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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1교시 - 공예, 어디까지 알고 있니? (조혜영 / 전시 기획자)

등록일 : 2023-04-24 15:52:12.0
조회수 : 490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에서
강연을 맡은 조혜영입니다.
저는 공예 전문가이자 전시
기획자입니다.
2002년부터 저는 분야에서 다양한 여러
가지 연출을 해왔습니다.
     
공공 기간과 같이 협력하면서 전시, 페어
또 한국 공예를 해외에 알리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가로 시작한 제가 어느새
행정 일과 또 전략을 세우는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유네스코 등재에 기관, 또는
비영리 기관, 여러 가지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동을 해왔습니다.
오늘은 여러분하고 같이 공예에 대한
이야기를 할 텐데요.
알고도 계시겠지만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공예라는 그런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이것은 일상생활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우리의 역사, 전통 그런
역할을 하는 분야라고 보시면 돼요.
그리고 직업군에 있어서도 미래에는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요.
그 이유는 융합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부분에 있어서 같이 이렇게 협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다양한 구도를 갖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첫 번째로 공예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런
부분들을 먼저 아우르면서 제가 이야기를
풀어나갈 텐데요.
여러분이 얼마만큼 또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는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주
원론적이고 기초적인 이야기부터
나누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공예, 어디까지
알고 있니입니다.
그럼 우선 공예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예에 대한 용어적인
정의 또는 그 배경에 대한 정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지금 보시면 달항아리가
있습니다.
이 달항아리는 저희가 약 17세기의 것을
추정하는데요.
달의 형섕을 닮았다고 해서 달항아리라고
저희가 후에 지칭을 하는데 사실은
두 개의 큰 사발을 접합해서 만든
항아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용도는 액체를 담기도 했고 또는 여러
가지 곡물을 담았다고도 기록에 남아
있는데요.
달항아리는 사실상 대호라는 용어로
저희가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맞습니다.
대호는 지탱하기 위해서 한 번에
만들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개의 사발을 만들어서 접합한
것이고요.
지금 보시는 이 항아리는 굉장히
세계적인 이목을 받았습니다.
이호는 약 400만 달러의 고가에서
경매에서 이게 팔렸던 그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금 보시는 이 사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입니다.
물론 사진을 찍은 사람도 유명한 셰실
비튼이라는 영국의 사진가고요.
소장됐던 이 소장처가 한국을 알리는
장본인인 버나드 리치, 영국인인 버나드
리치가 이 항아리를 알림으로써 한국의
도자기가 전 세계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는 1930년 이 당시의 항아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에 와서 이 항아리를 소장한 후
영국으로 돌아가서 생을 다하기 전에
영국의 유명한 루시 리라는 도예가한테
이 달항아리를 전달했죠.
루시 리 역시도 오랫동안 이 사물을
즐기고 지켜보고 작업실에 소장했다가
본인이 세상을 뜨면서 영국의 가장
유명한 영국 박물관에 기증하게
됩니다.
이 달항아리를 발견한 구본창 사진작가는
후에 달항아리를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는데요.
그 접근으로 인해서 세계에 있는 한국의
모든 백자를 기록으로 남아서 작품으로
발전시키죠.
그만큼 한국의 달항아리는 의미가 있고
또 우리의 옛 삶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근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의 중요성을 또 알아본을
악셀 베르보르트라는 컬렉터는 권대
사업의 현대 달항아리를 컬렉팅하기
시작함으로써 전 세계 달항아리의
중요성을 한층 더 알리게 되는 역할을
하죠.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그런 미술적인 또는
아름다움을 담은 공예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공예라는 용어 안에서는 실용성 또 미
그다음에 기술, 이런 말이 담아
있습니다.
이것의 근거는 그리스어의 테크네 또
라틴어의 아르스에서 아트.
기술과 미가 만났다는 의미를 전파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기능, 실용적인 부분과
장식적인 부분 또는 응용 미술,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호모 하빌리스라는
우리의 인류 발전 안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도구를 사용하면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창작을 하고 또 생존에
의해서 뭔가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의 기초는 저희가 손도끼라고
하죠.
