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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1교시 - 21세기 불평등, 민주주의의 위기 (김윤태 / 사회학자)
등록일 : 2023-04-10 13:46:26.0
조회수 : 941
-대한민국 최고의 강연, 최강 1교시 강연을 맡은 사회학자 김윤태입니다.
저는 고려대학교 공공정책대학 교수로 사회학 관련 과목들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 사회학, 빈곤, 불평등, 복지국가의 변화, 사회학 이론이 주요 전공 분야입니다.
최근에 한국의 불평등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오늘 제가 드릴 이야기는 21세기 불평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불평등이란 무엇이며 불평등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지난 30년간 불평등이 왜 커졌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불평등의 특징은 무엇이고
불평등을 줄이는 방법이 또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21세기 불평등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21세기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이 되고 로봇을 이용한 제조업 생산품이 풍족하고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시대이죠.
얼마 전 우주 개발을 위해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블루 오리진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우주여행을 위한 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짧은 시간의 여행에 2억 원의 비용이 필요한데요.
여기에 정말 수만 명이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거나 병든 아이들이 치료 약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루에 11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재벌 대기업의 창업자 가문은 4대째 세습을 하는 가운데 10살이 안 됐는데 수십억의 재산을 물려받은 어린이 주식 부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일하러 나가자 라면을 끓여 먹다가 죽은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는 이런 극단적인 부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할까요?
아프리카와 한국의 가난한 어린이의 삶은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빈곤과 불평등이 모두 신의 섭리일까요?
아니면 자연의 법칙일까요?
어쩌면 우리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의 문제일까요?
19세기 말 자연 선택 이론을 제시한 위대한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가난한 사람의 불행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면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다.
다윈의 말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는 이 강연이 끝난 후에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연 맨 처음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 강연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게임이 세계적 관심을 끌게 해 준 것은 한류의 우월성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라는 것을 성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한국인들의 느낌입니다. 제가 서울의 한 경제 단체의 초청 강연에서 들은 말입니다.
강연 주제가 왜 불평등이냐. 이런 주제면 아예 참석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앙정부의 한 강연에서는 고위 공무원이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불평등 대신 다른 용어를 쓰면 안 될까요?
사람들이 거부감이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아예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대부분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 개발 예산에는 관심이 크지만 우리 한국 사회 전체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입법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한국 엘리트들은 불평등이라는 말 자체를 기피하거나 심지어는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최근 한 여론 조사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은 불평등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2020년 KBS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66%가 소득 불평이 매우 심하다고 응답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에게 불평등은 좋은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겁니다.
엘리트와 국민들의 불평등의 생각이 매우 다르죠.
셋째, 제가 오늘 말씀드릴 거는 한국인은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한국의 심각한 불평등은 비교적인 최근의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1950년대까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 중의 한 나라였습니다.
1949년 농지 개혁 때문입니다. 그때를 이후로 지주가 사라지고 아마도 공산주의국가를 제외하고는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평등한 사회 중의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상위층 소득 집중은 선진국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편입니다.
2022년 통계를 보면 한국 상위 1%는 소득의 14.7%를 차지하고 상위 10%는 46.5%를 차지합니다.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50% 소득의 14배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심화된 불평등은 2개의 극단적인 역설을 보여줍니다.
1960년부터 90년대까지 우리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빠른 고도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삶의 만족, 행복감은 선진국 가운데 최하위입니다.
엄청난 물질적인 성공과 정신적인 실패가 바로 첫 번째 한국의 역설입니다.
저는 그 가장 큰 이유가 경제 성장의 혜택이 대부분 소수의 계층에게 집중되고 물질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는 불평등의 상처, 불평등의 고통, 불평등의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경제 위기와 기후 위기만큼 불평등의 위기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사회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1980년대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90년대 초에서야 본격적으로 불평등이 커졌다는 점도 역설적입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대중의 생활 수준이 개선될수록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민주주의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평등의 고통은 크게 세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차원과 그다음에 사회적 차원, 심리적 차원입니다.
첫째, 사회학자로서 사회를 바라볼 때 출산율, 사망률을 가장 중요한 통계로 봅니다.
합계 출산율 0.8명, 0.7명 심지어는 서울은 0.6명 수준으로 내려가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로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도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보여줍니다.
미래를 주도할 청년 세대의 고용, 주거 불안이 남녀 임금 격차와 여성의 경력 단절 등 젠더 불평등이 출산율을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또 산재 사고로 한 해에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있고 위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재난의 불평등도 우리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입니다.
두 번째, 사회학자로서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회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유대감과 사회적 신뢰도가 낮다는 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정이 많고 끈끈하고 또 가족들의 유대가 강한 걸로 알려졌지만 통계 분석에서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느냐.
자신이 어려움을 처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응답하는 비율은 선진국에서 최하위권이었습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 최고 자살률, 가장 낮은 신뢰, 사회적 고립을 보여주는 사회 지표는 저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불평등과 관련이 크다고 봅니다.
셋째, 불평등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009년에 영국의 사회 역학자인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 교수가 쓴 평등이 답이라는 책을 보면 미국, 스웨덴, 전 세계 많은 선진국의 불평등과 사회 문제 수준을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은 경제 수준은 스웨덴보다 훨씬 높지만 아동 사망률이나 10대 임신, 문맹률, 감옥 수감률,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당뇨병, 우울증, 정신 질환,
심지어는 살인율까지 다양한 사회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학자는 부의 집중과 빈곤의 확산이 개인의 심리를 위축시키고 경제 동력도 떨어트리고 사회 활력을 없애고 사회 전체의 행복감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우리 한국 사회의 불평등의 또 다른 상처는 바로 과잉 경쟁입니다.
인간의 경쟁은 어떤 면에서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경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 경쟁과 구조적 경쟁입니다.
먼저 자발적 경쟁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한 지위를도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거죠.
이거는 어쩌면 우리 흔히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적 경쟁은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입니다.
대표적으로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구조적 경쟁도 자세히 보면 자연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사회 제도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경쟁에 몰두하는 이유는 지나친 보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능 점수 몇 점과 등급 하나의 차이로 훗날 어느 대학에 가고 어느 직장에 가서 보수의 차이가 커진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서 사교육에 투자하려고 모두가 뛰어들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리플리 기자가 한국에 와서 교육 현장을 보고 한국 학원을 압력밥솥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인터뷰한 사람 가운데 한국의 교육 제도를 높이 평가한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사교육 중심의 과잉 경쟁 교육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과잉 경쟁이 궁극적으로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서는 성형 수술 열풍, 사치품 열풍, 부동산 투기도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거의 경쟁은 소득 분배를 둘러싼 경쟁이었지만, 점차 문화적, 상징적 경쟁이 커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중산층은 소비 경쟁을 주도했습니다.
성형 수술을 통한 외모 경쟁이 극단적으로 표현되고 세계에서 성형 수술의 건수와 비용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임금 격차가 크고 젠더 격차가 큰 미국, 중국, 베네수엘라, 중남미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성형 수술을 더 많이 하는 거죠.
결국 외모 지상주의라는 것도 단순히 아름다워지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불평등과 영향을 받는 사회적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경쟁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극단적인 경쟁이 과잉 경쟁 사회를 만들고 그 경쟁은 절대적 기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합니다.
대학에서도 상대평가제가 도입됐습니다.
직장에서도 다른 동료보다 앞서야 승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쟁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은, 많은 사람은 극단적인 스트레스나 소진이나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한국은 경제는 세계 10위의 대국이 됐지만, UN에서 발표하는 행복지수는 50위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선진국 중에서는 최하위권입니다.
고도성장으로 놀라운 물질적 성공을 이루었지만, 정신적 불행감에 직면했다는 현실은 정말 안타까운 한국의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UN은 세계 행복의 날을 제정하고 행복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는데 북유럽 국가들이 행복 순위 제일 높습니다.
그러면 왜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 덴마크, 북유럽 국가의 행복 순위는 높은 걸까요?
많은 학자는 신뢰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봅니다.
신뢰의 근간은 관대한 실업 구조를 비롯해서 무료 의료, 교육, 보육 지원이 튼튼한 사회복지 제도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지만, 반드시 최고의 행복 수준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과연 한국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이 문제가 오늘 강연의 핵심 주제입니다.
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불평등을 지난 20세기 이전의 오래된 불평등과 우리가 살고 있는 새로운 불평등으로 나눠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과연 불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불평등은 생존, 정치적 권력, 경제적 자원의 불균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류 역사상 생존, 권력, 경제적 자원 등 세 가지 요소를 둘러싼 사회 투쟁은 끝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첫째, 생존의 불평등을 보겠습니다. 주로 아동 사망률이나 출생 당시의 건강 상태 등 그리고 사망률 그리고 기대 수명, 건강 상태 등의 불평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기대 수명과 건강은 타고난 유전도 있지만,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많이 가진 계층이 더 오래 살고 건강과 영양 상태가 좋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이 유아 사망률이 낮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의료 기술이 놀랍게 발전했기 때문에 생존 불평등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존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선진국과 아프리카의 기대 수명은 무려 20년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한국에서도 서울 서초구의 기대 수명이 가장 높은데 강원도 화천군에 비교하면 10년 이상 높습니다.
