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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선사미학, 세계유산 반구천의 암각화
등록일 : 2025-10-13 15:36:07.0
조회수 : 15
-(해설) 문자가 없던 그 옛날, 종이가 없던 그때. 바위 위에 새겨진 인류의 시간.
신석기부터 청동기, 청동기에서 통일 신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사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반구천의 암각화.
선사인들이 들려주는 오래된 미래를 따라 우리의 새로운 내일을 만나러 갑니다.
1940년 프랑스 중부 도르도뉴 지방의 작은 마을 몽티냑.
이곳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라스코 언덕 어딘가에 중세 시대 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전설 하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을 소년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 언덕을 탐험하기로 했죠.
-(해설) 4명의 소년들이 발견한 것은 땅속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스러운 동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과 마주했습니다.
-(해설) 들소의 조상 격인 오록스,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 벽을 가득 메운 사슴과 염소.
그건 너무나 거대하고 사실적인 800여 점의 벽화였습니다.
소년들은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이 놀라운 탐험의 결과를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고학의 선구자 앙리 브뢰유는 동굴 벽화를 그린 주인공이 빙하기 말기 추위를 피해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의 인류라는 걸 단번에 알았습니다.
-(해설) 기원전 1만 3000년 전. 산사태로 동굴 입구가 막힌 라스코동굴 벽화.
그 비밀의 동굴을 소년들이 발견할 때까지 그림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거죠.
-(해설) 라스코동굴 벽화의 발견은 몽티냑이라는 작은 마을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선사인들이 남긴 벽화를 1만 7000년 후 호기심 많은 그들의 후손이 찾았다는 사실에 매우 흥미로워하죠.
인류의 역사는 신화나 전설보다 더 오래된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만을 기억할 뿐이죠.
-(해설) 문자가 없던 원시 시대에도 인류는 삶을 이어가며 그들만의 예술 세계를 펼쳤습니다.
-(해설) 그래서 암각화는 때로는 선사 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죠.
그 시작을 알린 게 바로 동굴 벽화였습니다.
1868년 스페인의 한 사냥꾼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저 신기한 그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후 고고학자 마르셀리노 사투올라와 그의 어린 딸이 다시 찾아 학계에 보고했지만
그 누구도 동굴 벽화가 2만 년 전 진짜 구석기 시대의 그림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놀라운 작품이 너무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죠.
이를 본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알타미라 이후 모든 예술은 퇴부했다며 구석기인들의 예술성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동굴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석판화로 된 11편의 황소 연작을 남겼죠.
1994년 프랑스 아르데슈 지방에서 발견된 쇼베 동굴 벽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알타미라와 비슷했습니다.
발견 당시 동굴 안에는 구석기 시대인들이 그린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경이로운 그림들로 가득했죠.
-(해설) 3만 6000년 전, 구석기 시대의 천재 예술가는 들판에서 본 사자와 달리는 말을 떠올리며
캄캄하고 깊숙한 동굴 속에서 횃불을 들고 목탄으로 부드럽고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해설)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금 인류가 선사시대 인류보다 더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동굴 벽화를 본 이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류의 예술성은 구석기 시대에도 이미 놀라운 수준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오래전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도 바위 위에 그림을 남겼습니다.
역사학자의 길을 걸어온 문명대 교수는 1970년 울산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가 이끌던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은 반고사를 찾는 중이었죠.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반고사에 머무를 때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했고
그 반고사는 영축사의 서북쪽에 있다는 반고사에 관한 내용이 나오죠.
-(해설) 크리스마스 하루 전.
조사단은 어렵지 않게 반구대 부근에서 절터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해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마을 주민은 또 다른 곳에 절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따라 상류로 1km 남짓.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계곡에 갔을 때였습니다.
-(해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불교 유적은 아니었습니다.
동심원이나 마름모꼴 같은 기하학적 문양과 한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바위, 바로 암각화였습니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그날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가 되었습니다.
조사단이 천전리 계곡에 3개월간 머무르고 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의 또 다른 제보가 있었습니다.
-(해설) 하지만 주민들이 말한 곳은 물에 잠겨 있었죠.
조사단은 꼬박 1년을 더 기다린 후에야 대곡리의 그 바위를 만났습니다.