결국 우리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 이
모든 걸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공예라는 것은 항상 그 시대성.
그렇기 때문에 현대성을 담아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경제, 사회, 종교, 이념 그다음에 사상
이런 발전에 의해서 우리가 매일 쓰는
사물들, 삶에 있어서 그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보시면 되는데요.
그 가치관의 기본을 하는 것이
의식주라고 보시면 됩니다.
의식주는 매일 저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죠.
원시인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지금 우리가 쓰는 반의반의 사물도 쓰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생존하는 것, 아주
가장 기본적인 것만 그들을 필요했죠.
하지만 인간이 진화하면서 그런 우리의
생활 패턴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의 근거는 저희가 기원전 1만
5000년에 있던 알타미라 스페인의
동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알타미라 동굴에는 동물과 또 그 삶에
있어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미술적인 측면에서는 것이를 우리가
어떠한 근거라고 하는데 사실상 이것은
일상생활의 기록이고 주술적인 부분이
있었고 그다음에 이것들은 무언가 경고
또는 조심해야 하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그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손도끼.
손도끼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가장 오래됐다고 하는 것은 케냐에 있는
지금 보시는 이런 돌도끼입니다.
이 도구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상생활에 먹고 또 삶에 있어서
살아가는 데 필요했던 기본 도구라고
보시면 되는데 약 33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동일하게 한국에 남아 있는 근거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있는데요.
벽화가 지금 한국에서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근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벽화는 무용총
수렵도라고 하는데 배경을 보시면
풍경이 있고.
그다음에 앞에 보시면 산수가 있고
뒤에는 짐승을 사냥하는 한 사람의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용총에서 손님맞이하는
벽화가 있는데요.
이 벽화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그 당시
사람이 살아가는 배경들은 어땠는지
윗단을 보시면 헝겊으로 지붕을 싸맨
장식이 있고.
밑단에는 찬과 음식이 차려진 손님맞이
준비의 그런 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금 등장하는 사람들의
의상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안압 3호분에서 찾아진
벽화인데요.
이 벽화에서는 당시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주방과 푸줏간 안에는 음식을 끓이고
굽고 또는 앞에 있는 푸줏간에서는
음식을 보관하는 장면을 근거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에서는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시의 생활을
볼 수 있는 빵을 만들거나 또 이것을
어떻게 포도주로 만들거나, 재배하거나,
그런 모습들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생존하는 데 있어서는
삶의 방식들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이거는 1200년 무렵에 소와
쟁기를 가지고 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만 있었다면
사람이 진화하면서 농사를 짓고 직업을
갖게 되면서 무리를 이뤄서 삶을 발전해
나가는데요.
그때는 이념과 종교 이런 것들이 사회에
도입되기 마련이죠.
그렇게 하면서 공예는 더 많은 사물들과
또 더 많은 의식에 의해서 많은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공예 역사에서 한국에서는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한번 저희가 같이
보시죠.
공예라는 용어는 사실상 조금
뭉뚱그려진 그런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기록을 찾아보면 드물게
백공기예라는 그런 근거 안에서
찾아지는데요.
일제강점기 때 번역을 하면서 산업과
미술, 하나의 일상생활 표현에 있어서
뭉뚱그려진 그런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학자들이 이 용어를 조금 더
연구하고 발전시킬 필요성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아직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영어로는 공예라는 부분을
크래프트라고 하고요.
일본어로는 코우게이라고 하는데 조금
더 각 나라의 언어에서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의 공예를 보게
되면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나누어지는데요.
여성의 공간에서 만들어졌던 공예는
흔히 규방공예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는 조각보겠죠.
조각보와 발 그다음에 신발.
이런 것들을 저희가 규방공예 안에서
규명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수, 이런 것들도 거기에
속하는데요.
지금 보시는 이 이미지는 박을복이라는
근현대에 아주 한국에서 유명한 그런
장인이 만든 자수 병풍과 방석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의 공간에서는 사랑방이라는 공간
안에서 많은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손님맞이를 했고 선비들은 글을
읊고 시를 낭송하고.
