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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스페셜 - 1부 초원에 부는 바람
등록일 : 2023-11-15 10:49:05.0
조회수 : 478
-(해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제국이자 유목 제국인 몽골의 옛 수도 카라코룸.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몽골 제국이지만 영화의 시절이 워낙 짧았기에
카라코룸이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시기는 30여 년에 미치지 못한다.
-(해설) 천하를 호령하던 제국의 심장,카라코룸.
화려했던 도시의 영광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다.
몽골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이곳을
수도로 지정했지만, 그의 후손에 의해
카라코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설) 13세기 칭기즈칸이 이끄는
군대는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동유럽을 대부분 점령했다.
정복한 땅은 동쪽으로 중국, 만주.
서쪽으로는 유럽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였다.
최고의 군주로 남은 칭기즈칸.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쫓아
떠나보자.
현재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161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몽골 인구의 거의 절반가량이 살고 있는 몽골 최대 도시.
이상 기후와 환경 파괴 등으로 유목 생활이 힘들어진 유목민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 중심의 수흐바타르 광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흔히 칭기즈칸 광장이라고 불린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몽골의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현재 수흐바타르 광장은 울란바토르 최고의 랜드마크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각종 국가 행사나 문화 행사, 웨딩 사진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 중앙에는 칭기즈칸 동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오고타이, 우측에는 쿠빌라이 동상이 버티고 있다.
몽골에서 칭기즈칸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다.
사실 몽골 제국의 위세가 워낙 컸기에 유럽과 이슬람권에서는 칭기즈칸을
학살자나 무자비한 정복자로 보는 등 시선이 갈렸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칭기즈칸의 수수께끼 가운데 일부를 해독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바로 13세기 몽골의 발음을 옮겨 놓은, 즉 몽골 비사를 판독하면서 칭기즈칸의 위상은 부활하게 된다.
몽골 비사와 함께 부활하는 칭기즈칸.
지난 2009년부터 건립 중인 칭기즈칸 박물관에서도 그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몽골 최대 규모의 박물관으로 칭기즈칸 탄생 86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22년 10월 개관했다.
-(해설) 200년 이상에 걸친 청나라의 지배와 이후 소련의 영향권에서 살아 온
70년 동안 몽골인들에게 칭기즈칸을 거론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금기였다.
잊혀졌던 영웅 칭기즈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1990년부터였다.
국민 통합을 위해 민족의 영웅 칭기즈칸의 동상과 비석이 세워지고 관련 유물 조사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칭기즈칸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은 2000년 전 흉노 시대 이전의 유물을 비롯해 총 1만여 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 90% 이상이 진품이다.
-(몽골어)
-(해설) 헨티 다달솜 칭기즈칸의 탄생지이다.
헨티주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북쪽 끝에 위치한 다달솜.
초원뿐이지만 칭기즈칸의 탄생지이자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처음 일으킨
곳으로 몽골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자 칭기즈칸의 탄생지를 알리는 돌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의 탄생지에 세워진 비석치고는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마음이 이 돌 비석에 모아져 있다.
-(해설) 비석 주변으로 조그마한 오보.
즉 우리나라의 서낭당과 유사한 돌무더기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높이 1.3m, 폭 1m의 정도의 비석에는 칭기즈칸이 물소 해인
1162년 10월 16일 여기서 태어나다라는 글이 전통 몽골문으로 새겨져 있다.
비석이 서 있는 곳은 벌덕이라는 이름 대로 구릉의 정상이었다.
-(해설) 몽골의 한 부족인 보르지기드의 부족장이었던
아버지 예수게이의 죽음 이후 테무친의 삶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몽골 초원의 세력들은 부계 집단 위주로 모여 살았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자 친척들은 어린 테무친과 가족들을 버리고 테무친은 포로가 되어 수년간
처참한 노예 생활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초원의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부족의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
-(해설)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 다달솜을 가로지르는 오논강.
이곳은 몽골 대초원의 젖줄이자 유목민들의 생명줄로 불린다.
가축이 먹을 만한 물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사는 유목 생활에서 가장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오논강이 초기 몽골의 중심지였던 이유다.
칭기즈칸 제국도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데 이후 통일 국가를 수립할 때까지의 모든 위업이 이 오논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지금도 오논강 주변에는 많은 몽골인이 전통 방식으로 가축을 기르며 유목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해설)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몽골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졌던 이곳
오논강에서 1206년 44세의 칭기즈칸은 몽골 칸의 자리에 올라 대몽골 제국의 서막을 열었다.
