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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1교시 - K-공예, 미래를 꿈꾸다 (조혜영 / 전시 기획가)
등록일 : 2023-05-03 09:57:10.0
조회수 : 707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 이어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에서 강연을 맡은 조혜영입니다.
저는 공예 분야 전문가이자 전시를 기획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하면 1988년을 꼽을 수 있는데요.
이 시기에는 하계 올림픽을 유치했던 그런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큰 변화가 이 시기에 있었을까요?
우선 해외로 가는 길이 쉬워졌습니다.
예전에는 미국과 일본에서만 공부할 수 있었다면 이 시기에는 세계 어디든지 가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학생들은 유럽, 일본, 중국, 그외에 타지에까지 가서 공부했고요.
이러다 보니 다양한 영향들이 우리나라로 유입되었습니다. 어떤 변화를 몰고 왔을까요?
이 시기에는 전시가 상당 부분 많이 발생했던 그런 시기인데 다수의 전시는 대학 동창 중심 또는 협회, 백화점, 이런 데서 문화를 전파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했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이번 강좌를 통해서 저희가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K-공예 미래를 꿈꾸다입니다.
지금 보시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과연 그 당시에 한국에 공예를 하는 그런 공방이라든지 제작소, 그런 것들이 있었을까요?
네, 있었습니다.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는 유일한 왕실에서 전파된 그런 제작소였는데요.
이 당시에 중요한 부분은 다수의 공예품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공예품들을 한국에서 만들고 있었죠.
마찬가지로 금속, 도자,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들이 디자인하고 또 의뢰한 공예품들을 만들었는데요.
일본인들은 한국의 전통 공예를 매우 선호했습니다.
따라서 백자, 청자, 그것도 상감청자, 이런 것들을 우리 한국에 제작소를 설립한 다음에 만들게 했죠.
지금 보시면 고려 시대나 전혀 다를 것 없는 그런 매병인데요.
운학문을 새긴 매병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전통의 청자를 발전시키고 계승했다고 하는 해강 유근형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0세기 초, 19세기 말, 이 당시에는 개인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서는 작품을 내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후대 1950년대, 1960년대, 이때 가야지만 개인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미술 전람회 또는 어떤 한 공모전 형태로써 일본인들의 영향 아래에 일본 미술과 같이 한국에 미술이 보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19세기 말에는 궁에서 만들어졌던 공예품이 다수였는데요.
이 당시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프랑스나 영국이나 이런 영향들을 도입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에 있는 도자, 이런 제작소와 협업으로 교육도 실시하고 제품도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했는데요.
1910년이 되자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이러한 계획들이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한국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1910년부터 1950년까지 맞이합니다.
거의 다수의 제작소는 일본인들의 지도 아래 만들어졌던 그런 제작소고요. 후에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이 제작소들이 공방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러면서 1958년이 되어야만 교육이 실시됩니다.
교육은 정부의 제도권 안에서 문화를 보전하는 차원으로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요.
공예라는 이름을 쓰기보다는 생활미술학과, 이렇게 해서 다양한 물성을 다루는 전공이 발생하게 됩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너져 간 우리의 문화 체계를 살리는 거였습니다.
그것을 재형성하기 위해서 공예학과들을 만들었는데요.
그중 가장 처음 만들어진 학과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생활미술학과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으로 섬유와 도자, 이것을 가르쳤는데요.
도자 같은 경우에는 역사와 전통에 근거를 삼아서 오랫동안 청자를 만들어 온 가문인 황종구 교수 아래에서 고려 시대 청자를 재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영향은 서울대학교에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도자학과는 디자인을 전공한 권순형 선생님 아래 지도를 받았는데요.
권순형 선생님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도자를 배운 다음에 우리의 도자 역사가 얼마나 훌륭한지 느끼고서는 도자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1950년도, 1960년도는 미국 정부의 후원으로 많은 전공자들이 유학을 갑니다.
다수가 어디로 갔을까요?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으로 가서야 본인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인 그런 장점들을 발견한 다음에 두 가지 분류의 작업을 하기 시작하죠.
첫 번째는 한국적인 것을 보존했고요.
두 번째는 조형적인 표현.
그러니까 흙이 갖고 있는 물성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금속공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승희 교수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현대적인 표현을 배워서 이것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전파하는데요.
현재 금속공예 하면 한국에서는 국민대학교가 가장 우수한데 그 국민대학교에 뿌리를 내린 장본인은 김승희 교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시다시피 형상들은 이해할 수 없는 거라서 다수의 사람들은 공예 하면 어렵다고 하죠.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이 아마 기억하고 있는 공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량 생산됐던 어떠한 집에서 사용하는 사물을 떠올리실 겁니다.
보다 쉽고 보다 익숙할 수도 있지만, 공예는 후에 더 많은 예술성을 겸비하면서 이와 같은 현상으로 발전합니다.
섬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순희 교수는 덕성여대에 뿌리를 내려서 여기에는 기초적인 섬유 직조 또는 표현하는 조형성 이런 것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현대 공예를 연구할 때는요.
미국과 일본에 일어났던 현상들을 반드시 좀 조명하는 게 중요한데요.
1강좌에서 미술공예운동이라는 거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 아마도 한국에 그와 유사한 발전은 1960년, 1970년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없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1970년도 되어서야 한국에서도 산업혁명과 비슷한 산업적 발전을 급격히 하기 시작하는 시기죠.
이와 같이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들이 현대 공예 분야를 장악하기 시작압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 공예는 한 세 가지 분류로 나누어지는데요.
첫 번째가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기반한 공예를 우리가 전수 공예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에서부터 보존했던 기술을 전수하는 분류가 있다면 이것을 장인 정신으로 기술만 보전하고 있는 분류가 또 있습니다.
세 번째가 대학에서 전공함으로써 현대적으로 이걸 발전시키는 분류라고 보시면 됩니다.
1970년대에는 협회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죠.
협회들은 미국 공예운동에서 보여줬던 공예 길드 또한 공예 연합과 같은 조직적인 그런 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표적인 협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한국 공예가협회입니다. 회원은 약 1000명이 넘고요.
1970년대에는 1세대 현대 공예 또는 2세대 현대 공예 이렇게 그 무리를 발전적인 요소에서 관찰하면서 과연 이들은 한국의 전통 공예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조명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물성적인 분류를 하고 또 물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물성끼리 결합해서 전시가 이루어졌던 시기입니다.
그다음에는 미국의는 본을 따서 미국에는 교육과 표현에 있는 NCECA, National Council on Education for the Ceramic Arts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건 즉 뭐냐 하면 교육과 예술적 표현의 연합이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현대적인 그런 표현을 하는 흙을 만지는 사람들의 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 번째는 한국 조형 디자인 협회라는 곳이 있는데요.
여기는 그야말로 연구를 목적으로 해서 논문을 발제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협회입니다.
교수들의 조직에 의해서 어떠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 협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 하나의 분류는 국가 무형문화재인데요.
인간문화재를 지정합니다. 이것을 관리하는 중앙부처는 문화재청이라는 곳입니다.
따라서 인간문화재로 지명되면 일정 부분은 교육에 다시 이분들이 사회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1년에 몇 개의 강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수의 인간문화재는 사라져가는 공예를 보호하고 또 이것을 보존하고 지속되게끔 노력하는 그러한 국가 무형문화재의 지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상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고요. 이것의 기본 영향은 일본에서 받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본은 이미 1970년대에는 저희보다 훨씬 더 앞서갔죠.
전통을 저희보다 훨씬 더 중요시하는 일본은 옛 기술을 보전해야지만 현대화시킬 수 있다는 이념 아래서 이와 같은 무형문화재의 지명을 제도적으로 설립한 다음에 사회에 도입했습니다.