-(해설) 그것이 반구대 암각화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은 호랑이뿐만 아니라 동해 바다에서 본 물을 뿜는 고래, 새끼 업은 고래,
물결을 일으키며 헤엄치는 고래까지 이곳 바위에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불적 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암각화는 그렇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천전리와 대곡리, 두 마을의 암각화는 반구천의 암각화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죠.
암각화가 발견되고 55년이 흐른 2025년.
반구천의 암각화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다시 한번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해설)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무대에 나선 건 2010년 세계 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지 1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해설) 유네스코는 반구천의 암각화가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졌을 뿐 아니라
고래와 같이 희귀한 주제를 창의적으로 풀어낸 걸작이라고 밝혔죠.
-(해설) 7000년의 무게를 견딘 반구천의 암각화는 그렇게 우리나라의 17번째 세계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평원에 있는 이곳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전 세계 암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세계유산이 된 곳입니다.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서 세계유산이 된 건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일하죠.
-(해설) 사실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수많은 문화 유적 가운데 이탈리아의 첫 번째 세계 유산이 된 곳이기도 하죠.
-(해설) 암각화에 밀려 그 이듬해 세계유산이 된 포로 로마노.
고대 로마의 심장으로 불리던 로마 제국의 역사적 현장조차 결코 암각화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거죠.
-(해설) 말하자면 이곳은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어 언어와 문화로부터 자유로웠던 선사 인류가 남긴 예술 작품입니다.
-(해설) 2400여 개의 바위에 있는 14만여 점의 암각화.
1906년에 발견된 이후 50년이 지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조사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해설) 이 방대한 양을 보면 신석기인들에게 이곳은 삶의 무대이면서 때로는 기록의 공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해설) 신석기인들은 여기에 자신들의 사냥 모습과 농경 생활만 그린 건 아닙니다.
관습과 종교 의식까지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했죠.
그런가 하면 이곳에 살던 철기 시대 사람들은 6개 고상 가옥과 30개가 넘는 네모난 경작지, 수십 명의 전사와
동물들이 있는 마을 지도를 그대로 바위에 옮겨놓았습니다.
-(해설) 마치 여러 화가들이 하나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곳 암각화 역시 하나의 바위면에 여러 시대가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단순한 바위 그림이 아니라 인류가 남긴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죠.
하나의 바위면에 문양과 글자, 역사 이전과 그 이후가 함께 있는 건 천전리 암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대 교수는 천전리 암각화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 바위에 새겨진 글이 신라 시대 것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해설) 여러 개의 화랑 이름 중에는 영랑뿐 아니라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의 화랑시절 이름인 법민랑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죠.
그런가 하면 바위면 하단에는 신라 법흥왕 12년에 새긴 글과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후 이에 덧붙여 적은 글이 나란히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약 400년에 걸친 신라의 숨은 이야기를 마치 책처럼 적어놓은 곳.
말하자면 이곳은 바위 위의 역사책입니다.
-(해설) 문명대 교수는 천전리 계곡이 신라시대 이전부터 문곡으로 불린 이유를 이곳 암각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해설) 천전리에 있는 명문과 암각화.
비록 문양과 시대는 다르지만 후손에게 남기기 위한 그들만의 기록이었던 거죠.
수만 년 전 인류가 남긴 암각화.
하지만 암각화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곳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죠.
-(해설) 사람들이 떠난 후 더욱 무성해진 풀과 나무 혹은 이끼가 암각화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천전리 암각화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처음 발견될 당시 암각화가 있던 곳은 개간 사업으로 나무조차 없던 곳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소나무와 활엽수가 숲을 이루었고 그 뿌리는 주변 바위로 뻗어가며 암각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험에 빠진 곳은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일주일.
울산 지역에 사흘간 내린 폭우로 사연댐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댐의 수위가 53m를 넘으면 잠기기 시작해 57m가 되면 완전히 물속에 들어가는 반구대 암각화.
그런데 댐수위가 58m를 훌쩍 넘어버린 거죠.
-(해설) 암각화가 있는 바위는 원래 고개를 숙인 듯 앞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죠.
그래서 비가 올 때도 마치 우산을 쓴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계곡보다 한참이나 높아 물이 차오를 일도 거의 없었죠.
1965년 사연댐이 생기지 않았다면 반구대 암각화의 운명도 분명 지금과는 달랐을 겁니다.
반구대 암각화 인근 한실마을에서 태어난 김태한 의장.