중세 동서양의 문명과 역사에 파란을 불러온 칭기즈칸과 대몽골 제국.
지난 1000년의 세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칭기즈칸.
이 땅에 이름을 새기는 순간이었다.
-(해설) 몽골 정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헨티 다달솜 언덕을
탄생지로 선포했으나 실제 탄생지는 다달솜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이곳 오논강가 빈데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몽골 정부가 선포한 다달솜의 언덕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해설) 자라서 몽골을 통일할 어린 테무친이 오논강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하며 오르혼강을 건넜다.
이 일대에는 피뿌리풀꽃이 온 초원과 언덕을 뒤덮듯 사방에서 바람이불어온다.
칭기즈칸의 또 다른 탄생지로 알려진 헨티 빈데르솜 가는 길.
빈데르솜은 몽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오논강이 흐르는 이곳은 1206년 부족 연맹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추대된 곳이기 때문이다.
케레이트족, 메르키트족, 타타르족, 나이만족 등 초원의 모든 부족을 물리친
후 테무친은 1206년 자신의 재위를 인정할 부족 회의를 소집했다.
고난과 영광이 새겨진 이 강변에서 초원이 하나로 통합된 것을 기념하고
새로운 체제를 알리는 쿠릴타이가 열린 것이다.
-(해설) 대칸의 자리에 오른 칭기즈칸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하고 구성원의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일이었다.
어느 부족 출신인지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로와 능력에 의해서 지휘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대회의인 쿠릴타이가 열린 광장 중앙에는 9개의 꼬리가 달린 흰 깃발이 세워졌다.
몽골족 아홉 분파의 영혼을 상징하는 곳으로 몽골족의 완전한 통합을 의미한다.
이 대회의에서 칭기즈칸은 대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대몽골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해설) 그토록 많은 파괴와 학살을 치른 몽골의 정복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헨티에서 바가노르로 가는 길.
칭기즈칸이 수백, 수천km를 행군하면서 세계를 정복했던 시기.
전쟁 중 많은 부족이 휴식을 취했던 여름 행궁지 터다.
칭기즈칸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여름 행궁지와 겨울 행궁지를 건설했다.
칭기즈칸시대에 대 몽골 제국은 수도가 없어 그가 머무는 곳이 바로 몽골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칭기즈칸은 대칸이 된 후 주로 이곳 사아리 케에르 평온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가을에는 카르토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해설) 칭기즈칸의 여름 행궁지터.
주변에 몹시 바람이 불었다.
사실 몽골 초원은 바람의 고향처럼 매일 거센 바람이 분다.
초원에는 평온함 뒤에 평온함이 오고, 위험뒤에는 또다른 위험이 있다라는
말처럼 몽골은 바람의 땅이 되었다.
바로 그 땅에서 칭기즈칸의 유산이 비롯된 것이다.
몽골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농사또한 짓지 못하고
풀또한 빨리 자라지 않는다.
유목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칭기즈칸의 시대.
몽골 유목민의 삶은 정복전쟁을 통해서 차츰 정주 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칭기즈칸의 또 다른 행궁지로 향한다.
겨울 행궁지 허더우 아랄로 가는 길.
이곳은 칭기즈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몽골 비사 성립 75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과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인 예켸 아우로비가 위치한 세계적인 역사 관광지이다.
1990년에 세워진 2m 높이의 기념비에는 칭기스칸의 전신상이 새겨져 있다.
-(해설)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 예켸 아우로그는 후방을 총괄하는 이동 병참
기지라는 뜻으로 칭기즈칸의 호라즘 원정때부터 이 명칭이 등장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붕괴 후 이곳은 전설의 땅으로 남았다.
이곳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 몽골과 일본이
공동조사단을 출범시키면서다.
-(해설) 지난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발굴한 결과 3개의 유적층이 발견되었다.
맨 아래층에서는 칭기즈칸 시대의 유적.
중간층에서는 오고타이 시대의 유적, 그리고 맨 위층에서는 라마교 사원의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몽골 정부는 행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중심으로 보존중이다.
칭기즈칸의 사후 허더 아랄은 대칸의 등극 장소로 애용되었다.