많은 부분은 효과적으로 운영이 됐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일본도 역시 저희와 비슷한 그런 현상들을 지금에 와서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시면 갓을 만드는 갓 장인도 있고요.
또 은입사를 금속에 채우는, 입사라 함은 실 같이 얇은 은을 표면에 두들겨서 채우는 그런 기술을 보전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요.
또는 소나 짐승의 뼈를 태워서 우리가 화각이라 함은 이런 함을 만들고 또 결혼식을 위해서 예물을 담는 그런 함을 만드는 장인도 있고요.
또 활자를 금으로 찍는 그런 장인도 있고요. 다양합니다.
이것의 기반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분업화됐던 것이 1970년대 오면서 1인 1체제로 한 사람이 만드는 것에서부터 이것을 판매하고 또 유지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하다 보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죠.
전통 공예에 있어서는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이와 같은 교육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강남에 유치하고 있는 전수교육관은 앞서 말씀드린 그런 무형문화재들이 일정 기간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을 수 있고 이걸 오랫동안 듣게 되면 조교가 되어서 그 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거는 지난해에 제가 사라져가는 공예를 보존하기 위해서 전문가로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 공예의 많은 뿌리는 통영에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통영 지역에 발령 났을 때 이미 통영에는 가죽과 목공예, 나전칠기, 금속공예,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단합니다.
공예는 자연에서 주는 산물들을 자연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 재료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의지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통영은 이와 같은 자연조건이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가장 훌륭한 곳 중의 하나입니다.
나무도 많고 산도 있고 또 여기에는 바다에서 주는 그런 선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의 공예는 자연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통영이 이와 같이 12공방이라는 이름을 띄울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세 개의 군을 통제하면서 이 지역에 있는 재주꾼들을 한곳에 모은 것이죠.
어디에 모았을까요? 통영에 모았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위해서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영에서는 목공예, 가죽공예, 금속공예가 그 당시에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가죽공예는 말의 안장을 만드는 데 필요했고요.
또는 전쟁에 나갈 때 보호 측면에서 착용의 의미에서도 사용됐습니다.
금속은 제가 설명 안 드려도 무기나 또는 장치나 어떠한 그런 도구로써 필요한 재료였고요.
마지막으로 목기는 운반이나 바퀴나 이런 거에 사용했었습니다.
더 중요한 건 통영은 이미 조선 시대, 그 당시에 분업하고 있었습니다.
재료를 다루는 사람 또한 그거를 가공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그것을 장식하는 사람, 이 분업이 이미 조선 시대 때부터 굉장히 발달돼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수로가 있었기 때문에 공급이 쉬웠습니다.
그래서 중앙으로 공급하는 그런 통로도 있었습니다.
제가 1강좌에서 말씀드렸던 미술공예운동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통영에 있었습니다.
비록 공장이나 이런 거는 없었지만 분업화에 있어서도 매우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2022년에는 이러한 문화적인 통영의 조건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도시 재생 그리고 통영의 문화 보존을 위해서 통영 국제 트리엔날레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는 사라져가는 통영의 공예를 보여줬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통영의 나전칠기 그리고 통영의 대나무 발, 또 한 가지 통영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입니다.
얼마나 그 당시에 저희 조상들이 앞서갔냐 하면 전쟁에 필요한 신호기가 필요했는데요.
연으로 이 신호를 보여줬습니다. 대체적으로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붉은 점이 있는 것과 붉은 점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붉은 점이 있는 것은 발포하라. 붉은 점이 없는 것은 발포를 멈춰라 하는 신호였습니다.
통영의 연은 전체적으로 한 24가지가 있었습니다.
이 24가지는 전부 다 다른 의미를 담고 있고요.
여기에는 접이식 연이 아니라 아주 거대한, 거의 인체 크기의 연인 대연으로써 하늘에 날리면서 신호를 띄웠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과거와 현재가 조금 더 연결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연결이 되면서도 또 얼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가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은 이 현대성, 현재, 이 모든 것이 전통과 과거를 만드는 건데요.
우리 한국에는 오늘날 21세기 와서 아마도 어느 나라보다도 공예 부분에 있어서는 행사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공예에 있어서 어떠한 다양한 그런 행사가 있는지 여러분과 공유드리겠습니다.
우선적으로 크게 맥락을 보면요. 비엔날레라는 것이 있고 두 번째는 상업적인 요소들이 있고 세 번째로는 페어가 있습니다.
페어는 어떤 점에서는 상업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데요.
이 상업과 페어와 또 이것을 해외에 알릴 때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조금 성격들이 다 다릅니다.
경기 도자 비엔날레가 있고요. 두 번째는 공예 비엔날레가 있습니다.
비엔날레라는 행사는 bi, 2년에 한 번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매년 일어나는 공예 트렌드 페어, 공예 트렌드 페어는 한국에 있는 유일한 그런 페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비엔날레나 이런 행사들은 공공기관과 같이 협력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진행하기 위해서는 상당 부분 그 비용이 필요한데요.
주로 이 비용은 한국 문화체육관광부나 또는 지방자치단체 안에서 비용이 책정돼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런 부분에 있어서 예술 감독으로 있었는데요.
예술 감독의 역할은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몇 가지 제가 했던 사례들을 예시로 삼겠습니다.
2015년에 저는 한국에서 유일한 공예 비엔날레를 예술 감독으로서 진행하게 되는데요.
제가 맡은 부분은 기획전시, 공예의 방향성과 미래성을 제시해 주는 그런 부분을 맡았습니다.
주제는 손 그리고 그 이상의 것, 손으로 잇는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잇고 또 더하라.
그런데 잇고 또 더하라는 것은 공예가 갖고 있는 물성에 있어서도 덧붙이고 직조로 짜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비엔날레를 할 때는 공예가 갖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보여주는 게 저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과 공예에 대한 배경을 설명드리고자 하는데요.
지금도 논의가 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화두는 지속 가능성입니다.
많은 재료들이 자연에서 오지만 이 재료들은 한번 버려지고 또다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주제 안에서는 재활용, 도구, 공존, 전통, 확장, 이런 것을 담았습니다.
공예에 있어서 도구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부분인데요.
손의 확장, 연장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또는 장인은 본인이 사용하는 도구를 쓸 줄 알아야지만 공예품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유산은 앞서 말씀드린 저의 전통과 역사, 또 이거에 보존에 있어서 한국에는 다양한 그런 컬렉터들이 있습니다.
컬렉터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좋아하는 공예품 또한 미술품, 디자인품을 모으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공예 중의 하나는 우리의 꽃인 화혜라고 하는 꽃신을 만드는 장인인데요.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일제 시대 때 만들어졌던 대량 생산을 위한 술병, 간장 도구, 이런 것들을 또 보여줬습니다.
나전칠기도 물론 보여줬고요. 지금 현재 서울 공예박물관에 가시면 허동화라는 컬렉터가 모은 약 4000여 점을 모은 조각보도 역시 전시를 통해서 공유했습니다.
조각보는 그의 역사성, 배경을 설명드리자면 조선 시대 때 옷을 만든 다음에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하나의 그런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에는 이것을 포장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도자, 이런 부분은 너무도 우리가 훌륭하게 잘하고 있어서 그것 또한 역시 전시에 담았지만 이것을 3D 프린터,
미래에 우리 아이들, 후손들을 위해서 어떻게 공예를 과학과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따라서 제 전시를 통해서 저는 공예에 대한 확장성, 과학과 접목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아도 물레로 할 수 있는, 어떠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전자 물레입니다.