또 저희가 문방사우라는 도구를 통해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지금 보시는 이 작품은 조선 시대 때의
근거를 재해석한 이용호 도예가의
작품이라고 보시는 됩니다.
하지훈 디자이너는 그 당시 사랑방에서
사용했던 가구를 재해석해서 이와 같이
표현을 또 했죠.
참으로 조선 시대의 그런 사물들은
차분하면서도 고풍스럽고 또 선비들의
그 기풍을 담은 표현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대량
생산이라는 것을 처음 소개하기
시작하는데요.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산업이
발달했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공방 안에서는 술을 담거나 또는
젓국을 담거나 음식을 담을 수 있는
용기들을 도자기로 이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보시면 여기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요.
이 글자는 어느 공방에서 무엇을 담았던
그런 도구라는 표현으로서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예에 있어서 미술공예운동은 떼어놓을
수 없는 큰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1880년도부터 1910년까지 우리가 이
부분을 미술공예운동의 대략적인
시기라고 보는데요.
이거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같이
동일하게 있었던 운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산업혁명은 결국 1880년도부터 1910년
시기를 말하고 있는데.
15세기에서 17세기에 있었던 유럽
봉건제도가 붕괴하면서부터 사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수출입 산업이 발전되고 또
이것이 시작이 된다고 보시면 되는데요.
다양한 여러 가지 영향을 결국은
받아들이는 그런 시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시기는 한국에 있어서는 조선 시기
말 또는 대한조선이 되는 그런
시기였는데요.
한국에 있어서는 그런 산업혁명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추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술공예운동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미술공예운동을 가장 앞서서
이걸 선도했던 나라는 영국이라고
보시면 되고.
영국에서 이 운동이 미국으로까지
전파가 되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흐름에
의해서 그렇게 전파가 됐는데요.
우선 어떤 이유로 이런 운동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있었던 유럽의
봉건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18세기, 19세기의 수출입
산업이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이것의 시작으로 인해서 많은 문화권의
영향을 유럽에서 받기 시작을 하죠.
너무도 잘 알려진 파리박람회도 있고
일본과의 그런 교섭을 통해서 일본의
문화가 유럽에 전파되는 그런 시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산업혁명은 어떠한 발전을 사회에
도입시켰을까요?
사상과 이념에 있어서 대량 생산이라는
부분이 가장 큰 그런 변화였고요.
그러면서 이제 기계 발명, 새로운
발명으로 인해서 모든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발명은 곧 대중교통이라든지
소통이라든지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는
부분에 있어서 훨씬 더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공예로 이때까지 작업을
해온 그런 장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수공예적인 것들, 손으로
만들어지는 공예가 없어질 것을 우려하기
시작을 해서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미술공예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들만 가지고 이런 운동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상가들 또 애호가들 또는 이걸
소장하는 그런 사람들과 동일하게, 같이
이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데요.
이 당시에는 17세기 이전과 다르게
손으로 만들었던 사물들이 어떠한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뭐랄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시다시피 손으로 만들었던 자수나 또
직물과 직조로 한 땀, 한 땀 짰던 것들을
이제는 기계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21세기에
와서는 AI.
지금 한창 화두가 되고 있는 이런
부분들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AI로 인해서
우리가 하고 있던 그런 직업.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죠.
따라서 공예로 말할 것 같으면 더 이상
우리가 손으로 안 만들어도 되고 기계가
이거를 대체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우려이죠.
그 당시의 사람들도 저희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발명으로는 뮬
방적기인데요.
새뮤얼 크럼프턴에 의해서 손으로
만들어졌던 섬유, 직물들이 이제는 대량
생산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대량 생산에 의해서
버려지는 많은 의류들, 옷들 또는
섬유들.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죠,
21세기에서는.
그래서 저희가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지금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요.