두 번째, 정치적 불평등입니다. 이는 주로 법률적 권리나 투표권, 세금이나 전쟁의 결정, 정치 참여에 따른 참여와 배제의 불평등을 가리킵니다.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는 항상 왕이 다스리는 군주제가 대부분의 정치, 권력 구조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 투쟁이 확산하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왕정국가도 있고 러시아나 중국 등에서는 선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선진적인 민주국가에서도 아직도 부유한 남자들이 정치와 정책 결정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세기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나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권리 요구 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투표권이 부여됐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일시적으로 투표권이 제한됐지만, 1987년 이후에는 정치적 평등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선거권과 별도로 부유층과 기업의 정치 영향력이 크고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의 투표율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분석입니다.
특히 정치 엘리트들인 국회의원들이 주로 고학력 중년 남성이 많고 여성과 청년들이 참여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점이 지적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도 경제적 불평등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보통 소득, 저축, 자산의 불평등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치열한 정치 갈등은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대 아테네 시대에 솔론의 개혁이 있었고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인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대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불균형은 모든 공화국의 가장 오랜, 치명적 우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조선 시대가 등장하면서 과전법 등 토지 개혁의 개혁 등이 결국 지나친 토지의 집중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제도 개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영국, 미국 이런 현대적인 혁명에서 정치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선거권을 주장하는 운동은 일어났지만 사실상 경제적 불평등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혁명 이후에도 재산 제도가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사유재산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토지의 7, 80%를 가톨릭교회가 소유했기 때문에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 분배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그 이후에 19세기에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노동운동이 확산되었고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유럽 역사에서 중요하게 부각됐습니다.
놀라게도 20세기는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급격하게 감소한 평등화의 시대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으로 부유층 재산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둘째, 러시아와 동유럽은 공산주의 정부로 넘어가면서 사유재산 제도가 폐지됐습니다.
셋째, 서유럽에서는 복지국가가 등장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공교육이나 건강보험, 노령연금, 실업보험 등 사회보장 제도가 제공되었습니다.
넷째,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지주의 재산이 없어지고 대규모 자작농, 평등한 농민들이 주류가 되는 사회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75년까지는 경제적 평등 수준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준 역사적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생존 불평등, 정치 불평등은 낮아졌지만 경제 불평등이 1975년 이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1980년대 이후로 유럽, 미국뿐 아니라 우리 한국과 중국에서도 경제 자본 이외의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의 불평등이 중요하게 사회적으로 부각됐습니다.
차례대로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경제 불평등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죠.
보통 불평등의 조사는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분포, 격차, 집중, 상대 빈곤, 젠더 격차 이렇게 다섯 가지 지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지표가 똑같은 수치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약간씩 다른 면이 보이죠. 마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할까요?
코는 말랑말랑하고 다리는 단단하고 꼬리는 가늘게 느껴지죠.
측정 방법에 따라서 약간은 다른 결과가 나오고 심지어는 좀 모순적인 수치가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사를 중심으로 해서 중요한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많은 한국 사람이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우리 불평등이 심각해졌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상 자세하게 지난 소득 분포 추이를 살펴보면 이미 외환위기 이전부터
우리 한국 경제 최고의 호황기였던 1990년대 초반. 약 1992년, 93년부터 소득 분배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단체 교섭이 확산하면서 대기업의 임금들이 급속하게 상승했습니다.
이때, 한때 소득 분배가 개선되는 통계가 나옵니다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92년부터 한국의 불평등이 악화됩니다.
그런데 놀라게도 이 시기는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등장하면서 소위 민주 정부가 등장한 시기에 더 불평등이 커졌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민주화와 또 민주당 같은 진보 정부가 등장했을 때 불평등이 더 약화되지 않고 더 심화됐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경제 자본에 의해서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보겠습니다.
먼저 이 문화 자본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79년에 구별 짓기라는 책에서 제기되었는데요.
아마도 이 부르디외는 지금 사진에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20세기 후반에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로 평가받습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은 특정한 문화의 유형이 일종의 사회적 유리함을 만드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고 이것이 자본의 형태로 변화한다고 봤습니다.
자본이라는 게 꼭 돈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문화적인 취향, 문화적인 어떤 습관, 문화적인 어떤 가치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도 하나의 자본과 같은 힘을 갖는다고 봤습니다.
어릴 때부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자주 가고 피아노를 배우고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경험은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허용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모두가 누리는 것은 아니죠.
문화 자본은 어린 시절의 고급문화 활동을 경험한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교 커리큘럼에 훨씬 더 적응을 잘하는 걸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학교 성적에 평가받는 음악이나 미술이나 다양한 국어나 이런 것들은 문화 자본을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많이 갖고 있는 어린이에게 훨씬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생들이 학교 성적도 좋고 좋은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모든 중산층 또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똑같이 학교에 가지만 사실은 학교 졸업한 이후에 어느 대학을 가느냐,
어느 직장에 가느냐는 것은 문화 자본이나 문화 취향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프랑스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문화 자본의 구별 짓기는 1990년대 이후에 소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요.
여기에는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한국은 상류층과 중산층의 문화 차이가 프랑스는 아주 큽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간 계급이 상위층을 모방하려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특히 영어 교육과 예술 교육에 중산층들이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교육은 중산층 교육은 없고 상류층 교육만 존재한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당연히 사교육비 지출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두 번째 한국의 문화자본의 축적은 프랑스와 같이 장기적이고 추상적 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기적이고 과시적인 문화자본의 습득에 주력합니다.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예술 교육이 성행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패션이나 외식, 성형수술, 미모를 통한 외모 경쟁도 치열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문화자본의 축적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영어 유치원이나 국제학교나 아주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전수하기 위해서 우리 한국의 중산층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회 자본에 의한 불평등입니다.
사회 자본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경제 자본, 문화 자본과 마찬가지로 사회 자본도 상당히 배타적 속성을 갖습니다.
물론 미국의 사회학자인 퍼트넘 같은 교수는 사회 자본이 많으면 일반적으로 사회적 신뢰나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는 특정한 집단 내부의 폐쇄적 속성을 가진 사회적 연줄망에 주목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내부자끼리 챙겨주고 공통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커넥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대표적으로 학벌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한국의 학벌주의도 배타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서로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맥을 형성하고 다른 대학 출신들을 차별합니다.
심지어는 부모의 학력 자본이 사회 자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의 대학 입학의 스펙 관리나 졸업 후에 기업의 인턴 기회나 창업 기회도 부모의 사회 자본이 영향을 주고 세습이 되는 겁니다.
한국의 사회 자본에 관해서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발견됩니다.
첫째 누구나 연결되는 소셜미디어 시대에서 사회 자본이 더 이상 폐쇄적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재벌 최고 경영자가 운영하는 소셜미디어에 내가 연결됐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폐쇄적 계급 사회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소셜미디어 친구가 정말 우리들의 진짜 친구일까요?
아니면 아닐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두 번째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관리직 계층은 서로 아주 잘 알고 있고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사회적인 활동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학력, 저소득, 생산직 노동자들은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이 부모의 사회 자본이 자녀들에게 똑같이 전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점인데 최상위 부유층들은 매우 특별한 사회적 연줄망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이들에겐 경쟁 자본은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사회 대다수 사람과는 명백하게 구별되고 심지어는 뭐 동창회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사회적인 친목회에서도 단절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비슷한 고가 주택에 살고 상위권 대학에 나오고 해외 유학을 가고 함께 투자를 상의하고 자녀의 대학 입시를 돕고 비슷한 가문끼리 결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20세기 이전에도 물론 사회적 인맥은 존재했지만 현시대에 더욱 뚜렷하게 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제 돈을 얼마나 가지냐보다 누구를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이 역시 경제 자본의 불평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경제 자본이 있어야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축적하고 강화할 수 있겠죠.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 현상이 나타납니다. 부모에게 이런 다양한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을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과 부모에게 물려받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커졌다는 점입니다.
이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이 아니라 부모가 부자인 자와 부자가 아닌 자의 불평등으로 나눠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9세기 유물로 사라진 출신이 이제 또 다른 부의 상징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1세기 불평등이 커지면서 우리 한국에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약 61%로 보고 있지만 주관적 중산층은 50%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약 80%가 중산층으로 생각한 거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축소를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소득 중산층은 60%인데 주관적 중산층은 50%이기 때문에 무려 10%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경우 한국의 중산층은 가계부채의 고통을 겪고 있고 노후나 사업의 실패나 이런 불안감들이 큰 추락의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지와 사회 안전망이 취약하기 때문에 그렇죠.
