가 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을 마무리하면서 소위 우리가 공동출병권이라고 청국과 일본이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하면 상대국에 반드시 알리기로 되어 있었어요.
-(해설)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맺은 톈진조약.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되 이후 파병을 하게 될 경우 상대국에 미리 알려 공동 출병할 수 있다고 규정해 두었습니다.
양대 강국의 싸움에 조선은 혼돈의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농민군들이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뭔가 문제 제기를 해서 봉기를 했잖아요.
봉기를 하면 당시의 지배층들은 그거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하거나
고민을 하거나 새로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때 어떤 판단과 결정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인데.
-그때 민비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나라를 잃어도 다시 임오의 치욕은 당하기 싫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임오군란 때 당한 치욕을 다시 당하기 싫다예요, 나라를 잃어도.
이때 나라란 누구 거죠?
-자기 거라 생각했겠죠.
-그렇지. 내 거니까. 내 나라를 잃어도 임오의 치욕은 당하기 싫다.
그래서 청나라군을 부르면 일본군이 온다는 걸 뻔히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불렀잖아요.
-제 나라 백성을 죽이라고 남의 나라에 군대 요청하는 그게 제정신인 정권이에요?
제정신이 아닌 정권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잖아요.
-우리가 반봉건, 반외세였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일본이라든지 중국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거였는데 지금 이렇게 외적이 온다는 거는
말이 안 되는 거다 해서 화의를 시도합니다.
-(해설) 청나라와 일본군의 개입으로 국가의 안녕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기에 전봉준과 김학진은 전주화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김학진의 입장은 약간 보수 수구적인 입장이 아니라 개화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풀어가는 방식이 당시 농민군들의 입장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그것들의 이야기를 수용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기본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요.
-(해설) 동학농민군은 12개의 안을 담은 폐정 개혁안을 제시했는데요.
신분제 철폐와 과부의 재가 허용, 탐관오리 징벌과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 경작하는 등의 파격적인 내용이 담겼습니다.
전주화약 체결 이후 동학군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추진해 나갔는데요.
집강소를 총체적으로 관리, 감독하기 위한 대도소는 전라관찰사의 집무실 선화당에 마련됐습니다.
-이 합의에 따라서 전봉준은 전라감영 안에 전라좌우 대도소라는 동학농민군 최고 본부를 감영하는 설치를 하는 거예요.
대단한 거죠.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민주의회와 전주감영 안에 설치된 겁니다.
-(해설) 전라도 지역 53개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 그중 이곳, 김제 원평 집강소만이 남아 있습니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염원이 담긴 공간, 집강소.
관과 민이 하나 된 역사상 최초의 민정 기관 집강소에서 민주주의 실현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해설) 일반 백성들이 직접 참여해 폐정 개혁을 실현한 주민 자치기구 집강소.
집강소는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성과이기도 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라고 하는 것들을 누가 결정을 했죠, 이렇게.
-(해설) 대통령.
-그렇죠. 그런데 그게 민주주의인가라고 한다고 하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양반을 중심으로 해서 운영되는 사회가 조선이었다고 하면 그것이 아닌 절대 다수라고 하는 90%에 초점을 맞춘,
다시 이야기해서 집강소의 행정 책임자가 집강인데 집강도 농민이고 또 어떤 지역에서 집강이 노예이기도 하고 이렇게 됐다고 하는 것이죠.
-(해설) 이곳은 당시 최하층에 속한 백정 동록개 소유의 집이었는데요.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동록개가 기증한 곳이기도 합니다.
정해진 신분의 사슬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격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꿈을 실현해 준 곳입니다.
-어떤 제도가 있을 때 누구에게 수혜를 주는 것이냐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왕정이라고 하는 것에는 왕권 강화거든요.
또는 만약에 왕권을 조금 느슨하게 한다고 해도 양반 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익을 보존하기 위한 체제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닌 수혜자를 농민 그리고 천민 이런 사람들에게 가게끔 하겠다고 하는 것을 내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그 점을 오늘날 지방자치랑 보게 되면 똑같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지방자치가 누구를 수혜자로 두는 거예요?
바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이것들로 더 볼 때 동학혁명 과정에서 있었던 집강소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지방자치의 시원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해설)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은 급기야 경복궁을 습격합니다.
침소로 난입해 고종을 인질로 잡은 뒤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갑오개혁을 추진시키게 됩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은 다 식민지가 있는데 일본 같은 경우에는 식민지가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 식민지는 누가 해야 하냐.
당시에는 홋카이도가 일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홋카이도 이런 데 그다음에 조선, 그다음에 대만, 여기를 차지해야지 않냐.
이거를 정한론이라고 하는데 정한론에 의해서 조선을 차지하려고 그런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조선에서 영향을 일단 높이고.
-그래서 첫 번째 프로젝트인 조선 정부를 점령하는데 결국 합법적인 방법으로 안 되니까 불법적인 방법을 기습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하잖아요. 그 명분으로 결국 대원군을 끌어들입니다.
