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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오래된 미래, 대구 근대건축의 발견

등록일 : 2024-01-29 14:59:10.0
조회수 : 130
-(해설) 여기 100여 년의 세월을 건너온 건축물이 있다.
근대화 시기 낯설고도 놀라웠던 이 서양식 건물들은 당대 시대 변화의
상징이었고 도시의 변화 속에 독특한 형태로 진화하면서 이제 그 자체로
도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역사가 되었다.
역사가 된 건축은 하나의 나침반이다.
이 오래된 건물들의 향방에 우리 도시의 미래가 있다.
-용서하시고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함께) 아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함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해설) 1902년 대구에 등장한 최초의 서양식 성당.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한 계산성당은 지난 120여 년간 수많은
시민들의 간절함 염원을 담아온 대구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이다.
낯선 이국땅에 와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수도자에게 성당 건축는 신의 존재와 언어를 번역해서 공간의 체험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처음 지었던 한옥식 목조 성당이 완공된 지 얼마 안 돼 화제로 잿더미가 된 후,
프랑스인 로베르 신부는 불에 강한 벽돌식 설계도를 입수하고 새로운 희망을 설계했다.
당시 계산성당 신자들은 인근에 벽돌 공장을 짓고 벽돌 수만 장을 직접 찍어냈다.
그렇게 착공 1년 만에 대구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 완성됐다.
김수환 추기경이 벌 받은 곳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린 장소.
계산성당은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해설) 그저 무심히 보아 넘긴 벽돌 한 장에 무게와 가치.
그것에 주목할 수 있을 때 근대건축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아치도 지금 보시면 기둥 간격하고 아치 크기에.
-(해설) 무거운 벽돌을 쌓아 천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중을 견딜 수 있는설계가 필수다.
아치 구조는 지붕이 누르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켜 웅장한 건축물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하는데 이 아치를 연속적으로 배열해 반원형 터널 모양으로 확장한 것을 볼트라고 한다.
로마에서 시작돼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기술은 화제에 취약한
목조 천장을 대체할 수 있게 한 혁신적인 공법으로 이후 웅장한 교회 건축이
발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해설) 벽돌도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 두 종류가 쓰였다.
내부 기둥과 천장 뼈대에 주로 쓰인 회색 벽돌은 성당을 지탱하는 구조체인 동시에 장식을 겸하고 있다.
-(해설) 이렇게 형성된 길고 높은 회랑은 미사를 집전하는 재단을 향해 나아간다.
성전을 더욱 신비롭고 엄숙한 공간으로 연출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당시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으로써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색찬란한 빛으로 신의 전능함을 눈부시게 보여주고 있다.
서울 명당 성당과 평양 관후리 성당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세워진 서양식
성당, 성당 공사를 직접 지휘했던 로베르 신부는 당시 한국인 벽돌 기술자를 구할
수 없어 명동 성동을 건축했던 중국인 석공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화재로 첫 성전을 잃은 신부에게 몇백 년을 버틸 견고한 벽돌 성당을 짓는 일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생일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특히 오랜 비바람을 견뎌야 하는 외벽은 벽돌 한 장, 한 장 허투루 쌓은 것이 없다.
-(해설) 120여 년 전.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 초가집이 대부분이던 대구에서 홀로 우뚝 솟은
계산 성당은 대구 부민들에게 경이로운 충격이었다.
성당은 그 자체로 신의 존재를 일깨우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선교 도구가 되었다.
대구 근대 건축의 시작이었다.
1900년대 초.
대구의 몽마르트르로 이름난 청라언덕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새로운 근대화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시신을 묻던 곳이라 이방인들도 별다른 텃새 없이 집을 짓던 곳.
선교사 스윗즈도 그렇게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옛 기록을 보면 주택 지을 때 벽돌은.
-(해설) 기초로 쌓은 이 바닥돌은 1907년 대구 읍성이 철거될 때 나온 성돌이다.
낯선 이국의 선교사는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 허물어진 우리의 역사를 위로라도
하듯 그 기반 위에 자신의 집을 지었다.
우리의 도시가 어떤 근대화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스윗즈 주택만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바로 우리의 전통 방식으로 얹은 기와지붕이다.
청라언덕에는 총 3채의 선교사 주택이 보존되어 있는데 다른 선교사들이 살던
챔니스 주택이나 블레어 주택은 당시 미국 방식 그대로 아스팔트 싱글 자재로 지붕을 얹었다.
무게가 가벼워 시공이 간편할 뿐만 아니라 가격도 저렴하고 관리도 쉬운 장점.