둘째 한국 사회에서는 세습 자본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취업자나 전문경영인이부자가 되기보다는 자수성가한 사람보다는 재벌 2세, 3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상속형 부자가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반면에 빈곤층은 가난을 대물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에 인터넷에서 떠도는 말인데 금수저, 흙수저로 사회가 분열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지나치게 커진 불평등은 많은 경제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1960년대 위에 주류 경제학은 사이먼 쿠즈네츠 경제학자의 역 U자 모형처럼 경제성장할수록 불평등은 줄어들 걸로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1950년대 60년대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불평등이 줄어들었죠.
그러나 1970년대 이후를 보면 이런 경제학자들의 낙관적인 이론과 같은 달리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200년간 주요 국가의 납세 통계를 분석해서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들에서 왜 불평등이 늘어났을까요?
피케티 교수는 조세 제도의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저는 조세 제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업 지배구조, 노동 시장, 노조의 약화 등 다른 요인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접근법으로 분류합니다.
첫째 구조적 관점인데요.
세계화나 기술의 진보나 인구 변화를 중시합니다.
둘째는 권력관계의 관점입니다.
기업과 노동 조합의 힘의 관계를 보는 거죠.
셋째는 제도적 관점인데 교육이나 복지나 사회 제도나 선거 제도, 정치 체제가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봅니다.
이 세 가지 차원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어떤 것은 또 명확하게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게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97년 한국 외환 위기 발생할 당시에 독일 언론인이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우리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지구화가 불평등을 심화시켜서 20:80의 사회를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시애틀에서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무역기구 회의 장소 앞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일부 사람들은 시애틀 전투라고 불렀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때 세계화에 반대하는 그런 목소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정말 세계화가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걸까요?
한국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이주 노동자가 한국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까요?
그러나 최근 연구를 보면 세계화 이후에 한국 실업률은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출 대기업의 수익이 늘어나면서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 수출 대기업의 임금 상승이 불평등의 원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만 이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불평등의 원인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의 극우 정당에서 세계화나 이주 노동자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보호 무역주의로 돌아가고 또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영국은 국민 투표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앞장선 미국과 영국이 반세계화로 돌아선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화에는 승자도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금융 자본과 대기업은 많은 이익을 얻었지만 선진국의 숙련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가장 큰 불평등의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기술의 진보에 관한 논쟁이 또 뜨거운 학계의 쟁점인데요.
19세기 기계의 도입 이후로 영국의 러다이트라는 사람들이 기계를 파괴했습니다.
기계가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늘어난다고 봅니다.
물론 한때 기술이 발전하고 로봇이 자동화가 도입되면 일자리가 없어질 거란 비관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론은 맞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실업률은 그다지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와 같은 숙련 노동자 좀 괜찮은 일자리는 없어지고 서비스, 저임금 주로 질이 나쁜 일자리가 많이 생겼다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이 기술이나 개인의 교육 수준의 불일치로 보는데 실제로 대졸, 고졸의 임금 차이는 있긴 있죠.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런 주장도 점점 현실에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아까 말씀드린 대로 기술적 실업,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서비스 분야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고 괜찮은 일자리가 적다는 점이 문제고요.
둘째로는 학력 수준이 높다고 해서 고졸보다 대졸 노동자들이 꼭 임금이 높은 것도 아닙니다.
요새는 괜찮은 일자리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대졸자들이 고졸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교육에 우리가 투자를 많이 해도 괜찮은 일자리를 점점 구하기 힘든 시대가 된 거죠.
셋째 무엇보다도 이런 기술이 모든 걸 결정한다, 이런 생각들은 자본 투자나 고용 관계, 노사 관계에 대한 설명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세계에서 제조업에서 로봇 도입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데 미국이나 일본, 독일보다 높습니다.
이것은 인건비를 아끼기 위한 기업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조업의 숙련 노동자 일자리가 점점 감소하고 대기업의 일자리는 과거에 비해서 현격히 줄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브린욜프슨과 맥아피 교수는 앞으로 제2의 기계 시대가 오면 디지털 기술이 더욱더 불평등을 크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불평등한 건 아닙니다.
많은 나라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를 도입한 가령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이런 나라들을 비교해 봐도 상대적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이런 나라들은 불평등은 좀 낮아진 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기술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산업 구조나 교육 과정, 직업 훈련 또는 노동 시장 제도나 임금 제도 또는 조세 제도, 복지 제도
이런 다양한 요인들이 불평등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인구 구조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점점 여성들이 대학을 진학하고 고학력자가 많아지면서 같은 대졸자끼리 결혼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육적인 동질혼이 커질수록 가구 간의 소득 격차가 커질 거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특히 남녀 간에 임금 격차가 클수록 여성들이 자신보다 학력이 높고 소득이 높은 남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그런 나라일수록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인구 고령화입니다. 노인의 빈곤화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심각한 수준이고, 2019년에 43%였고, 노인 자살률도 세계 최고입니다.
이건 노인 연금 제도의 도입이 너무 늦어서 생긴 문제고, 연금을 받는 노인도 너무 숫자도 적지만 연금을 받는 액수가 너무 낮기 때문에 노인 빈곤이 높은 겁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의 제도의 실패가 결국 노인 빈곤을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불평등의 증가라는 것은 세계화나 기술의 진보나 인구 구조의 변화처럼 어쩔 수 없는 힘의 결과라기보다는 정부가 그런 변화된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을 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권력 균형이 깨져서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위기가 발생한 거죠.
이러한 위기가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조세 정책과 복지 정책의 변화입니다.
1910년대, 1920년대 미국은 세계 최초로 누진소득세와 상속세를 도입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부자와 기업 감세를 통해 고용과 투자를 늘린다는 낙수 경제학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감세는 정부 재정을 축소하는 긴축 정책을 강제하고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악화시켰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부유층은 세계화의 성과를 차지하고 소득을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소득세와 재산세, 상속세는 미국에서 계속 낮아졌습니다.
반면에 노동자의 임금은 억제되거나 정체되었습니다.
노동 조건이 점점 나빠지거나 오히려 부가세를 비롯한 세금들이 인상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유명한 투자자인 워런 버핏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계급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속한 부자 계급이 빈곤 계급을 이기고 있다.
워런 버핏과 같은 슈퍼 리치가 부담하는 금융 소득세율은 15%에 불과하지만 그 워런 버핏의 비서인 노동자는 근로 소득세를 30%가 넘게 훨씬 세율이 높습니다.
기업의 법인세율도 2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상속세율도 더 낮아졌고, 면세점 기준도 높아졌습니다.
미국의 소비세는 대부분 물품에 부과하는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사용하는 서비스는 대부분 세금이 매우 낮습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는 미국 경제학자들의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2022년 옥스팜이라는 국제 구호 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19 기간 동안 상위 1%가 부의 63%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하나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2014년과 2018년 동안 적용된 실질 세율이 불과 3%에 불과합니다.
세계 최고 부자들은 조세 도피처로 자기 재산을 옮기거나 국적이나 회사 본사를 아예 이전해서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글이나 메타와 같은 빅테크기업의 탈세도 심각합니다.
에너지 식품 대기업은 지난 최근에 인플레이션 때문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지만 주주들에게 배당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폭등으로 삶의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조세 정책과 사회 정책이 불평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걸로 분석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은 조세 부담률이 너무 낮고, 사회 지출 비율도 너무 낮습니다. 우리는 세금을 너무 많이 낸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1980년대 우리나라 최고 소득세율은 70% 수준이었지만 90년대를 거치면서 절반 수준으로 인하가 됐고, 소득세, 누진세도 후퇴되었습니다.
한국의 조세 부담률은 20% 수준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제일 낮은 수준입니다.
결과적으로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 지출 비율도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입니다.
공공사회지출 예산 비율이 국내총생산에 비교했을 때 12%를 겨우 넘습니다.
그래서 OECD 평균인 20%에 비해 크게 뒤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복지 선진국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북유럽 국가가 이렇게 세금을 많이 걷으면 경제에 부담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복지 지출 수준보다 복지 지출의 구조가 중요합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세금을 많이 걷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금을 나눠주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들은 주로 공교육에 투자하고 병원이나 보건에 투자하고, 젊은이들의 직업 교육에 투자하고, 또 모든 성인을 위한 평생 교육에 투자하고, 기업과 연구 개발을 위해 투자합니다.
그래서 사회 투자와 연구 개발과 같은 미래 투자를 통해서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북유럽 복지 국가는 친성장 복지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지 예산이 가장 많은 독일, 스웨덴, 덴마크가 지금 경제 강국입니다.