당시 일반 인민들도 그렇고 동학인민군들도 그렇고 가장 믿고 지지했던 정치 지도자가 대원군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대원군을 설득합니다.
우리는 순수하다, 우리는 그야말로 조선을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는 내정 개혁은 조선의 독립, 조선의 앞날을 위한 것이지 우리의 진정성을 인정해달라.
결국 이 말에 대원군도 넘어갑니다.
-(해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반외세 개혁 운동이 일어나는데요. 바로 2차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당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일본군 침략에 대항하는 총동원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천명이오. 기포하시오.
-(해설) 해월의 기포 명령 후 들불처럼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한 사람. 백범 김구입니다.
-김구가 어린 나이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서 어린 나이 때 과거를 보려고 했더니 자기 신분이 너무 낮은 거야.
그래서 과거를 볼 수 없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희망이 없으니까 좌절한 기운에서 말하자면 동네 건달, 이런 생활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지나가던 보부상이 너 세상을 왜 이렇게 헛사냐. 그러니까 백범이 나 지금 희망이 없다.
이렇게 살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니까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이 건너편에 가면 오응선이라는 사람이
사람을 진짜 하늘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더라.
그러니까 그분을 가서 한번 찾아봬라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백범이 오응선이라는 사람을 찾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백범이 처음 보니까 넙죽 인사를 큰절을 했을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그 양반도 따라서 맞절을 하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백범이 깜짝 놀랐죠.
자기는 그때 열일곱, 열여덟 이때였는데. 어르신 이러지 마시라고 그랬더니 아니라고.
우리 동학 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처럼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라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오응선 씨의 그 두 손으로다가 바로 입도를 해요. 그게 백범이 동학에 들어간 계기예요.
그리고서는 백범은 비로소 거기에서 사람이 진짜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고 열심히 동학 수련을 하죠.
-(해설) 10대 어린 나이에 동학에 입문한 김구는 교주 최시형을 만나 황해도 8봉의 접주로 임명받게 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평안도, 함경도까지 가을 봉기 때 확대가 됐고 황해도는 해주성이 점령됐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도청 소재지가 점령된 것은 전주성하고 해주성 두 군데거든요.
-물론 백범은 해주성 공격하는 데 앞장섰어요. 그래서 그때 별명이 소년 장수.
그때는 백범 김구가 아니고 김창수, 본명 김창수였어요.
그래서 소년 장수 김창수 또는 애기 접주.
가장 어린 접주였으니까 그런데도 열심히 포덕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접주 타이틀을 받은 거라는 말이에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백범은 동학과 깊은 인연을 맺고 어떻게 보면 그의 어린 나이 때 백범의 민족 의식
또는 민족주의 사상은 동학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죠.
-(해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적과 최시형이 이끈 북적이 척외양의를 내걸고 다시 한번 결기를 다짐한 그해.
호남의 농민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뭉쳤습니다.
길이 사방으로 트여 들고 나기 편했던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농민군과 군량미를 실어 나르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이후 한양을 향해 가던 이들은 전라도에서 충남 공주로 가는 길목, 우금치에 들어서는데요.
고개를 넘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치열한 공방전.
그러나 엄청난 전력 차이로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전투였습니다.
-그러니까 피의 전투였죠. 한마디로 피의 전투였죠.
어쨌거나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공주감영을 장악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금치 고개를 넘어야 했고 이때 동학농민군의 무기는 주무기는 화승총이거든요.
그런데 사거리가 워낙 짧기 때문에 무기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다음에 재래식으로 칼이나 죽창 가지고 싸우는데 이에 반해서 반대편 일본군 같은 경우에는 주무기가 스나이더 소총이라고 신식 무기예요.
이거는 1분에 10발이 나갑니다. 그리고 여러 발을 쏴도 이게 열이 안 나서 장시간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화승총 같은 경우에는 여러 발 총을 쏘게 되면 총구가 뜨거워져서 쉬었다 해야 해요.
그건 1분에 1발 잘해야 쏠까 말까 하고.
-공초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가 구상한 농민군이 1만 명이 있었는데 한 번 전투하고 나니까 3000명으로 줄고
또 다시 한번 전투하고 나서 전부 하니까 500명으로 줄고.
-(해설) 신식 무기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져 간 농민군.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그들의 꿈은 자비 없는 총탄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왕과 또는 그 당시 지배 세력인 양반, 왕.
이 두 세력과 백성이 싸우는 과정에서 죽고 죽이는 문제가 있을 수 있죠.
그럴 수 있잖아요. 그거는 역사가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사건이 달라지는 거예요.
아주 쉽게 말하면 내 자식 마음에 안 든다고 옆집 아저씨 데려다가 때리는 거 아니에요.
죽이는 거 아니에요.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는 거 아닙니까.
이것은 우리 역사의 가장 참혹한 사건이죠.
-(해설)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 끝에 붙잡힌 해월 최시형.
그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집니다.