어쩌면 거기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도 더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선교사 스윗즈는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해설) 미국식 설계대로 경사도가 심한 박공 지붕 모양에 굴뚝까지 있는
상황이라 여기 기와를 얹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윗츠 선교사는 층층이 아름다운 한식 기와로 지붕을 장식했다.
-(해설) 낯선 문화가 새롭게 이식되는 근대화 시기.
일상의 삶을 담는 주택 건축에서는 이곳에 스며들고 싶었던 100년 이방인의
이틋한 마음이 우리의 전통과 결합해 아름다운 유산을 남겼다.
그렇게 우리의 도시 풍경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종교를 통해 시작된 근대 건축은 대구의 교육 시설에도 유산을 남겼다.
1908년, 대구 최초로 들어선 서양식 교사 계성학교.
무려 115년째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해설) 오래된 교실은 이곳이 간식한 역사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교과서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무려 7만 명의 졸업생이 이 교과서 안에 머물다 갔다.
특히 이곳에서 신식 학문을 배웠던 초기 계성학교 선배들은 개화군으로 불리며
근대화를 견인했던 선각자들이었다.
학교의 역사는 모두의 자부심이 되었다.
학교 건물이 이렇게 건재하게 남아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내심 깊은 노동과 탁월한 기술 덕분이었다.
여기 보시면.
-(해설) 최근 뉴진스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입소문을 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대구의 자랑.
-(해설) 요즘은 보기 힘든 섬세한 시공 기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분해서 황동 줄눈으로 해놓고 갈아낸 거죠.
-(해설) 허물고 새로 지었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당시의 귀한 공법들.
건축가에게는 마냥 행복한 보물찾기가 펼쳐진다.
-(해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은 이후 115년의 세월을 계산했었을까?
-(해설) 1900년대 초 자신의 자택을 임시 학교로 사용했던 선교사 아담스는
1908년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를 동원해 영남 지역 최초의 양옥 학교를 건립했다.
지금도 여전히 교무실로 사용하는 계성중학교 아담스관이다.
이곳 지하실은 대구 3.1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대구 독립운동만세의 주역들은 아담스관 지하실에 모여 학교 등사 기계를 사용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
대구에서 3.1운동으로 형을 산 사람 중 약 60%가 개성학교 재학생과 전, 현직 교사들이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이 공간은 우리 근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건축이 남아 있는 한 역사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
허물어버리기 쉽지만 한 번 허물면 되살리기 어려운 도시의 역사.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도 근대 건축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다.
대구의 근현대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대구근대역사관.
2011년 개관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 수탈을 위해 특수 은행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한때는한 금고였던 이곳에서 사진 엽서에 담긴 식민지 대구의 근대 풍경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이제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도시의 아픔과 과거를 보관하는 역사의 금고가 된 것이다.
1930년대 유럽의 근대 건축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당시 식민지에 대한 권위의 상징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웅장한 은행을 건립했다.
이 시기 대구 도심 곳곳에 일본 자본이 침투하면서 건축 자재와 공법이
다양해졌고 대구의 풍경도 급속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된 이 건물이 그 표본인 셈이다.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된 이 건물의 상부 벽은 당시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흰색 타일을 붙였다.
독일에서 대구까지 8215km의 항해 끝에 90년을 지탱해 온 타일이다.
-(해설) 광복 후 한국 산업은행이 되면서 내부를 개조했지만 곳곳에 원형이 남아 있다.
실제 현장에서 덩어리로 큰, 물론 세부적으로 내부의 이런.
-(해설) 한때는 조선 상인들을 수탈하는 거점이었지만 광복 후에는 조국 근대화에 기여한 공간.
역사의 고충을 겪으면서 시대에 따라 이름을 바꿔온 이 건물처럼 대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 시간의 연속성이 공간적으로 누적되어 온 도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누적된 공간에 대한 기억은 어떨까.
하나의 공간이 사라지고 다시 탄생할 때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2013년 새롭게 문을 연 고품격 클래식 전문 공연장.
지금 이곳의 이름은 대구콘서트하우스다.
그리고 한때는 대구시민회관이었으며. 시간을 더 거슬러 가면 대구공회당이었다.
이 모든 기억은 바로 이곳, 한 공간에서 출발한다.
-지금 저는 광장에 앉아있는데요.
-(해설) 1920년대 대구역 동쪽으로 일본 상품의 전시와 판매를 위한 상품 진열소가 들어섰다.
이후 상공 정영환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당시 엑스코와 같은 역할들을 수행했다.
-그러면 서쪽에도 뭐가 있어야 하겠죠?
-(해설) 1931년 대구에도 공회당이 건립됐다.