허더 아랄에는 청동기 시대의 사슴돌, 돌궐석인상 등 많은 역사 유적이 존재한다.
몽골대학교와 디지털복원전문회사인 디지털 솔루션은 과거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의 모습을 디지털로 복원했다.
몽골 정부는 허우 아랄 즉,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지에서 발견된 유물에 주목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유물이 극소수만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번 유물 발견으로 인해
칭기즈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조명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됐다.
대초원을 말을 타고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 독특한 문화와 그들의
생활방식을 통해 몽골제국의 문화를 들여다보고 특히 12세기에서 13세기의 유물은
칭기즈칸이 한창 세력을 확장하던 때와 일치하므로 과거 몽골 왕족의 전성기를 유추하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해설) 유족발굴을 통해 발견된 칭기즈칸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겨울행궁지박물관.
과거 12,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청나라 시기 몽골 인장을 비롯해 화살촉과 동물 뼈 등 행궁터에서 출토된 많은 역사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군은 거짓말처럼 무덤 하나 발견되지 않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간 신의 군대처럼 기념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이 겨울행궁박물관은 칭기즈칸의 과거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다.
몽골의 초원은 잠시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넓은 초원 탓에 어디서든 길이 끊기고 웅덩이에 빠지기 일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길을 시속 70km 이상으로 달리다 보면 초원 곳곳에서 사고 차량을 볼 수 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눈앞에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광활한 땅.
이 초원 위를 수없이 내달렸을 칭기즈칸에게 이 길은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열린 문이었다.
바가노르를 뒤로 하고 헨티 바양골로 가는 길.
헨티 바양골은 칭기즈칸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만난 곳이다.
한갈호수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곳 호수에는 칭기즈칸의 야망의 바람보다 비원의 바람이 분다.
그리고 이 바람은 좌절의 바람으로 끝났다.
칭기즈칸의 동지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자무카.
칭기즈칸과 숙명적이라 할 정도로 애증의 길을 걸어야 했던 자무카는 비범한 재능과 함께
끈질긴 인내까지 겸비한 초원의 풍운아였다.
자무카와 칭기즈칸의 첫 인연은 칭기즈칸이 11살 때 서로 동물의 뼈를 주고받으며 만났다.
-(해설) 칭기즈칸과 자무카가 어린 시절 같이했던 장소.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 과정에서 최대의 경쟁자로 등장한 자무카.
그는 칭기즈칸에 버금가는 초원의 영웅으로 만일 칭기즈칸이 없었다면 몽골 초원을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칭기즈칸과 애증이 교차한 혈 투를 벌였던 자무카는 1205년 자신의 동지들에 의해 칭기즈칸에게 잡혀 왔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교수형에 처했다.
칭기즈칸과 자무카의 초원에 세워진 비석. 그 비문은 이렇다.
아주 옛날부터 테무진과 자무카 둘의 전설이 있는데 두 안다의 우정의 징표로 이 오보를 만들어
성스러운 우정을 상징한다.
몽골 문화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사슴돌이다.
주로 상부에
사슴 모양이 형상화된 조각상인데 몽골 전역에 약 1500여 개가 존재한다.
이 석상은 몽골에서부터 동유럽 지역까지 분포된
매우 흥미로운 유물이다.
-(해설) 사슴돌 문양은 한국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몽골의 암각화에 있는 별자리들이 한국의 암각화에서 발견됐기 때문인데,
이는 두 나라의 문화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몽골어)
-(해설) 푸른 호수란 뜻의 후흐노르.
테무진에게 제2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그가 부족들에 의해 칭기즈칸으로 추대된 곳이다.
몽골족이 자무카와 테무진의 진영으로 나눠짐에 따라 전쟁에 대비해서라도
우두머리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
1189년 조용했던 숲속의 호수에서 테무진의 추종자들은 그를 맹주,
바로 칸으로 추대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해설) 테무진의 칸 등극.
이로써 테무진은 초원의 통합과 함께 더 넓은 세계에 진출한다.
칭기즈칸이 푸른 호수의 서약을 맺은 뒤 몽골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는 이 15년 동안의 시간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몽골을 통일하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칸.
그렇게 초원 위의 바람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몽골어)
-(해설) 칭기즈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손들에게 유목민의 기지를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통치 지역이 넓어지면서 그의 후손들은 정주민 지역을
통치의 중심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개척해 나가는 유목민 마인드의 본질만 잃지 않으면 될 것이다.
