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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세계의 벽, 희망의 벽
등록일 : 2025-05-12 15:05:46.0
조회수 : 49
-(해설) 인류 최초의 벽은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요?
수렵 시대, 인류는 궂은 날씨와 사나운 동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왔습니다.
동굴은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최초의 경계였죠.
벽으로 둘러싸인 동굴 속에서 인류는 안전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거대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선사시대에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던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설) 벽이 더 중요해진 것은 농경 문화의 발달로 인류가 정착하면서부터죠.
벽을 쌓는 것은 삶과 직결됐습니다.
돌로 쌓아 올린 계단식 밭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풍요로운 경작지가 됐죠.
종교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심리적 울타리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마니차 벽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죠.
오늘 세계의 벽은 인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 에워싸는 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벽은 2만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 베제르강 주변.
선사 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굴된 곳입니다.
깎아지는 절벽에, 크고 작은 구멍이 보이는데요.
바로 구석기 시대, 크로마뇽인들의 거주지, 동굴입니다.
이곳에서 2만여 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의 두개골과 수많은 부싯돌, 생활 도구 등이 발견됐습니다.
동굴의 발견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가 처음으로 생긴 순간이었습니다.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내부에서 외부의 사나운 짐승과 추위 등 궂은 날씨를 피할 수 있었죠.
벽으로 둘러싸인 동굴은 인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에워싸는 공간이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곳은 147개의 유적지와 25개의 벽화 동굴이 있습니다.
-(해설) 크로마뇽인 선사유적지로부터 25km 떨어진 몽티냑 마을.
이곳에 벽의 역사를 알려주는 라스코 동굴이 있습니다.
2만여 년 전 크로마뇽인이 생활했던 동굴은 1940년 우연히 발견됐는데요.
강아지를 찾아 나선 10대 소년 4명이 땅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동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높이 13m, 총길이 235m의 거대한 규모였죠.
외부와 단절된 깊고 어두운 동굴 내부.
선사시대 인류의 삶을 추정케 하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 겁니다.
동굴 천장에 그려진 다양한 동물 그림, 바로 동굴 벽화.
동물들은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라스코 동굴벽화에는 세 가지 동물이 99%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바로 들소와 사슴 그리고 말.
인류는 왜 동굴에 이 거대한 동굴벽화를 남겼을까요?
동굴에 들어오면서 외부와 내부라는 경계가 처음으로 생겨났고.
동굴은 인류를 보호하는, 에워싸는 공간이기도 했죠.
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동굴에서 인류는 거대한 동굴벽화를 그렸는데요.
이 들소 그림은 무려 5m로 실제 들소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벽화는 동굴의 낮은 벽이 아니라 가장 높은 천장에 집중돼 있죠.
인류는 왜 이토록 동굴 높은 곳에 실제보다 훨씬 크게 동물벽화를 그린 것일까요?
-(해설) 당시는 수렵시대. 인류는 동물을 사냥해서 생존해야 했죠.
그래서 동물은 사냥의 대상이자 매우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동굴벽화는 생존과 경외,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죠.
반면에 인류는 스스로를 아주 작게 그려놨는데요.
수렵시대, 동물에 비해 연약하고 작은 존재였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해설) 그렇다면 인류에게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동굴벽화는 어떤 기원이 담겨 있는 걸까요?
-(해설) 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동굴에서 인류는 거대한 동물을 그리면서 더 많이 사냥할 수 있기를.
그래서 더 오래 생존할 수 있기를.
그렇게 동굴은 희망을 기원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산지대인 안데스산맥. 이곳에는 벽이 만든 위대한 문명이 있습니다.
쿠스코 광장에는 15세기 잉카문명을 건설한 파차쿠티 황제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페루 국기와 함께 잉카제국의 깃발도 걸려 있죠.
모두 페루인들의 정체성이 잉카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파차쿠티 왕이 건설한 삭사이와만.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전입니다. 평균 높이는 7m.
무려 200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를 쌓아 올린 것입니다.
규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석벽의 정교함과 견고함입니다.
현대 건축학자들도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로 거대한 돌들이 조각하듯 맞물려 있습니다.