3D 프린팅이 2015년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3D 프린팅을 보여주면서 영국 왕실에서 만들었던 모자와 갓을 접목시켜서 보여줬습니다.
CNC 커팅이라는 기계로 절단하고 접합하는 부분도 조명을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전시는 단순히 어떠한 예술품을 보는 그런 공간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제시도 하고 또 저희가 발전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같이 공유하는 어떠한 그런 의견들을 나누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부분들을 녹여서 전시를 통해서 보여주면서 과학이 줄 수 있는 산물들, 예를 들면 야광, 이런 조명이라든지 또 신소재라든지 이런 것 역시도 전시를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유리공예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유리를 녹이는 화로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24시간, 365일 가동해야 하다 보니 유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전시에서 꼭 여기에 조명하고 싶었고요.
지금 보시는 이 설치 작업은 부산에 가면 F1963이라는 고려제강과 또 같이 확장됐던 작품인데요.
고무줄과 북한에서 떠내려온 나무를 응용해서 만든 설치 작업입니다. 보통 전시장이 운영 안 될 때는 이와 같은 그런 공간이죠.
제가 전시했던 청주 공예 비엔날레는 옛 연초 제조창, 담배를 저장했던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공간이 갖고 있는 원래의 형태도 전시에 담아봤습니다.
전시에 있어서는 트렌드, 플로, 소비자의 성격,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예술 감독으로서 이런 것을 제가 공부를 안 하고 연구를 안 한다면 여러분이 전시를 왔을 때 이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거지? 뭘 도대체 말하고자 하는 거지?
이런 의문점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공예 트렌드 페어는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소비 형태의 트렌드 페어입니다.
그야말로 여기 오셔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구매하고 또 애호하고 일상생활에 가치관을 도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그런 행사인데요.
지금까지 약 14년 동안 진행해 왔고 매번 여기에 주제라든지 컬러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릅니다.
저는 2016년에 여기에 예술 감독을 했었고요.
이 당시에 쇼핑의 개념을 처음 도입해서 판매를 촉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비엔날레와 페어는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해외에서 한국 문화를 알릴 때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미국을 생각하면 햄버거를 떠올릴 수 있고 할리우드를 떠올릴 수 있고 이런 고정관념들이 있듯이 그러면 한국을 떠올리면 어떤 것들이 서구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연상이 될까요?
가장 쉬운 건 도자기입니다. 2017년에는 제가 25명을 섭외해서 미국에서 페어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페어를 가면 설치하고 한국적인 그런 설치로 연출해야 합니다.
주로 작가들과 같이 가서 설명하고 그 공간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게끔 설명하는데요.
과연 미국인들이 우리 공예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까요?
또는 유럽인들은 우리 공예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공예 하면 해외에서는 청자, 청자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요.
그다음에는 달항아리, 이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스위스,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전시를 끊임없이 해 왔습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석 달까지 하는데 그걸 매일매일 운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 매일매일 설명하고 일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문화가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아직까지도 많이 해외에 나가서 활동을 못 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언어가 문제이겠죠.
다행히도 어린 나이부터 저는 이런 부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행사를 통해서 기관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하면서 계속적으로 학술적인 부분,
심포지엄 또는 전시, 페어를 통해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죠.
그러면 전시에 있어서 어떻게 홍보를 하는 게 가장 좋을지. 문화 교류,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하는지. 역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육적인 측면이 가장 중요하죠.
공간 안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또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고 또 이 사물이 갖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서 설명하죠.
가장 중요했던 그런 행사 중의 하나는 2016년에 했던 한불 수교 130주년의 전시였습니다.
이 전시는 한국에 있는 대표적인 도자기를 바탕으로 해서 사진,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 이것들을 한 곳에서 다 보여줬습니다.
역시 이들도 고정관념이 있어서 이 전시를 구상할 때는 달항아리와 옹기와 또는 고려청자를 기반으로 해서 전시를 풀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들은 한국의 고려청자, 백자를 그렇게 우리의 문화의 상징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지금 보시는 오른편의 이미지는 신미경이라는 작가가 비누로 만든 도자기 형상들입니다.
이 도자기 형상들은 우리나라 또는 아시아에 있는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아서 비누로 만든 것입니다.
역시 이 작가는 서양에서는 어떤 것을 문화적으로 선호하는지를 인지하고서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다수의 작품들이 그런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만큼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한국의 청자와 백자를 중요시 여기고 이것을 한국의 상징성이라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그만큼 고온에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밖에 없었습니다.
그 역사성은 뿌리 깊게 있습니다. 17세기 유럽에 전파되면서 이들은 고온에 굽는 방법과 재료들을 연구했죠.
그러다 보니 여러 실패를 하고 도저히 과학적인 부분과 그 기술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유사한 것들을 아주 낮은 온도에 구울 수 있는 백색의 흙으로써 시도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작품은 조선 시대 백자에 있는 청화 무늬, 그러니까 갈색빛이 도는 철의 성분으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재해석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모든 영감을 전통, 역사에서부터 가져옵니다.
가져와서 이것을 본인만의 표현으로 바꾸는데요.
이 작가 같은 경우에는 미술 공부를 하는 데생, 데생을 기본으로 해서 조선 시대 때 백자 형태에 연필로 그린 유일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강좌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달항아리는 끊임없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버나드 리치를 통해서 루시 리, 오늘날 영국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달항아리의 근거를 오른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본창 작가는 그 달항아리를 찍어서 마치 달의 모습처럼 표현했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아마 전 세계에서 공예가 가장 많고 또 공예를 지금까지 선도하는 그런 박물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국에 가시면 반드시 가야 할 그런 박물관 중의 하나인데요.
프랑스에서 했던 한불 수교 전시는 성공을 거두어서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되죠.
하지만 전시라는 것은 공간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구상이 다릅니다.
따라서 박물관에서 했을 때는 원래 프랑스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축소된 그런 규모로 전시했고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한국 도자와 같이 전시했습니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19세기 말에 생겼는데요.
컬렉터에 의해서 컬렉션을 여기에 기증하면서부터 박물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생활에 관련한 그런 사물들이 가장 많은 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도자기는 20세기 초부터 박물관에서 수집했고요. 백자, 청자, 옹기, 이런 부분들을 갖고 있습니다.
보시면 다양한 기법으로 전통을 재해석하는데요. 왜 많은 현대 작가들은 전통에서 영감을 받을까요.
전통은 아마도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의 역사성 또는 우리 뿌리를 탐구하고 또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요.
지금 보시는 유의정 작가는 백자를 해학적으로 기존에 있는 21세기에 있는 브랜드들, 나이키라든지 애플이라든지 이런 것을 팝아트적인 표현을 하면서 거대한 항아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루이비통을 묘사한 그런 패턴을 도입한 거대한 항아리고요. 윗부분에는 애플에서 보이는 A 자, A 자를 여기에 부착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많은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면서 한국의 도자 발전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그 이해에는 밀라노에 가서도 제가 전시했는데요.
거의 많은 지역에서 전시를 했다고 보시면 되는데 대표적인 곳이 영국, 밀라노 그다음에 미국인데요.
왜 이런 곳에서 전시했을까요? 왜 이게 아프리카가 아니고 또 호주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닌 이와 같은 장소에서 전시가 이루어졌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시는 단지 전시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교육과 소장, 소장의 가치,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권에서 전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번 전시가 될 때마다 이것이 박물관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중요한 기관으로 소장이 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이탈리아 밀라노는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
디자인으로써는 선도하고 있는 그런 도시라고 보면 되는데요.
주로 4월에 이루어지는데 역시 여기에서도 도자 전시를 제가 기획했습니다. 왜 또 도자일까요?