그 역시 사연댐 건설로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오랜 교직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설) 한때 90여 가구가 살던 한실마을은 대부분 물속에 잠기고 이제 겨우 10여 가구만 남아 있죠.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암각화 바위에 대한 추억만은 뚜렷합니다.
-(해설) 사연댐이 생긴 후 반구대 암각화 또한 어린 시절 놀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정겨웠던 고향 마을은 그렇게 영원히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문명대 교수는 사연댐이 생기고 6년 후 이곳을 처음 찾았습니다.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기고 한참이나 지나서 말이죠.
-(해설) 1974년 물속에서 잠깐 벗어난 틈을 타 비로소 암각화 전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반구대 암각화는 물과의 악연을 예고하고 있었던 거죠.
-(해설) 사연댐을 높이면 두 암각화 모두 물에 잠긴다는 판단에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문명대 교수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해설) 대곡댐은 두 개의 암각화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위 조절이 불가능한 사연댐과 기후 변화가 가져온 극한 호우는 벌써부터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물과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해설) 선사 유적에 대한 대중의 관심으로 오히려 혹독한 유명세를 치른 곳이 있습니다.
1940년에 발견돼 8년 후 일반에 공개된 라스코 동굴 벽화가 그런 경우죠.
-(해설) 한때 하루 1200명의 관람객이 동굴에 몰려들자 산소 부족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그 이후 이산화탄소 배출 장치를 만든 게 더 큰 화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동굴 벽화에 얼룩이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해설) 동굴이 폐쇄된 이후에도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진짜와 똑같이 만드는 복제품이었죠.
-(해설) 1983년 마침내 동굴 벽화 중 황소의 방과 축의 방, 이 두 개의 방을 똑같이 재현한 또 하나의 라스코가 문을 열었습니다.
-(해설) 2012년에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고 싶어 하는 전 세계인들을 위한 전시용 복제품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라스코 동굴 벽화 전체를 재현한 현대식 라스코까지 완성했죠.
이렇게 선사인들의 놀라운 작품은 지금의 예술가들과 첨단 기술로 완벽하게 재현되었습니다.
-(해설) 구석기인들의 그림과 프랑스의 복제 기술은 모두 예술의 경지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동굴 벽화를 지키기 위한 이곳의 다양한 노력은 가장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7년 프랑스에서 발견된 로코 오 소시에르 암석 거주지는 훼손을 우려해 처음부터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해설) 마법사의 바위로도 불리는 이곳 암각화는 그 이름만큼이나 신기하고 독특한 게 많습니다.
석회암 바위에 색과 굴곡을 최대한 살려 입체적으로 만든 암각화.
여기는 각각의 그림이 마치 하나의 조각상 같아 보이는 곳이죠.
-(해설) 이곳 조각은 인류의 삶과 죽음 혹은 인류가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며 후손으로 이어졌는지를 이야기하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해설이 있는 선사미술관 같은 곳이죠.
-(해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장석호 박사는 암각화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암각화와의 인연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해설) 원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끝에서 만나게 된 암각화.
암각화가 있는 곳에 늘 그가 있었습니다.
암각화만을 쫓았던 그의 여정은 울산에서 시작해 일본, 몽골, 러시아를 거쳐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설) 그는 투명 비닐을 이용해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 모두 실물 크기 그대로 본뜨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해설) 비닐을 이용한 채록 과정에서 겹쳐 그려진 곳도 여럿 찾았습니다.
한 자리에 그림이 겹쳐 있어도 가장 먼저 그린 그림을 찾아낼 수 있는 거죠.
-(해설) 이 같은 선단식 포경 장면은 한반도 고래잡이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해설) 1986년 포경이 금지되기 전 울산 장생포의 풍경과 닮아 있는 암각화 속의 고래잡이.
그 옛날 선사인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이 이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또한 전 세계 바다 그 어디에나 있는 고래.
하지만 고래 사냥이 새겨진 암각화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다는 데 주목했던 거죠.
장석호 박사는 암각화를 통해 바위그림이 원시미술이 아니라 선사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위대한 기록이라는 걸 알게 됐죠.
-(해설) 문명대 교수는 암각화 발견으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났습니다.
-(해설) 암각화와 함께한 반세기.
그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한국 불교 미술의 대가로 암각화를 최초로 발견한 연구자로 여전히 학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해설) 이제 선사인들이 먼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암각화의 신비한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와 탁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사 미학.
반구천의 암각화로부터.
신석기부터 청동기, 청동기에서 통일 신라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사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반구천의 암각화.