-(해설) 거대한 석벽을 넘어서면 가장 고도가 높은 곳에 잉카인들이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신전 터가 드러납니다.
-(해설) 매년 6월, 페루에서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태양절 축제, 인티라미가 열립니다.
고산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는 그해 날씨가 무엇보다 중요했죠.
잉카인들은 태양신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했습니다.
-(해설) 잉카인들의 벽은 농업 기술의 진전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이곳은 잉카제국의 농업기술센터, 모라이입니다.
평지가 아닌 해발 2, 3000m. 고산지대에 맞는 농작물을 개발하던 곳이죠.
돌을 촘촘히 쌓아 올려 만들어진 계단식 밭.
높이는 2.5m, 폭은 4m. 각 층마다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계산해 과학적으로 농작물을 시험 재배한 것입니다.
-(해설) 계단식 밭은 층마다 기온이 달랐는데요.
맨 위층과 맨 아래층은 5도 이상 기온 차이가 났죠.
시험 재배된 농작물은 이듬해 한 계단씩 올려 경작했는데요.
서서히 추위에 적응시켜 고산지대에 맞는 농작물을 개발한 것이죠.
석벽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감자, 옥수수 등의 경작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해설) 석벽을 이용한 농작물 개발 기술 덕분에 15세기 잉카제국으로 발전했는데요.
페루와 에콰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해설) 해발 2400m의 고산 지대.
깎아지는 절벽에 세워진 도시, 마추픽추입니다.
15세기 잉카 제국이 건설한 성벽 도시인데요.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중 도시로 불립니다.
-지금 우리는 현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에 와 있습니다.
-(해설) 잉카의 성벽 도시 마추픽추는 모든 건축물을 오직 돌을 쌓아 올려 건설했는데요.
서민들이 살았던 집에 비해 귀족의 거주지 석벽이 조금 더 정교합니다.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 지대의 험준한 산악 지형.
어떻게 이 많은 돌을 쌓아서 도시를 건설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합니다.
마추픽추의 가장 높은 곳.
그리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습니다.
-(해설) 거대한 돌들이 마치 짜맞춘 듯 정교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잉카인들은 접착제 없이 석벽을 견고하게 쌓아 올렸죠.
벽을 쌓는 기술 덕분에 고산 지대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고 또한 도시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성벽 도시 앞에 층층이 펼쳐져 있는 계단.
바로 잉카인들이 농작물을 재배하던 밭입니다.
계단식 밭 역시 모두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서 만들었죠.
덕분에 고산 지대에서도 다양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석벽 기술이 잉카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했습니다.
계단식 밭에는 아래쪽에는 큰 돌, 그 위로 작은 돌, 그 위로 부엽토와 흙을 쌓아 올렸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산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고 필터처럼 아래로 스며듭니다.
-(해설) 계단식 논에서 재배한 옥수수와 감자는 돌로 지은 저장고, 콜카에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죠.
잉카인들이 고산지대에서 정착해 농경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돌로 쌓은 벽 덕분이었습니다.
-우리 잉카 문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위가 있고 벽이 있어서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벽이 있었기에 계단식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벽 덕분에 적의 침입을 막는 요새도 지을 수 있었고 벽이 있어서
곡식을 저장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잉카인들에게 벽은 기본 삶의 기본 바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해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600년이 흐른 지금도 잉카제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페루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카제국의 후예라고 생각하죠.
잉카의 전통복을 입고 태양절 축제를 계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잉카인이라는 정체성은 페루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결속시켰죠.
잉카인이라는 정체성과 유대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태양신이여, 우리는 당신의 자식입니다.
여기 쿠스코 도시는 돌로 만들어졌고 매일매일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태양신.
-(해설) 잉카제국이 쌓아 올린 벽은 국가를 보호하는 경계만이 아니었습니다.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페루 사람들은 여전히 잉카제국의 후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발 고도 8000m.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 히말라야.
히말라야산맥은 신들의 땅으로 불립니다.
척박한 고산지대. 깎아지는 절벽에 위험천만한 길을 달려.
다시 험준한 산맥의 계곡을 지나 도착한 곳.
네팔의 작은 마을 마낭입니다.
이곳에는 종교적 믿음이 그득합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네팔은 2500년의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불교의 땅입니다.
