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스페셜 방영중
토요일 오전 8시
TV

다시보기

테마스페셜 - 전북대생 이세종, 5·18 최초의 희생자

등록일 : 2025-05-19 15:48:37.0
조회수 : 52
-(해설) 1980년 5월. 민주화를 향한 외침으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곳.
바로 광주였습니다.
국가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만 공식적으로 160여 명.
그 가운데 1980년 5월 18일 새벽 전북대학교에서 계엄군에 의해 생을 마감한 이세종이 있습니다.
전북대생 이세종, 그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
5.18 최초의 희생자.
-(해설)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세종.
그가 마지막까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얼마 전까지도 차디찬 기운이 몰아쳤던 곳.
푸른 잔디가 세상의 이치를 말해 주는 듯합니다.
이곳에서 5.18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전북대생 이세종 열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스물둘에 죽음과 마주한 그는 어떤 청년이었을까요.
그를 기억하는 친구는 어느덧 백발의 노년이 되었습니다.
-(해설) 이세종 열사를 기리는 추모비 바로 옆에 공사가 한창인 이 건물.
본래 학생회관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건데요.
시계추를 되돌려본다면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0년 5월.
이곳은 투쟁의 본거지였습니다.
-(해설) 1980년 5월 17일 밤 9시 40분.
전두환 등 12.12 세력은 임시국무회의를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속전속결로 의결합니다.
그와 동시에 유력 정치인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하죠.
그날밤 익산 금마에 있던 제7공수여단 병력이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을 점령합니다.
-(해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했던 그날.
학생회관을 지키던 농학과 2학년 이세종은 새벽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한 젊은이의 숭고한 영혼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
-(해설) 1980년 5월의 전주.
학교 안에서만 학원 자율화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하죠.
계엄 확대 나흘 전 전북도청 앞에는 무려 6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집결했습니다.
이 사진 속 어딘가에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던 이세종 투사가 있었을 겁니다.
-(해설) 전두환 신군부는 이세종을 기리는 작은 비석마저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의 들불, 투사 이세종의 넋을 돌에 새길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1990년,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기까지.
그를 그냥 떠나보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이게 전라고등학교 1학년 때 입학했을 때 형의 사진입니다, 이게.
그다음에 이게 대학교 때 사진이고요.
이게 저하고 형하고 촌집에서 찍은 사진이거든요.
이게 저의 앉아 있는 모습이 저고요, 이게 형이었습니다, 형.
1998년에 유공자로 인정돼서, 99년 4월에 5.18광주묘지로 이장을 하는데.
참 그때...
이장을 하면서 유골을 봤잖아요. 제가 확실히 봤는데.
여기에 개머리판 자국이 있는 거예요. 머리가 단단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개머리판 자국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위에서 찍어버린 거예요.
얼마나 세게 쳤으면 그렇게 두개골이 함몰되었겠어요.
-(해설) 공부를 잘해 전주에 있던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던 넷째 아들.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실했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온 집안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다음에 이동근 박사님의 의견서. 그다음에 여러 가지 신청이 있고요. 그다음에 여기.
-(해설) 스크랩북을 가득 채운 낡은 종이 뭉치가 지난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증언하는 듯합니다.
-인정해달라는 보상 서류고요, 그리고 뭐. 그다음에 각 신문에서, 매체에서 이렇게 나온 것이고요.
여기 보면 최초 희생자로 44년 만에 공식 인정됐다고 나온 내용입니다.
-(해설) 1980년 5월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한 곳.
광주에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장소가 있죠.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5.18민주화운동은 시간과 공간의 확장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해설) 지금도 많은 사람이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에서만 일어난 사건으로 알고 있는 이유는.
광주의 희생이 차마 말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컸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의 실체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전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내란 저지 투쟁이었습니다.
-(해설) 민주주의를 지켜온 부산 사람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는 공간은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그 이듬해인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살펴볼 수 있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 시대의 유산이 부산의 5.18을 뚜렷이 말해줍니다.
-부산에서 매년 5.18 기념행사를 해요. 그런데 주변에서 제가 5.18 유공자라 그러면.
아니, 그때 광주에 있었느냐고 물어요, 저한테.