대구역 서쪽에 들어선 이 건물은 지하부터 옥상 정원까지 5층 규모, 높이
19m로 설계 규모나 건축미에 있어 조선 제일을 자랑하며 순식간에 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됐다.
일제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발휘된 기술력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관에서 주도하는 행사나 모임, 교육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인 홀 외에도 다양한 집회실이
있었고 그랜드 피아노와 영사기까지 갖추어 크고 작은 모든 문화 행사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그 시절 공회당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늘 새로운 볼거리와 체험이 넘쳐났고 대구 사람들은 공회당에서 신문물과 신문화를 마음껏 흡수했다.
집이 공회당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무용 같은 것을 보러 다녔습니다.
다리로 탬버린을 치고 두드리며 춤을 추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대단히 감동을 했고 그런 것을 보러 다녔지요.
부모님한테 보러 가고 싶다고 하면 얼마 전에도 갔다 왔는데 또 가고 싶냐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요.
사이쇼키라고 압니까?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
그 무렵에는 이시이 바쿠라든지 그 문하생인 이시이 사자나미 등의 무용이
자주 공연이 되었고 그런 것을 보러 다녔습니다.
-(해설)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과 세련된 내부 공간에서 보여주는 모든 콘텐츠들은 자연스레 식민지 조선인들을 유혹했다.
일제강점기 지역마다 들어섰던 공회당은 고도로 계산된 문화 통치의 거점이었지만
워낙에 잘 만들어졌다 보니 해방 이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KBS 방송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전히 접근성 좋은 시민들의 문화 공간이자 광장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도시의 기능들을 외곽으로 이동시키게 되는데요.
중앙로를 연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해설) 대구 북쪽이 확장되고 동시에 서쪽 공회당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대구시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인호에게 공회당을 대체할 새로운 건물의 설계를 맡겼다.
그리고 1975년 대구시민회관이 탄생했다.
대구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본 대구의 상징.
시민회관은 대구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집단 기억이다.
가난했던 시절.
일상만은 풍요롭게 바꾸어주었던 이곳에서의 기억이 오늘의 대구 시민들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설)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고 무너지고 태어난다.
근대에서 현대로 흐르는 그 격동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본의 개발 논리에
밀려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져 버린 수많은, 보석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건축물이 사라질 때 그 속에서 함께 한우리의 기억도 무너진다.
그래서 한 장소를 꿋꿋이 지켜온 이 존재들이 더욱더 소중한 것이다.
그랬더니 시민회관에 와 있다고 하더라고요, 콘서트하우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1931년에 공회당이 만들어지고 그다음에 75년에 시민회관으로 이름이 바뀌고
2013년도에 와서 콘서트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도.
거기서 시작한 요소들의 근본을 잃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설) 건축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다.
시대의 요청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한다.
하지만 형태는 변해도 결코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
그 공간의 가치를 지켜가는 한 우리의 행복했던 기억도 여전히 이곳에 건재하다.
대구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
대구 상권의 중심인 만큼 시시각각 그 모습이 달라지는 곳이다.
지금도 여전히 만남의 장소로 손꼽히는 이곳은 한일극장 앞이라는 한 단어로 대구의 고유명사가 된 곳이다.
수십 년 전부터 계속해서 대구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인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으뜸가는 호화 건물로 이름난 영화관이 있던 곳이다.
1938년 일본인에 의해서 대구 키네마 구락부라는 이름으로 개관된 한일극장.
당시 극장은 영화뿐 아니라 연극이나 판소리 같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 활동이 펼쳐지던 최고의 대중 오락 공간이었다.
근대적 문화 공간이 전무했던 동성로에 들어선 대구 키네마 구락부.
극장도 극장이지만 건축물 그 자체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
서양의 건축 양식과 현대 건축을 결합시킨 한일극장은 건물이 완공되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마침내 1938년 이곳에 들어섰던 조선 제일의 호화 건물.
지금으로부터 꼭 85년 전의 일이었다.
건축적으로나 그리고 대구라는 도시 역사 전체 차원으로 보나.
이 극장은 국립극장으로도 활용이 됐었어요.
디자인적 구조적 건축 기술적 특징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설) 당시 극장은 모더니즘을 건축 형태로 구현해 냈다.
-여러분은 이제 1937년에 이 극장이 개관했을 때 로비로 들어와 계신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으리으리하고 반짝반짝하게 빛이 나는 도기 타일로 마감되어 있는 벽면의 모습을 보시게 됩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있고요.
-(해설) 이후 이 화려한 극장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전쟁 그리고 피란.