한국 문화를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도자 전시를 또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고정관념이죠. 고정관념 안에서 한국을 어쩔 수 없이 포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의 예술 감독으로서의 역할입니다.
밀라노에 100년 넘은 건물 안에서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예술 감독으로서 하나의 전시 패턴이 있다면 있는데요.
공예에 있어서 도구를 보여주고 도구와 같이 재료에 대한 설명을 보여주고 그다음에 이것을 작품과 연결시킵니다.
여러분한테도 설명드릴 때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도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요리할 때 칼을 쓰고 또 어머니가 요리할 때 어떠한 용기에 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도구가 없어서는 완성할 수 없죠. 몰입도를 위해서 도자기만 보여줄 수 있게끔 인테리어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도 청자, 백자, 옹기, 그다음에 새로운 해석,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었습니다.
상당 부분은 항아리 형태가 보여지죠. 이번에 색다른 그런 시도를 했던 것은 옹기였습니다.
옹기라는 것은 1100도에 구워지는 흙을 말하는 것이죠.
옹기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위계질서가 없었던 모든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일한 그런 도자기입니다.
백자나 청자 같은 경우에는 궁이나 또는 그런 높은 선비들이나 사용했다면 옹기는 모든 사람이 쓸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옹기는 우리의 식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모든 사람한테 필수품이었습니다.
옹기도 각기 다른 그런 형태를 갖고 있는데요.
옹기를 중정에 보여주면서 전시를 이번에는 했었습니다.
이 전시는 매우 좋은 콘텐츠로 선정돼서 상을 탈 수 있는 후보까지도 올라갔습니다.
보여드린 바와 같이 연출에 있어서는 이번에는 백자나 청자가 아닌 옹기가 가장 중심이 돼서
우리 식생활, 또는 우리의 식문화와 좀 더 밀접하게 서양인들한테 보여주는 것이 전시의 의도였습니다.
제가 계속 하는 용어가 있다면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말인데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공예에 대한 역사가 거의 7000년이 넘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 7000년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현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통과 역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립 민속박물관은 우리나라의 공예를 잘 보여주는 그런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다면 특히 식문화, 의식주, 이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국립 민속박물관 또는 얼마 전에 생긴 서울 공예박물관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K-크래프트, 이번 강좌의 설명은 K-크래프트의 어떤 해외적, 글로벌한 시선 또는 과연 우리 공예가 해외에 잘 전달될까요 하는 그런 질문을 품고서 한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로에베 파운데이션, 그러니까 명품 회사인 로에베, 가방과 가죽 공예로 잘 알려진 이 기관은 2017년부터 혜성 같은 어떤 행사를
공예 부분에 만들면서 공예 분야를 지금 발전시키고 바꾸고 있습니다.
많은 명품 회사들이 그 공예에 손을 댔지만 로에베 재단처럼 효과를 본 그런 럭셔리 브랜드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1700년도 말에 있었던 가죽 공방, 로에베.
그 정신을 담아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거는 공모전 형식으로 전 세계에 있는 공예가들을 섭외하거나 또는 공모전에 응시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제도가 있는데요.
작년에 2022년에는 한국 서울에 있는 서울 공예박물관에서 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전시가 이루어지면서 이 공모전에 3000여 명이 시도했는데요.
매년 로에베 공예상은 30명만 뽑아서 전시하고 우승자를 선정합니다.
역대 우승자는 한국인이 없었죠. 작년까지는요. 그런데 작년에 2022년에는 한국인이 우승했습니다.
보시면 1회 때, 2017년에는 독일인인 목공예가 상을 탔고요.
2018년에는 도자인 영국인이 상을 탔고 2019년에는 옻칠로 일본인이 탔고 2022년에 와서야 비로소 한국이 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우승자는 다름 아닌 37살의 정다혜 작가입니다.
정다혜 작가는 사라져가는 말총공예를 살렸다고 보면 되고요. 현재로서는 한국을 알리는 문화 홍보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총으로 탕건, 망건, 그러니까 갓 속에 쓰는 그런 장식을 만들었던 것을 영감을 받아서 패턴을 적용해서 투명한, 거의 바구니의 형태와 유사한 이러한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창작가들을 이 형태를 보고서는 어디서 보지도 못한 그런 새로운 형태라고 말하면서 우승자로 선정했죠.
로에베 브랜드에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조나단 앤더슨은 단번에 이 정다혜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앞으로도 작품을 더 만들면 반드시 본인한테 먼저 보여달라.
그만큼 나는 정다혜 작가의 작품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이 물성이 갖고 있는 또는 이 창작이 갖고 있는 혁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작가들은 이 상에 매번 선정되었습니다.
2017년부터 조명해 보자면 지금까지 한 30명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자에 배세진, 그다음에 도자에 김상우, 유리공예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유리 파이널 리스트로 선정된 김준용 작가,
섬유 작가로서 베테랑인 장연순 작가, 옻칠로써 장인의 정신과 또 혁신적인 색감을 가진 정해조 작가.
훌륭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보신 많은 이 공예가들은 전통을 기반으로 해서 형태나 재료의 사용, 표현에 있어서 본인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금속에 손계연 작가, 장신구에 고희승 작가, 한지를 이용해서 한지를 꼬아서 만든 이영순 작가, 투명한 소재로 옷을 만드는 김민희 작가,
조성호 금속 작가는 궁궐이나 역사적인 건축물에서 탁본을 따서 금속에 이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리 작가인 이지용 작가, 도자는 설명 안 해도 한국으로는 한국 하면 도자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그런 부분이 있어서 당연히 도자는 여기에 해당이 되죠.
옻칠, 옻만으로도 형태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물성에 집중된 박성열 작가. 리스트는 무궁무진합니다.
이들이 우리의 K-크래프트를 현재 지켜주고 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속적으로 해외에 노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에베라는 명품 회사의 브랜드를 통해서 이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성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죠.
2021년에 파이낸셜타임스는 드디어 때가 왔다.
K-크래프트의 시기가 왔다. 모든 사람이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다혜 작가에 관련한 자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이 말총을 이렇게 함으로써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문화에 있어서 큰 기여를 했죠.
얼마 전에 있었던 영국에서의 유일한 공예 페어인데요. 여기에서도 우리의 현대 유리가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K-공예에 대해서 오늘은 설명드렸는데요. 어떠셨는지요?
한국 작가들이 활발하게 작품을 만들고 개발하며 자신들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 내수 시장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아직까지도 수요 부분에 있어서는 저조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공예를 많이 사랑해 주셔야 합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다움을 찾아가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남을 탓하거나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많죠.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수년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저는 이러한 측면에서 저의 마음가짐을 하나의 장인정신이라고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공예를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외로움 속에서 나다움을 찾아가는 하나의 기술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함에서 보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적인 그런 선택에 의해서 이들은 매일매일 본인이 하는 것을 지키면서 지속하고 있습니다.
손재주는 한국 따라갈 그런 문화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손재주는 세계적으로 이제 인정받는 시기가 왔습니다.
지금 한국 문화 예술 콘텐츠는 대세입니다.
더 잘해야겠죠.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 조혜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4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빚내서 사업을 늘려놨는데 장사가 안되기 시작하죠.
물가가 올라간다는 이야기는 화폐 가치가 하락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인플레가 좋을까요, 디플레가 좋을까요?
가격이 내려가면 그 순간 수요가 확 늘어납니다.
인플레이션은 안 좋다고 했는데 왜 이게 좋은 것처럼 보이지? 이게 좋은 인플레이션입니다.
저는 공예 분야 전문가이자 전시를 기획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하면 1988년을 꼽을 수 있는데요.