마을 어귀 어디에나 쌓여 있는 마니석에는 옴 마니 반메 훔, 불교 경전이 새겨져 있습니다.
네팔은 특히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데요.
가장 상징적인 수행 도구가 있습니다.
어린 수도승들이 돌리고 있는 것 바로 긴 원통형의 마니차입니다.
불교 경전을 넣어둔 마니차를 돌리면 그만큼 부처의 자비를 받아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마니차는 이곳 사람들에게 종교적 울타리라 할 수 있죠.
-(해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불교 사원 보우더나트.
오전 5시, 이른 새벽부터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데요.
하루를 시작하기 전 기도를 하기 위해서죠.
매일 불교 사원을 찾아 참배하는 것은 네팔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이 자신을 에워싸면서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이곳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죠.
티베트 사원은 둥근 원형으로 에워싸는 형태인데요.
거대한 불탑, 스투파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모두 마니차를 돌리는데요.
불교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까지 수십 개의 마니차를 돌리며 부처님의 자비를 기원하고 있죠.
네팔 사람들에게 마니차는 믿음과 희망을 돌리는 것입니다.
보우더나트 사원의 켄포 스님은 불교에 입적한 지 25년이 넘은 라마라 불리는 큰 스님이십니다.
-(해설) 마니차를 돌리며 외우는 특별한 기도문이 있는데요.
바로 옴 마니 반메 훔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주문인데요.
옴 마니 반메 훔은 온 우주에 충만한 지혜와 자비가 중생들에게 퍼진다는
뜻으로 이 주문을 외우면 번뇌와 죄가 소멸하고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합니다.
-(해설) 부처님께 기도하고 법문을 공부하는 승려들의 수련 공간.
이곳에는 티베트 불교의 상징인 큰 스승, 라마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요.
특히 14대 달라이 라마는 세계적으로 비폭력, 평화 운동을 펼치고 계신 분입니다.
한 개인이나 한 국가를 위한 종교가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불교.
달라이 라마로부터 어린 동자승까지 티베트 불교의 정신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믿음, 이것은 2500년 동안 변치않고 이어져 온 티베트 불교의 뿌리 깊은 정신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희망의 마니차를 돌립니다.
티베트 불교만이 아니라 종교는 세상 모든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이름이 다를 뿐 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해왔습니다.
즉 나와 당신으로 나누지 않고 우리로 연결하는 것이죠.
-(해설) 누구나 마음에 부처가 있고 부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네팔은 문맹률이 높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4분의 1만이 글을 읽을 수 있죠.
신들의 땅 히말라야에서 평생을 살아온 소남 체테 씨.
그녀의 하루는 부처님께 정갈한 물을 올리고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티베트 불교 의식인 향을 피우고 집 마당을 나와서까지 기도는 계속됩니다.
마을 전체를 다니며 기도를 올립니다.
수십 개의 마니차를 돌리며 계속해서 옴마니 반메 훔, 주문을 외우는데요.
글을 몰라 불교 경전을 읽지 못해도 마니차를 돌리면 누구나 공덕을 쌓을 수 있죠.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한 불교, 마니차에 담긴 의미입니다.
-(해설) 우리 모두를 위한 믿음. 티베트 불교는 나와 당신으로 나누지 않죠.
우리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500년 동안 티베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모로코의 천년 고도 페스. 벽이 어떻게 사람을 이어줄 수 있을까.
여러 민족이 함께 운명을 꽃 피운 이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죠.
본래 이 땅에는 베르베르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이슬람 왕좌가 세워진 건 8세기 말.
침략자였던 이그리스 왕은 토착민의 지지를 얻어 왕국을 세웠죠.
구시가지인 올드페스에는 벽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세워진 아랍 왕조가 이슬람권 최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벽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해설)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높이 8m의 성벽에는 문이 있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출입구가 되기도 했죠.
개폐가 가능한 벽은 관용과 엄격함의 두 얼굴을 가졌습니다.
누구든 이곳에 와서 살 수 있었지만, 범죄자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죠.
성벽으로 둘러싸인 올드페스에는 여러 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블루게이트는 가장 유명한 출입구죠.