칭기즈칸이 궁궐 안에 게르를 설치해 놓고 그 속에서 잠을 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다.
농경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 마인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진 행위일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만난 유목민 곰보 씨 부부.
그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유목 생활을 하며 가축을 키워온 목축민이다.
초원을 떠돌며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은 예부터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을 성대하게 접대하는 풍습이 있다.
가축의 젖을 먹는 문화가 발달한 몽골에서는 손님에게 가장 먼저 우유와
찻잎을 넣고 끓인 수태차를 대접하는데 내 마음이 우유처럼 하얗다는 뜻을 의미한다.
-(해설) 지금이 유목민들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기인 셈이다.
보통 몽골인들은 여름에 더 많은 유제품을 먹는다.
여름철에는 고기가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초원에도 문명 기기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지만, 이들은 전통 가옥인 게르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이동식 주택인 게르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삶에 최적화된 주거 형태이다.
불편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유목 생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곰보 씨 가족 역시 노마딕의 DNA가 흐르고 있다.
초원의 고유함 속에 수천 년, 수만 년을 흘러온 구름과 바람.
그 속에는 몽골인들의 수많은 사연이 스며있다.
이 초원 위에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유목민.
이들의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칭기즈칸은 그들이 숭배하는 최고의 데칼이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초원 위를 쉼 없이 내달렸던 칭기즈칸처럼 오늘날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팍스 몽골리카를 이어가고 있다.
-(해설)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축이다.
도시의 삶보다는 초원에서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게 마음이 여유롭고 편하다는 부부.
물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초원 위의 삶이다.
-(해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
그래서 초원에서의 생활은 단순하다.
날이 어두워지면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잠자리에 든다.
부디 내일도 평화로운 하루가 되길 기원하며.
이 드넓은 몽골 초원은 바다처럼 팔을 벌리고 수천 년 전부터 숱한 부족의 흥망성쇠를 가슴에 품어왔다.
그리고 매번 또 다른 희망을 쏘아 올린다.
푸른 초원에서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최근 몽골에서도 유목 생활을 접고 도시로 떠나는 유목민이 늘고 있다.
하지만 곰보 씨 부부는 매일 아침 초원에서 눈 뜨는 유목 생활에만족하며 살아간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은 도시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유목 생활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게 유목민들의 생각이다.
스스로가 선택한 유목민의 삶을 끝까지 지켜나가고 싶다는 곰보 씨 부부.
초원에서 맞는 하루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고 여유롭다.
-(해설) 초원에서의 평화로운 삶.
곰보 씨 부부의 유목 생활은 칭기즈칸이 그토록 바라던 몽골인들의 모습이었다.
800년간 몽골 초원을 지켜온 칭기즈칸의 후예들.
팍스 몽골리카는 계속된다.
이제 칭기즈칸이 몽골의 수도로 명명한 카라코룸으로 향한다.
카라코룸이 위치한 오르온 계곡 지역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자
몽골제국에서 신성한 영역이었다.
1220년에 칭기즈칸이 처음 머문 이곳.
1235년 오고타이 칸이 이곳에 네 개의 문이 있는 벽을 올려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았다.
2020년 몽골 정부는 몽골 대학교와 함께 이곳 카라코룸을 디지털로 복원했다.
카라코룸의 외관은 큰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궁궐 내부는 화려하게 기록되어 있다.
칸의 궁전에는 금은보화와 음식이 넘쳐나고 사방에서 상인들이 몰려왔다.
-(해설) 몽골제국의 번성에 짧은 영화를 누렸던 초원의 카라코룸.
하지만 카라코룸은 14세기 후반 원이 붕괴하면서 그 도시는 터만 남게 되었다.
몽골 정부는 몽골의 옛 수도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디지털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를 실현했다.
그만큼 몽골의 역사,
칭기즈칸의 역사에서 카라코룸은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해설) 몽골족이 나타난 10세기 전후.
이 땅은 초원의 지배권을 갖기 위한 각 죽장이었다.
그 땅의 시작이 바로 칭기즈칸이다.
몽골비사 제1절은 몽골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선조는 하늘이 점지에서 태어난 푸른 늑대였다.
그의 아내는 흰 사슴이었다.
오논강 상류에 있는 부르칸 칼둔에 터를 잡고 사는 동안 그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칭기즈칸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몽골 제국이지만 영화의 시절이 워낙 짧았기에
카라코룸이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시기는 30여 년에 미치지 못한다.