선사인들이 들려주는 오래된 미래를 따라 우리의 새로운 내일을 만나러 갑니다.
1940년 프랑스 중부 도르도뉴 지방의 작은 마을 몽티냑.
이곳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라스코 언덕 어딘가에 중세 시대 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전설 하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을 소년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 언덕을 탐험하기로 했죠.
-(해설) 4명의 소년들이 발견한 것은 땅속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스러운 동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과 마주했습니다.
-(해설) 들소의 조상 격인 오록스,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 벽을 가득 메운 사슴과 염소.
그건 너무나 거대하고 사실적인 800여 점의 벽화였습니다.
소년들은 학교 교장 선생님에게 이 놀라운 탐험의 결과를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고학의 선구자 앙리 브뢰유는 동굴 벽화를 그린 주인공이 빙하기 말기 추위를 피해
동굴에 살았던 구석기 시대의 인류라는 걸 단번에 알았습니다.
-(해설) 기원전 1만 3000년 전. 산사태로 동굴 입구가 막힌 라스코동굴 벽화.
그 비밀의 동굴을 소년들이 발견할 때까지 그림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거죠.
-(해설) 라스코동굴 벽화의 발견은 몽티냑이라는 작은 마을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선사인들이 남긴 벽화를 1만 7000년 후 호기심 많은 그들의 후손이 찾았다는 사실에 매우 흥미로워하죠.
인류의 역사는 신화나 전설보다 더 오래된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만을 기억할 뿐이죠.
-(해설) 문자가 없던 원시 시대에도 인류는 삶을 이어가며 그들만의 예술 세계를 펼쳤습니다.
-(해설) 그래서 암각화는 때로는 선사 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죠.
그 시작을 알린 게 바로 동굴 벽화였습니다.
1868년 스페인의 한 사냥꾼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저 신기한 그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후 고고학자 마르셀리노 사투올라와 그의 어린 딸이 다시 찾아 학계에 보고했지만
그 누구도 동굴 벽화가 2만 년 전 진짜 구석기 시대의 그림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눈을 뗄 수 없는 놀라운 작품이 너무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죠.
이를 본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알타미라 이후 모든 예술은 퇴부했다며 구석기인들의 예술성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동굴 벽화에서 영감을 받아 석판화로 된 11편의 황소 연작을 남겼죠.
1994년 프랑스 아르데슈 지방에서 발견된 쇼베 동굴 벽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알타미라와 비슷했습니다.
발견 당시 동굴 안에는 구석기 시대인들이 그린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경이로운 그림들로 가득했죠.
-(해설) 3만 6000년 전, 구석기 시대의 천재 예술가는 들판에서 본 사자와 달리는 말을 떠올리며
캄캄하고 깊숙한 동굴 속에서 횃불을 들고 목탄으로 부드럽고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해설)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금 인류가 선사시대 인류보다 더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녔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동굴 벽화를 본 이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류의 예술성은 구석기 시대에도 이미 놀라운 수준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오래전 한반도에 살았던 인류도 바위 위에 그림을 남겼습니다.
역사학자의 길을 걸어온 문명대 교수는 1970년 울산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가 이끌던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은 반고사를 찾는 중이었죠.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반고사에 머무를 때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했고
그 반고사는 영축사의 서북쪽에 있다는 반고사에 관한 내용이 나오죠.
-(해설) 크리스마스 하루 전.
조사단은 어렵지 않게 반구대 부근에서 절터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해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마을 주민은 또 다른 곳에 절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를 따라 상류로 1km 남짓.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계곡에 갔을 때였습니다.
-(해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불교 유적은 아니었습니다.
동심원이나 마름모꼴 같은 기하학적 문양과 한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바위, 바로 암각화였습니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그날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가 되었습니다.
조사단이 천전리 계곡에 3개월간 머무르고 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의 또 다른 제보가 있었습니다.
-(해설) 하지만 주민들이 말한 곳은 물에 잠겨 있었죠.
조사단은 꼬박 1년을 더 기다린 후에야 대곡리의 그 바위를 만났습니다.
-(해설) 그것이 반구대 암각화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은 호랑이뿐만 아니라 동해 바다에서 본 물을 뿜는 고래, 새끼 업은 고래,
물결을 일으키며 헤엄치는 고래까지 이곳 바위에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불적 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암각화는 그렇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천전리와 대곡리, 두 마을의 암각화는 반구천의 암각화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죠.