복지 예산이 제일 적은 미국이나 일본은 지금 심각한 경제 위기와 불평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즉, 경제에 부담이 되는 건 복지 예산 지출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돈을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선거 제도도 중요하게 불평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난 100년 전을 들여다보면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더 불평등 수준이 낮은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불평등 수준이 훨씬 높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많은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 연구를 보면 미국의 불평등은 선거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아이버슨 교수와 런던 정경대학의 소스키스라는 사회학 교수가 선거 제도와 불평등을 비교해서 연구를 해보니까 유럽 국가와 같이 비례대표제를 선택한 나라들은
복지가 확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나라은 의외제 정부고 비례 대표제뿐 아니라 중대 선거구제가 다당제의 특성과 같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워덴, 덴마크, 네덜란드 이런 나라들인데, 어느 한 정당이 과반수 정당을 못 만들어서 연정을 구성하고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노사정 사회적 대화가 발전하고 서로 합의 민주주의를 만듭니다.
한국과 달리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정치인보다 잘 참고 상대방을 포용하고 타협을 잘하는 정치인이 인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은 오랜 민주주의 정통이지만 선거 제도가 소선거구제도입니다.
흔히 다수 대표제라고 합니다.
한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1등만 선거가 됩니다, 우리 한국과 똑같죠.
이런 나라들은 주로 양당제가 발전하고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래서 다수제 민주주의라 부릅니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은 정치 과정에서 배제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권 교체기마다 경쟁이 아주 치열하고 정치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미국에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에 불복해서 의회에 폭동 사태가 난 것과 같은 이런 정치적 갈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단순, 다수대표제의 정당 체제에서는 부자가 지지하는 보수 정당과 가난한 사람들이 지지하는 진보 정당, 양당 체제로 재편이 되는데.
대부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이기는 경우가 3분의 2가 많습니다.
왜냐, 캐스팅보트를 가진 중산층들이 대게 보수 정당을 지지합니다.
사실 중산층들은 보수나 진보에 중간에 있기 때문에 조세도 점진적으로 인상하고 복지도 점진적으로 확대하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면 보수, 진보 어느 정당도 자기 마음에 드는 정당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마음에 안 들 바에는 차라리 현상 유지를 선택하자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다당제에서는 중산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중도 정당이 상당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고 보수 정당, 진보 정당
어느 쪽이 집권을 하더라도 연정을 구성하거나 심지어는 보수 정당, 진보 정당이 대연정을 구성해서 서로 상대방의 정책이나 공약 중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미국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선거제도를 도입했지만 불평등 민주주의다 이런 지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래리바텔스 교수의 2008년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이 공화당이나 민주당뿐 아니라 미국의 모든 정치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저소득층의 대변하는 미국의 민주당인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 이후에 1990년대에 오히려 세금을 인하하고 기업이 요구한 대로 부자들 감세를 해주고 복지도 축소했습니다.
그리고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오히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금융 규제 완화를 시도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도 거의 유사한 정책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이런 유사한 불평등 민주주의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더욱더 선거제도가 독특합니다.
소선거구제뿐만 아니라 두 번째 중요한 문제는 지역주의 정당 구조가 아주 강구하다는 겁니다.
지역주의 개발 공약만 유권자들이 관심이 크고 전국적인 이슈인 조세나 복지는 관심이 적은 편입니다.
세 번째로는 반공주의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진보적인 정당들이 상당히 입지가 약합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약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선출될 수 있는 정당들이 매우 취약하고 취약계층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약자를 무시하는 배제 정치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에도 다 진보 정당이 있는데, 왜 빈곤과 불평등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걸까요?
여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제조업 인구가 감소하고 있고 노동 운동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대신 화이트컬러나 서비스직이 증가하고 있죠.
둘째는 정당의 선거 전략이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도 비슷한 선거 전략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당원들이 제조업의 노동자보다는 서비스 분야의 고학력, 고소득 당원 비율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들의 정책들이 바뀌고 있습니다.
고학력 당원들은 복지 확대보다는 주로 미국 같은 낙태나 동성애나 문화적 이슈, 정체성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고학력 진보파를 브라만 좌파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도 강남 좌파라는 말이 있죠.
이들은 말로는 진보를 주장 하지만 오히려 세금을 감면해 주고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 세습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클린턴과 영국의 블레어가 집권하는 동안에 오히려 빈곤과 불평등이 악화 됐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래서 점차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기가 지지했던 진보 정당이 더욱더 자기 삶을 개선해 주지 못하자 자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바로 실업과 빈곤의 책임이 이민자 때문에 그렇다, 여자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주장하는 극우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도널드 대통령과 유럽 연합 탈퇴를 주장했던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현상을 워릭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콜린 크라우치 교수는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에 의한 지배가 작동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근본적 목적을 배신하는 국가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정당, 진보정당 모두가 이념적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후보의 이미지와 스캔들이 임금, 조세, 복지, 사회, 경제적 이슈를 압도해 버립니다.
선거를 정책 경쟁의 장이 아니라 마케팅과 광고에 결합된 스펙터클이나 네거티브 캠페인이 압도적입니다.
유권자들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선거 운동을 마치 무슨 쇼처럼 구경하는 사람이 되거나,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게, 마치 정치 참여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사실상 정치를 지배하는 건 기업 엘리트고, 또 행정부 중에 퇴직해서 다시 법무법인에 갔다가, 또는 대기업에 갔다가 다시 행정부에 돌아오는
이런 회전문 인사에 의해서 정치, 경제, 행정 엘리트들이 사실상 대다수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그런 지적이 포스트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 주장입니다.
정말 우리 한국에서도 포스트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민주주의는 죽어가는 걸까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가장 불평등이 커졌고, 빈곤과 실업이 급증했습니다.
2011년에는 중동의 재스민 혁명,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일어났고, 홍콩의 우산 혁명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미국에서도 부자 증세나 전 국민 건강보험, 대학 무상 등록금을 주장하는 버니 샌더스 같은 정치인이 나타났습니다.
또 뉴욕의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젊은 여성 정치인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인상하라.
이런 드레스를 입고 어떤 패션쇼에, 갈라에 참석한 걸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이런 새로운 문제 제기가 미국 정치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에 대한 진단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에 대한 진단이 정확하지 않으면 처방은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저의 주장은 불평등 증가를 세계화나 또는 기술의 진보나 또는 인구의 변화.
이렇게 불가피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간주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기술결정론이나 구조결정론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기술의 도입은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결정하는 겁니다. 부의 재분배도 언제나 정치적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불평등은 따라서, 순수한 경제 시스템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줄어들 수 없습니다.
2008년 세계 경제를 강타한 금융 위기 이후에 부유층의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유층들이 모이는 세계경제포럼의 창설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나는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신봉자이지만, 우리는 죄를 지었다.
이런 참회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 후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IMF나 월드뱅크, OECD에서도 자유 시장 만능주의와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OECD에서는 2012년부터 포용 성장이라는 걸 각국의 정부에 제안했습니다.
소득 증가뿐 아니라, 고용이나 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조세를 개혁하고, 부유층들에게 세금을 좀 더 올리고, 최저임금도 인상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라고 공고했던 겁니다.
노벨경제학상을 탄 스티글리츠 교수는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에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 독점 규제, 금융 산업 통제, 기업의 장기 투자 장려, 완전 고용의 추진, 노동자의 권리의 강화,
부유층의 증세, 복지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정부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도 자유 시장 접근법을 폐기하고 경제 침체와 불평등과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부유층 증세, 복지예산 확대, 산업 정책 등 적극적인 정부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한국은, 과거의 부자 감세, 규제 철폐. 이런 자유 시장 만능주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부자 감세와 규제 철폐만 주장하는 자유 시장 만능주의는, 빈곤과 불평등을 키우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는 자유 시장 만능주의라는 과거의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 번영의 성과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위한 공공정책만이 현재의 경제 위기, 기후 위기가 함께 불평등 위기 등 3중 위기를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 전략, 정책 방안은 다음 강연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21세기 한국의 불평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불평등이 급증했습니다.
21세기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 사회적으로도 불평등이 커졌습니다.
젠더 불평등과 지리적 불평등도 심각하죠.
불평등은 세계화, 기술의 진보, 인구구조의 변화의 영향도 받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역학관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정부의 조세 정책, 복지 정책, 교육 정책이 불평등에 큰 영향을 줍니다.
지나친 불평등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불평등을 줄이는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합니다.
지나친 불평등은 사회 분열을 만들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든다.
20세기 한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민주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삶의 만족, 행복감, 사회적 신뢰, 사회적 결속감은 매우 낮습니다.
엄청난 경제 성공과 정신적 실패가 바로 한국의 역설입니다.
그 이유는, 경제 성장의 혜택이 대부분 소수의 계층에게 집중되고, 물질적으로 대다수 사람이 불안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국민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도록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번영의 성과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강의 강연, 최강 1교시, 김윤태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지나친 불평등이 가장 치명적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도 경제성장률 7%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력 또는 능력이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
이것은 민주주의 원칙과는 상반된 주장입니다.
어떤 평등이 가능한지 설명하는 이론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저는 고려대학교 공공정책대학 교수로 사회학 관련 과목들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 사회학, 빈곤, 불평등, 복지국가의 변화, 사회학 이론이 주요 전공 분야입니다.