이 문을 통과하는 비좁은 골목이 얽히고 설킨 중세의 미로 도시를 마주하게 됩니다.
실핏줄처럼 얽힌 벽은 1만 개의 골목을 만들었고 그렇게 세계 최대의 미로 도시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이 비좁은 벽은 복잡한 구조 때문에 침략자들이 길을 잃게 만들곤 했죠.
막다른 골목에서 궁지에 몰린 적을 방어한다고 해서 붙여진 흥미로운 이름도 있습니다.
-(해설) 다닥다닥 벌집처럼 붙은 벽은 질식 골목의 적을 몰아붙이는 반면 이 길을 꿰고 있는 아군에게는 유리한 고지가 되어 주었죠.
-(해설) 1000년이 넘은 벽에서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페스.
8세기 말에 세워진 이 도시는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했죠.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세계 최초의 대학이 설립됐습니다.
859년에 세워진 알 카라 위인 대학.
서양의 가장 오래된 대학보다 200년이나 앞서 세워졌죠.
-(해설) 모스크 안에 자리한 이 대학은 수많은 석학을 배출했고 여전히 이슬람학, 천문학 등을 배우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이곳을 찾습니다.
-(해설) 무질서 속의 질서란 이런 모습일까요?
이곳의 벽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삶을 보장해 주었죠.
-(해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페스가 세워진 1200년 전부터 일관되어 온 철학입니다.
이슬람 왕조가 세운 나라였지만 토착민은 물론이고 이주해 온 유대인까지도 이곳에 정착해 살 수 있었죠.
단, 부를 자랑하는 건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 크기와 외관을 비슷하게 유지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했죠.
벽을 화합의 통로로 이용한 이 중세 도시의 놀라운 점은 여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팔레트를 연상하게 하는 이곳은 전통 방식 그대로 천연 염색을 하는 가죽 공장이죠.
이곳에는 여전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10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젖소 가죽과 씨름 중인 이 남성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일을 배웠습니다.
-(해설) 어느덧 아버지가 된 그의 하루는 생가죽을 세척하는 일로 시작되죠.
생가죽은 여러 번 세척을 거치는데 재래식 세탁기를 이용합니다.
선조들이 이용했던 물레방아 형태의 오래된 세탁기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죠.
중세 방식 그대로 염색하는 일은 고된 과정의 연속입니다.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강한 산성인 비둘기 배설물에 담가야 하는데 그 악취는 상상을 초월하죠.
-(해설) 코를 찌르는 악취에도 오롯이 작업에 열중인 사람들.
염색 공장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는 건 그들의 땀과 열정이었습니다.
퇴근길 모아신 씨의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미로 골목에 사는 그는 이웃의 아이를 딸처럼 반가워하는데요.
공동 출입구를 거쳐 다시 자신의 집 문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보니 이웃과 마치 대가족처럼 지내고 있죠.
막내를 품에 안자,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집니다.
30년 넘게 해온 일로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모아신 씨.
이웃집과 천장이 뻥 뚫린 독특한 구조의 집에서 3대가 저녁 식사를 합니다.
-(아랍어)
-(해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화합을 중시했던 삶의 방식이 여전히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죠.
1000년의 세월을 넘어 벽 안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어릴 적부터 이 벽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이 벽은 우리 삶의 일부예요.
-(해설) 벽과 벽 사이의 공터는 가장 좋은 놀이터.
아이들은 여전히 이 벽 안의 세계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웁니다.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떠나 이곳의 벽은 모두를 끌어안았습니다.
-(해설) 이곳에서 벽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교류의 통로였죠.
모두가 함께 누리는 공공시설을 짓고 이주민에게는 문을 개방해 공존의 벽을 실현한 페스의 정신은 오늘날 더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1000년의 세월을 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했죠.
벽 안의 세계를 유지해 온 나라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폐쇄적인 벽이 아니라 개방된 벽이었다는 점이죠.
방어를 위해 지어진 벽의 문을 열면 공존과 교류의 통로로 바뀌어 더 큰 번영과 안정을 선사했습니다.
벽 안의 세계를 지키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무거운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훗날, 우리가 사는 벽 안의 세계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공존의 벽을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수렵 시대, 인류는 궂은 날씨와 사나운 동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왔습니다.