-(해설) 천하를 호령하던 제국의 심장,카라코룸.
화려했던 도시의 영광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다.
몽골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이곳을
수도로 지정했지만, 그의 후손에 의해
카라코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설) 13세기 칭기즈칸이 이끄는
군대는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동유럽을 대부분 점령했다.
정복한 땅은 동쪽으로 중국, 만주.
서쪽으로는 유럽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였다.
최고의 군주로 남은 칭기즈칸.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쫓아
떠나보자.
현재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
161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몽골 인구의 거의 절반가량이 살고 있는 몽골 최대 도시.
이상 기후와 환경 파괴 등으로 유목 생활이 힘들어진 유목민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 중심의 수흐바타르 광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흔히 칭기즈칸 광장이라고 불린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몽골의 독립 영웅, 수흐바타르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현재 수흐바타르 광장은 울란바토르 최고의 랜드마크로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각종 국가 행사나 문화 행사, 웨딩 사진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 중앙에는 칭기즈칸 동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오고타이, 우측에는 쿠빌라이 동상이 버티고 있다.
몽골에서 칭기즈칸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다.
사실 몽골 제국의 위세가 워낙 컸기에 유럽과 이슬람권에서는 칭기즈칸을
학살자나 무자비한 정복자로 보는 등 시선이 갈렸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칭기즈칸의 수수께끼 가운데 일부를 해독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바로 13세기 몽골의 발음을 옮겨 놓은, 즉 몽골 비사를 판독하면서 칭기즈칸의 위상은 부활하게 된다.
몽골 비사와 함께 부활하는 칭기즈칸.
지난 2009년부터 건립 중인 칭기즈칸 박물관에서도 그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몽골 최대 규모의 박물관으로 칭기즈칸 탄생 86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22년 10월 개관했다.
-(해설) 200년 이상에 걸친 청나라의 지배와 이후 소련의 영향권에서 살아 온
70년 동안 몽골인들에게 칭기즈칸을 거론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금기였다.
잊혀졌던 영웅 칭기즈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1990년부터였다.
국민 통합을 위해 민족의 영웅 칭기즈칸의 동상과 비석이 세워지고 관련 유물 조사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칭기즈칸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은 2000년 전 흉노 시대 이전의 유물을 비롯해 총 1만여 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중 90% 이상이 진품이다.
-(몽골어)
-(해설) 헨티 다달솜 칭기즈칸의 탄생지이다.
헨티주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북쪽 끝에 위치한 다달솜.
초원뿐이지만 칭기즈칸의 탄생지이자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처음 일으킨
곳으로 몽골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자 칭기즈칸의 탄생지를 알리는 돌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를 호령했던 영웅의 탄생지에 세워진 비석치고는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마음이 이 돌 비석에 모아져 있다.
-(해설) 비석 주변으로 조그마한 오보.
즉 우리나라의 서낭당과 유사한 돌무더기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높이 1.3m, 폭 1m의 정도의 비석에는 칭기즈칸이 물소 해인
1162년 10월 16일 여기서 태어나다라는 글이 전통 몽골문으로 새겨져 있다.
비석이 서 있는 곳은 벌덕이라는 이름 대로 구릉의 정상이었다.
-(해설) 몽골의 한 부족인 보르지기드의 부족장이었던
아버지 예수게이의 죽음 이후 테무친의 삶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몽골 초원의 세력들은 부계 집단 위주로 모여 살았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자 친척들은 어린 테무친과 가족들을 버리고 테무친은 포로가 되어 수년간
처참한 노예 생활을 하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초원의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부족의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
-(해설)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 다달솜을 가로지르는 오논강.
이곳은 몽골 대초원의 젖줄이자 유목민들의 생명줄로 불린다.
가축이 먹을 만한 물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사는 유목 생활에서 가장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오논강이 초기 몽골의 중심지였던 이유다.
칭기즈칸 제국도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데 이후 통일 국가를 수립할 때까지의 모든 위업이 이 오논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지금도 오논강 주변에는 많은 몽골인이 전통 방식으로 가축을 기르며 유목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해설)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몽골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졌던 이곳
오논강에서 1206년 44세의 칭기즈칸은 몽골 칸의 자리에 올라 대몽골 제국의 서막을 열었다.