아니다 그러면 그런데 왜 당신이 5.18 유공자냐고.
5.18을 전부 다 광주하고만 연결하는 거예요.
그 당시 저도 구속돼서 징역을 꽤 오래 살았으니까.
다른 지역에 그렇게 징역을 살았던 친구들하고 만나보면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증언자 아닌가. 우리가 당사자 아닌가.
그러면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일단 남겨야 하겠다.
-(해설) 그렇게 1980년, 전국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되찾아주기 위한 노력이 그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두꺼운 책에는 광주 밖에서 국가 폭력의 피해를 당한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 하나.
5.18은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사실이죠.
-(해설) 언론마저 계엄군이 철저히 통제하던 당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해설) 젊음을 불태웠던 투쟁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해설) 1980년, 전북 지역에서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피해는 정확한 집계가 아직도 어렵습니다.
-(해설) 마을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가는 일에 매진하며 전북 5월 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심영배 씨.
45년 전, 5.18은 그에게 잊히지 않는 상처를 남겨 놓았습니다.
-(해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또 다른 장소. 전주 510보안 부대.
-(해설)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던 곳.
4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야만의 시간을 뚜렷이 기억하는 이도 있습니다.
-(해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설) 1980년 5월, 강원도의 대학가에도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투쟁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죠.
-5월 8일부터 14일까지를 민주화 운동 행진 기간으로 정했어요, 그 총학생회에서.
그래서 첫날 학생들이 모였는데 전교생이 거의 다 모였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전교생이 한 4000명 됐었는데 4000명이 운동장에 꽉 차서 시위를 했고 그때부터 매일 시위를 했죠.
낮에는 시위를 하고 밤에는 학교 들어가서 농성을 하고.
보안대에서 보고된 자료입니다.
검거 목표, 검거, 훈방, 이렇게 나와 있는데 강원대학교에서 목표가 43명인데 46명 그리고 강릉에 관동대가 있거든요.
관동대에서도 42명, 상지대에서도 19명, 그래서 강원도에서만 공식적으로 집계된 게 114명이에요.
그런데 서울은 얼마나 많았겠어요.
-(해설) 45년 전 5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10.26 사건부터 5.18에 이르기까지 운동의 중심은 사실 서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도 서울이고 여기에서 모든 정치적인 활동이 벌어지니까요.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80년 5월 17일 개헌 발표를 딱 들으면서 5월 15일에
해산하면서 했던 약속, 우리가 집결하던 곳에 평일이 시작되는 날 나가 모이자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5월 19일 월요일 아침 10시에 서울역 앞으로 나갔습니다.
누군가 구호를 선창하고 스크럼을 짜고 차도로 나가서 시위를 시작했죠.
그런데 그 이전과는 사뭇 달랐어요.
전투경찰이었는데 굉장히 폭압적으로 진압을 했고 연행됐죠, 붙잡혀서.
서울역 앞에 남대문경찰서로 연행이 됐는데.
물론 엄청난 구타를 당했죠.
-(해설) 1980년 5월 27일, 경찰서에서 풀려난 역사 학도는 대학원 대신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죠.
이른바 운동권의 길을 걷기로 말이죠.
그리고 5.18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펜을 잡았습니다.
-(함께)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해설) 매년 5월이면 전북대학교 교정에서 열리는 5.18 기념식.
전북대생 이세종 열사가 5.18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로 공식 인정을 받은 이후 기념식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해설) 이세종 열사의 숭고한 죽음을 이렇게 떳떳하게 기릴 수 있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른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이세종의 기억 투쟁이 크게 한 3단계로 이렇게 구성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1단계는 1985년에서 89년까지, 80년대고요.
이때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추모식을 시작하고 90년대 중후반기에 이르게
되면 전북 지역에서도 이세종 열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하죠, 언론사 등에서요.
결국 1989년에 이세종 열사가 5.18 사망자로 인정을 받고 국립 5.18 묘지에 안치됩니다.
그다음에 2000년대 이후로 5.18 최초 사망자로서 본격적인 공론화를 진행합니다.