당시에는 그것보다는 빨리 무언가를 많이
만들어서 이것을 여러 곳으로 운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그런 시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 21세기에 와서는 이런 것들이
근거가 돼서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는
그런 브랜드들, 유니클로라든지
무지라든지 또 한국에 있는
에잇세컨즈라든지 일회용으로 거의
취급되는 이런 현상을 지금 보고 있는데
당시에는 이런 기계 발명들은 엄청난
혁명이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면서 두렵고 또 과연
손으로 했던 이 모든 기술이
사라질까.
현재 우리는 AI라는 것을 Artificial
Intelligence로 비슷한 그런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을까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AI로 인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직업들이
없어지는 거는 아닐까요?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량 생산을 하는 데서
또 중요한 그런 요소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요소는 대중교통이었습니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차를 만들면서
기차라는 것이 만들기
시작합니다.
기차라는 것을 이제 운영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저희가 이제 수단이
필요했는데요.
철도가 만들어지고 또 수로가 만들어지고
길이라는 이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죠.
결국은 공장에서 만들어졌던 이런
물건들을 도시와 도시로 연결할 수
있었고 빠른 시간 안에서 물류를 운송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량 생산에 있어서 이것이 도시와
도시로 옮겨진다는 것은 필수적인 그런
사회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런던에서는 1863년에 지하철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하철은 도시와 도시를 시간을
단축하면서 좀 더 빨리 연결할 수 있었던
교통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런던에 가셔도 그 당시에 사용했던
그런 기관차들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결국 대중교통이 발달한다는 것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면서 소통, 교류, 교섭
또는 무역 이런 것들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역시 그렇게 하면서 도시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예전에는 여러 곳에서 살았다면
도시가 가장 핵심이 돼서 도시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죠.
그러면서 라이프 스타일이라든지 생활
방식이라든지 생활에 사용되었던
의식주가 변하기 시작하죠.
지금 보시는 이 이미지들은 그 당시의
런던과 맨체스터의 그런 형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우리의 삶과 삶의
가치는 바뀌죠.
속도도 빨라지고 또 사용하는 일상생활의
그런 도구들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저희가 이제 19세기
후반에서부터 보았던 현상들인데요.
산업 혁명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새롭게
평가되면서 바뀌기 시작합니다.
대량 생산에 의해서 빨라지고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만들 수가 있지만
수공예적인 부분들은 아무래도 그
퀄리티나 이런 가치에 있어서는 많이
저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손으로 작업하던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문화 애호가들
또는 이것을 지키기 위한 여러
철학가들이 있었다고 보시면 되는데
이념과 또는 생각과 철학은 우리의
발전에 기여를 하는데요.
저는 지금부터 세 명의 사상가들을 소개
드리겠습니다.
그중 하나는 네오고딕 양식을 주장했던
건축가 푸진이 있었습니다.
푸진은 그 당시에 디자인이라는 그런
용어가 없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인 이론을 만들었던 그런
장본인이고요.
이런 디자인 이론을 만들면서 예술 또는
미술 이런 것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시대에 필요한 그 예술의 감성을 충분히
연구하면서 대량 생산에 대입될 수 있는
뭔가의 이념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근거를 찾았을 때는 고딕 양식, 중세의
그런 이론들을 도입시키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이 당시에는 자연 또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던 그러한 구축에 있어서의
그런 기초를 다시 재조명하자는 의미에서
이것들을 다시 평가하고 또 가치관을
새롭게 하면서 시대에 맞는 이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푸진을 이어서 러스킨은 이분은 시도
쓰고 글도 남기고 건축에도 비평을
하는 그러한 문화인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문화와 또 철학과, 또는 이러한 미술
문화 운동에 있어서는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표적으로 베네스의 돌.
The Stones of Venice라는 그런 책을
써서 알려졌는데요.
역시 여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영국인들이
흔히 이탈리아에서 영감을 받았던 건축
양식 또는 문화적인 발전 또는 생활,
이런 것들을 도입시켰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량 생산에 의해서 없어져 가는
수공예에 대한 이념들을 보존하는 데
있어는 기본적으로 노동 또는 예술의
가치 이런 것들을 주장했는데 노동에
있어서는 편리함도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 안에서는 이 편리함에
의해서 자연과 같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편하면서도 또 이것을 자연과
밀접하게 지켜나가는 양식들을 탐구하기
시작했죠.