중세 동서양의 문명과 역사에 파란을 불러온 칭기즈칸과 대몽골 제국.
지난 1000년의 세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 칭기즈칸.
이 땅에 이름을 새기는 순간이었다.
-(해설) 몽골 정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헨티 다달솜 언덕을
탄생지로 선포했으나 실제 탄생지는 다달솜에서 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이곳 오논강가 빈데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몽골 정부가 선포한 다달솜의 언덕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해설) 자라서 몽골을 통일할 어린 테무친이 오논강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하며 오르혼강을 건넜다.
이 일대에는 피뿌리풀꽃이 온 초원과 언덕을 뒤덮듯 사방에서 바람이불어온다.
칭기즈칸의 또 다른 탄생지로 알려진 헨티 빈데르솜 가는 길.
빈데르솜은 몽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오논강이 흐르는 이곳은 1206년 부족 연맹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추대된 곳이기 때문이다.
케레이트족, 메르키트족, 타타르족, 나이만족 등 초원의 모든 부족을 물리친
후 테무친은 1206년 자신의 재위를 인정할 부족 회의를 소집했다.
고난과 영광이 새겨진 이 강변에서 초원이 하나로 통합된 것을 기념하고
새로운 체제를 알리는 쿠릴타이가 열린 것이다.
-(해설) 대칸의 자리에 오른 칭기즈칸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하고 구성원의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일이었다.
어느 부족 출신인지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로와 능력에 의해서 지휘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대회의인 쿠릴타이가 열린 광장 중앙에는 9개의 꼬리가 달린 흰 깃발이 세워졌다.
몽골족 아홉 분파의 영혼을 상징하는 곳으로 몽골족의 완전한 통합을 의미한다.
이 대회의에서 칭기즈칸은 대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대몽골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해설) 그토록 많은 파괴와 학살을 치른 몽골의 정복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헨티에서 바가노르로 가는 길.
칭기즈칸이 수백, 수천km를 행군하면서 세계를 정복했던 시기.
전쟁 중 많은 부족이 휴식을 취했던 여름 행궁지 터다.
칭기즈칸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여름 행궁지와 겨울 행궁지를 건설했다.
칭기즈칸시대에 대 몽골 제국은 수도가 없어 그가 머무는 곳이 바로 몽골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칭기즈칸은 대칸이 된 후 주로 이곳 사아리 케에르 평온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가을에는 카르토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해설) 칭기즈칸의 여름 행궁지터.
주변에 몹시 바람이 불었다.
사실 몽골 초원은 바람의 고향처럼 매일 거센 바람이 분다.
초원에는 평온함 뒤에 평온함이 오고, 위험뒤에는 또다른 위험이 있다라는
말처럼 몽골은 바람의 땅이 되었다.
바로 그 땅에서 칭기즈칸의 유산이 비롯된 것이다.
몽골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농사또한 짓지 못하고
풀또한 빨리 자라지 않는다.
유목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칭기즈칸의 시대.
몽골 유목민의 삶은 정복전쟁을 통해서 차츰 정주 문화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칭기즈칸의 또 다른 행궁지로 향한다.
겨울 행궁지 허더우 아랄로 가는 길.
이곳은 칭기즈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몽골 비사 성립 75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과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인 예켸 아우로비가 위치한 세계적인 역사 관광지이다.
1990년에 세워진 2m 높이의 기념비에는 칭기스칸의 전신상이 새겨져 있다.
-(해설)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 예켸 아우로그는 후방을 총괄하는 이동 병참
기지라는 뜻으로 칭기즈칸의 호라즘 원정때부터 이 명칭이 등장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붕괴 후 이곳은 전설의 땅으로 남았다.
이곳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0년 몽골과 일본이
공동조사단을 출범시키면서다.
-(해설) 지난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발굴한 결과 3개의 유적층이 발견되었다.
맨 아래층에서는 칭기즈칸 시대의 유적.
중간층에서는 오고타이 시대의 유적, 그리고 맨 위층에서는 라마교 사원의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몽골 정부는 행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지를 중심으로 보존중이다.
칭기즈칸의 사후 허더 아랄은 대칸의 등극 장소로 애용되었다.
허더 아랄에는 청동기 시대의 사슴돌, 돌궐석인상 등 많은 역사 유적이 존재한다.