최근에 한국의 불평등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오늘 제가 드릴 이야기는 21세기 불평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불평등이란 무엇이며 불평등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지난 30년간 불평등이 왜 커졌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불평등의 특징은 무엇이고
불평등을 줄이는 방법이 또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 주제는 21세기 불평등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21세기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이 되고 로봇을 이용한 제조업 생산품이 풍족하고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시대이죠.
얼마 전 우주 개발을 위해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블루 오리진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우주여행을 위한 상품을 개발했습니다.
짧은 시간의 여행에 2억 원의 비용이 필요한데요.
여기에 정말 수만 명이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거나 병든 아이들이 치료 약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루에 11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재벌 대기업의 창업자 가문은 4대째 세습을 하는 가운데 10살이 안 됐는데 수십억의 재산을 물려받은 어린이 주식 부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일하러 나가자 라면을 끓여 먹다가 죽은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왜 이 세상에는 이런 극단적인 부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할까요?
아프리카와 한국의 가난한 어린이의 삶은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빈곤과 불평등이 모두 신의 섭리일까요?
아니면 자연의 법칙일까요?
어쩌면 우리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의 문제일까요?
19세기 말 자연 선택 이론을 제시한 위대한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가난한 사람의 불행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면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다.
다윈의 말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는 이 강연이 끝난 후에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연 맨 처음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 강연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게임이 세계적 관심을 끌게 해 준 것은 한류의 우월성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라는 것을 성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둘째 한국인들의 느낌입니다. 제가 서울의 한 경제 단체의 초청 강연에서 들은 말입니다.
강연 주제가 왜 불평등이냐. 이런 주제면 아예 참석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앙정부의 한 강연에서는 고위 공무원이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불평등 대신 다른 용어를 쓰면 안 될까요?
사람들이 거부감이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아예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대부분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 개발 예산에는 관심이 크지만 우리 한국 사회 전체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입법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한국 엘리트들은 불평등이라는 말 자체를 기피하거나 심지어는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최근 한 여론 조사를 보면 한국인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은 불평등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2020년 KBS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66%가 소득 불평이 매우 심하다고 응답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에게 불평등은 좋은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겁니다.
엘리트와 국민들의 불평등의 생각이 매우 다르죠.
셋째, 제가 오늘 말씀드릴 거는 한국인은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한국의 심각한 불평등은 비교적인 최근의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1950년대까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 중의 한 나라였습니다.
1949년 농지 개혁 때문입니다. 그때를 이후로 지주가 사라지고 아마도 공산주의국가를 제외하고는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평등한 사회 중의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상위층 소득 집중은 선진국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편입니다.
2022년 통계를 보면 한국 상위 1%는 소득의 14.7%를 차지하고 상위 10%는 46.5%를 차지합니다.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50% 소득의 14배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심화된 불평등은 2개의 극단적인 역설을 보여줍니다.
1960년부터 90년대까지 우리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빠른 고도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삶의 만족, 행복감은 선진국 가운데 최하위입니다.
엄청난 물질적인 성공과 정신적인 실패가 바로 첫 번째 한국의 역설입니다.
저는 그 가장 큰 이유가 경제 성장의 혜택이 대부분 소수의 계층에게 집중되고 물질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는 불평등의 상처, 불평등의 고통, 불평등의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경제 위기와 기후 위기만큼 불평등의 위기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사회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1980년대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90년대 초에서야 본격적으로 불평등이 커졌다는 점도 역설적입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대중의 생활 수준이 개선될수록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민주주의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평등의 고통은 크게 세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차원과 그다음에 사회적 차원, 심리적 차원입니다.
첫째, 사회학자로서 사회를 바라볼 때 출산율, 사망률을 가장 중요한 통계로 봅니다.
합계 출산율 0.8명, 0.7명 심지어는 서울은 0.6명 수준으로 내려가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로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도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보여줍니다.
미래를 주도할 청년 세대의 고용, 주거 불안이 남녀 임금 격차와 여성의 경력 단절 등 젠더 불평등이 출산율을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또 산재 사고로 한 해에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있고 위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재난의 불평등도 우리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입니다.
두 번째, 사회학자로서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회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유대감과 사회적 신뢰도가 낮다는 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정이 많고 끈끈하고 또 가족들의 유대가 강한 걸로 알려졌지만 통계 분석에서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안전하다고 느끼느냐.
자신이 어려움을 처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응답하는 비율은 선진국에서 최하위권이었습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 최고 자살률, 가장 낮은 신뢰, 사회적 고립을 보여주는 사회 지표는 저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불평등과 관련이 크다고 봅니다.
셋째, 불평등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009년에 영국의 사회 역학자인 리처드 윌킨스와 케이트 피킷 교수가 쓴 평등이 답이라는 책을 보면 미국, 스웨덴, 전 세계 많은 선진국의 불평등과 사회 문제 수준을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은 경제 수준은 스웨덴보다 훨씬 높지만 아동 사망률이나 10대 임신, 문맹률, 감옥 수감률,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당뇨병, 우울증, 정신 질환,
심지어는 살인율까지 다양한 사회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학자는 부의 집중과 빈곤의 확산이 개인의 심리를 위축시키고 경제 동력도 떨어트리고 사회 활력을 없애고 사회 전체의 행복감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우리 한국 사회의 불평등의 또 다른 상처는 바로 과잉 경쟁입니다.
인간의 경쟁은 어떤 면에서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경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 경쟁과 구조적 경쟁입니다.
먼저 자발적 경쟁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한 지위를도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거죠.
이거는 어쩌면 우리 흔히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적 경쟁은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입니다.
대표적으로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구조적 경쟁도 자세히 보면 자연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사회 제도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경쟁에 몰두하는 이유는 지나친 보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능 점수 몇 점과 등급 하나의 차이로 훗날 어느 대학에 가고 어느 직장에 가서 보수의 차이가 커진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서 사교육에 투자하려고 모두가 뛰어들 것입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리플리 기자가 한국에 와서 교육 현장을 보고 한국 학원을 압력밥솥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인터뷰한 사람 가운데 한국의 교육 제도를 높이 평가한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사교육 중심의 과잉 경쟁 교육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과잉 경쟁이 궁극적으로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서는 성형 수술 열풍, 사치품 열풍, 부동산 투기도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거의 경쟁은 소득 분배를 둘러싼 경쟁이었지만, 점차 문화적, 상징적 경쟁이 커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중산층은 소비 경쟁을 주도했습니다.
성형 수술을 통한 외모 경쟁이 극단적으로 표현되고 세계에서 성형 수술의 건수와 비용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임금 격차가 크고 젠더 격차가 큰 미국, 중국, 베네수엘라, 중남미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성형 수술을 더 많이 하는 거죠.
결국 외모 지상주의라는 것도 단순히 아름다워지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불평등과 영향을 받는 사회적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경쟁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극단적인 경쟁이 과잉 경쟁 사회를 만들고 그 경쟁은 절대적 기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합니다.
대학에서도 상대평가제가 도입됐습니다.
직장에서도 다른 동료보다 앞서야 승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쟁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은, 많은 사람은 극단적인 스트레스나 소진이나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한국은 경제는 세계 10위의 대국이 됐지만, UN에서 발표하는 행복지수는 50위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선진국 중에서는 최하위권입니다.
고도성장으로 놀라운 물질적 성공을 이루었지만, 정신적 불행감에 직면했다는 현실은 정말 안타까운 한국의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UN은 세계 행복의 날을 제정하고 행복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는데 북유럽 국가들이 행복 순위 제일 높습니다.
그러면 왜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 덴마크, 북유럽 국가의 행복 순위는 높은 걸까요?
많은 학자는 신뢰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봅니다.
신뢰의 근간은 관대한 실업 구조를 비롯해서 무료 의료, 교육, 보육 지원이 튼튼한 사회복지 제도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지만, 반드시 최고의 행복 수준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과연 한국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이 문제가 오늘 강연의 핵심 주제입니다.
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불평등을 지난 20세기 이전의 오래된 불평등과 우리가 살고 있는 새로운 불평등으로 나눠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과연 불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불평등은 생존, 정치적 권력, 경제적 자원의 불균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류 역사상 생존, 권력, 경제적 자원 등 세 가지 요소를 둘러싼 사회 투쟁은 끝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첫째, 생존의 불평등을 보겠습니다. 주로 아동 사망률이나 출생 당시의 건강 상태 등 그리고 사망률 그리고 기대 수명, 건강 상태 등의 불평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기대 수명과 건강은 타고난 유전도 있지만,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많이 가진 계층이 더 오래 살고 건강과 영양 상태가 좋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이 유아 사망률이 낮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의료 기술이 놀랍게 발전했기 때문에 생존 불평등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존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선진국과 아프리카의 기대 수명은 무려 20년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한국에서도 서울 서초구의 기대 수명이 가장 높은데 강원도 화천군에 비교하면 10년 이상 높습니다.