그거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고딕
양식이라고 보면 되는데 고딕 양식은
자연과 아주 비슷하게 규칙적이지
않았다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영감을
받았고 아치와 아치 사이에 그런 기둥,
이 사이에서 그 공간적인 면들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지요.
푸진과 러스킨의 이념을 확장했던 그런
장본인은 윌리엄 모리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그야말로 미술 공예
운동의 선구자라고 보면 됩니다.
지금 저희가 알고 있는 이 모든 미술
공예 운동에 있어서 이념들은 윌리엄
모리스가 푸진과 러스킨의 그런 생각을
통합시켜서 실제로 실현하고 구현하고
발전시켰다고 보면 되는데요.
모리스는 어린 나이부터 시를 쓰고
정원을 가꾸고 이러한 문화적인 부분에서
충분히 만끽하면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부유한 가정 안에서 포도밭을 가꾸고
정원을 가꾸고 문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 안에서 에핑이라는 그
숲속에서 자연을 발견하죠.
후에는 윌리엄 모리스는 이것을 벽지로
표현하기도 하고 직물로 따비를
만들면서 표현하죠.
모리스는 라파엘 전파의 그림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라파엘 전파의 그림 안에서는 고딕
양식에 있는 건축과 또 그 당시에 정원을
가꾸는 묘사된 자연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모리스가 후에 모리스 상회라는
트레이드, 이런 걸 통해서 본인이 만들고
싶은 것들을 여기에서 다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이념을 주장할 수 있었던 모리스는
유년 시절이 굉장히 부유했고 아버지는
포도주를 생산했던 그런 상인이었다고
하는데요.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아시다시피
이런 포도의 품질이라든지 또는 그것을
포장하는 용기라든지 이런 것들이
겸비돼야 했었습니다.
많은 시간을 정원을 가꾸고 또 시를 쓰고
어떠한 몽상적인 것들을 관찰하면서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보면 되는데 유년
시절은 거의 에핑 포레스트 영국에 있는
에핑 포레스트에서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수공예와 접목을 시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이런 문화 애호가들은
한 가지만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시를 쓰고 글을 쓰고 또는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이런 어떠한
풍류를 즐겼다고 보시면 되는데요.
이것을 하면서 본인들이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연구하고 또 거기에 있는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본인들의 지식을 더
확대했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이제 모리스 같은 경우에는
섬유도 했고 또 그림도 그렸고 시도
쓰면서 건축까지도 공부를 했습니다.
이들은 다 학식도 매우 출중했고 또
깊이와 그 방대함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훗날 그런 영향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모리스의 가장 훌륭했던 작업은 본인이
살았던 신혼집으로 했던
더 레드하우스.
뭐 누구나 그런 집을 만들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레드하우스는 아직도 영국에
존재하고 미술 공예 운동의 근거를
연구하시겠다고 하면 반드시 가야 할
그런 명소 중의 하나입니다.
아직도 영국에 가면 여기를 방문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레드하우스가 단지 집을 설계하고
장식을 하는 그런 근거로써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요.
그 당시의 시대적인 이념을 가장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장인들을 모아서 만든 집이라고
보면 됩니다.
러스킨과 푸진이 주장했던 자연의 그
불규칙, 고딕 양식의 아치형
그러면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간.
이런 것들을 살려 천장은 고딕 양식으로
만들되, 뒤에 있는 이 선반은 그 틀을
응용해서 반영해서 실용에 아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어떠한 선반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책도 여기에 담고 또 접시 또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사물들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의자 역시도 팔을 걸 수 있고 하는
양식을 이 집 안에 담았다고 합니다.
물론 누구든지 이렇게 최고급품으로 집을
치장하면 좋겠지요.
하지만 모리스가 이렇게 미술 공예
운동을 할 당시에 모리스에 반발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하나의 집을 이와 같이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요.