부하의 밀고로 붙잡힌 전봉준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요.
그러나 그들이 목놓아 외친 새 날의 꿈은 저물지 않았습니다.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함성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학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충격이 생긴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서학의 반대가 아니에요.
서학으로부터 들어온 충격을 집권 세력이 받아들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 거예요.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에 이 한반도 땅을 지배했던 지배자들이 담론을 독점해왔다는 말이에요.
담론을 독점해 왔는데 그 서학이 들어올 때 이들이 담론을 독점해서 이 시대에 맞게 해석할 능력을 상실했어요, 이미 집권 세력이.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충격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는 주체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게 동학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 시대의 흐름 속에 동학농민군들이
앞서있는 지식인들이 이게 받아들일 거라고 본 거예요, 어느 정도는.
왜냐하면 그 당시에 많은 사람이, 양반들도 천주교, 쉽게 말하자면 서학을 받아들이잖아요.
기독교도 받아들이고 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변화의 시기라는 거예요.
큰 변화에, 세계가 거대한 충돌의 시기라는 말이에요.
그 충돌의 시기에 오로지 이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집단이 있었으니 그게 궁궐에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예요.
새로운 시대라 함은 더 이상 백성이 통치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발언권을 갖는,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스스로 말하는 형상하는 그런 시대가 이미 열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것을 이 나라의 집권 세력이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권력,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고 그 정점에 동학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해설)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3.1만세운동으로 이어져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이 되어 굳건히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자유를 외치고 평등을 부르짖었던 동학의 정신은 3.1독립선언서에 담겨 있습니다.
-3.1혁명은요.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야. 왜 그렇게 보냐 하면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접주들이 민족대표 33인의 9인이 있어요.
9명 중에 천도교 대표가 15명인데 15명 중에 9명이야.
그러니까 주도 세력이 계승된다는 거예요.
무엇보다도 의암 손병희 선생이 만들었다는 공약 3장.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이 세 가지는 동학농민혁명의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한 거예요.
-10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이 남긴 기록물이 4.19 혁명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습니다.
-129년 전 이 땅의 민중들이 남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유도 결국은 당시에는 엄청난 국가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받았지만 그래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는 거.
-특히 동학농민군이 설치한 민관 협치 기구 집강소는 19세기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민주주의의 실험으로써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할 때도 이 집강소 부근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이고 관련 기록물이다.
왜냐하면 그거는 민주주의의 어떤 담론은 민주주의의 가치는 세계인들이 공유할 가치잖아요.
-(해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시작.
동학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요.
-헌법은 국민이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리고 헌법의 특징이라면 일반 국민은요. 헌법을 위반할 수가 없어요.
그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권력자, 그것도 최고 권력자.
-(해설) 헌법의 기원은 동학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보통 후보를 한 다섯 가지 정도 이야기해요.
갑신정변 때 정강 14조 또 동학농민혁명에서 폐정개혁안들 또 갑오개혁 때 홍범 14조 또 독립협회 활동 때 만민공동회 활동했을 때
헌의 6조 또 대한제국 때 대한국국제 한 다섯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국민주권주의라든지
권력분립의 원칙에 어느 정도 충실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게 3.1운동하고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으로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니까 한 2개 정도 헌의 6조 그리고 폐정개혁안.
이게 우리 헌법의 원형으로 볼 수 있겠다. 그 폐정개혁안이 헌의 6조보다 한 4년 정도 빠릅니다.
그래서 어떤 최초 우리 헌법의 최초 원형은 폐정개혁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해설) 동학의 이념은 헌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 헌법의 최고 이념이 인간 존엄성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늘이다. 하늘이야말로 정말 존엄한 존귀한 존재 아닙니까?
우리 모든 사람은 귀천에 상관없이, 신분에 상관없이,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다 하늘과 같이 존귀한 존재다.
이것보다 더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에게 울림으로 다가오는 게 있을까요?
동학농민혁명은 대한민국의 뿌리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이 없을 거예요.
저는 동학농민혁명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거기서 출발했는데.
-(해설) 131년 전 새로운 세상을 위해 외쳤던. 동학농민군의 함성.
국민이 주인이라는 외침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밝히는 힘이 됩니다.
-전 세계에서 누가, 누가 평화적으로, 평화적으로 집권 최고 권력자를 탄핵합니까? 두 번이나.
그럴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겠냐, 이거예요.
힘의 원천이 저는 뿌리가 기본적으로는 가깝게는 3.1 독립만세운동.
그리고 그 3.1 독립만세운동의 모든 뿌리는 동학이에요.
-동학농민군이 지향했던 그런 평화, 자유, 인권, 생명의 가치는 지금도 우리의 과제잖아요.
한강 작가가 그런 말을 했잖아요. 과거는 현재를 구할 수 있다.
결국 현재를 구하는 길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거거든요.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 다 같이 살고 서로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날의 외침.
용기 있게 외쳤던 민중들의 함성은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위대한 혁명으로 기억돼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