두 번째, 정치적 불평등입니다. 이는 주로 법률적 권리나 투표권, 세금이나 전쟁의 결정, 정치 참여에 따른 참여와 배제의 불평등을 가리킵니다.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는 항상 왕이 다스리는 군주제가 대부분의 정치, 권력 구조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 투쟁이 확산하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왕정국가도 있고 러시아나 중국 등에서는 선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선진적인 민주국가에서도 아직도 부유한 남자들이 정치와 정책 결정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세기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나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권리 요구 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투표권이 부여됐습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일시적으로 투표권이 제한됐지만, 1987년 이후에는 정치적 평등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선거권과 별도로 부유층과 기업의 정치 영향력이 크고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의 투표율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분석입니다.
특히 정치 엘리트들인 국회의원들이 주로 고학력 중년 남성이 많고 여성과 청년들이 참여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점이 지적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도 경제적 불평등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보통 소득, 저축, 자산의 불평등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치열한 정치 갈등은 경제적 불평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대 아테네 시대에 솔론의 개혁이 있었고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인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대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불균형은 모든 공화국의 가장 오랜, 치명적 우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조선 시대가 등장하면서 과전법 등 토지 개혁의 개혁 등이 결국 지나친 토지의 집중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제도 개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영국, 미국 이런 현대적인 혁명에서 정치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선거권을 주장하는 운동은 일어났지만 사실상 경제적 불평등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혁명 이후에도 재산 제도가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사유재산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토지의 7, 80%를 가톨릭교회가 소유했기 때문에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 분배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그 이후에 19세기에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노동운동이 확산되었고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유럽 역사에서 중요하게 부각됐습니다.
놀라게도 20세기는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급격하게 감소한 평등화의 시대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으로 부유층 재산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둘째, 러시아와 동유럽은 공산주의 정부로 넘어가면서 사유재산 제도가 폐지됐습니다.
셋째, 서유럽에서는 복지국가가 등장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공교육이나 건강보험, 노령연금, 실업보험 등 사회보장 제도가 제공되었습니다.
넷째,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지주의 재산이 없어지고 대규모 자작농, 평등한 농민들이 주류가 되는 사회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75년까지는 경제적 평등 수준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준 역사적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와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생존 불평등, 정치 불평등은 낮아졌지만 경제 불평등이 1975년 이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1980년대 이후로 유럽, 미국뿐 아니라 우리 한국과 중국에서도 경제 자본 이외의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의 불평등이 중요하게 사회적으로 부각됐습니다.
차례대로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경제 불평등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죠.
보통 불평등의 조사는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분포, 격차, 집중, 상대 빈곤, 젠더 격차 이렇게 다섯 가지 지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지표가 똑같은 수치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약간씩 다른 면이 보이죠. 마치 코끼리 만지기라고 할까요?
코는 말랑말랑하고 다리는 단단하고 꼬리는 가늘게 느껴지죠.
측정 방법에 따라서 약간은 다른 결과가 나오고 심지어는 좀 모순적인 수치가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사를 중심으로 해서 중요한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많은 한국 사람이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우리 불평등이 심각해졌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상 자세하게 지난 소득 분포 추이를 살펴보면 이미 외환위기 이전부터
우리 한국 경제 최고의 호황기였던 1990년대 초반. 약 1992년, 93년부터 소득 분배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단체 교섭이 확산하면서 대기업의 임금들이 급속하게 상승했습니다.
이때, 한때 소득 분배가 개선되는 통계가 나옵니다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92년부터 한국의 불평등이 악화됩니다.
그런데 놀라게도 이 시기는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등장하면서 소위 민주 정부가 등장한 시기에 더 불평등이 커졌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민주화와 또 민주당 같은 진보 정부가 등장했을 때 불평등이 더 약화되지 않고 더 심화됐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경제 자본에 의해서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보겠습니다.
먼저 이 문화 자본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79년에 구별 짓기라는 책에서 제기되었는데요.
아마도 이 부르디외는 지금 사진에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20세기 후반에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로 평가받습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은 특정한 문화의 유형이 일종의 사회적 유리함을 만드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고 이것이 자본의 형태로 변화한다고 봤습니다.
자본이라는 게 꼭 돈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문화적인 취향, 문화적인 어떤 습관, 문화적인 어떤 가치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도 하나의 자본과 같은 힘을 갖는다고 봤습니다.
어릴 때부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자주 가고 피아노를 배우고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경험은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허용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모두가 누리는 것은 아니죠.
문화 자본은 어린 시절의 고급문화 활동을 경험한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교 커리큘럼에 훨씬 더 적응을 잘하는 걸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학교 성적에 평가받는 음악이나 미술이나 다양한 국어나 이런 것들은 문화 자본을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많이 갖고 있는 어린이에게 훨씬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생들이 학교 성적도 좋고 좋은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모든 중산층 또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똑같이 학교에 가지만 사실은 학교 졸업한 이후에 어느 대학을 가느냐,
어느 직장에 가느냐는 것은 문화 자본이나 문화 취향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프랑스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문화 자본의 구별 짓기는 1990년대 이후에 소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요.
여기에는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한국은 상류층과 중산층의 문화 차이가 프랑스는 아주 큽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중간 계급이 상위층을 모방하려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특히 영어 교육과 예술 교육에 중산층들이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교육은 중산층 교육은 없고 상류층 교육만 존재한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당연히 사교육비 지출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두 번째 한국의 문화자본의 축적은 프랑스와 같이 장기적이고 추상적 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기적이고 과시적인 문화자본의 습득에 주력합니다.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예술 교육이 성행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패션이나 외식, 성형수술, 미모를 통한 외모 경쟁도 치열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문화자본의 축적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영어 유치원이나 국제학교나 아주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전수하기 위해서 우리 한국의 중산층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회 자본에 의한 불평등입니다.
사회 자본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경제 자본, 문화 자본과 마찬가지로 사회 자본도 상당히 배타적 속성을 갖습니다.
물론 미국의 사회학자인 퍼트넘 같은 교수는 사회 자본이 많으면 일반적으로 사회적 신뢰나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에르 부르디외는 특정한 집단 내부의 폐쇄적 속성을 가진 사회적 연줄망에 주목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내부자끼리 챙겨주고 공통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커넥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대표적으로 학벌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한국의 학벌주의도 배타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서로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맥을 형성하고 다른 대학 출신들을 차별합니다.
심지어는 부모의 학력 자본이 사회 자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의 대학 입학의 스펙 관리나 졸업 후에 기업의 인턴 기회나 창업 기회도 부모의 사회 자본이 영향을 주고 세습이 되는 겁니다.
한국의 사회 자본에 관해서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발견됩니다.
첫째 누구나 연결되는 소셜미디어 시대에서 사회 자본이 더 이상 폐쇄적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재벌 최고 경영자가 운영하는 소셜미디어에 내가 연결됐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폐쇄적 계급 사회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소셜미디어 친구가 정말 우리들의 진짜 친구일까요?
아니면 아닐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두 번째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관리직 계층은 서로 아주 잘 알고 있고 같은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사회적인 활동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학력, 저소득, 생산직 노동자들은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이 부모의 사회 자본이 자녀들에게 똑같이 전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점인데 최상위 부유층들은 매우 특별한 사회적 연줄망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이들에겐 경쟁 자본은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사회 대다수 사람과는 명백하게 구별되고 심지어는 뭐 동창회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사회적인 친목회에서도 단절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비슷한 고가 주택에 살고 상위권 대학에 나오고 해외 유학을 가고 함께 투자를 상의하고 자녀의 대학 입시를 돕고 비슷한 가문끼리 결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20세기 이전에도 물론 사회적 인맥은 존재했지만 현시대에 더욱 뚜렷하게 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제 돈을 얼마나 가지냐보다 누구를 얼마나 아느냐가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이 역시 경제 자본의 불평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경제 자본이 있어야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축적하고 강화할 수 있겠죠.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 현상이 나타납니다. 부모에게 이런 다양한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을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과 부모에게 물려받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커졌다는 점입니다.
이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이 아니라 부모가 부자인 자와 부자가 아닌 자의 불평등으로 나눠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9세기 유물로 사라진 출신이 이제 또 다른 부의 상징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1세기 불평등이 커지면서 우리 한국에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약 61%로 보고 있지만 주관적 중산층은 50%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약 80%가 중산층으로 생각한 거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축소를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소득 중산층은 60%인데 주관적 중산층은 50%이기 때문에 무려 10%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경우 한국의 중산층은 가계부채의 고통을 겪고 있고 노후나 사업의 실패나 이런 불안감들이 큰 추락의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지와 사회 안전망이 취약하기 때문에 그렇죠.