또는 재료와 또는 그 디자인을 하기 위한
장인들을 고용해서 사용하기란 상당수의
비용이 들었겠지요.
지금 보시는 이 레드하우스에서는 최고의
벽지, 최고의 따비로 인해서
양탄자에서부터 가구까지
그다음에 심지어 가구를 씌우는 섬유
직물까지도 모리스가 모두
디자인했습니다.
이것의 가장 축소된 샘플은 영국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 이 방은
모리스가 사용했던 벽지, 자연의 꽃들,
들꽃들을 반영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미술공예운동은 이와 같이 발전되면서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러스킨의 이념과 모리스의 이념이
접목되면서 당연히 단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요.
이 단체들은 수공예품의 장인들 또는 그
사라져 가는 기술들을 보존하는 측면에서
길드라고 합니다.
길드라는 것은 연합입니다.
연합이 만들어지면서 본인들이 갖고 있는
사업을 지켰고 사라져가는 수공예품들을
살릴 수 있는 그런 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단체가 만들어지면서 또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교육이 필수적으로
필요하죠.
영국에 있는 상당 수준의 그런 학교들은
그 당시에 만들어졌습니다.
길드가 형성되면서 교육까지 확장되는데
교육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에
있는 미술 교육의 근거를
미술공예운동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재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라고 하는
영국의 미술 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는 이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보면
되는데 교육 과정 역시 지금까지도
당시에 실시했던 교육 과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만들어지면서 교육이 전파되면서
미술의 양상은 다양한 변화를 또 겪게
되죠.
바우하우스까지 가기 전에는 아르누보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아르누보 움직임은 결국 동양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시면 되는데.
아르누보라는 용어 안에서는 새로운
미술, 새로운 미술의 양상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선보다는 곡선, 곡선에서는
자연의 영감.
오스트리아가 이것의 가장 좋은 예시라고
보면 되는데요.
아르누보의 건축 양식은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전파되어서 바우하우스에서는
보다 미술 양상, 디자인의 이념 또는
공예적인 기술, 모든 것을 겸비해서
바우하우스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의 장본인은 발터 그로피우스.
1910년에 건축 안에서 보이는 미술, 건축
안에서 보이는 디자인 그리고 공예.
결국은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를 담은 거죠.
모리스의 영향은 영국에서만 진행됐던
것이 아닙니다.
후에 나아가서 미국까지도 이것이
전파되는데요.
미국에서도 모리스의 상회와 동일하게
여기에서는 티파니라든지 금속과 유리,
이런 것을 접목한 상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죠.
상품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게
상품이라기보다는 수공예적인 어떠한
디자인된 사물이라고 보시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역시 아르누보와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서
그 당시에 만들어졌던 티파니의
조명이라든지 금속 공예는 곡선 표현을
충분히 하고 있죠.
다시 돌아가서 바우하우스의 정의를
보자면 바우하우스는 결국 집을 짓다,
조착시키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건축이 기반이 된 미술공예운동을
펼치자.
이렇게 하면서 디자인이라는 이념이
여기에서부터 발생하죠.
바우하우스는 교육과 또는 디자인과
미술의 양상을 충분히 연구하면서 건축
안에서 이것을 어떻게 반영시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하는 것을
탐구했죠.
지금 보시면 당시에 그런 사상들이
만들어졌던 본고장이라고 보십니다.
독일에 드레스덴 지역에 있는 바우하우스
건물입니다.
미술 학교도 그렇고 많은 유럽에 있는
문화 시설들은 건물은 굉장히
소박합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물에 인해서 후에
만들어지는 미술 학교들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건축에 있어서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어찌
보면 공장 건물 같은 그런 형상을 띄고
있어서 후에 이것을 다시 관찰했을 때는
매우 아름답지 않은 건축이라고도 비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우하우스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또
하나의 디자인적인 측면인데요.
디자인의 이념에서는 물론 입체적인
사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평면에
담은 텍스트, 그래픽 디자인이죠.
결국 글자와 또는 이미지, 이것들을
이념을 심어서 발전시키면서 이것을
저희가 Editorial이라고 하는 편집.