-(해설) 학계에서 5.18 최초의 희생자, 전북대생 이세종의 존재가 공론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민규 교수의 역할이 컸습니다.
-신군부가 상당히 많은 언론에 난도질을 했더라고요.
기사 열 건이 계엄단에 들어가면 다섯 건 이상이 삭제되는 그런 사태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광주 민주화운동입니다.
-(해설) 삭제된 기사 가운데 이민규 교수의 눈에 들어온 건 전북대생 이세종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죠.
-전북대생 한 명 추락사, 계엄군 피하려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니까 새벽 1시 반에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
학생회관 3층에서 동교 농학과 2년 이세종 열사가 13m 콘크리트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는 짧은 단신 기사죠.
그래서 이것이 사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서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그때 많은 젊은 영혼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게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제가 이 부분을 이야기했습니다.
-(해설)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세상을 떠난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광주의 슬픔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죠.
그 가운데 전북대생 이세종 열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부산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다 국가 폭력으로 세상과 이별한 임기윤 목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70년대에 꾸준히 인권 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해 왔던 분이 5월 17일
내란을 보고 5월 18일 이후에 광주에서 유혈을 보고 참을 수가 없는 거죠.
설교를 통해서 질타했죠, 그 5.18을.
그래서 당시 5.18과 관련해서 광주 밖에서 희생당한 분은
전주의 이세종 열사를 필두로 해서 네 번째 희생자예요.
-(해설) 1980년 5월 18일 새벽.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이세종 열사.
그의 옆자리에는 종로의 기독교회관 6층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서까지 광주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서강대생 김의기 열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5.18의 진실을 알리려고 서울 신촌에서 1980년 6월 9일 분신을 택한 김종태 열사.
그의 마지막 외침은 노동 3권 보장과 비상계엄 해제였습니다.
1980년 광주 밖 5.18 희생자는 모두 4명.
마지막은 1980년 7월 고문으로 숨진 부산의 임기윤 목사입니다.
-(해설) 임기윤 목사는 지난 1998년에서야 민주화 운동 희생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99년 5월 이곳에 잠들 수 있었던 거죠.
-(해설)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기까지 무려 19년이 걸린 이세종 열사.
5.18 최초의 희생자인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의 진실은 누가 알고 있을까요?
-(해설) 지금까지 알려진 이세종 열사의 사망 경위를 다시 살펴볼까요?
군이 남겨놓은 기록에 따르면 1980년 5월 18일 새벽 계엄군을 피하려다 이곳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건데요.
45년 전 그날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해설) 사체검안서에 남겨진 이세종 열사의 사인은 두개골 함몰.
계엄군의 폭력에 의한 사망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
그날의 진실을 말해줄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도피하듯 건너간 미국에서 연방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상원 씨.
절체절명의 순간 선배 이세종의 흔들리던 마지막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해설) 지난해 전북대학교 박물관 한편에서 열린 이세종 열사 추모전.
올곧은 모습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선한 눈빛.
정성스럽게 정리해놓은 전공 노트는 그의 품성을 짐작케합니다.
1980년 5월 18일, 피 흘리며 세상과 이별했던 그의 마지막 유류품을 다시 만났습니다.
-(해설) 이세종 열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이세종 열사가 주검으로 있던 자리였기 때문에 표지석을 해놨어요.
그런데 이게 없어져 버린 거예요, 지금.
-(해설) 1980년 5월의 현장이었던 학생회관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의 마지막 온기가 남아 있었던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거죠.
1987년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궤변을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군사정권은 결국 항복과도 같은 6.29 선언을 하게 되죠.
그를 기리기 위한 이곳에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분수령이었던 1987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로 가족에게 마음을 전하고 기타를 유독 사랑했던 박종철을 알아갈 수도 있죠.
-(해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사진이 벽면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게 눈에 띕니다.
-(해설) 2025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을 겁니다.
군부 독재에 맞서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계엄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꽃다운 청춘.
그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해설) 독재에 맞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45년 전 사진은 그 주인공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 사회의 아픈 과거가 미래 세대에게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요.
5.18 최초의 희생자, 전북대생 이세종.
그의 희생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들려줄 답변은 이제 너무도 명확해졌습니다.
사이트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