암각화가 발견되고 55년이 흐른 2025년.
반구천의 암각화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다시 한번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해설) 반구천의 암각화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무대에 나선 건 2010년 세계 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지 1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해설) 유네스코는 반구천의 암각화가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졌을 뿐 아니라
고래와 같이 희귀한 주제를 창의적으로 풀어낸 걸작이라고 밝혔죠.
-(해설) 7000년의 무게를 견딘 반구천의 암각화는 그렇게 우리나라의 17번째 세계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평원에 있는 이곳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전 세계 암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세계유산이 된 곳입니다.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서 세계유산이 된 건 반구천의 암각화가 유일하죠.
-(해설) 사실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수많은 문화 유적 가운데 이탈리아의 첫 번째 세계 유산이 된 곳이기도 하죠.
-(해설) 암각화에 밀려 그 이듬해 세계유산이 된 포로 로마노.
고대 로마의 심장으로 불리던 로마 제국의 역사적 현장조차 결코 암각화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거죠.
-(해설) 말하자면 이곳은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어 언어와 문화로부터 자유로웠던 선사 인류가 남긴 예술 작품입니다.
-(해설) 2400여 개의 바위에 있는 14만여 점의 암각화.
1906년에 발견된 이후 50년이 지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조사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해설) 이 방대한 양을 보면 신석기인들에게 이곳은 삶의 무대이면서 때로는 기록의 공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해설) 신석기인들은 여기에 자신들의 사냥 모습과 농경 생활만 그린 건 아닙니다.
관습과 종교 의식까지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했죠.
그런가 하면 이곳에 살던 철기 시대 사람들은 6개 고상 가옥과 30개가 넘는 네모난 경작지, 수십 명의 전사와
동물들이 있는 마을 지도를 그대로 바위에 옮겨놓았습니다.
-(해설) 마치 여러 화가들이 하나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곳 암각화 역시 하나의 바위면에 여러 시대가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단순한 바위 그림이 아니라 인류가 남긴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죠.
하나의 바위면에 문양과 글자, 역사 이전과 그 이후가 함께 있는 건 천전리 암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대 교수는 천전리 암각화를 처음 발견했을 당시 바위에 새겨진 글이 신라 시대 것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해설) 여러 개의 화랑 이름 중에는 영랑뿐 아니라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의 화랑시절 이름인 법민랑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죠.
그런가 하면 바위면 하단에는 신라 법흥왕 12년에 새긴 글과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후 이에 덧붙여 적은 글이 나란히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약 400년에 걸친 신라의 숨은 이야기를 마치 책처럼 적어놓은 곳.
말하자면 이곳은 바위 위의 역사책입니다.
-(해설) 문명대 교수는 천전리 계곡이 신라시대 이전부터 문곡으로 불린 이유를 이곳 암각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해설) 천전리에 있는 명문과 암각화.
비록 문양과 시대는 다르지만 후손에게 남기기 위한 그들만의 기록이었던 거죠.
수만 년 전 인류가 남긴 암각화.
하지만 암각화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곳 발카모니카 암각화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죠.
-(해설) 사람들이 떠난 후 더욱 무성해진 풀과 나무 혹은 이끼가 암각화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천전리 암각화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처음 발견될 당시 암각화가 있던 곳은 개간 사업으로 나무조차 없던 곳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소나무와 활엽수가 숲을 이루었고 그 뿌리는 주변 바위로 뻗어가며 암각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험에 빠진 곳은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일주일.
울산 지역에 사흘간 내린 폭우로 사연댐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댐의 수위가 53m를 넘으면 잠기기 시작해 57m가 되면 완전히 물속에 들어가는 반구대 암각화.
그런데 댐수위가 58m를 훌쩍 넘어버린 거죠.
-(해설) 암각화가 있는 바위는 원래 고개를 숙인 듯 앞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죠.
그래서 비가 올 때도 마치 우산을 쓴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계곡보다 한참이나 높아 물이 차오를 일도 거의 없었죠.
1965년 사연댐이 생기지 않았다면 반구대 암각화의 운명도 분명 지금과는 달랐을 겁니다.
반구대 암각화 인근 한실마을에서 태어난 김태한 의장.
그 역시 사연댐 건설로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오랜 교직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설) 한때 90여 가구가 살던 한실마을은 대부분 물속에 잠기고 이제 겨우 10여 가구만 남아 있죠.