문화 시설은 꿈도 꿀 수 없던 열악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한일극장은 뜻하지
않게 대한민국의 문화 중심에 서게 된다.
1953년 한국 전쟁으로 무너진 서울 국립중앙극장을 대신해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된 것이다.
뛰어난 시설 덕분이었다.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되면서 무대가 확장되고 좌석도 1300석 규모로 늘어났다.
4년 뒤 서울의 국립극장이 재개관하기까지 한일극장은 대한민국이
가장 힘든 순간 문화예술로 희망을 보여주던 귀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구는 도심지에 이런 저밀도의 단독 극장을
두기에는 너무 벅찬 경제 성장에 맞닥트렸다.
-한일극장이라는 규모가 감당하기에 동성로의 성장은 훨씬 더 거대하고
빠르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는 이 복합시설과 극장이 결합된 방식으로 다시 개발이 되게 되죠.
-(해설) 과연 우리 도시는 발전한 것일까.
오래된 극장 하나 품지 못하는 도시가 과연 우리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대기업이 운영하는 복합 영화관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한일극장 앞으로 불리는 기억 속의 공간.
놓치기 아까운 이 기억들이 우리에게 박제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역할로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건축물 덕분이지 않을까.
그래서 한 공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기 가까스로 철거 위기를 면한 근대 건축물이 있다.
여기가 일종의 시내의 변경으로서 향후 대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조망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의 역할도 했다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읍성이었던 대구와 근대 도시로서 대구부였던 시기의 요소들을 전부 다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해설) 1923년 서점에서 출발한 무영당은 1937년 대구 최초의 민족자본 백화점으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절에도 일본인이 세운 이비시아 백화점이나 미나카이
백화점과 함께 대구 3대 백화점으로 손꼽히며 당당히 어깨를 겨룬 조선인 백화점.
그 중심에 개성상인 출신 이근무가 있다.
무영당은 그 이름대로 무성한 나무처럼 번창했다.
이근무 씨는 일본의 치하에 있으면서도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긍심을 이런 상업
경제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많았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보면.
-(해설) 당시 무영당은 시인 이상화,
화가 이인성, 아동문학가 윤복진과 작곡가 박태준까지 쟁쟁한 청년
작가들이 문화를 향유하던 공간이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함께 동요집을 출판하고 전시회도 열 수 있었던 예술인들의 사랑방.
이근무의 지원을 받던 화가 이인성이 1931년 그린 작품 뒷면에는 도화지에
붙였던 무영당 스티커가 지금도 남아 있다.
1920년대, 10평 남짓의 한옥 문방구로 문을 연 무영당은 이후 2층 목조건물에
대구 최대 서점으로 확장하게 된다.
하지만 화재로 목조건물이 소실되자 1936년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새롭게
신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1937년 개점과 동시에 매일 평균 5000명의 손님이 찾던 곳이었지만 이후
1946년부터는 여러 차례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무영당의 역사는 서서히 잊혀 갔다.
건물의 주인과 용도가 바뀌면서 내부 구조나 형태도 조금씩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20년 건물주가 이 건물을 철거하기 직전 대구시는 극적으로 건물 매입에 성공했다.
자칫 우리 도시에서 사라질 뻔했던 무영당의 역사와 문화가 기어코
대구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곳은 청년 예술가들이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을 그 자체로 남긴다면 그 건물의 가치는 잘 남아있게 될까요?
건축은 그 자체가 도시를 구성하는 구성 요소이자 도시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 인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보면 박제시키는, 시체를 전시시키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는 면적 보존과 활용이라는 측면들을,
-(해설) 각각의 건축물이 하나의 점이라면, 건물 사이를 오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이 되고, 그 선과 선이 만나 면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과거와 만나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일 것이다.
-(해설) 약 100년의 시간이 이렇게 겹친다.
오미야 식료품이라는 가게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그 당시 아이들의 공통된 기억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100년의 시간을 거쳐온 건물이잖아요.
-(해설) 이곳은 1년 전 오늘과 100년 전 오늘이 하루하루 수천, 수만 겹으로 쌓여 있다.
밀도 높은 공통된 기억은 우리 개개인의 정체성이자 도시의 정체성이다.
대구의 시공간을 압축해서 보는 듯한 압도감을 주기 때문이에요.
저는 여기서 대구라는 도시가 생로병사를 겪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대구는 또 어떻게 바뀔까요?
-(해설) 도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시시각각 변화한다.
건축과 건축이 만든 공간.
이 공간 사이 축적된 시간을 읽는 일은 우리가 도시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자
오늘의 시간을 더해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몇 년 후 어떤 도시를 바라보게 될까?
우리가 가닿은 그곳에서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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