편집의 개념 또한 발전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잡지의 근거가
지금 보이는 이 이미지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요.
글자 또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영역
안에서 시각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요소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라는 말을 텍스트로
이렇게 디자인하거나 잡지의 형태로
만들어져서 매번 발간하거나 하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바우하우스 잡지 안에서는 그 당시에
실시됐던 교육 그다음에 생각, 철학들을
담았습니다.
색채, 사물, 움직이는 요소들 또는 영상,
사진, 여기까지도 바우하우스는
발전시켰다고 보시면 됩니다.
내용적으로는 바우하우스에서 했던 모든
교육 프로그램과 디자인적인 이념과 또는
이것을 상품으로 발전시키는 그러한
내용들을 담았겠죠.
바우하우스의 대표적인 교육 중 하나는
의자를 만들고 가구를, 건축을 기반으로
했던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주
안에서 건축과 조화가 되는 사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것의 기본은 의자였고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사물들인데요.
지금 보시는 이 의자들은 현재도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매우 중요한
디자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색채도 상당 부분
중요한데요.
우리가 흔히 어떤 사물을 컬렉팅하거나
구입할 때는 색채에 우선적으로 시각적인
자극을 받아서 우리가 컬렉팅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제프 알베르스는 바우하우스
안에서 색채를 전담했던
교사였는데요.
색채에 있어서 보색 대비색의 적용을
충분히 연구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색을 서로 상호적으로
대비하느냐에 따라서 공간의 개념 또는
공간의 느낌, 공간적인 지능, 이런
것들이 감지되었다고 그는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터랙티브 오브 컬러는 바우하우스의
대표적인 교재였습니다.
보시면 지금 주전자도 있는데요.
주전자 역시도 건축적인 요소를 담아서
각지거나 또는 어떠한 직선이라든지
직선과 곡선의 대비라든지, 이것을
충분히 조형의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그냥 주전자가 아니고 이 주전자는
기능도 있지만 시각적으로 아름다워야
했다는 거죠.
따라서 아름다움과 편의성, 이것을 앞서
설명드렸던 공예적인 테크네와 아르가 다
겸비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공예미술운동이 과연 유럽에만
전파됐을까요?
동시에 일제강점기에는 민예운동이라고
있었습니다.
흔히 영어로는 밍게이 무브먼트라고
하는데요.
민예운동은 역시 산업화 되는 그 현상
안에서 일본에서도 대량 생산을 우려하던
그런 상황에서 민예 공예 또는 어떤
커뮤니티, 굉장히 민속적이고 토속적인
것들을 선호했죠.
따라서 이 시기에는 손맛이 나는 것들을
찾아다니면서 결국 버나드 리치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까지 오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공예품에서 아름다움을 찾게
되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앞서 보여드렸던 달
항아리였습니다.
그 달 항아리는 버나드 리치가 1930년에
컬렉팅을 해서 영국으로
가져가면서부터 이것이 알려지기 시작을
하죠.
버나드 리치는 한국의 공예를, 도예를
특히 알리는 장본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특별한 교육 과정을 통해서
미술공예운동은 수공예적인 것을 지켰지만
이것을 더 나아가 하나의 상회를
만들었습니다.
상회를 통해서 그래픽 디자인이
만들어지면서 발간, 잡지를 만들기
시작을 했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라이프 스타일의
그런 잡지들은 여기에 근거를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안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담아서
전파를 하는 역할을 굉장히 중요시
여겨서 우리뿐만 아닌 대량 생산에
대립될 수 있는 운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어떠한 미술 양상 또는
수공예적인 것 또는 그것의 가치, 그것의
퀄리티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지만
텍스트를 통해서 근거를 남기고 전파를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지금 보시면 바우하우스의 그런 교육을
했던 선생님들인데요.