둘째 한국 사회에서는 세습 자본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취업자나 전문경영인이부자가 되기보다는 자수성가한 사람보다는 재벌 2세, 3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상속형 부자가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반면에 빈곤층은 가난을 대물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에 인터넷에서 떠도는 말인데 금수저, 흙수저로 사회가 분열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지나치게 커진 불평등은 많은 경제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1960년대 위에 주류 경제학은 사이먼 쿠즈네츠 경제학자의 역 U자 모형처럼 경제성장할수록 불평등은 줄어들 걸로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1950년대 60년대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불평등이 줄어들었죠.
그러나 1970년대 이후를 보면 이런 경제학자들의 낙관적인 이론과 같은 달리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200년간 주요 국가의 납세 통계를 분석해서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들에서 왜 불평등이 늘어났을까요?
피케티 교수는 조세 제도의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저는 조세 제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업 지배구조, 노동 시장, 노조의 약화 등 다른 요인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접근법으로 분류합니다.
첫째 구조적 관점인데요.
세계화나 기술의 진보나 인구 변화를 중시합니다.
둘째는 권력관계의 관점입니다.
기업과 노동 조합의 힘의 관계를 보는 거죠.
셋째는 제도적 관점인데 교육이나 복지나 사회 제도나 선거 제도, 정치 체제가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봅니다.
이 세 가지 차원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어떤 것은 또 명확하게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게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97년 한국 외환 위기 발생할 당시에 독일 언론인이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우리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지구화가 불평등을 심화시켜서 20:80의 사회를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시애틀에서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무역기구 회의 장소 앞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일부 사람들은 시애틀 전투라고 불렀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때 세계화에 반대하는 그런 목소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정말 세계화가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걸까요?
한국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이주 노동자가 한국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까요?
그러나 최근 연구를 보면 세계화 이후에 한국 실업률은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출 대기업의 수익이 늘어나면서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 수출 대기업의 임금 상승이 불평등의 원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만 이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불평등의 원인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의 극우 정당에서 세계화나 이주 노동자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확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보호 무역주의로 돌아가고 또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영국은 국민 투표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앞장선 미국과 영국이 반세계화로 돌아선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화에는 승자도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금융 자본과 대기업은 많은 이익을 얻었지만 선진국의 숙련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가장 큰 불평등의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 번째 기술의 진보에 관한 논쟁이 또 뜨거운 학계의 쟁점인데요.
19세기 기계의 도입 이후로 영국의 러다이트라는 사람들이 기계를 파괴했습니다.
기계가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보는 거죠.
그러나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늘어난다고 봅니다.
물론 한때 기술이 발전하고 로봇이 자동화가 도입되면 일자리가 없어질 거란 비관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론은 맞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실업률은 그다지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와 같은 숙련 노동자 좀 괜찮은 일자리는 없어지고 서비스, 저임금 주로 질이 나쁜 일자리가 많이 생겼다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이 기술이나 개인의 교육 수준의 불일치로 보는데 실제로 대졸, 고졸의 임금 차이는 있긴 있죠.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런 주장도 점점 현실에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아까 말씀드린 대로 기술적 실업,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서비스 분야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고 괜찮은 일자리가 적다는 점이 문제고요.
둘째로는 학력 수준이 높다고 해서 고졸보다 대졸 노동자들이 꼭 임금이 높은 것도 아닙니다.
요새는 괜찮은 일자리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대졸자들이 고졸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교육에 우리가 투자를 많이 해도 괜찮은 일자리를 점점 구하기 힘든 시대가 된 거죠.
셋째 무엇보다도 이런 기술이 모든 걸 결정한다, 이런 생각들은 자본 투자나 고용 관계, 노사 관계에 대한 설명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세계에서 제조업에서 로봇 도입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데 미국이나 일본, 독일보다 높습니다.
이것은 인건비를 아끼기 위한 기업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조업의 숙련 노동자 일자리가 점점 감소하고 대기업의 일자리는 과거에 비해서 현격히 줄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브린욜프슨과 맥아피 교수는 앞으로 제2의 기계 시대가 오면 디지털 기술이 더욱더 불평등을 크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불평등한 건 아닙니다.
많은 나라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를 도입한 가령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이런 나라들을 비교해 봐도 상대적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이런 나라들은 불평등은 좀 낮아진 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기술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산업 구조나 교육 과정, 직업 훈련 또는 노동 시장 제도나 임금 제도 또는 조세 제도, 복지 제도
이런 다양한 요인들이 불평등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인구 구조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점점 여성들이 대학을 진학하고 고학력자가 많아지면서 같은 대졸자끼리 결혼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육적인 동질혼이 커질수록 가구 간의 소득 격차가 커질 거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특히 남녀 간에 임금 격차가 클수록 여성들이 자신보다 학력이 높고 소득이 높은 남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그런 나라일수록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인구 고령화입니다. 노인의 빈곤화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심각한 수준이고, 2019년에 43%였고, 노인 자살률도 세계 최고입니다.
이건 노인 연금 제도의 도입이 너무 늦어서 생긴 문제고, 연금을 받는 노인도 너무 숫자도 적지만 연금을 받는 액수가 너무 낮기 때문에 노인 빈곤이 높은 겁니다.
그래서 결국 국가의 제도의 실패가 결국 노인 빈곤을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불평등의 증가라는 것은 세계화나 기술의 진보나 인구 구조의 변화처럼 어쩔 수 없는 힘의 결과라기보다는 정부가 그런 변화된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을 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권력 균형이 깨져서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위기가 발생한 거죠.
이러한 위기가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조세 정책과 복지 정책의 변화입니다.
1910년대, 1920년대 미국은 세계 최초로 누진소득세와 상속세를 도입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부자와 기업 감세를 통해 고용과 투자를 늘린다는 낙수 경제학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감세는 정부 재정을 축소하는 긴축 정책을 강제하고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악화시켰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부유층은 세계화의 성과를 차지하고 소득을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소득세와 재산세, 상속세는 미국에서 계속 낮아졌습니다.
반면에 노동자의 임금은 억제되거나 정체되었습니다.
노동 조건이 점점 나빠지거나 오히려 부가세를 비롯한 세금들이 인상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유명한 투자자인 워런 버핏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계급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속한 부자 계급이 빈곤 계급을 이기고 있다.
워런 버핏과 같은 슈퍼 리치가 부담하는 금융 소득세율은 15%에 불과하지만 그 워런 버핏의 비서인 노동자는 근로 소득세를 30%가 넘게 훨씬 세율이 높습니다.
기업의 법인세율도 20%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상속세율도 더 낮아졌고, 면세점 기준도 높아졌습니다.
미국의 소비세는 대부분 물품에 부과하는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사용하는 서비스는 대부분 세금이 매우 낮습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된다는 미국 경제학자들의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2022년 옥스팜이라는 국제 구호 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19 기간 동안 상위 1%가 부의 63%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하나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2014년과 2018년 동안 적용된 실질 세율이 불과 3%에 불과합니다.
세계 최고 부자들은 조세 도피처로 자기 재산을 옮기거나 국적이나 회사 본사를 아예 이전해서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글이나 메타와 같은 빅테크기업의 탈세도 심각합니다.
에너지 식품 대기업은 지난 최근에 인플레이션 때문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지만 주주들에게 배당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인플레이션과 에너지 폭등으로 삶의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조세 정책과 사회 정책이 불평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걸로 분석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은 조세 부담률이 너무 낮고, 사회 지출 비율도 너무 낮습니다. 우리는 세금을 너무 많이 낸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1980년대 우리나라 최고 소득세율은 70% 수준이었지만 90년대를 거치면서 절반 수준으로 인하가 됐고, 소득세, 누진세도 후퇴되었습니다.
한국의 조세 부담률은 20% 수준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제일 낮은 수준입니다.
결과적으로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 지출 비율도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입니다.
공공사회지출 예산 비율이 국내총생산에 비교했을 때 12%를 겨우 넘습니다.
그래서 OECD 평균인 20%에 비해 크게 뒤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복지 선진국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북유럽 국가가 이렇게 세금을 많이 걷으면 경제에 부담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복지 지출 수준보다 복지 지출의 구조가 중요합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세금을 많이 걷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금을 나눠주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들은 주로 공교육에 투자하고 병원이나 보건에 투자하고, 젊은이들의 직업 교육에 투자하고, 또 모든 성인을 위한 평생 교육에 투자하고, 기업과 연구 개발을 위해 투자합니다.
그래서 사회 투자와 연구 개발과 같은 미래 투자를 통해서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북유럽 복지 국가는 친성장 복지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복지 예산이 가장 많은 독일, 스웨덴, 덴마크가 지금 경제 강국입니다.