비록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암각화 바위에 대한 추억만은 뚜렷합니다.
-(해설) 사연댐이 생긴 후 반구대 암각화 또한 어린 시절 놀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정겨웠던 고향 마을은 그렇게 영원히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문명대 교수는 사연댐이 생기고 6년 후 이곳을 처음 찾았습니다.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기고 한참이나 지나서 말이죠.
-(해설) 1974년 물속에서 잠깐 벗어난 틈을 타 비로소 암각화 전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반구대 암각화는 물과의 악연을 예고하고 있었던 거죠.
-(해설) 사연댐을 높이면 두 암각화 모두 물에 잠긴다는 판단에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문명대 교수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해설) 대곡댐은 두 개의 암각화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위 조절이 불가능한 사연댐과 기후 변화가 가져온 극한 호우는 벌써부터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물과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해설) 선사 유적에 대한 대중의 관심으로 오히려 혹독한 유명세를 치른 곳이 있습니다.
1940년에 발견돼 8년 후 일반에 공개된 라스코 동굴 벽화가 그런 경우죠.
-(해설) 한때 하루 1200명의 관람객이 동굴에 몰려들자 산소 부족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그 이후 이산화탄소 배출 장치를 만든 게 더 큰 화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동굴 벽화에 얼룩이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해설) 동굴이 폐쇄된 이후에도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진짜와 똑같이 만드는 복제품이었죠.
-(해설) 1983년 마침내 동굴 벽화 중 황소의 방과 축의 방, 이 두 개의 방을 똑같이 재현한 또 하나의 라스코가 문을 열었습니다.
-(해설) 2012년에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고 싶어 하는 전 세계인들을 위한 전시용 복제품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라스코 동굴 벽화 전체를 재현한 현대식 라스코까지 완성했죠.
이렇게 선사인들의 놀라운 작품은 지금의 예술가들과 첨단 기술로 완벽하게 재현되었습니다.
-(해설) 구석기인들의 그림과 프랑스의 복제 기술은 모두 예술의 경지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동굴 벽화를 지키기 위한 이곳의 다양한 노력은 가장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7년 프랑스에서 발견된 로코 오 소시에르 암석 거주지는 훼손을 우려해 처음부터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해설) 마법사의 바위로도 불리는 이곳 암각화는 그 이름만큼이나 신기하고 독특한 게 많습니다.
석회암 바위에 색과 굴곡을 최대한 살려 입체적으로 만든 암각화.
여기는 각각의 그림이 마치 하나의 조각상 같아 보이는 곳이죠.
-(해설) 이곳 조각은 인류의 삶과 죽음 혹은 인류가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며 후손으로 이어졌는지를 이야기하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해설이 있는 선사미술관 같은 곳이죠.
-(해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장석호 박사는 암각화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암각화와의 인연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해설) 원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끝에서 만나게 된 암각화.
암각화가 있는 곳에 늘 그가 있었습니다.
암각화만을 쫓았던 그의 여정은 울산에서 시작해 일본, 몽골, 러시아를 거쳐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설) 그는 투명 비닐을 이용해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 모두 실물 크기 그대로 본뜨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해설) 비닐을 이용한 채록 과정에서 겹쳐 그려진 곳도 여럿 찾았습니다.
한 자리에 그림이 겹쳐 있어도 가장 먼저 그린 그림을 찾아낼 수 있는 거죠.
-(해설) 이 같은 선단식 포경 장면은 한반도 고래잡이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해설) 1986년 포경이 금지되기 전 울산 장생포의 풍경과 닮아 있는 암각화 속의 고래잡이.
그 옛날 선사인들의 삶과 지금 우리의 삶이 이어져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또한 전 세계 바다 그 어디에나 있는 고래.
하지만 고래 사냥이 새겨진 암각화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다는 데 주목했던 거죠.
장석호 박사는 암각화를 통해 바위그림이 원시미술이 아니라 선사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위대한 기록이라는 걸 알게 됐죠.
-(해설) 문명대 교수는 암각화 발견으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났습니다.
-(해설) 암각화와 함께한 반세기.
그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한국 불교 미술의 대가로 암각화를 최초로 발견한 연구자로 여전히 학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해설) 이제 선사인들이 먼 후손들에게 들려주는 암각화의 신비한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와 탁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사 미학.
반구천의 암각화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