가장 여기서 유명했던 분들 중의 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조셉 앨버스, 칸딘스키
또는 클레 이런 분들이 회화를 통해서
음악과 또는 움직이는 모션 픽처 그래서
결국은 영상까지도 발전시켰다고 보는데
교육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그런 역할이
가장 중요한데 공예미술운동에 있어서는
바우하우스가 생존할 수 있었던 근거는
이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공예에 있어서는 공예
발전, 산업혁명이
오히려 큰 작용이 되었는데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모리스와 같은 사람들이 벽지를
만들고 가구를 만들고 또는 집을 치장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면 또 이것이 더 확장되어서
잡지, 라이프 스타일 이런 것들이
파생되기 시작을 합니다.
역시 모리스가 주장했던 같은 이념을
바우하우스에 도입을 해서 동일하게
모리스 상회에서 했던 그러한 행위들을
바우하우스에서는 한층 더 발전을 시켜서
이것을 하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만들어져서
30년까지 이어오는데요.
2차 대전으로 인해서 이 많은 제주가
있는 예술가 또는 이거를 전파할 수 있는
철학자, 이 모든 분이 미국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이 주장했던 모리스와 러스킨의
이념들은 미국으로도 전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동일한 그런 움직임이
있었고 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잭슨 폴락
이런 분들이 탄생을 하게 됩니다.
표현주의는 미국 동부로 들어가서 동양의
하나의 점을 찍거나 또는 여백을
표현하거나 이런 것들로 파생이
되면서부터 전파가 됩니다.
역시 버나드 리치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당시에 1950년에 미국으로 가서 밍게이
운동을 전파를 하게 되면서부터 동양의
공예적인 이념들이 서구에 표출되기
시작을 합니다.
이것이 확대되어서 어떠한 기능적인 것,
수공예적인 것이 미국에 역시도 도입되기
시작을 합니다.
따라서 미술공예운동은 여태까지 우리가
디자인적인 이념 또는 손으로 만드는
어떠한 장인 정신의 근원이 된다고
보시면 되고 공예 현대화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오리진 역사, 전통의
확장이라고 정의를 하는 게 더욱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번 강연에 있어서 공예가 갖고 있는
기본 의미와 배경 그리고 현대 사회에
적용되기까지 다양한 그런 변화,
사회적인 변화에서부터 미술 양상에
있어서의 변화, 그러면서 산업혁명을
통해서 발전되고 있었던 사회적인 위기감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 내용들을 통해서 공예에 대해서 조금
더 재미있게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예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이렇게 발전되어
왔으며 현대성을 그 당시에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에 지금에 있어서도 그
현대성을 우리가 다시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공부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늘 공예를 생각하면 베토벤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베토벤은 음악을 작곡을 하면서 본인도
넘어설 수 없는 그런 한계를 어떤
면에서는 고민을 하면서 늘 주장했던
것이 있습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답은 꼭 그래야만 했어.
본인은 이렇게 정의를 내렸는데요.
우리가 태어나서 너무나도 다양한 직업이
있지 않습니까?
직업 안에서도 왜 우리가 이런 것을 하고
사는지 고민을 해보신 적이
있으셨는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공예 전시 기획자, 흔히
말하는 큐레이터라고 하는데요.
왜 제가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지만 열정적으로 제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거를 비교해서 장인들을
비춰봤을 때는 왜 장인들은 그 특정한
재료를 갖고 평생을 거기에 몸담아서
그것만 할지요.
우리 한국에서는 사라져가는 그런
공예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기술이 보존되기를 희망을 하지만 많은
부분은 사라져가고 있고요.
어떤 시대성에 적합하지 않다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상을 느끼고
있으면서 항상 안타깝죠.
어쩔 수 없는 그런 현상이지만 그야말로
그래야만 하겠지요.
그래야만 했고 또 그래야만 하고 이
장인들이 좀 더 기술을 전파하고
전수해서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베토벤의 문구를 한번 소개
드려보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 조혜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동방으로 탈바꿈합니다.
공예의 많은 뿌리는 통영에 있습니다.
전시는 어떠한 예술품을 보는 그런
공간이 아닙니다.
한국의 고려청자, 백자를 우리의 문화의
상징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의 손재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시기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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