몽골대학교와 디지털복원전문회사인 디지털 솔루션은 과거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의 모습을 디지털로 복원했다.
몽골 정부는 허우 아랄 즉, 칭기즈칸의 겨울 행궁지에서 발견된 유물에 주목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유물이 극소수만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번 유물 발견으로 인해
칭기즈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조명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됐다.
대초원을 말을 타고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 독특한 문화와 그들의
생활방식을 통해 몽골제국의 문화를 들여다보고 특히 12세기에서 13세기의 유물은
칭기즈칸이 한창 세력을 확장하던 때와 일치하므로 과거 몽골 왕족의 전성기를 유추하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해설) 유족발굴을 통해 발견된 칭기즈칸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겨울행궁지박물관.
과거 12,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청나라 시기 몽골 인장을 비롯해 화살촉과 동물 뼈 등 행궁터에서 출토된 많은 역사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군은 거짓말처럼 무덤 하나 발견되지 않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간 신의 군대처럼 기념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이 겨울행궁박물관은 칭기즈칸의 과거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다.
몽골의 초원은 잠시도 안심해서는 안된다.
넓은 초원 탓에 어디서든 길이 끊기고 웅덩이에 빠지기 일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길을 시속 70km 이상으로 달리다 보면 초원 곳곳에서 사고 차량을 볼 수 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눈앞에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광활한 땅.
이 초원 위를 수없이 내달렸을 칭기즈칸에게 이 길은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열린 문이었다.
바가노르를 뒤로 하고 헨티 바양골로 가는 길.
헨티 바양골은 칭기즈칸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만난 곳이다.
한갈호수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곳 호수에는 칭기즈칸의 야망의 바람보다 비원의 바람이 분다.
그리고 이 바람은 좌절의 바람으로 끝났다.
칭기즈칸의 동지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자무카.
칭기즈칸과 숙명적이라 할 정도로 애증의 길을 걸어야 했던 자무카는 비범한 재능과 함께
끈질긴 인내까지 겸비한 초원의 풍운아였다.
자무카와 칭기즈칸의 첫 인연은 칭기즈칸이 11살 때 서로 동물의 뼈를 주고받으며 만났다.
-(해설) 칭기즈칸과 자무카가 어린 시절 같이했던 장소.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 과정에서 최대의 경쟁자로 등장한 자무카.
그는 칭기즈칸에 버금가는 초원의 영웅으로 만일 칭기즈칸이 없었다면 몽골 초원을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을 것이다.
칭기즈칸과 애증이 교차한 혈 투를 벌였던 자무카는 1205년 자신의 동지들에 의해 칭기즈칸에게 잡혀 왔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교수형에 처했다.
칭기즈칸과 자무카의 초원에 세워진 비석. 그 비문은 이렇다.
아주 옛날부터 테무진과 자무카 둘의 전설이 있는데 두 안다의 우정의 징표로 이 오보를 만들어
성스러운 우정을 상징한다.
몽골 문화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사슴돌이다.
주로 상부에
사슴 모양이 형상화된 조각상인데 몽골 전역에 약 1500여 개가 존재한다.
이 석상은 몽골에서부터 동유럽 지역까지 분포된
매우 흥미로운 유물이다.
-(해설) 사슴돌 문양은 한국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몽골의 암각화에 있는 별자리들이 한국의 암각화에서 발견됐기 때문인데,
이는 두 나라의 문화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몽골어)
-(해설) 푸른 호수란 뜻의 후흐노르.
테무진에게 제2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그가 부족들에 의해 칭기즈칸으로 추대된 곳이다.
몽골족이 자무카와 테무진의 진영으로 나눠짐에 따라 전쟁에 대비해서라도
우두머리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
1189년 조용했던 숲속의 호수에서 테무진의 추종자들은 그를 맹주,
바로 칸으로 추대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해설) 테무진의 칸 등극.
이로써 테무진은 초원의 통합과 함께 더 넓은 세계에 진출한다.
칭기즈칸이 푸른 호수의 서약을 맺은 뒤 몽골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는 이 15년 동안의 시간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몽골을 통일하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칸.
그렇게 초원 위의 바람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몽골어)
-(해설) 칭기즈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손들에게 유목민의 기지를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통치 지역이 넓어지면서 그의 후손들은 정주민 지역을
통치의 중심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개척해 나가는 유목민 마인드의 본질만 잃지 않으면 될 것이다.