동굴은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최초의 경계였죠.
벽으로 둘러싸인 동굴 속에서 인류는 안전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거대한 벽화를 그렸습니다.
-선사시대에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던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설) 벽이 더 중요해진 것은 농경 문화의 발달로 인류가 정착하면서부터죠.
벽을 쌓는 것은 삶과 직결됐습니다.
돌로 쌓아 올린 계단식 밭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풍요로운 경작지가 됐죠.
종교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심리적 울타리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마니차 벽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죠.
오늘 세계의 벽은 인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 에워싸는 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벽은 2만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 베제르강 주변.
선사 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굴된 곳입니다.
깎아지는 절벽에, 크고 작은 구멍이 보이는데요.
바로 구석기 시대, 크로마뇽인들의 거주지, 동굴입니다.
이곳에서 2만여 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의 두개골과 수많은 부싯돌, 생활 도구 등이 발견됐습니다.
동굴의 발견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가 처음으로 생긴 순간이었습니다.
크로마뇽인들은 동굴 내부에서 외부의 사나운 짐승과 추위 등 궂은 날씨를 피할 수 있었죠.
벽으로 둘러싸인 동굴은 인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에워싸는 공간이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곳은 147개의 유적지와 25개의 벽화 동굴이 있습니다.
-(해설) 크로마뇽인 선사유적지로부터 25km 떨어진 몽티냑 마을.
이곳에 벽의 역사를 알려주는 라스코 동굴이 있습니다.
2만여 년 전 크로마뇽인이 생활했던 동굴은 1940년 우연히 발견됐는데요.
강아지를 찾아 나선 10대 소년 4명이 땅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동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높이 13m, 총길이 235m의 거대한 규모였죠.
외부와 단절된 깊고 어두운 동굴 내부.
선사시대 인류의 삶을 추정케 하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 겁니다.
동굴 천장에 그려진 다양한 동물 그림, 바로 동굴 벽화.
동물들은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라스코 동굴벽화에는 세 가지 동물이 99%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바로 들소와 사슴 그리고 말.
인류는 왜 동굴에 이 거대한 동굴벽화를 남겼을까요?
동굴에 들어오면서 외부와 내부라는 경계가 처음으로 생겨났고.
동굴은 인류를 보호하는, 에워싸는 공간이기도 했죠.
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동굴에서 인류는 거대한 동굴벽화를 그렸는데요.
이 들소 그림은 무려 5m로 실제 들소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벽화는 동굴의 낮은 벽이 아니라 가장 높은 천장에 집중돼 있죠.
인류는 왜 이토록 동굴 높은 곳에 실제보다 훨씬 크게 동물벽화를 그린 것일까요?
-(해설) 당시는 수렵시대. 인류는 동물을 사냥해서 생존해야 했죠.
그래서 동물은 사냥의 대상이자 매우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동굴벽화는 생존과 경외,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죠.
반면에 인류는 스스로를 아주 작게 그려놨는데요.
수렵시대, 동물에 비해 연약하고 작은 존재였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해설) 그렇다면 인류에게 이 깊고 어두운 동굴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동굴벽화는 어떤 기원이 담겨 있는 걸까요?
-(해설) 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동굴에서 인류는 거대한 동물을 그리면서 더 많이 사냥할 수 있기를.
그래서 더 오래 생존할 수 있기를.
그렇게 동굴은 희망을 기원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산지대인 안데스산맥. 이곳에는 벽이 만든 위대한 문명이 있습니다.
쿠스코 광장에는 15세기 잉카문명을 건설한 파차쿠티 황제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페루 국기와 함께 잉카제국의 깃발도 걸려 있죠.
모두 페루인들의 정체성이 잉카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파차쿠티 왕이 건설한 삭사이와만.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전입니다. 평균 높이는 7m.
무려 200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를 쌓아 올린 것입니다.
규모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석벽의 정교함과 견고함입니다.
현대 건축학자들도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로 거대한 돌들이 조각하듯 맞물려 있습니다.
-(해설) 거대한 석벽을 넘어서면 가장 고도가 높은 곳에 잉카인들이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신전 터가 드러납니다.