이 시기에는 하계 올림픽을 유치했던 그런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큰 변화가 이 시기에 있었을까요?
우선 해외로 가는 길이 쉬워졌습니다.
예전에는 미국과 일본에서만 공부할 수 있었다면 이 시기에는 세계 어디든지 가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학생들은 유럽, 일본, 중국, 그외에 타지에까지 가서 공부했고요.
이러다 보니 다양한 영향들이 우리나라로 유입되었습니다. 어떤 변화를 몰고 왔을까요?
이 시기에는 전시가 상당 부분 많이 발생했던 그런 시기인데 다수의 전시는 대학 동창 중심 또는 협회, 백화점, 이런 데서 문화를 전파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했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이번 강좌를 통해서 저희가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K-공예 미래를 꿈꾸다입니다.
지금 보시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과연 그 당시에 한국에 공예를 하는 그런 공방이라든지 제작소, 그런 것들이 있었을까요?
네, 있었습니다.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는 유일한 왕실에서 전파된 그런 제작소였는데요.
이 당시에 중요한 부분은 다수의 공예품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공예품들을 한국에서 만들고 있었죠.
마찬가지로 금속, 도자,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들이 디자인하고 또 의뢰한 공예품들을 만들었는데요.
일본인들은 한국의 전통 공예를 매우 선호했습니다.
따라서 백자, 청자, 그것도 상감청자, 이런 것들을 우리 한국에 제작소를 설립한 다음에 만들게 했죠.
지금 보시면 고려 시대나 전혀 다를 것 없는 그런 매병인데요.
운학문을 새긴 매병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전통의 청자를 발전시키고 계승했다고 하는 해강 유근형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0세기 초, 19세기 말, 이 당시에는 개인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서는 작품을 내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후대 1950년대, 1960년대, 이때 가야지만 개인이 본인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미술 전람회 또는 어떤 한 공모전 형태로써 일본인들의 영향 아래에 일본 미술과 같이 한국에 미술이 보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19세기 말에는 궁에서 만들어졌던 공예품이 다수였는데요.
이 당시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프랑스나 영국이나 이런 영향들을 도입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에 있는 도자, 이런 제작소와 협업으로 교육도 실시하고 제품도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했는데요.
1910년이 되자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이러한 계획들이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한국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1910년부터 1950년까지 맞이합니다.
거의 다수의 제작소는 일본인들의 지도 아래 만들어졌던 그런 제작소고요. 후에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이 제작소들이 공방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러면서 1958년이 되어야만 교육이 실시됩니다.
교육은 정부의 제도권 안에서 문화를 보전하는 차원으로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요.
공예라는 이름을 쓰기보다는 생활미술학과, 이렇게 해서 다양한 물성을 다루는 전공이 발생하게 됩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너져 간 우리의 문화 체계를 살리는 거였습니다.
그것을 재형성하기 위해서 공예학과들을 만들었는데요.
그중 가장 처음 만들어진 학과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생활미술학과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으로 섬유와 도자, 이것을 가르쳤는데요.
도자 같은 경우에는 역사와 전통에 근거를 삼아서 오랫동안 청자를 만들어 온 가문인 황종구 교수 아래에서 고려 시대 청자를 재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영향은 서울대학교에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도자학과는 디자인을 전공한 권순형 선생님 아래 지도를 받았는데요.
권순형 선생님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도자를 배운 다음에 우리의 도자 역사가 얼마나 훌륭한지 느끼고서는 도자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1950년도, 1960년도는 미국 정부의 후원으로 많은 전공자들이 유학을 갑니다.
다수가 어디로 갔을까요?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으로 가서야 본인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인 그런 장점들을 발견한 다음에 두 가지 분류의 작업을 하기 시작하죠.
첫 번째는 한국적인 것을 보존했고요.
두 번째는 조형적인 표현.
그러니까 흙이 갖고 있는 물성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금속공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승희 교수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현대적인 표현을 배워서 이것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전파하는데요.
현재 금속공예 하면 한국에서는 국민대학교가 가장 우수한데 그 국민대학교에 뿌리를 내린 장본인은 김승희 교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시다시피 형상들은 이해할 수 없는 거라서 다수의 사람들은 공예 하면 어렵다고 하죠.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이 아마 기억하고 있는 공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량 생산됐던 어떠한 집에서 사용하는 사물을 떠올리실 겁니다.
보다 쉽고 보다 익숙할 수도 있지만, 공예는 후에 더 많은 예술성을 겸비하면서 이와 같은 현상으로 발전합니다.
섬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순희 교수는 덕성여대에 뿌리를 내려서 여기에는 기초적인 섬유 직조 또는 표현하는 조형성 이런 것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현대 공예를 연구할 때는요.
미국과 일본에 일어났던 현상들을 반드시 좀 조명하는 게 중요한데요.
1강좌에서 미술공예운동이라는 거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 아마도 한국에 그와 유사한 발전은 1960년, 1970년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없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1970년도 되어서야 한국에서도 산업혁명과 비슷한 산업적 발전을 급격히 하기 시작하는 시기죠.
이와 같이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들이 현대 공예 분야를 장악하기 시작압니다.
하지만 사실상 우리 공예는 한 세 가지 분류로 나누어지는데요.
첫 번째가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기반한 공예를 우리가 전수 공예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에서부터 보존했던 기술을 전수하는 분류가 있다면 이것을 장인 정신으로 기술만 보전하고 있는 분류가 또 있습니다.
세 번째가 대학에서 전공함으로써 현대적으로 이걸 발전시키는 분류라고 보시면 됩니다.
1970년대에는 협회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죠.
협회들은 미국 공예운동에서 보여줬던 공예 길드 또한 공예 연합과 같은 조직적인 그런 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표적인 협회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한국 공예가협회입니다. 회원은 약 1000명이 넘고요.
1970년대에는 1세대 현대 공예 또는 2세대 현대 공예 이렇게 그 무리를 발전적인 요소에서 관찰하면서 과연 이들은 한국의 전통 공예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조명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물성적인 분류를 하고 또 물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물성끼리 결합해서 전시가 이루어졌던 시기입니다.
그다음에는 미국의는 본을 따서 미국에는 교육과 표현에 있는 NCECA, National Council on Education for the Ceramic Arts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건 즉 뭐냐 하면 교육과 예술적 표현의 연합이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현대적인 그런 표현을 하는 흙을 만지는 사람들의 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 번째는 한국 조형 디자인 협회라는 곳이 있는데요.
여기는 그야말로 연구를 목적으로 해서 논문을 발제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협회입니다.
교수들의 조직에 의해서 어떠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 협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 하나의 분류는 국가 무형문화재인데요.
인간문화재를 지정합니다. 이것을 관리하는 중앙부처는 문화재청이라는 곳입니다.
따라서 인간문화재로 지명되면 일정 부분은 교육에 다시 이분들이 사회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1년에 몇 개의 강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수의 인간문화재는 사라져가는 공예를 보호하고 또 이것을 보존하고 지속되게끔 노력하는 그러한 국가 무형문화재의 지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상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고요. 이것의 기본 영향은 일본에서 받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본은 이미 1970년대에는 저희보다 훨씬 더 앞서갔죠.
전통을 저희보다 훨씬 더 중요시하는 일본은 옛 기술을 보전해야지만 현대화시킬 수 있다는 이념 아래서 이와 같은 무형문화재의 지명을 제도적으로 설립한 다음에 사회에 도입했습니다.
많은 부분은 효과적으로 운영이 됐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일본도 역시 저희와 비슷한 그런 현상들을 지금에 와서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보시면 갓을 만드는 갓 장인도 있고요.