칭기즈칸이 궁궐 안에 게르를 설치해 놓고 그 속에서 잠을 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다.
농경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 마인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진 행위일 것이다.
몽골 초원에서 만난 유목민 곰보 씨 부부.
그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유목 생활을 하며 가축을 키워온 목축민이다.
초원을 떠돌며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은 예부터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을 성대하게 접대하는 풍습이 있다.
가축의 젖을 먹는 문화가 발달한 몽골에서는 손님에게 가장 먼저 우유와
찻잎을 넣고 끓인 수태차를 대접하는데 내 마음이 우유처럼 하얗다는 뜻을 의미한다.
-(해설) 지금이 유목민들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기인 셈이다.
보통 몽골인들은 여름에 더 많은 유제품을 먹는다.
여름철에는 고기가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초원에도 문명 기기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지만, 이들은 전통 가옥인 게르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이동식 주택인 게르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삶에 최적화된 주거 형태이다.
불편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유목 생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곰보 씨 가족 역시 노마딕의 DNA가 흐르고 있다.
초원의 고유함 속에 수천 년, 수만 년을 흘러온 구름과 바람.
그 속에는 몽골인들의 수많은 사연이 스며있다.
이 초원 위에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유목민.
이들의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칭기즈칸은 그들이 숭배하는 최고의 데칼이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초원 위를 쉼 없이 내달렸던 칭기즈칸처럼 오늘날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팍스 몽골리카를 이어가고 있다.
-(해설)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축이다.
도시의 삶보다는 초원에서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게 마음이 여유롭고 편하다는 부부.
물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초원 위의 삶이다.
-(해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유목민의 삶.
그래서 초원에서의 생활은 단순하다.
날이 어두워지면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과 잠자리에 든다.
부디 내일도 평화로운 하루가 되길 기원하며.
이 드넓은 몽골 초원은 바다처럼 팔을 벌리고 수천 년 전부터 숱한 부족의 흥망성쇠를 가슴에 품어왔다.
그리고 매번 또 다른 희망을 쏘아 올린다.
푸른 초원에서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최근 몽골에서도 유목 생활을 접고 도시로 떠나는 유목민이 늘고 있다.
하지만 곰보 씨 부부는 매일 아침 초원에서 눈 뜨는 유목 생활에만족하며 살아간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은 도시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유목 생활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게 유목민들의 생각이다.
스스로가 선택한 유목민의 삶을 끝까지 지켜나가고 싶다는 곰보 씨 부부.
초원에서 맞는 하루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고 여유롭다.
-(해설) 초원에서의 평화로운 삶.
곰보 씨 부부의 유목 생활은 칭기즈칸이 그토록 바라던 몽골인들의 모습이었다.
800년간 몽골 초원을 지켜온 칭기즈칸의 후예들.
팍스 몽골리카는 계속된다.
이제 칭기즈칸이 몽골의 수도로 명명한 카라코룸으로 향한다.
카라코룸이 위치한 오르온 계곡 지역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자
몽골제국에서 신성한 영역이었다.
1220년에 칭기즈칸이 처음 머문 이곳.
1235년 오고타이 칸이 이곳에 네 개의 문이 있는 벽을 올려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았다.
2020년 몽골 정부는 몽골 대학교와 함께 이곳 카라코룸을 디지털로 복원했다.
카라코룸의 외관은 큰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궁궐 내부는 화려하게 기록되어 있다.
칸의 궁전에는 금은보화와 음식이 넘쳐나고 사방에서 상인들이 몰려왔다.
-(해설) 몽골제국의 번성에 짧은 영화를 누렸던 초원의 카라코룸.
하지만 카라코룸은 14세기 후반 원이 붕괴하면서 그 도시는 터만 남게 되었다.
몽골 정부는 몽골의 옛 수도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 디지털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를 실현했다.
그만큼 몽골의 역사,
칭기즈칸의 역사에서 카라코룸은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해설) 몽골족이 나타난 10세기 전후.
이 땅은 초원의 지배권을 갖기 위한 각 죽장이었다.
그 땅의 시작이 바로 칭기즈칸이다.
몽골비사 제1절은 몽골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선조는 하늘이 점지에서 태어난 푸른 늑대였다.
그의 아내는 흰 사슴이었다.
오논강 상류에 있는 부르칸 칼둔에 터를 잡고 사는 동안 그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칭기즈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