-(해설) 매년 6월, 페루에서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태양절 축제, 인티라미가 열립니다.
고산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는 그해 날씨가 무엇보다 중요했죠.
잉카인들은 태양신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했습니다.
-(해설) 잉카인들의 벽은 농업 기술의 진전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이곳은 잉카제국의 농업기술센터, 모라이입니다.
평지가 아닌 해발 2, 3000m. 고산지대에 맞는 농작물을 개발하던 곳이죠.
돌을 촘촘히 쌓아 올려 만들어진 계단식 밭.
높이는 2.5m, 폭은 4m. 각 층마다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계산해 과학적으로 농작물을 시험 재배한 것입니다.
-(해설) 계단식 밭은 층마다 기온이 달랐는데요.
맨 위층과 맨 아래층은 5도 이상 기온 차이가 났죠.
시험 재배된 농작물은 이듬해 한 계단씩 올려 경작했는데요.
서서히 추위에 적응시켜 고산지대에 맞는 농작물을 개발한 것이죠.
석벽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감자, 옥수수 등의 경작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해설) 석벽을 이용한 농작물 개발 기술 덕분에 15세기 잉카제국으로 발전했는데요.
페루와 에콰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해설) 해발 2400m의 고산 지대.
깎아지는 절벽에 세워진 도시, 마추픽추입니다.
15세기 잉카 제국이 건설한 성벽 도시인데요.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중 도시로 불립니다.
-지금 우리는 현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에 와 있습니다.
-(해설) 잉카의 성벽 도시 마추픽추는 모든 건축물을 오직 돌을 쌓아 올려 건설했는데요.
서민들이 살았던 집에 비해 귀족의 거주지 석벽이 조금 더 정교합니다.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 지대의 험준한 산악 지형.
어떻게 이 많은 돌을 쌓아서 도시를 건설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합니다.
마추픽추의 가장 높은 곳.
그리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습니다.
-(해설) 거대한 돌들이 마치 짜맞춘 듯 정교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잉카인들은 접착제 없이 석벽을 견고하게 쌓아 올렸죠.
벽을 쌓는 기술 덕분에 고산 지대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고 또한 도시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성벽 도시 앞에 층층이 펼쳐져 있는 계단.
바로 잉카인들이 농작물을 재배하던 밭입니다.
계단식 밭 역시 모두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서 만들었죠.
덕분에 고산 지대에서도 다양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뛰어난 석벽 기술이 잉카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했습니다.
계단식 밭에는 아래쪽에는 큰 돌, 그 위로 작은 돌, 그 위로 부엽토와 흙을 쌓아 올렸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산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고 필터처럼 아래로 스며듭니다.
-(해설) 계단식 논에서 재배한 옥수수와 감자는 돌로 지은 저장고, 콜카에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죠.
잉카인들이 고산지대에서 정착해 농경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돌로 쌓은 벽 덕분이었습니다.
-우리 잉카 문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위가 있고 벽이 있어서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벽이 있었기에 계단식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벽 덕분에 적의 침입을 막는 요새도 지을 수 있었고 벽이 있어서
곡식을 저장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잉카인들에게 벽은 기본 삶의 기본 바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해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600년이 흐른 지금도 잉카제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페루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카제국의 후예라고 생각하죠.
잉카의 전통복을 입고 태양절 축제를 계속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잉카인이라는 정체성은 페루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결속시켰죠.
잉카인이라는 정체성과 유대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태양신이여, 우리는 당신의 자식입니다.
여기 쿠스코 도시는 돌로 만들어졌고 매일매일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태양신.
-(해설) 잉카제국이 쌓아 올린 벽은 국가를 보호하는 경계만이 아니었습니다.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페루 사람들은 여전히 잉카제국의 후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발 고도 8000m. 산스크리트어로 눈이 사는 곳 히말라야.
히말라야산맥은 신들의 땅으로 불립니다.
척박한 고산지대. 깎아지는 절벽에 위험천만한 길을 달려.
다시 험준한 산맥의 계곡을 지나 도착한 곳.
네팔의 작은 마을 마낭입니다.
이곳에는 종교적 믿음이 그득합니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네팔은 2500년의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불교의 땅입니다.