또 은입사를 금속에 채우는, 입사라 함은 실 같이 얇은 은을 표면에 두들겨서 채우는 그런 기술을 보전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요.
또는 소나 짐승의 뼈를 태워서 우리가 화각이라 함은 이런 함을 만들고 또 결혼식을 위해서 예물을 담는 그런 함을 만드는 장인도 있고요.
또 활자를 금으로 찍는 그런 장인도 있고요. 다양합니다.
이것의 기반은 아주 오래됐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분업화됐던 것이 1970년대 오면서 1인 1체제로 한 사람이 만드는 것에서부터 이것을 판매하고 또 유지하고 교육하는 것까지 하다 보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죠.
전통 공예에 있어서는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이와 같은 교육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강남에 유치하고 있는 전수교육관은 앞서 말씀드린 그런 무형문화재들이 일정 기간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을 수 있고 이걸 오랫동안 듣게 되면 조교가 되어서 그 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거는 지난해에 제가 사라져가는 공예를 보존하기 위해서 전문가로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 공예의 많은 뿌리는 통영에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통영 지역에 발령 났을 때 이미 통영에는 가죽과 목공예, 나전칠기, 금속공예,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단합니다.
공예는 자연에서 주는 산물들을 자연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 재료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의지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통영은 이와 같은 자연조건이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가장 훌륭한 곳 중의 하나입니다.
나무도 많고 산도 있고 또 여기에는 바다에서 주는 그런 선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의 공예는 자연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통영이 이와 같이 12공방이라는 이름을 띄울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세 개의 군을 통제하면서 이 지역에 있는 재주꾼들을 한곳에 모은 것이죠.
어디에 모았을까요? 통영에 모았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위해서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영에서는 목공예, 가죽공예, 금속공예가 그 당시에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가죽공예는 말의 안장을 만드는 데 필요했고요.
또는 전쟁에 나갈 때 보호 측면에서 착용의 의미에서도 사용됐습니다.
금속은 제가 설명 안 드려도 무기나 또는 장치나 어떠한 그런 도구로써 필요한 재료였고요.
마지막으로 목기는 운반이나 바퀴나 이런 거에 사용했었습니다.
더 중요한 건 통영은 이미 조선 시대, 그 당시에 분업하고 있었습니다.
재료를 다루는 사람 또한 그거를 가공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그것을 장식하는 사람, 이 분업이 이미 조선 시대 때부터 굉장히 발달돼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수로가 있었기 때문에 공급이 쉬웠습니다.
그래서 중앙으로 공급하는 그런 통로도 있었습니다.
제가 1강좌에서 말씀드렸던 미술공예운동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통영에 있었습니다.
비록 공장이나 이런 거는 없었지만 분업화에 있어서도 매우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2022년에는 이러한 문화적인 통영의 조건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도시 재생 그리고 통영의 문화 보존을 위해서 통영 국제 트리엔날레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는 사라져가는 통영의 공예를 보여줬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통영의 나전칠기 그리고 통영의 대나무 발, 또 한 가지 통영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입니다.
얼마나 그 당시에 저희 조상들이 앞서갔냐 하면 전쟁에 필요한 신호기가 필요했는데요.
연으로 이 신호를 보여줬습니다. 대체적으로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붉은 점이 있는 것과 붉은 점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붉은 점이 있는 것은 발포하라. 붉은 점이 없는 것은 발포를 멈춰라 하는 신호였습니다.
통영의 연은 전체적으로 한 24가지가 있었습니다.
이 24가지는 전부 다 다른 의미를 담고 있고요.
여기에는 접이식 연이 아니라 아주 거대한, 거의 인체 크기의 연인 대연으로써 하늘에 날리면서 신호를 띄웠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과거와 현재가 조금 더 연결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연결이 되면서도 또 얼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가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은 이 현대성, 현재, 이 모든 것이 전통과 과거를 만드는 건데요.
우리 한국에는 오늘날 21세기 와서 아마도 어느 나라보다도 공예 부분에 있어서는 행사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공예에 있어서 어떠한 다양한 그런 행사가 있는지 여러분과 공유드리겠습니다.
우선적으로 크게 맥락을 보면요. 비엔날레라는 것이 있고 두 번째는 상업적인 요소들이 있고 세 번째로는 페어가 있습니다.
페어는 어떤 점에서는 상업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데요.
이 상업과 페어와 또 이것을 해외에 알릴 때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조금 성격들이 다 다릅니다.
경기 도자 비엔날레가 있고요. 두 번째는 공예 비엔날레가 있습니다.
비엔날레라는 행사는 bi, 2년에 한 번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매년 일어나는 공예 트렌드 페어, 공예 트렌드 페어는 한국에 있는 유일한 그런 페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비엔날레나 이런 행사들은 공공기관과 같이 협력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진행하기 위해서는 상당 부분 그 비용이 필요한데요.
주로 이 비용은 한국 문화체육관광부나 또는 지방자치단체 안에서 비용이 책정돼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런 부분에 있어서 예술 감독으로 있었는데요.
예술 감독의 역할은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몇 가지 제가 했던 사례들을 예시로 삼겠습니다.
2015년에 저는 한국에서 유일한 공예 비엔날레를 예술 감독으로서 진행하게 되는데요.
제가 맡은 부분은 기획전시, 공예의 방향성과 미래성을 제시해 주는 그런 부분을 맡았습니다.
주제는 손 그리고 그 이상의 것, 손으로 잇는다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잇고 또 더하라.
그런데 잇고 또 더하라는 것은 공예가 갖고 있는 물성에 있어서도 덧붙이고 직조로 짜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비엔날레를 할 때는 공예가 갖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보여주는 게 저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과 공예에 대한 배경을 설명드리고자 하는데요.
지금도 논의가 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화두는 지속 가능성입니다.
많은 재료들이 자연에서 오지만 이 재료들은 한번 버려지고 또다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주제 안에서는 재활용, 도구, 공존, 전통, 확장, 이런 것을 담았습니다.
공예에 있어서 도구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부분인데요.
손의 확장, 연장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또는 장인은 본인이 사용하는 도구를 쓸 줄 알아야지만 공예품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유산은 앞서 말씀드린 저의 전통과 역사, 또 이거에 보존에 있어서 한국에는 다양한 그런 컬렉터들이 있습니다.
컬렉터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좋아하는 공예품 또한 미술품, 디자인품을 모으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공예 중의 하나는 우리의 꽃인 화혜라고 하는 꽃신을 만드는 장인인데요.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일제 시대 때 만들어졌던 대량 생산을 위한 술병, 간장 도구, 이런 것들을 또 보여줬습니다.
나전칠기도 물론 보여줬고요. 지금 현재 서울 공예박물관에 가시면 허동화라는 컬렉터가 모은 약 4000여 점을 모은 조각보도 역시 전시를 통해서 공유했습니다.
조각보는 그의 역사성, 배경을 설명드리자면 조선 시대 때 옷을 만든 다음에 남은 자투리 천으로 만든 하나의 그런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에는 이것을 포장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도자, 이런 부분은 너무도 우리가 훌륭하게 잘하고 있어서 그것 또한 역시 전시에 담았지만 이것을 3D 프린터,
미래에 우리 아이들, 후손들을 위해서 어떻게 공예를 과학과 접목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따라서 제 전시를 통해서 저는 공예에 대한 확장성, 과학과 접목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아도 물레로 할 수 있는, 어떠한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전자 물레입니다.
3D 프린팅이 2015년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3D 프린팅을 보여주면서 영국 왕실에서 만들었던 모자와 갓을 접목시켜서 보여줬습니다.