복지 예산이 제일 적은 미국이나 일본은 지금 심각한 경제 위기와 불평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즉, 경제에 부담이 되는 건 복지 예산 지출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돈을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선거 제도도 중요하게 불평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난 100년 전을 들여다보면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더 불평등 수준이 낮은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불평등 수준이 훨씬 높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많은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 연구를 보면 미국의 불평등은 선거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아이버슨 교수와 런던 정경대학의 소스키스라는 사회학 교수가 선거 제도와 불평등을 비교해서 연구를 해보니까 유럽 국가와 같이 비례대표제를 선택한 나라들은
복지가 확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나라은 의외제 정부고 비례 대표제뿐 아니라 중대 선거구제가 다당제의 특성과 같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워덴, 덴마크, 네덜란드 이런 나라들인데, 어느 한 정당이 과반수 정당을 못 만들어서 연정을 구성하고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노사정 사회적 대화가 발전하고 서로 합의 민주주의를 만듭니다.
한국과 달리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정치인보다 잘 참고 상대방을 포용하고 타협을 잘하는 정치인이 인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은 오랜 민주주의 정통이지만 선거 제도가 소선거구제도입니다.
흔히 다수 대표제라고 합니다.
한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1등만 선거가 됩니다, 우리 한국과 똑같죠.
이런 나라들은 주로 양당제가 발전하고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그래서 다수제 민주주의라 부릅니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은 정치 과정에서 배제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권 교체기마다 경쟁이 아주 치열하고 정치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미국에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에 불복해서 의회에 폭동 사태가 난 것과 같은 이런 정치적 갈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단순, 다수대표제의 정당 체제에서는 부자가 지지하는 보수 정당과 가난한 사람들이 지지하는 진보 정당, 양당 체제로 재편이 되는데.
대부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이기는 경우가 3분의 2가 많습니다.
왜냐, 캐스팅보트를 가진 중산층들이 대게 보수 정당을 지지합니다.
사실 중산층들은 보수나 진보에 중간에 있기 때문에 조세도 점진적으로 인상하고 복지도 점진적으로 확대하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면 보수, 진보 어느 정당도 자기 마음에 드는 정당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마음에 안 들 바에는 차라리 현상 유지를 선택하자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다당제에서는 중산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중도 정당이 상당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고 보수 정당, 진보 정당
어느 쪽이 집권을 하더라도 연정을 구성하거나 심지어는 보수 정당, 진보 정당이 대연정을 구성해서 서로 상대방의 정책이나 공약 중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미국식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선거제도를 도입했지만 불평등 민주주의다 이런 지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래리바텔스 교수의 2008년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이 공화당이나 민주당뿐 아니라 미국의 모든 정치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저소득층의 대변하는 미국의 민주당인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 이후에 1990년대에 오히려 세금을 인하하고 기업이 요구한 대로 부자들 감세를 해주고 복지도 축소했습니다.
그리고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오히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금융 규제 완화를 시도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도 거의 유사한 정책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이런 유사한 불평등 민주주의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더욱더 선거제도가 독특합니다.
소선거구제뿐만 아니라 두 번째 중요한 문제는 지역주의 정당 구조가 아주 강구하다는 겁니다.
지역주의 개발 공약만 유권자들이 관심이 크고 전국적인 이슈인 조세나 복지는 관심이 적은 편입니다.
세 번째로는 반공주의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진보적인 정당들이 상당히 입지가 약합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약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선출될 수 있는 정당들이 매우 취약하고 취약계층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약자를 무시하는 배제 정치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에도 다 진보 정당이 있는데, 왜 빈곤과 불평등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걸까요?
여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제조업 인구가 감소하고 있고 노동 운동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대신 화이트컬러나 서비스직이 증가하고 있죠.
둘째는 정당의 선거 전략이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도 비슷한 선거 전략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당원들이 제조업의 노동자보다는 서비스 분야의 고학력, 고소득 당원 비율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들의 정책들이 바뀌고 있습니다.
고학력 당원들은 복지 확대보다는 주로 미국 같은 낙태나 동성애나 문화적 이슈, 정체성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고학력 진보파를 브라만 좌파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도 강남 좌파라는 말이 있죠.
이들은 말로는 진보를 주장 하지만 오히려 세금을 감면해 주고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 세습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클린턴과 영국의 블레어가 집권하는 동안에 오히려 빈곤과 불평등이 악화 됐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래서 점차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기가 지지했던 진보 정당이 더욱더 자기 삶을 개선해 주지 못하자 자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바로 실업과 빈곤의 책임이 이민자 때문에 그렇다, 여자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주장하는 극우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도널드 대통령과 유럽 연합 탈퇴를 주장했던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현상을 워릭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콜린 크라우치 교수는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에 의한 지배가 작동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근본적 목적을 배신하는 국가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정당, 진보정당 모두가 이념적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후보의 이미지와 스캔들이 임금, 조세, 복지, 사회, 경제적 이슈를 압도해 버립니다.
선거를 정책 경쟁의 장이 아니라 마케팅과 광고에 결합된 스펙터클이나 네거티브 캠페인이 압도적입니다.
유권자들은 정책 결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선거 운동을 마치 무슨 쇼처럼 구경하는 사람이 되거나,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게, 마치 정치 참여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민주주의에서 사실상 정치를 지배하는 건 기업 엘리트고, 또 행정부 중에 퇴직해서 다시 법무법인에 갔다가, 또는 대기업에 갔다가 다시 행정부에 돌아오는
이런 회전문 인사에 의해서 정치, 경제, 행정 엘리트들이 사실상 대다수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그런 지적이 포스트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 주장입니다.
정말 우리 한국에서도 포스트 민주주의가 등장하고 민주주의는 죽어가는 걸까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가장 불평등이 커졌고, 빈곤과 실업이 급증했습니다.
2011년에는 중동의 재스민 혁명,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일어났고, 홍콩의 우산 혁명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미국에서도 부자 증세나 전 국민 건강보험, 대학 무상 등록금을 주장하는 버니 샌더스 같은 정치인이 나타났습니다.
또 뉴욕의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젊은 여성 정치인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인상하라.
이런 드레스를 입고 어떤 패션쇼에, 갈라에 참석한 걸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이런 새로운 문제 제기가 미국 정치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에 대한 진단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에 대한 진단이 정확하지 않으면 처방은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저의 주장은 불평등 증가를 세계화나 또는 기술의 진보나 또는 인구의 변화.
이렇게 불가피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간주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기술결정론이나 구조결정론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기술의 도입은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결정하는 겁니다. 부의 재분배도 언제나 정치적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불평등은 따라서, 순수한 경제 시스템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줄어들 수 없습니다.
2008년 세계 경제를 강타한 금융 위기 이후에 부유층의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유층들이 모이는 세계경제포럼의 창설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나는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신봉자이지만, 우리는 죄를 지었다.
이런 참회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 후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IMF나 월드뱅크, OECD에서도 자유 시장 만능주의와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OECD에서는 2012년부터 포용 성장이라는 걸 각국의 정부에 제안했습니다.
소득 증가뿐 아니라, 고용이나 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조세를 개혁하고, 부유층들에게 세금을 좀 더 올리고, 최저임금도 인상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라고 공고했던 겁니다.
노벨경제학상을 탄 스티글리츠 교수는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에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 독점 규제, 금융 산업 통제, 기업의 장기 투자 장려, 완전 고용의 추진, 노동자의 권리의 강화,
부유층의 증세, 복지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정부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도 자유 시장 접근법을 폐기하고 경제 침체와 불평등과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부유층 증세, 복지예산 확대, 산업 정책 등 적극적인 정부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한국은, 과거의 부자 감세, 규제 철폐. 이런 자유 시장 만능주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부자 감세와 규제 철폐만 주장하는 자유 시장 만능주의는, 빈곤과 불평등을 키우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는 자유 시장 만능주의라는 과거의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 번영의 성과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위한 공공정책만이 현재의 경제 위기, 기후 위기가 함께 불평등 위기 등 3중 위기를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 전략, 정책 방안은 다음 강연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21세기 한국의 불평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불평등이 급증했습니다.
21세기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 사회적으로도 불평등이 커졌습니다.
젠더 불평등과 지리적 불평등도 심각하죠.
불평등은 세계화, 기술의 진보, 인구구조의 변화의 영향도 받지만,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역학관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정부의 조세 정책, 복지 정책, 교육 정책이 불평등에 큰 영향을 줍니다.
지나친 불평등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불평등을 줄이는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합니다.
지나친 불평등은 사회 분열을 만들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든다.
20세기 한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민주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삶의 만족, 행복감, 사회적 신뢰, 사회적 결속감은 매우 낮습니다.
엄청난 경제 성공과 정신적 실패가 바로 한국의 역설입니다.
그 이유는, 경제 성장의 혜택이 대부분 소수의 계층에게 집중되고, 물질적으로 대다수 사람이 불안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국민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도록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번영의 성과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강의 강연, 최강 1교시, 김윤태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지나친 불평등이 가장 치명적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도 경제성장률 7%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업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력 또는 능력이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
이것은 민주주의 원칙과는 상반된 주장입니다.
어떤 평등이 가능한지 설명하는 이론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