마을 어귀 어디에나 쌓여 있는 마니석에는 옴 마니 반메 훔, 불교 경전이 새겨져 있습니다.
네팔은 특히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데요.
가장 상징적인 수행 도구가 있습니다.
어린 수도승들이 돌리고 있는 것 바로 긴 원통형의 마니차입니다.
불교 경전을 넣어둔 마니차를 돌리면 그만큼 부처의 자비를 받아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마니차는 이곳 사람들에게 종교적 울타리라 할 수 있죠.
-(해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불교 사원 보우더나트.
오전 5시, 이른 새벽부터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데요.
하루를 시작하기 전 기도를 하기 위해서죠.
매일 불교 사원을 찾아 참배하는 것은 네팔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이 자신을 에워싸면서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이곳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죠.
티베트 사원은 둥근 원형으로 에워싸는 형태인데요.
거대한 불탑, 스투파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모두 마니차를 돌리는데요.
불교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까지 수십 개의 마니차를 돌리며 부처님의 자비를 기원하고 있죠.
네팔 사람들에게 마니차는 믿음과 희망을 돌리는 것입니다.
보우더나트 사원의 켄포 스님은 불교에 입적한 지 25년이 넘은 라마라 불리는 큰 스님이십니다.
-(해설) 마니차를 돌리며 외우는 특별한 기도문이 있는데요.
바로 옴 마니 반메 훔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주문인데요.
옴 마니 반메 훔은 온 우주에 충만한 지혜와 자비가 중생들에게 퍼진다는
뜻으로 이 주문을 외우면 번뇌와 죄가 소멸하고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합니다.
-(해설) 부처님께 기도하고 법문을 공부하는 승려들의 수련 공간.
이곳에는 티베트 불교의 상징인 큰 스승, 라마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요.
특히 14대 달라이 라마는 세계적으로 비폭력, 평화 운동을 펼치고 계신 분입니다.
한 개인이나 한 국가를 위한 종교가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불교.
달라이 라마로부터 어린 동자승까지 티베트 불교의 정신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믿음, 이것은 2500년 동안 변치않고 이어져 온 티베트 불교의 뿌리 깊은 정신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희망의 마니차를 돌립니다.
티베트 불교만이 아니라 종교는 세상 모든 이들을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이름이 다를 뿐 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해왔습니다.
즉 나와 당신으로 나누지 않고 우리로 연결하는 것이죠.
-(해설) 누구나 마음에 부처가 있고 부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네팔은 문맹률이 높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4분의 1만이 글을 읽을 수 있죠.
신들의 땅 히말라야에서 평생을 살아온 소남 체테 씨.
그녀의 하루는 부처님께 정갈한 물을 올리고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티베트 불교 의식인 향을 피우고 집 마당을 나와서까지 기도는 계속됩니다.
마을 전체를 다니며 기도를 올립니다.
수십 개의 마니차를 돌리며 계속해서 옴마니 반메 훔, 주문을 외우는데요.
글을 몰라 불교 경전을 읽지 못해도 마니차를 돌리면 누구나 공덕을 쌓을 수 있죠.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한 불교, 마니차에 담긴 의미입니다.
-(해설) 우리 모두를 위한 믿음. 티베트 불교는 나와 당신으로 나누지 않죠.
우리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500년 동안 티베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모로코의 천년 고도 페스. 벽이 어떻게 사람을 이어줄 수 있을까.
여러 민족이 함께 운명을 꽃 피운 이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죠.
본래 이 땅에는 베르베르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이슬람 왕좌가 세워진 건 8세기 말.
침략자였던 이그리스 왕은 토착민의 지지를 얻어 왕국을 세웠죠.
구시가지인 올드페스에는 벽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세워진 아랍 왕조가 이슬람권 최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벽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해설)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높이 8m의 성벽에는 문이 있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출입구가 되기도 했죠.
개폐가 가능한 벽은 관용과 엄격함의 두 얼굴을 가졌습니다.
누구든 이곳에 와서 살 수 있었지만, 범죄자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죠.
성벽으로 둘러싸인 올드페스에는 여러 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블루게이트는 가장 유명한 출입구죠.