CNC 커팅이라는 기계로 절단하고 접합하는 부분도 조명을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전시는 단순히 어떠한 예술품을 보는 그런 공간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제시도 하고 또 저희가 발전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같이 공유하는 어떠한 그런 의견들을 나누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부분들을 녹여서 전시를 통해서 보여주면서 과학이 줄 수 있는 산물들, 예를 들면 야광, 이런 조명이라든지 또 신소재라든지 이런 것 역시도 전시를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유리공예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유리를 녹이는 화로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24시간, 365일 가동해야 하다 보니 유리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전시에서 꼭 여기에 조명하고 싶었고요.
지금 보시는 이 설치 작업은 부산에 가면 F1963이라는 고려제강과 또 같이 확장됐던 작품인데요.
고무줄과 북한에서 떠내려온 나무를 응용해서 만든 설치 작업입니다. 보통 전시장이 운영 안 될 때는 이와 같은 그런 공간이죠.
제가 전시했던 청주 공예 비엔날레는 옛 연초 제조창, 담배를 저장했던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공간이 갖고 있는 원래의 형태도 전시에 담아봤습니다.
전시에 있어서는 트렌드, 플로, 소비자의 성격,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예술 감독으로서 이런 것을 제가 공부를 안 하고 연구를 안 한다면 여러분이 전시를 왔을 때 이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거지? 뭘 도대체 말하고자 하는 거지?
이런 의문점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공예 트렌드 페어는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소비 형태의 트렌드 페어입니다.
그야말로 여기 오셔서 마음에 드는 것들을 구매하고 또 애호하고 일상생활에 가치관을 도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그런 행사인데요.
지금까지 약 14년 동안 진행해 왔고 매번 여기에 주제라든지 컬러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릅니다.
저는 2016년에 여기에 예술 감독을 했었고요.
이 당시에 쇼핑의 개념을 처음 도입해서 판매를 촉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비엔날레와 페어는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해외에서 한국 문화를 알릴 때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미국을 생각하면 햄버거를 떠올릴 수 있고 할리우드를 떠올릴 수 있고 이런 고정관념들이 있듯이 그러면 한국을 떠올리면 어떤 것들이 서구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연상이 될까요?
가장 쉬운 건 도자기입니다. 2017년에는 제가 25명을 섭외해서 미국에서 페어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페어를 가면 설치하고 한국적인 그런 설치로 연출해야 합니다.
주로 작가들과 같이 가서 설명하고 그 공간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게끔 설명하는데요.
과연 미국인들이 우리 공예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까요?
또는 유럽인들은 우리 공예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공예 하면 해외에서는 청자, 청자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요.
그다음에는 달항아리, 이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 동안 스위스,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전시를 끊임없이 해 왔습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석 달까지 하는데 그걸 매일매일 운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 매일매일 설명하고 일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문화가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아직까지도 많이 해외에 나가서 활동을 못 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언어가 문제이겠죠.
다행히도 어린 나이부터 저는 이런 부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행사를 통해서 기관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하면서 계속적으로 학술적인 부분,
심포지엄 또는 전시, 페어를 통해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죠.
그러면 전시에 있어서 어떻게 홍보를 하는 게 가장 좋을지. 문화 교류,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하는지. 역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육적인 측면이 가장 중요하죠.
공간 안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또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고 또 이 사물이 갖고 있는 역사성에 대해서 설명하죠.
가장 중요했던 그런 행사 중의 하나는 2016년에 했던 한불 수교 130주년의 전시였습니다.
이 전시는 한국에 있는 대표적인 도자기를 바탕으로 해서 사진,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 이것들을 한 곳에서 다 보여줬습니다.
역시 이들도 고정관념이 있어서 이 전시를 구상할 때는 달항아리와 옹기와 또는 고려청자를 기반으로 해서 전시를 풀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들은 한국의 고려청자, 백자를 그렇게 우리의 문화의 상징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지금 보시는 오른편의 이미지는 신미경이라는 작가가 비누로 만든 도자기 형상들입니다.
이 도자기 형상들은 우리나라 또는 아시아에 있는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아서 비누로 만든 것입니다.
역시 이 작가는 서양에서는 어떤 것을 문화적으로 선호하는지를 인지하고서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다수의 작품들이 그런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만큼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한국의 청자와 백자를 중요시 여기고 이것을 한국의 상징성이라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그만큼 고온에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밖에 없었습니다.
그 역사성은 뿌리 깊게 있습니다. 17세기 유럽에 전파되면서 이들은 고온에 굽는 방법과 재료들을 연구했죠.
그러다 보니 여러 실패를 하고 도저히 과학적인 부분과 그 기술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유사한 것들을 아주 낮은 온도에 구울 수 있는 백색의 흙으로써 시도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작품은 조선 시대 백자에 있는 청화 무늬, 그러니까 갈색빛이 도는 철의 성분으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재해석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모든 영감을 전통, 역사에서부터 가져옵니다.
가져와서 이것을 본인만의 표현으로 바꾸는데요.
이 작가 같은 경우에는 미술 공부를 하는 데생, 데생을 기본으로 해서 조선 시대 때 백자 형태에 연필로 그린 유일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강좌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달항아리는 끊임없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버나드 리치를 통해서 루시 리, 오늘날 영국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달항아리의 근거를 오른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본창 작가는 그 달항아리를 찍어서 마치 달의 모습처럼 표현했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아마 전 세계에서 공예가 가장 많고 또 공예를 지금까지 선도하는 그런 박물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국에 가시면 반드시 가야 할 그런 박물관 중의 하나인데요.
프랑스에서 했던 한불 수교 전시는 성공을 거두어서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되죠.
하지만 전시라는 것은 공간이 매번 다르기 때문에 구상이 다릅니다.
따라서 박물관에서 했을 때는 원래 프랑스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축소된 그런 규모로 전시했고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한국 도자와 같이 전시했습니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19세기 말에 생겼는데요.
컬렉터에 의해서 컬렉션을 여기에 기증하면서부터 박물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생활에 관련한 그런 사물들이 가장 많은 박물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도자기는 20세기 초부터 박물관에서 수집했고요. 백자, 청자, 옹기, 이런 부분들을 갖고 있습니다.
보시면 다양한 기법으로 전통을 재해석하는데요. 왜 많은 현대 작가들은 전통에서 영감을 받을까요.
전통은 아마도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의 역사성 또는 우리 뿌리를 탐구하고 또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요.
지금 보시는 유의정 작가는 백자를 해학적으로 기존에 있는 21세기에 있는 브랜드들, 나이키라든지 애플이라든지 이런 것을 팝아트적인 표현을 하면서 거대한 항아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루이비통을 묘사한 그런 패턴을 도입한 거대한 항아리고요. 윗부분에는 애플에서 보이는 A 자, A 자를 여기에 부착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많은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면서 한국의 도자 발전을 여기서 이해할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그 이해에는 밀라노에 가서도 제가 전시했는데요.
거의 많은 지역에서 전시를 했다고 보시면 되는데 대표적인 곳이 영국, 밀라노 그다음에 미국인데요.
왜 이런 곳에서 전시했을까요? 왜 이게 아프리카가 아니고 또 호주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닌 이와 같은 장소에서 전시가 이루어졌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시는 단지 전시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교육과 소장, 소장의 가치,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권에서 전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번 전시가 될 때마다 이것이 박물관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중요한 기관으로 소장이 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죠.
이탈리아 밀라노는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
디자인으로써는 선도하고 있는 그런 도시라고 보면 되는데요.
주로 4월에 이루어지는데 역시 여기에서도 도자 전시를 제가 기획했습니다. 왜 또 도자일까요?
한국 문화를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도자 전시를 또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고정관념이죠. 고정관념 안에서 한국을 어쩔 수 없이 포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저의 예술 감독으로서의 역할입니다.
밀라노에 100년 넘은 건물 안에서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예술 감독으로서 하나의 전시 패턴이 있다면 있는데요.
공예에 있어서 도구를 보여주고 도구와 같이 재료에 대한 설명을 보여주고 그다음에 이것을 작품과 연결시킵니다.
여러분한테도 설명드릴 때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도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요리할 때 칼을 쓰고 또 어머니가 요리할 때 어떠한 용기에 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도구가 없어서는 완성할 수 없죠. 몰입도를 위해서 도자기만 보여줄 수 있게끔 인테리어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도 청자, 백자, 옹기, 그다음에 새로운 해석,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었습니다.
상당 부분은 항아리 형태가 보여지죠. 이번에 색다른 그런 시도를 했던 것은 옹기였습니다.
옹기라는 것은 1100도에 구워지는 흙을 말하는 것이죠.
옹기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위계질서가 없었던 모든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일한 그런 도자기입니다.
백자나 청자 같은 경우에는 궁이나 또는 그런 높은 선비들이나 사용했다면 옹기는 모든 사람이 쓸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옹기는 우리의 식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모든 사람한테 필수품이었습니다.
옹기도 각기 다른 그런 형태를 갖고 있는데요.
옹기를 중정에 보여주면서 전시를 이번에는 했었습니다.
이 전시는 매우 좋은 콘텐츠로 선정돼서 상을 탈 수 있는 후보까지도 올라갔습니다.
보여드린 바와 같이 연출에 있어서는 이번에는 백자나 청자가 아닌 옹기가 가장 중심이 돼서
우리 식생활, 또는 우리의 식문화와 좀 더 밀접하게 서양인들한테 보여주는 것이 전시의 의도였습니다.
제가 계속 하는 용어가 있다면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말인데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공예에 대한 역사가 거의 7000년이 넘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 7000년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현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통과 역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립 민속박물관은 우리나라의 공예를 잘 보여주는 그런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다면 특히 식문화, 의식주, 이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국립 민속박물관 또는 얼마 전에 생긴 서울 공예박물관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K-크래프트, 이번 강좌의 설명은 K-크래프트의 어떤 해외적, 글로벌한 시선 또는 과연 우리 공예가 해외에 잘 전달될까요 하는 그런 질문을 품고서 한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로에베 파운데이션, 그러니까 명품 회사인 로에베, 가방과 가죽 공예로 잘 알려진 이 기관은 2017년부터 혜성 같은 어떤 행사를
공예 부분에 만들면서 공예 분야를 지금 발전시키고 바꾸고 있습니다.
많은 명품 회사들이 그 공예에 손을 댔지만 로에베 재단처럼 효과를 본 그런 럭셔리 브랜드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1700년도 말에 있었던 가죽 공방, 로에베.
그 정신을 담아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거는 공모전 형식으로 전 세계에 있는 공예가들을 섭외하거나 또는 공모전에 응시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제도가 있는데요.
작년에 2022년에는 한국 서울에 있는 서울 공예박물관에서 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전시가 이루어지면서 이 공모전에 3000여 명이 시도했는데요.
매년 로에베 공예상은 30명만 뽑아서 전시하고 우승자를 선정합니다.
역대 우승자는 한국인이 없었죠. 작년까지는요. 그런데 작년에 2022년에는 한국인이 우승했습니다.
보시면 1회 때, 2017년에는 독일인인 목공예가 상을 탔고요.
2018년에는 도자인 영국인이 상을 탔고 2019년에는 옻칠로 일본인이 탔고 2022년에 와서야 비로소 한국이 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우승자는 다름 아닌 37살의 정다혜 작가입니다.
정다혜 작가는 사라져가는 말총공예를 살렸다고 보면 되고요. 현재로서는 한국을 알리는 문화 홍보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총으로 탕건, 망건, 그러니까 갓 속에 쓰는 그런 장식을 만들었던 것을 영감을 받아서 패턴을 적용해서 투명한, 거의 바구니의 형태와 유사한 이러한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창작가들을 이 형태를 보고서는 어디서 보지도 못한 그런 새로운 형태라고 말하면서 우승자로 선정했죠.
로에베 브랜드에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조나단 앤더슨은 단번에 이 정다혜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앞으로도 작품을 더 만들면 반드시 본인한테 먼저 보여달라.
그만큼 나는 정다혜 작가의 작품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이 물성이 갖고 있는 또는 이 창작이 갖고 있는 혁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작가들은 이 상에 매번 선정되었습니다.
2017년부터 조명해 보자면 지금까지 한 30명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자에 배세진, 그다음에 도자에 김상우, 유리공예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유리 파이널 리스트로 선정된 김준용 작가,
섬유 작가로서 베테랑인 장연순 작가, 옻칠로써 장인의 정신과 또 혁신적인 색감을 가진 정해조 작가.
훌륭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보신 많은 이 공예가들은 전통을 기반으로 해서 형태나 재료의 사용, 표현에 있어서 본인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금속에 손계연 작가, 장신구에 고희승 작가, 한지를 이용해서 한지를 꼬아서 만든 이영순 작가, 투명한 소재로 옷을 만드는 김민희 작가,
조성호 금속 작가는 궁궐이나 역사적인 건축물에서 탁본을 따서 금속에 이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리 작가인 이지용 작가, 도자는 설명 안 해도 한국으로는 한국 하면 도자 할 정도로 잘 알려진 그런 부분이 있어서 당연히 도자는 여기에 해당이 되죠.
옻칠, 옻만으로도 형태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물성에 집중된 박성열 작가. 리스트는 무궁무진합니다.
이들이 우리의 K-크래프트를 현재 지켜주고 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속적으로 해외에 노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에베라는 명품 회사의 브랜드를 통해서 이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성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죠.
2021년에 파이낸셜타임스는 드디어 때가 왔다.
K-크래프트의 시기가 왔다. 모든 사람이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다혜 작가에 관련한 자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이 말총을 이렇게 함으로써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문화에 있어서 큰 기여를 했죠.
얼마 전에 있었던 영국에서의 유일한 공예 페어인데요. 여기에서도 우리의 현대 유리가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K-공예에 대해서 오늘은 설명드렸는데요. 어떠셨는지요?
한국 작가들이 활발하게 작품을 만들고 개발하며 자신들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 내수 시장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아직까지도 수요 부분에 있어서는 저조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공예를 많이 사랑해 주셔야 합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다움을 찾아가는 장인이 되어야 한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남을 탓하거나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 많죠.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수년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죠. 저는 이러한 측면에서 저의 마음가짐을 하나의 장인정신이라고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공예를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외로움 속에서 나다움을 찾아가는 하나의 기술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함에서 보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적인 그런 선택에 의해서 이들은 매일매일 본인이 하는 것을 지키면서 지속하고 있습니다.
손재주는 한국 따라갈 그런 문화권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손재주는 세계적으로 이제 인정받는 시기가 왔습니다.
지금 한국 문화 예술 콘텐츠는 대세입니다.
더 잘해야겠죠.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 조혜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4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빚내서 사업을 늘려놨는데 장사가 안되기 시작하죠.
물가가 올라간다는 이야기는 화폐 가치가 하락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인플레가 좋을까요, 디플레가 좋을까요?
가격이 내려가면 그 순간 수요가 확 늘어납니다.
인플레이션은 안 좋다고 했는데 왜 이게 좋은 것처럼 보이지? 이게 좋은 인플레이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