이 문을 통과하는 비좁은 골목이 얽히고 설킨 중세의 미로 도시를 마주하게 됩니다.
실핏줄처럼 얽힌 벽은 1만 개의 골목을 만들었고 그렇게 세계 최대의 미로 도시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이 비좁은 벽은 복잡한 구조 때문에 침략자들이 길을 잃게 만들곤 했죠.
막다른 골목에서 궁지에 몰린 적을 방어한다고 해서 붙여진 흥미로운 이름도 있습니다.
-(해설) 다닥다닥 벌집처럼 붙은 벽은 질식 골목의 적을 몰아붙이는 반면 이 길을 꿰고 있는 아군에게는 유리한 고지가 되어 주었죠.
-(해설) 1000년이 넘은 벽에서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페스.
8세기 말에 세워진 이 도시는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했죠.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세계 최초의 대학이 설립됐습니다.
859년에 세워진 알 카라 위인 대학.
서양의 가장 오래된 대학보다 200년이나 앞서 세워졌죠.
-(해설) 모스크 안에 자리한 이 대학은 수많은 석학을 배출했고 여전히 이슬람학, 천문학 등을 배우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이곳을 찾습니다.
-(해설) 무질서 속의 질서란 이런 모습일까요?
이곳의 벽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삶을 보장해 주었죠.
-(해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페스가 세워진 1200년 전부터 일관되어 온 철학입니다.
이슬람 왕조가 세운 나라였지만 토착민은 물론이고 이주해 온 유대인까지도 이곳에 정착해 살 수 있었죠.
단, 부를 자랑하는 건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 크기와 외관을 비슷하게 유지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했죠.
벽을 화합의 통로로 이용한 이 중세 도시의 놀라운 점은 여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팔레트를 연상하게 하는 이곳은 전통 방식 그대로 천연 염색을 하는 가죽 공장이죠.
이곳에는 여전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10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젖소 가죽과 씨름 중인 이 남성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일을 배웠습니다.
-(해설) 어느덧 아버지가 된 그의 하루는 생가죽을 세척하는 일로 시작되죠.
생가죽은 여러 번 세척을 거치는데 재래식 세탁기를 이용합니다.
선조들이 이용했던 물레방아 형태의 오래된 세탁기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죠.
중세 방식 그대로 염색하는 일은 고된 과정의 연속입니다.
가죽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강한 산성인 비둘기 배설물에 담가야 하는데 그 악취는 상상을 초월하죠.
-(해설) 코를 찌르는 악취에도 오롯이 작업에 열중인 사람들.
염색 공장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는 건 그들의 땀과 열정이었습니다.
퇴근길 모아신 씨의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미로 골목에 사는 그는 이웃의 아이를 딸처럼 반가워하는데요.
공동 출입구를 거쳐 다시 자신의 집 문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보니 이웃과 마치 대가족처럼 지내고 있죠.
막내를 품에 안자,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집니다.
30년 넘게 해온 일로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모아신 씨.
이웃집과 천장이 뻥 뚫린 독특한 구조의 집에서 3대가 저녁 식사를 합니다.
-(아랍어)
-(해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화합을 중시했던 삶의 방식이 여전히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죠.
1000년의 세월을 넘어 벽 안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어릴 적부터 이 벽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이 벽은 우리 삶의 일부예요.
-(해설) 벽과 벽 사이의 공터는 가장 좋은 놀이터.
아이들은 여전히 이 벽 안의 세계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웁니다.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떠나 이곳의 벽은 모두를 끌어안았습니다.
-(해설) 이곳에서 벽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교류의 통로였죠.
모두가 함께 누리는 공공시설을 짓고 이주민에게는 문을 개방해 공존의 벽을 실현한 페스의 정신은 오늘날 더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1000년의 세월을 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했죠.
벽 안의 세계를 유지해 온 나라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폐쇄적인 벽이 아니라 개방된 벽이었다는 점이죠.
방어를 위해 지어진 벽의 문을 열면 공존과 교류의 통로로 바뀌어 더 큰 번영과 안정을 선사했습니다.
벽 안의 세계를 지키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무거운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훗날, 우리가 사는 벽 안의 세계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공존의 벽을 만들기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